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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속의 그리스도 /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이병호주교옮김
내 친구는 죽었다. 거룩한 샘물을 마시듯, 모든 생명에 입을 대고 마셨던 내 친구는 죽었다. 그의 마음은 그 안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의 몸은 베르뎅을 눈앞에 두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삶을 비추고 평화롭게 해 주었던 강렬한 비전, 나를 서서히 거기로 인도했던 그의 말 몇 마디를 나는 지금 되뇌일 수 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당신은 강력하고 다양한 우주가 어떻게 해서 내게 그리스도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 그것이 아시고 싶다고 하셨던가요? 그 일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처럼 만사를 새롭게 해 주는 통찰은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에 관해서 제 영혼 속으로 빛이 밀려오던 경험 몇 가지를 말씀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휘장이 단속적으로 열리는 것과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는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저는 반쯤은 철학적이고 반쯤은 미학적인 성격을 띤 의문 한 가지 때문에 정신이 온통 잡혀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기 내 앞에 육체적으로 나타나신다면 그 모습이 어떨까? 그 옷차림은 어떨까? 특히 물질 속에 감지할 수 있게 개입해 들어오시는 그 방식은 어떤 것일까? 주변의 여러 가지 것들을 배경으로 해서 볼 때 그분이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무엇일까? … 그리고 그때 저는 주님의 육체가 세계를 배경으로 해서 수많은 하급 물체들과 나란히 세워지는데도 이들이 어떤 감지할 수 있는 변화를 통해서 바로 옆에 있는 강렬한 기운을 느끼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그런 상황은 생각만으로도 막연하게나마 어떤 못마땅함, 묘하게 기분이 상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눈길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심장을 사람들에게 주시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위에 가서 자동적으로 멈췄습니다. 그 그림은 제가 기도하러 들어간 성당의 벽에 걸린 채 제 눈앞에 정면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의 흐름을 따라, 화가가 예수의 거룩한 인간성을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육체에서 바로 이 부분을 부각시키지 않고도 그것을 적절히 나타낼 방법이 과연 있을까 하는 데로 관심이 기울어졌습니다. 그것이 그분을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분리시켜 따로 세워 놓는 것 같이 생각되었습니다. 그분 모습을 그리기 위한 극히 개인적인 이 표현 이외에 다른 어떤 표현이 그분의 인간성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것일까? 그 모습이 아름답다면, 그것은 다른 모든 유형의 아름다움을 배제한 대단히 특수한 의미에서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것들을 두고 불안스레 자문했습니다. 그러고는 그림을 바라보았는데, 바로 그때 비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사실대로 말씀드리면 저는 비전이 정확히 언제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그것을 의식했을 때는 이미 그 강도가 상당히 진전된 후였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저의 눈길을 그림의 윤곽을 따라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버려두고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 때, 저는 갑자기 그 윤곽이 ‘녹아 없어지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그것은 놓아 버리는 것이었는데, 그 방법은 너무나 특이해서 무어라고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정확히 보려고 노력하면, 그 윤곽이 분명하게 한정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제가 비전의 노력을 중지하고 흘러가는 대로 그대로 두면, 그리스도의 옷자락, 겉옷의 주름살, 머리칼의 광채, 그 육체의 아름다움이 다른 모든 것들 속으로 건너 (스스로 사라지지는 않으면서도) 갔습니다.
그리스도와 주변세계를 갈라놓는 표면이 하나의 떨리는 층으로 바뀌고, 거기에서는 모든 한계들이 사라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이런 변화는 먼저 초상화의 가장자리 어떤 점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서부터 변화는 초상화의 윤곽 전체로 퍼져나갔습니다. 제가 의식하는 한 적어도 그런 순서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또 그때부터 변모 과정은 빠르게 확산되어 모든 것들에까지 번져 나갔습니다.
