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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老兵 26사단 2박 3일 체험기-사단장 소장 이하 이등병까지 만나다
대한민국 예비역 일반하사 이원우/lww54@lycos.co.kr/ 010-4731-4356
* 노병이 쓴 본고가 혹시 안보(혹은 보안)상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연락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언제든지 그 충고를 받아들여 수정 내지 부분 삭제하겠습니다. 저는 군을 진정 사랑합니다. 내가 이번에 본 우리 군의 전투력은 막강하고 사기 충천해 있었습니다.
o 눈 어두우신 엄마를 남겨 두고, 군에 입대하였다. 65년 3월이었다. 창원 훈련소에서 기본 훈련을 마치고 영천 부관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101보충대를 거쳐 26사단 불무리 부대에 자대 배치를 받은 게 동년 7월이었다.
그로부터 49년이 흘렀다. 오늘이 13년 12월 23일이니까---.반백년 아니 반세기의 무게가 어떤 것인가를 실감한다. 틈만 나면 내가 부르는 민요 '청춘가'의 한 소절이 생각난다. 세월이 가기는 흐르는 물 같고 / 인생이 늙기는 바람결 같구나(좋다!----*후렴)
o 지난 16일 나는 제자의 승용차에 편승하여 그 26사단 불무리 부대를 찾았다. 양주역에서 내리니 여단 정훈장교가 지프차를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이미 사단장 양병ㅇ소장과 여단장 김동ㅇ 대령, 12* 기갑 대대장 홍 중령, 12* 기갑 대대장 오 중령, 5*전차 대대장 전 중령, 부관참모 김 소령 등과 협의가 된 터였다. 부관참모와 함께 사단장실을 방문하였다. 물론 내가 제대할 때처럼 하사 계급장을 단 전투복을 입고, 베레모도 섰다. 사단장은 무척이나 반가워하였다
"공격! 신고합니다. 예비역 일반하사 이원우, 49년 만에 불무리 사단에 일일 병사 체험과 예하 부대 안보 강연 차 복귀하였습니다. 이에 신고합니다! 공격!"
사단장은 사진으로써는 전형적인 武骨처럼 보였는데, 선비의 기품까지 드러나는, 문무를 겸비한 장군이었다. 이윽고 차 한 을 내놓는데 사단장의 말이 내 가슴을 뿌듯하게 파고 든다.
"반세기가 지났는데, 아직 군인 정신으로 뭉쳐진 것 같습니다. 하하"
나는 그대로 긍정할 수밖에. 거기다가 옛집을 찾아왔다는 안도감 비슷한 기분에 휩싸여, 망설임 없이 반세기를 회억하는 말들을 쏟아냈다. 베레모를 벗고 병사보다 짧게 깎은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 보였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長髮이 내 트레이드마크였었다는 사실도 들먹였다. 환담이 끝나고 부관참모부로 내려왔다. 한사코 마다하는 김 소령에게 거수 경례를 올려붙이며 비슷한 내용의 신고를 하였다.
< 사진 위: 하사 계급장을 달고 부관 참모로부터 격려를 받다.>
<사진 아래: 사단장실로 가기 전, 평상복 차림으로 부사관 및 병사들과 인사를 나누다. 이번에 알았다. 군에 '전문하사'가 있다는 것을. 병장으로 만기 복무를 하고, 희망에 따라 하사로 임관되어 일정 기간 더 근무를 하는 것이다. 한 달에 120만원 정도 저축할 수 있는 봉급을 준단다. 무엇보다 군에서 전문인력이 필요해서 시행하는 제도겠지만. 작년에는 세 쌍동이 형제가 전문하사로 임관된 적이 있어서 화제였다고 한다. 이 부사관도 전문하사? 내년 봄에 부관부에 들르면 만날 수 있을는지---.>
o 오전 일과를 마치고 부관부 장병들과 사병 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나는 무엇이든지 잘 먹는 사람이다. 반세기 전에는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는데, 지금은 더 먹고 싶다면 얼마든지 더 주는 군대다. 밥도 한 그릇 그득하게, 반찬도 푸짐하게 달래서 포만감이 들도록 먹어 치웠다. 정말 맛이 있었다. 웬만한 대중 음식 식당보다 질이 좋았다. 하사 계급장을 보고 다른 부서의 병사들이 힐끗 힐끗 쳐다보며 지나가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했다. 난 조그맣게 소리내었다.