먼저, 저는 그리스도의 주변을 화관처럼 둘러싸고 있는 진동하는 대기가 그분 주변의 얇은 층에만 갇혀 있지 않고, 무한대에까지 방사되는 것을 감지했습니다. 그분은 스스로 물질의 극한 권들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분출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면서, 가끔 인광체의 흐름처럼 빛을 내며 지나가시곤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모든 실체들을 관통해서 형성된 혈관망 혹은 신경망처럼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우주 전체가 진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대상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려고 하면, 그 각각은 언제나 개체로서의 모습을 분명하게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움직임은 그리스도, 특별히 그 심장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흐름의 원천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 그 리듬을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애를 쓰는 동안, 제 주의는 초상화 자체로 되돌아와, 비전이 빠른 속도로 그 절정에 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
… 그런데 제가 그리스도의 옷에 대해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군요. 그분의 옷은 복음의 변모 장면에서처럼 빛났습니다. 그런데 제게 특히 놀라웠던 것은 그 옷이 인공적으로 짠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천사들의 손이 물질의 손이 아니라면 말씀입니다. … 그 옷감에 들어간 실도 거칠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물질, 물질의 정화精華는 아름다운 비단처럼 그 실체의 가장 내밀한 부분까지 스스로를 엮고 짜 나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한 올 한 올 짜여 가는 품새가 끝없이 이어져, 자연스런 모양을 따라 조화롭게 어울리며 확장되어 나가면서도 처음의 무늬를 정확하게 유지해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질의 모든 에너지와 모든 계층이 한결같이 협력해서 짠 이 옷에 대해,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특별한 관심을 두지는 않았습니다. 저의 주의를 온통 끌어 사로잡은 것은 스승님의 변모한 얼굴이었던 것입니다.
밤에 어떤 별들이 그 빛깔을 바꾸는 것을 가끔 보셨겠지요. 어떤 때는 핏빛 같은 진주로 보이고, 어떤 때는 비로드의 보랏빛 불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또 때로는 투명한 구슬 위로 무지개 같은 빛이 휙 지나가는 것을 보신 적도 있으시겠지요. …
그처럼, 형언할 수 없는 빛의 아롱진 향연 속에, 예수님의 불변하는 모습 위로 우리 모든 아름다움의 빛과 색깔이 찬란하게 비치고 있었습니다. 저의 원의가 너무나 강한 나머지 어떤 환상을 보고 있었는지, 아니면 저의 취미를 관장하시고 잘 아시는 분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실제의 사건을 보고 있었는지, 저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장엄성・감미・거역할 수 없는 매력 들이 수많은 변화가 서로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저를 흡족하게 채워 주는 조화 속에서, 하나가 다른 것들 속으로 녹아 들어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움직이는 표면 뒤로 (그 표면을 떠받치고 또 그것을 한 단계 상급 일치 속으로 중심화하면서) 그리스도의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여전히 떠 있었습니다. … 그런데 실은 그 아름다움을 제가 직접 목격했다기보다 미루어 짐작했다고 해야 더 맞는 말이 될 것 같습니다. 저에게서 그것을 가리는 하급 아름다움들의 층을 헤치고 직접 가까이 들여다보려고 애를 쓸 때마다, 또 다른 부분적이고 조각난 아름다움들이 올라와 ‘진짜’를 가리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진짜를 짐작하게 하고 더욱 갈망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얼굴은 이런 식으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빛살과 그 찬란한 빛깔의 발원점은 변모된 인물화의 눈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얼굴은 이런 식으로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빛살과 그 찬란한 빛깔의 발원점은 변모된 인물화의 눈 속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그 눈의 아주 깊은 속 언저리에는 매력을 행사하는 모든 것, 살아 있는 모든 것 … 의 무지개 모양 반영反影 — 그것이 창조적 형상, 관념이 아니라면 — 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불이 보여주는 빛나는 단순성은 그것을 파악해 보려고 노력할수록 저의 눈앞에서 무궁무진한 복잡성으로 변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 복잡성 속에는 인간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부드러움을 느끼게 했던 모든 시선들이 한데 모아져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 앞에서 제가 느꼈던 그 부드럽고 다정한 눈길이, 다음 순간에는 한 여인의 정열적이고 매혹적인 눈길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동시에 저의 존재를 완전히 제압하리만큼 순수한 것이어서, 그 눈길 앞에서 저의 감정이 헷갈린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가 했는데 그다음 순간에는 웅대하고 남성적인 위엄이 그 눈에 충만한 것이었습니다. 대단히 용감하고 강력한 인간의 눈에서 볼 수 있는 위엄, 그러면서도 비할 수 없이 더욱 고답적이고 동시에 말할 수 없이 감미로운 그런 위엄을 느끼게 하는 눈이었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조화를 이루며 내는 반짝임은 참으로 완전하고 사람을 온전히 휘감으며 또 빠르기도 해서, 제 존재의 모든 능력이 그 힘으로 한꺼번에 살아나 뼛속까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존재는 활짝 피어나고 저는 그때까지 어디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행복감을 넘치게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매혹적이고 이글거리는 생명의 심연으로 변한 그리스도의 눈동자 속에 정열적으로 저의 눈길을 담그고 있는 동안, 같은 눈의 깊은 속으로부터 먹구름이 피어올라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광경을 서서히 덮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신적 시선의 다양한 조화 위로 특별하고 강렬한 표정이 서서히 만들어져서, 먼저 그들을 물들이고 그다음에는 그것들을 흡수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동안 혼란스러웠습니다.