"그래 난 노병이야, 노병은 죽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아."
식사를 마치고 다시 모자를 쓰고 나서니 지나가는 초급 장교들이며 부사관, 병사들이 거수 경례를 부친다. 공격!
<사진 아래: 부사관과 병사들과 나란히 앉아 점심 식사를 하다. 부사관을 보고 넌지시 말했다.
"어때, 먹을 만해? 편식하면 안 되는 거야."
맞은편에 부관참모 김 소령이 보인다.>
o 이번 부산 수필문인협회에서 주는 '수필 문학상'의 상금은 아주 의미 있는 데에 쓰기로 했다. 나는 그 중 일부를 떼어 몇 개의 금일봉으로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부대에 갔다. 당연히 부관참모부의 전우들에게 그 중 한 개를 전할 수 밖에. 한데 성질도 급하지. 누가 심부름을 나갔는지 모르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햄버거며 콜라 등을 사들고 들어왔다. 참 맛이 있었다. 작년에 사령부 바로 앞에 있는 불무리 성당에 금일봉을 전했는데(부관부보다 많은 액수) 그때 병사들의 말이 귀에 쟁쟁했다. 제일 먹고 싶은 게 햄버거라고.
o 일요일 오전에는 대부분 종교 활동을 한단다, 실은 거기서 성당이나 절, 교회에서 주는 간식에도 상당한 매력을 느낀다고. 입을 모아 말했지. 그 중 햄버거가 제일 좋다고. 우리 군대 시절에는 햄버거란 음식이 있지도 않았다. 세탁비누를 모아다가 의정부에 외출을 해서 민간 세탁소에 주면 영화 한 편 보고 식당에서 라면 두 개(달걀 넣은 것)를 끓인 걸 먹을 수 있었지. 그 라면이야말로 최고의 인기였는데---.금석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사진 아래: 햄버거와 콜라를 앞에 두고 부관 참모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내 입맛에도 꼭 맞았다.>
o 군에서 부사관과 초임장교의 역할은 크다. 산전수전 다 겪은 前者와 이제 갓 임용된 초임장교, 옛날엔 갈등도 많았다. 학군 장교들이 보충중대에 전입해 오면 보직을 받을 때까지 머물렀는데, 스무 두서너 살 되는 소위가 군에서 잔뼈가 굵은 중상사들에게 경례를 안 한다고 기합(?)을 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런 묘한 갈등 관계가 지금은 없다. 부사관에서 제일 높은 계급은 주임원사다. 주임원사는 대단한 예우를 받는다. 육군본부 주임원사는 준장과 같은 의전 서열에 선다.
<사진 아래: 부산 출신 박보영 여군 소위와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이현철 원사의 사이에 내가 슬쩍 끼어들었다.(부대 역사관에서)
<사진 아래: 반세기 전의 제설 작업은 고통스러웠지만, 오늘은 왜 이리 즐거울까? 난 그저 신바람이 났다. 미리 체조랑 가벼운 아령 들기 등 예비 운동을 충분히 했던 까닭인가? 조금도 지친 줄 모르고 몇십 분 동안 삽질을 했다. 그림으로 봐서는 내가 노병 같지 않다. 도중에 충주 의료원에 근무하는 부산 출신 신경외과 전문의 김순철 전 거제 백 병원장 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노인이니 정말 눈(雪) 위에서는 조심하란다. 하지만, 나는 그런 데에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건성건성'으로, '괜찮다'만 연발했다. 김정은 체제라면 사형?>
o 이번 일 때문에 부관참모부에서 고생이 막심하였다. 육군본부에 내 '장정 명부 및 병적 기록부' 사본을 요청한 모양이다. 물론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나는 毛筆兵이었다. 즉 사단장 표창장을 붓으로 쓰는 작업을 한 것이다. 한데, 66.10.25. 사단장 공로 표창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지 않은가? 619호다.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우습다. 내 손으로 써서 내 손으로 사단장 관인(직인)을 찍은 표창장? 어쨌든 나는 부관참모의 요청대로 그 옛날 현역 복무 시절처럼 붓이 아닌 붓펜으로 표창장을 한 번 써 봤다. 잘 안 된다. 물론 두 文具가 다른 탓도 있지만, 실력이 줄어들었다는 얘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마에서 진땀이 났다.
o저녁 식사를 마치고 PX에 들렀다. 치약이랑 칫솔을 사기 위해서.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듯한 박 병장이 소스라치게 놀라 공격! 구호를 외치면서 경례를 올려부친다. 손을 내리고는 얼떨떨한 표정이다.
"왜 그러는가? 반세기 만의 병영 체험일세."
"그러셨군요. 저는 예비역 將軍이신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파안대소, 박 소위도 그 분위기에 휩쓸렸다.
<사진 아래: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었다. 군복은 우기면 받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소중한 물자를 내가 탐낼 수 없는 게 아닌가? 대신 모자를 갖고 와서는 내 방 침대 위에 얹어 놓고 보니 실로 만감이 교차한다. 엄마 생각도 났다. 숙소 시설이 마치 호텔 같았다. 특히 화장실이 깨끗하고 너른 게 마음에 들었다. 반세기 전? 꿈도 꾸지 못할 현실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걸 보고 어찌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있으랴. 낮에 본 부대 시설의 구석구석, 정말 짜임새가 있었던 걸 기억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o 17일 아침, 여단 본부 정훈장교 조 중위가 지프차로 나를 데리러 왔다. 여단 본부에서 장병들 대상으로 안보 강연을 하는 시간이다. 오전 120분(정미 2 시간). 선임 탑승(앞자리에 앉는 것)이 미안해서 머뭇거렸더니, 조 중위는 당연하다며 운전 병더러 출발하잔다. 세상에 예비역 하사가 현역 중위를 뒤로 밀어내고(?) 여단본부로 가다니 싶었지만, 지프차는 잘도 달린다. 이윽고 여단장실, 김동ㅇ 대령이 반긴다. 일년 만의 해후다. 눈물겹도록 보고 싶었던 군인 중의 군인이다. 차 한 잔을 하고, 교육장으로 내려왔다. 장병(부사관 포함)들이 대기해 있다.
o 내가 뭐 특별한 안보에 대한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현장이- 물리적으로 맞는 표현인지 모르지만- 적과 대치해 있는 곳이라 정치적인 얘기는 끄집어 낼 수도 없다. 지난 4월 30일 내가 암 수술 때 만난 103세 한의사 남성혁 원장의 건강 비결 다섯 가지(소식/ 운동/ 금연-절주/ 용서하기/ 남 허물하지 않기)를 들먹이며, 身體髮膚는 受之父母라/ 不敢毁傷이 孝之始也---를 강조했다. 적군과 싸울 때 외는 손가락 하나라도 다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 셈이다. 뒷자리에 앉은 여단장에게 물어 봤다 '전우야 잘 자라'를 가르쳐도 되겠느냐고. 여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야호!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여러분의 할아버지가 전장에서 부르던 '군가'라며 한 소절을 내가 선창하면 장병들이 '復唱'하는 식으로 1절을 소화해 냈다. 장엄하다는 느낌까지 들었다.(실은 이 노래가 '군가'에 포함되지 못하는 것은 너무 감상적이란 게 원인이라는 얘기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내 고향 출신 박시춘의 작곡이라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는 친일인사로 분류되었으니까
<사진 아래: 여단 본부에서 잘 생기고 키가 큰 중대장으로부터 '교육 준비 끝!'이라는 구호와 함꼐 거수 경례를 받고 있다. 내가 먼저 손을 내리고
"쉬어!"