모든 것을 제압하고 모든 것을 요약하는 이 마지막 표정을 ‘제가 해명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말할 수 없는 고뇌를 드러내는지, 아니면 그와 반대로, 개선의 더할 수 없는 기쁨을 의미하는지, 저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그때 이후, 죽어 가는 군인의 눈에서 같은 장면을 또 한 번 힐끗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저의 눈에는 순간적으로 눈물이 고여 시선이 흐려졌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당 벽에 걸린 그리스도의 그림을 다시 쳐다볼 수 있었을 때에는, 그 그림이 다시 테두리가 반듯하고 그 형상 또한 굳어 있었습니다.”
……
… 친구는 말을 이었다. “저는 태어날 때부터 범신론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생래적으로 저는 그 방향으로 억누를 길 없는 열망을 항상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그런 경향을 자유로이 활용할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그것을 저의 신앙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여러 가지 체험 — 다른 체험도 포함하여 —을 한 뒤부터, 저는 삶에서 마르지 않는 흥미와 변치 않는 평화를 찾아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저는 유일한 요인, 모든 것의 중심이자 세목細目 곧 인격적 사랑과 우주적 능력의 품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분께 도달하고 그분과 결합하기 위해서, 저는 우주 전체를 제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고귀한 투쟁, 그 정열적 탐구, 완성시키고 치유시켜야 할 수많은 영혼들과 함께 우주 전체가 제 앞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으로서의 노작, 거기에 저는 있는 힘을 다해 투신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합니다. 제가 저의 몫을 다하면, 그만큼 저는 실재의 표면에 발을 착실히 딛고 서는 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만큼 더 저는 그리스도께 도달하고 그분 가슴에 깊이 안기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체로서는 영원한 존재이시지만, ‘우리를 위해서’는 형성되는 과정에 계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심장’이시기도 합니다. 우주의 광대한 배경은 가라앉아 버리거나 말라 버릴 수가 있습니다. 심지어 죽음으로 저에게서 거두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저의 기쁨을 앗아 가지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에너지와 영광을 후광처럼 쓰고 있던 먼지가 흩어지고 난 다음에도, 본질적 실재는 고스란히 남아 거기에 모든 완전성이 영원히 보존될 것입니다. 온갖 빛살들은 원천 속으로 모여들고, 거기에서 저는 그것들을 가슴속에 품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조차 저에게는 당황스럽지 않습니다. 며칠 안으로 저희는 도몽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투입될 것입니다. 이 장렬한 행위 속에서 저는 영혼들의 해방을 위한 세계의 결정적 한 걸음이 상징적으로 나타나 있음을 봅니다. 저는 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영혼을 다해 경건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할 것입니다. 단 하나의 충동에 몸을 맡길 터인데, 거기에서 저는 인간적 격정이 어디에서 끝나고 어디에서부터 하느님 경배가 시작되는지 구분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만일 거기에서 끝내 내려오지 못하게 되면, 저는 제 몸이 요새의 진흙 속에 그대로 묻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도성의 돌들 사이를 이어 주는 살아 있는 시멘트로서 하느님께서 쓰시는 도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10월 어느 날, 내 사랑하는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영혼은 만물의 유일한 생명과 본능적으로 통교하고, 육체는 바라던 대로, 지금 저 들판 어딘가에 묻혀 있는 내 친구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옮기고 나서 / 이병호