그러면 중대장이 돌아서서 장병들에게 복창한다. 쉬어!
내 배가 이렇게 튀어 나온 줄 뒤늦게 사진으로 알았다. 小食을 부르짖은 내가 부끄럽다. 실은 암 수술 전보다 체중을 7-8킬로그램을 뺐는데---.내년엔 날씬한 모습을 보이련다. 여단장의 모습은 왼쪽에 가려져 안 보인다.>
<사진 아래: 사단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점심을 같이 먹자는 것이다. 물론 바깥이 아니라 부대 내의 간부 식당에서다. 여단 본부에서 지프 차로 급히 이동했다. 잠시 부관부에 들러 '고향 친구' 둘을 만났다. 박 소위와 정 중위. 解語之畵란 말이 있다. 말을 알아듣는 꽃이라는 뜻으로 美人을 칭한다. 여군들은 다 미인이다? 여기 두 친구, 아니 전우도 마찬가지! 부산을 잠시 머리에 떠올렸다. 출발 전 나를 격려해 주던 문인들이 보고 싶다면서도 짐짓 여유를 부렸다. 여군 소령도 만났는데 역시 인물이 출중했다>
O점심 식사 시간은 즐거웠다. 난 군과의 인연을 소상하게 사단장에게 설명했다. 공군3875부대(옛 5672부대) 호국 문예 심사위원장 7-8년 경력부터 부대장(비행단장 김진삼-김부곤-주창성-김영곤 준장 등)의 노인학교 버스 지원 등등. '가방 없는 날' 운영 때, 군수사 김재옥 대령의 신세를 지던 일화도 들먹였다. 한데 그 김재옥 대령을 사단장 옆에 앉아-은 예비역 대령이 안단다. 연락의 다리를 놓겠다는 게 아닌가! 그토록 찾고 싶었던 옛 친구(물론 나이는 내가 많지만)를 반세기 전의 부대 지휘관과의 자리에서 찾게 되다니---.부사단장/ 참모장/ 각 참모 등이 박수를 보내 줬다.
o오후엔 123기갑대대에서 시정을 보냈다. 작년에 두 시간 안보 강연을 했던 곳이라, 낯설지 않았다. 다만 대대장이 바뀌었고 중대장 대부분도 마찬가지. 그래도 선임하사를 비롯한 모든 전우들이 반겨 주었다. 특히 부산 출신 여군 부사관 정보름 하사(여)는 군인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당당한 전우였디. 임관한 지는 얼마 안 되지만, 체대를 다닐 때 부산 최우수 권투 선수로 뽑혔을 정도로 격투기에 뛰어난 실력을 갖췄다나? 게다가 태권도 4단! 웬만한 남자가 그와 맞붙어 이길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 또 한 사람의 解語之花를 일선 부대에서 만나다니--.내가 부산에서 교장으로 지낼 때 정 부사관은 6학년쯤? 그래서 더 정이 갔다. 정보름 부사관 만세!
o 참, 대대장실에서 제주도 출신 병사를 만났다. 나이 서른, 그도 나처럼 노병이다. 마침 포상 휴가를 간단다. 그는 호국 미술 대전에서 특선을 한 宋 상병이다. 내 조그마한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액자에 넣어 주는데, 정말 실물과 똑 같다. 게다가 예술적인 혼을 실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나는 망설임 없이 지갑에서 5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어 손에 쥐어 주었다. 무안해 하는 그를 보며 어깨를 다독였다.(이번에 받은 상금이 이렇게 따뜻하게 쓰여질 줄 몰랐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우리 부산 수필 문인 협회의 회장단/ 집행부/ 심사위원 외 관게자에게 감사드린다. '금일봉'은 두 군데서 더 전했다.
* 귀가 후에, 제대를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병장을 거리에서 만났다. 하사 계급을 단 나를 보고 이상하게 여기기에 이번 일에 대해 몇 마디 이야기를 했다. 연쇄점에 들어갔는데 그도 내 옆에 서기에 무얼 사려느냐고 물었다. 담배란다. 나는 두말 없이 담배 두 갑을 집어 그에게 건넸다. 아내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사진 아래: 121기갑 대대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를 읽어 보라 했다, 아는 병사가 몇 없다. 마침 사법 고시를 공부하다 입대했다는 병사가 똑 바로 대답하기에 가슴 가득히 칭찬을 안았다가 그에게 내뿜었다. 아무리 박수를 보내도 모자라는 장면을 그렇게 연출하고 보니 2시간이 가까워질수록 힘이 쏫았다. 참, 대대 단위에는 대개 교회는 있다. 그래서 교육도 여기서 한다. 이 교회의 목사는 육군 대령 출신으로 예배가 있는 날에 온단다. 천주교 성당은 그렇지 못하다. 절도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는 약속했다. 시원찮은 책이지만 근간 졸저100권을 보내겠다고.>
o 대대장실로 옮겨 차 한 잔을 나누었다. 보안부대 준사관과 부사관이 와 있길래 한참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들도 이런 안보강연은 처음이라며 박수를 보내 줬다. 동생이나 아들처럼 여겨져서 내 입꼬리가 귀에 걸리곤 했다.
O 여단장이 만찬을 준비했단다. 본래는 숙소에서 오리고기로 하기로 했단다. 하지만, 멀리서 온 손님에게 그럴 수 없다며 바깥에서 콩으로 만든 요리 전문집에서 만나잔다. 물론 조 중위가 지프차에 동승했다. 우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종일관 그들은 나를 선배님이라 불렀고(조 중위를 빼고/ 그러고 보니 소령까지는 몰라도 대위가 그런 호칭으로 나를 대한다면 거부감이 생길 것 같았다. 부사관이라도 쉰에 가까우면 모르지만)
O 나도 간 크게 선배 행동을 했다(?) 교만 탓일까? 어느 대대장의 부인이 가수가 꿈이라기에 내가 다리를 놓아 주겠다고 했더니 박수가 터졌다. 123기갑대대에 책을 보내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내가 지난번에 보낸 100여 권은 새로 마련한 서가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개/ 문학 /노인학교/ 추등학교/ 프로 야구 시구/ 노래 등 화제가 참 다양했다.>
<사진 위: 불무리 성당이 사령부 앞에 있다. 일년 전 내가 마련한 금일봉으로 산 햄버거를 들고 좋아하던 병사들의 모습, 잊지 못할 것이다. 다음 사령부 방문 때는 사단 절(寺)을 방문하는 것은 당연하다. 47년 전 정훈참모 박 대위(나중에 소령 진급)은 머리를 나보다 짦게 깎은 스님이었다. 물에 불린 쌀을 씹어 먹던 그의 모습이 그립다. 이번에 만난 정훈참모는 소령이었다.>
o 여단장이 입을 열었다.
"전 중령, 내일 마지막 아니오? 선배님을 장갑차에 모시고 부대 입구에서 교육장까지 가는 거야, 알았어?"
5* 전차대대장은 물론 좋다고 했다.
<사진 아래: 표정은 부드럽지만 결의는 매섭다. 공격! 화이팅. 왼쪽부터 전차대대장 전 중령/ 본인 이원우 예비역 하사/ 여단장 김 대령/ 121기갑대대장 홍 중령/ 123기갑대대장 오 중령)>
O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이러저리 전화를 했다. 행복하다는 내용이었다.
마음이 편해서 그런지 숙면을 취했다. 아침 메뉴는 어제처럼 육개장! 정말 맛이 기가 막혀서다. 얼른 식사를 마치고 나니 누가 문을 두드린다. 사단장 당번병이다.
"사단장님께서 찬 한 잔 하고 싶다고 하셔서요, 모시러 왔습니다."