우주는 시간이라는 축을 통과하면서 아주 단순한 모양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복잡한 모양으로 진화합니다. 우주 자체가 그렇다면 그 안에 있는 온갖 것들, 특히 우주 진화의 꼭지점에 서서 그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인간의 경우, 그 육체나 정신이 어떤 씨앗 내지 싹에서 출발하여 점점 더 크게 자라는 나무와 같은 성장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떼이야르의 사상이 언뜻 볼 때 더할 수 없이 웅대하고 복잡하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출발해서 결국 그런 모양을 갖추게 되었는지, 그 성장 과정을 추적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줄기와 가지를 구분하고 이리저리 뒤얽혀 있는 듯한 생각의 가닥을 쉽게 잡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떼이야르 스스로 이런 이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자신의 사상을 쉽게 이해시키는 방법의 하나로, 자서전적 형식을 빌려, 자기 사상이 어떻게 태동하였으며, 어떤 과정과 단계를 거쳐 왔는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줍니다.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것, 부서지지 않는 것, 소멸하지 않는 것 … 어디엔가 있을 것 같은 그것을 찾아나선 떼이야르가, 어린 시절 묵직한 쇠붙이를 발견하고는 거기에 정신을 빼앗겨 마당 한구석에 숨겨놓고 가끔 꺼내어 이리저리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영원한 것을 찾아나선 한 순례자의 첫걸음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떼이야르는 그때까지 영원한 것을 찾는 사람이라면 으레 가게 마련인 길과는 정반대되는 방향을 걷고 있었고 그 길을 끝까지 갔습니다. 저 위 어딘가에 떠 있는 순수 정신이 아니라, 이 아래 묵직하고 칙칙하게 깔려 있는 물질과 그것이 보이는 움직임의 방향을 추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추적 과정에서, 그는 빅뱅에서 출발한 우주 자체가 지금도 계속 폭발적 확산 운동을 계속하고, 그 안에 있는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져 감에 따라, 자신이 찾고 있던 “오래가는 것”, “지속적인 것”은 “불변”과는 정반대 쪽인 “변화와 움직임” 쪽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의 심안心眼에는 이 움직임이 어떤 중심축을 지니고 더구나 일정한 방향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뚜렷이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처음 단계에서 철이나 돌조각 등 무기물에 머물렀던 관심은 차츰 생명체로 옮겨지고, 그 가운데에서도 반성과 의식을 지닌 인간에게로 집중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서 우주적 진화 운동의 최후 지향극점을 찾아내었습니다. 오늘날 빅뱅으로 잘 알려진 우주의 출발점을 알파 포인트라고 한다면, 거기서 시작된 움직임은 진화 과정을 거쳐서 결국 그 도착점인 오메가 포인트에서 완성된다고 하는 그의 주장은 너무나 거대해서 몽상가의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이 오메가 포인트가 다름 아닌 그리스도라는 주장을 대하면서부터는 사람들이 과학적 사실에 바탕을 둔 한 자연과학자에서 돌연히 계시는 믿는 사람으로 입장을 바꾼 한 사람의 신앙고백을 듣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와 함께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묵시 1,8)라는 성서의 말씀을 연상하며, 과학과 신앙 사이의 거리가 이렇게 간단히(?!) 연결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과 신앙이라는 두 세계에 똑같이 충실하며 그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아 한 삶을 쏟아바친 떼이야르의 주장과 논리의 전개 과정을 잘 따라가면, 왜 그의 말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단한 설득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65년에 이어 1981년에 다시 국제연합 교육·과학·문화기구(유네스코)가 과학자로서, 철학자로서, 그리고 종교 사상가로서 큰 영예를 부여했던 떼이야르는, 과학이 날로 새롭게 펼쳐 보여주고 있는 거대한 우주와 자연의 신비 앞에서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인류에게, 이 시대에 걸맞은 폭과 깊이로 삶이 궁극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훌륭한 길잡이임에 틀림없습니다. 이 위대한 사상가가 이끄는 대로 세상과 자신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며, 거기서 깊은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가장 축복된 경험의 하나가 될 것입니다.
2002.8.15.
이병호
*<물질의 심장> / 삐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 지음 / 이병호 빈첸시오 주교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