세상에 사단장 승용차(별판이 달린) 까만 세단이 숙소 밖에서 기다리는 게 아닌가? 얼떨결에 뒷자리에 올라탔지만, 예의가 아닌지 몰라 찜찜했다. 어쨌든 부관참모부를 거쳐 이번에 전출하게 된 부관참모 김형주 소령과 다시 사단장실로 향했다. 부관부 장교 및 부사관과 함께. 사단장은 나와 나란히 앉고 그 옆으로 장병들이 도열(?)해 앉았다.
o사단장 양병ㅇ 소장은 다시 한 번 내게 칭찬을 해 줬다. 그러면서 선물을 하나 건넸다. 궁금했지머 뜯어볼 수 없어 그냥 받았는데---.(나중에 보니 사단장 버클이 달린 혁대였다). 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단장 부채/ 코인/ 혁대/ 즉석 사진 2장(1장은 사진틀에 넣어서)/ 주임원사 코인/ 초상화/ 여단장이 준 방문 기념 사진(틀에 넣어서)/ 하사 계급장이 달린 베레모---
<사진 아래: 체대 재학 중에 부사관으로 임용된 정보름 하사. 태권도 4단에 부산대표 권투 최우수 선수. 이목구비가 빼어난 미인이기도 하다. 부산의 자랑이 아니라 한국의 자랑? 맞는 말일지 모른다. 그의 꿈은 한국 최초의 여군 주임원사?>
<사진 아래: 피날레를 장식하였다. 전차 대대에서! 여군이 전 병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아직 전차대대에는 못 들어오고 있단다. 그만큼 힘든 병과란 이야기다. 나는 여기서 온갖 '싱겁'을 떨었다. '전우야 잘 자라'를 부르면서 현란하게 손뼉과 무릎을 번개처럼 번갈아치는 전국에서 몇 명 안 되는 '기능 보유자'로서의 끼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물론 장갑차를 타고 입구에서 교육장으로 이동하였었다. 이문열 중위! 소대장인 그가 분위기 메이커 아니 아쩌면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바람에 내 입술은 이미 터져 있었지만 겨드랑이에 날개를 단 것처럼 뛰고 날았다. 이 전차대대에서의 사진이 가장 많아서 몇 장 더 올린다. >
<사진 위 아래: 장갑차에 오르다>
<사진 아래: 달리자! 내 입에서 '전우야 잘 자라'며 '진짜 사나이'가 절러 터져 나왔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일도 많다만/ 너와 나는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살았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넘어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하다"
장갑차는 생각보다 빨랐다. 어지간한 오르막도 힘 안들리고 넘는다! 철통 같은 방어 태세, 아니 여차하면 선제 공격! 이게 26기계화 사단의 자랑이다. 나는 다시 한 번 26사단에 몸 담았었던 경력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사진 아래: 근래 O Sole Mio를 많이 독창하였다. 여기서도 예외일 수가 없어서--'산들바람'도 불렀다>
<사진 아래: 斷腸? 누구나가 다 아는 말이다. 그러나 그게 고사성어라고 하면 더러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황하의 협곡을 지나 벼슬아치 일행이 하류로 소풍을 갔다. 진탕 놀다가 돌아가려는 찰나, 하인이 수풀 속에 있는 원숭이 어미와 새끼를 발견하고 새끼를 낚아채어 배에 실었다. 어미는 천리를 멀다 않고 뛰쫓아 왔다. 마침내 출발점에 되돌아와 배를 멈추었을 때 어미가 뱃전에 뛰어올라와 숨을 거두어버리는 게 아닌가? 이상하다 싶어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세 치나 끊어져 있더라는 것. 작고한 반야월 작사기가 미아리 고개에서 포탄에 딸을 잃었더란다. 어쩔 수 없어 딸의 주검을 대개 묻고 떠나가는 이야기를 적은 게 '단장의 마아리 고개'다. 미아리 눈물 고개 님이 떠난 이별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나는 그 노래를 병사들에게 가르쳤다.
<사진 아래:'전우야 잘 자라'는 내가 보기에 최고 군가다. 전우들의 불끈 쥔 주먹을 보라. 궤간을 드나들며 한 소절씩 부르고 있다>
<사진 아래: 나부터 복부 비만으로부터 탈출! 내년 6월엔 날씬한 모습으로 장병들 앞에 서고 싶다.>
<사진 아래: 소대장들과 한떄>
<이문열 중위(소대장)는 내 수제자? 그의 현란한 솜씨를 보라. 머리카락부터 달은꼴이다.>
<사진 아래: 7*여단 본부에서 강의하다. 오늘 동영상을 메일로 받았는데, 눈시울을 적시는 내용이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황당하기도 하고. 자막 한 구절이다. 우리의 은사 이원우 선생님, 총 10시간 만에 사제지간이 되다니--.나는 너무 반성할 게 많은 사람이다. 43년 동안 초등학교에서 근무했으니 제자들은 나를 은사로 부른다. 노인 학교 23-25년 동안 수도 없는 제자들을 만나고 저승으로 보냈다. 수천 명이다. 그들도 나를 은사로 대접했다. 그들은 저승에서 터를 얻어 놓고 나를 기다린다.낮에 일하고 밤에 노래 공부하는 노인학교를 짓겠다고. 이제 여생은 노루꼬리 만한데 수천 명 장병들이 나를 스승으로 치켜세우다니--.이 부끄러운 마음을 어디다 감출까? 모르겠다, 노력이나 하자. 그리고 틈만 나면 26사단과 맹호 여단으로 달려 가자. 이제 알았다. 여기서 500번 버스를 타고 1시간, 서울역에서 지하철로 환승하면 다시 1시간, 양주역에 도착할 수 있다. 거기서 택시로 20분? 그리운 옛 부대로 안 들어가도 그 앞에서 서성거릴 수 있다.>
<사진 아래 : 사단장의 선물 부채, 그 뒤로 하사 계급장이 빛나는 베레모가 보인다. 사진 속의 군인들은 부관참모부 요원들이다. 태극기 좌우로 사단장/ 이원우, 시계 방향으로 민 대위, 박소위(여군), 전문하사, 박 준위(박사 학위 소지), 이현철 원사, 정 중위(여군), 부관참모 김 소령>
<사진 아래:사단장 얼굴을 이렇게 드러내 보이면 안 되는데---.에라 모르겠다.군번 줄이 두 개다. 나는 입대할 때 51021281 군번을 받았고, 일반하사로 임용될 때 80054895 군번을 다시 받았다. 아마 내가 대한민국 부사관으로서 54895번째로 임용되었다는 뜻일 게다. 근데 군번줄을 목에 걸 때 비장감마저 들었다. 2박3일 동안에 만약 죽는다면 어떤 장례를 치를까? 미리 써 놓은 내 유언대로 사체는 분초를 다투어 가톨릭 대학교로 실려 가겠지. 사체 및 장기 기증 서약서를 지갑에 넣어 두었으니. 아무려나 나는 자랑스러웠다. 새 지평을 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단장의 버클이 달린 혁대/ 코인/ 주임원사의 코인 등 선물도 한 아름(?)>
<사진 아래 :상패 등을 넣어 놓는 공간이 이제 비좁다. 26사단 방문 기념 사진 등이 차지해서다. 자랑스럽다. 나는 노병이지만,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작년 12월 17일 12* 기갑 대대에서 안보 강연을 마치고 나서 기념 촬영한 것, 김ㅇㅇ 대대장과 중대장, 참모들과 함께. 지금 ㅇㅇ참모본부로 전출 근무하고 있다. 먼 훗날 대령 진급을 하게 되면, 나를 불러 주기로 했다. 꼭 1년 하루 만에 다시 찾은 대대에서의 감격 잊을 수 없다. >
끝을 맺으며
교육동지들이여, 문학동지들이여! 저 여생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옛 부대 26사단을 찾을 겁니다. 아는 데까지 이야기하고, 사기 진작을 위한 노래를 부르고--.장병(주로 병사)들에게 읽을거리를 마련해 줄 겁니다. 우선 12*기갑대대부터! 가진 것은 老軀뿐이니 발로 뛸게요. 여러분들이 나라를 지키는 우리 아들딸들을 위해 신간 서적(절대 고본은 아니고)/ 자기 저서/ 베스트셀러 등을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덕도리 사서함 96-27 . 2123부대 부대장 혹은 김석주 주임원사 앞
보안상 올리지 못한 사진도 있습니다. 양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다가오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기원합니다.
멀리 용인에서 이원우 올림
첫댓글 선생님. 열정만 있다고 되는 건 아님을 알겠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지성이 물에 젖으면 그냥 퍼지고 번져버릴 지저분한 먹물에 불과하듯....대단하십니다. 군화와 베레모가 꽤 잘 어울리는 건 또 무슨 조화입니까?....^^....
이종민 선생님. 나이가 들면 뭐합니까? 문단 경력이 오래면 또 뭐합니까? 우리 수필 문단에 이종민 선생님처럼 좋은 글 쓰시는 분이 자꾸 나와야 합니다. 저는 이미 늙고 잃은 게 많으니, 북쪽을 바라보며 살겠습니다. 세상에 이번에 1사단 사령부를 지나 121대대에 갔지 뭡니까? 아름다운 심성을 지닌 우리 이종민 선생님. 좋은 글 쓰시도록 성원을 보낼게요. 고백하건대 부끄럽습니다. 공격!!(느낌표는 하나만 찍는 게 약속인데 특별한 경우라서 '용기'를 냈습니다.)
이원우 예비역 하사님, 참 대단하십니다. 어쩌면 그런 모험(?)을 하실 생각을 다 했습니까? 지난 9월에는 사직야구장에서 시구를 하시더니, 이번엔 또 일선부대 안보강연이라, 그렇게 항상 새롭고, 기발하고, 재미 있는 사건을 벌이니까 늙을 새가 없지요. 사진에 보니, 흰 머리 빼고는 젊은 현역 장병들과 꼭 같습니다. 더구나 고런 젊고 이쁘고 대찬 解語花들과 함께 어울렸으니, 젊은 기를 잔뜩 받고 왔겠네요. 그 참....부럽습니데이. 그리고 츄카합니데이~!!
새해 복많이 받으시어 복부비만도 빼고, 더 젊은 오빠로 거듭나시기를~!!!
정약수 학장님! 2박3일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거칠 것도 없고, 망성일 것도 없었습니다. 사단장을 세 번이나 만났고, 준장을 째고는 이등병까지 경례를 주고 받았습니다. 부사단장-참모장-여단장! 다들 대령. 멋진 계급 아닙니까? 아직 어리둥절해하지만, 이등병 병사들은 제 손자 나이. 그들의 체온은 따뜻했고 군인 정신이 투철했지요. 소령 정도(?)는 알아서 먼저 경례를 붙입디다. 공격! 강연을 마치고 지프차를 타고 역으로 나오는 도중, 운전병이 준 흰 장갑을 끼고 상대 차량 선임탑승자로부터의 경례에 답을 하는 기분이란---. 살아야겠습니다. 건강하게! 장병들에게 달려가고 싶은 제 심정은 학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년엔 학장님 내외분이 저보다 더 큰 기쁨을 안으리시라 믿습니다. 기도도 하고 미사도 봉헌할게요. 저는 학장님 내외분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떠올리며 감동합니다. 내년 시즌의 애국가 독창! 그때 뵙지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읽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병영문화를 글의 소재로 삼는 데 앞장서 볼까 합니다만, 글쎄 잘 될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초급 장교나 서른 이쪽저쪽의 부사관은 제 아들이요, 새내기 병사들은 손자들? 외람된 표현입니다. 그런 정신으로 군부대를 찾거나 부근에서라도 서성거리는 삶. 그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국장님은 참 좋은 분! 거듭 감사드립니다. 문운 융성 장구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