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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근정전(景福宮勤政殿)
국보 제223호인 근정전은 조선시대 정궁인 경복궁의 중심 건물로,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태조 3년(1394)에 지었으며, 정종을 비롯한 조선 전기의 여러 왕들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하기도 하였다. ‘근정’이란 이름은 천하의 일은 부지런하면 잘 다스려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정도전이 지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고종 4년(1867) 다시 지었는데, 처음 있던 건물에 비해 많이 변형하였다.
앞면 5칸·옆면 5칸 크기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여진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식 건물이며 그 형태가 화려한 모습을 띠고 있다. 건물의 기단인 월대의 귀퉁이나 계단 주위 난간기둥에 훌륭한 솜씨로 12지신상을 비롯한 동물들을 조각해 놓았다. 건물 안쪽은 아래·위가 트인 통층으로 뒷편 가운데에 임금의 자리인 어좌가 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병풍을 놓았고, 위는 화려한 장식으로 꾸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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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정전(正殿). 국보 제223호. 1395년(태조 4) 지은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리고 현재의 건물은 1867년 중건된 것이다.
2층의 목조건물로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던 곳이다. 근정전은 이단으로 된 월대(月臺) 위에 자리하며, 월대 주위의 돌난간에 새겨진 12지상(十二支像)은 정전 수호의 의미가 있다. 월대의 주위를 둘러싼 회랑은 홍례문의 좌우에서 시작해 향오문의 좌우로 연결되면서 근정문(勤政門)과 사정문(思政門)의 좌우에도 이어져 직사각형의 회랑은 모두 3개의 영역으로 구분된다.
근정전의 좌우 회랑에는 동쪽에 융문루(隆文樓), 서쪽에 융무루(隆武樓), 그 북쪽에 동서행각문인 계인문(啓仁門)과 협의문(協義門)을 두었다. 근정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의 2층 문루인 근정문의 좌우에 일화문과 월화문을 두어 권위성을 보여준다.
앞면 5칸, 옆면 5칸의 팔작지붕으로 아래층의 고주가 위층의 변주가 되는 구조이며, 창방·평방 위에 놓인 다포계의 공포는 외삼출목(外三出目)·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기둥머리마다 직각방향으로 튀어나온 안초공(安草工)을 두었다. 공포의 전체조형은 판재화하는 조선 후기 다포계 건물의 일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천장은 대들보 윗부분부터 우물천장으로 천장 중앙에는 다포계의 천개를 설치하고, 개판에 운룡(雲龍)을 부조했다. 팔작지붕의 지붕마루는 모두 양성(兩城)을 했고,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鷲頭)를, 추녀마루 위에는 용두(龍頭)와 잡상(雜像)을 올려놓았고,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아 위엄을 더했다.
조선시대 궁궐의 정전 중에서 가장 높고 규모가 크며, 조선 후기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대표하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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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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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정전은 국보 제 22호로 경복궁의 정전이며 "백성을 부지런히 다스린다"는 뜻을 갖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등이 이 정전에서 즉위 한것으로 전해진다. 근정전은 주산으로 "북악을 우백호로 인황을 좌청룡"으로 낙산을 안산으로는 남산을 두고 앉아 있다 근정전의 아름다움은 배산인 북악산과 함께하며, 그 아름다움을 제대로 보려면 근정전의 동쪽 향각과 남쪽 행각이 만나는 모서리 위치가 제격이다.(좌측 사진) 근정전 오른쪽 어깨 너머로 북악이 가슴 보인다.북악은 서울의 주산이다. 좌우로 낙산과 인왕이 앉아있고 그 가운데 북악의 혈자리에 경복궁이 앉아 있다. 경복궁앞에 주안상이 차려져 있으니, 곧 서울의 안산인 남산이다 그리고 한강 넘어로 손님산인 관악산이 앉아있다.
근정전은 지금은 중층이지만 태조 중건 당시에는 단층이었다고 한다. 왕의 존업을 나타내는 의식용 건물인 만큼 여러전각 가운데서도 규모와 치장에서 으뜸이다. 근정전은 팔작지붕에 다포계 건물이다. 현재 처마 아래 그물망이 공포를 감싸고 있어서 다소 눈에 걸리는데 조류나 곤충 때문에 설치된 방충망이다. 근정전은 벽체가 없는 건물이다 외부를 문창호로 막음하였는데 모두가 4분합문이다. 즉 네벽의 모든 문을 들어올리면 기둥만 남게되는 것이다.또한 근정전은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 즉 왕의 즉위식, 및 외교관 접대,조회등이 열릴 때 사용하던 공간이다.지금은 수리를 위해 관광객의 출입을 막고 멀리서 그 위엄을느껴야한다
조정
"조정대신들은 뭐하고 있노!!!..!"흔히 조정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이는 정전의 마당을 뜻하는 말이다. 근정전 조정은 밝은 화강석으로 깔려 있다 흔히 박석이라고 하는 보도 블록을 닮은 넓적한 돌이다.물에 하얗게 씻긴 냇가의 돌을 손질하지 않고 그냥 깐 듯한 자연미가 눈맛을 한결 부드럽게 해주고 있다.그렇다 조선 아니 한국의 미는 바로 이 "박석"이 대표한다. 누가 한국의 미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지체없이 말하라. '자연의 미'라고... 중국의 그것은 숨이 막히다. 웅장하고 빈틈이 없다. 거기에는 정을 느낄수가없다. 일본의 것은 어떠한가.마치 미니어처를 보듯 아기자기하면서 조금하고 앙증맞다. 한국의 미는 촌스럽다 하지만 자연스럽다. 한국 어딜 가든지 조각상의 모습을 보면 너무나 친근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미"이다.
임금의 길 어도
조정의 박석을 보다보면 가운데 길이 불룩 나와있다 .바로 이곳이 어도이다 어도는 임금만이 지나갈 수 있는 길로 궁궐을 다니다보면 곳곳에 이런 길을 볼수가있을 것이다.
품계석
그리고 그길 좌우에는 비석처럼 생긴 품계석이 놓여있다 정1품에서 종9품까지의 품계석은 관리들의 지위를 나타내며 근정전 앞으로 갈수록 높은 지위의 관리가 서게된다. 그리고 근정전을 바라보면서 오른쪽은 문반(문인)이 자리하며 왼쪽에는 무반(무인)이 자리잡는다.우리가 양반이란 말을많이사용하는데 바로 이 무반과 문반의 합친말이다. 머리속으로 상상을 해보라 만조백관이 자신의 품계석에 서서 왕을 향해 외친다" 천세 천세 천천세!!
박석위의 고리
품계석을 따라 건물 앞쪽으로 가다보면 고리가 보일 것이다. 이는 행사중 비가 오거나 햇볕이 따가울떄는 천막을 치는데 그위로그위로 차일을 쳤다 그떄 사용했던 큼지막한 차일 고리가 지금도 앞마당에 남아있다
행각으로 걷기
근정전 구역은 네모난 행각으로 구획지어져 있다.행각의 둥근기둥들이 마치 사열받는 병정들처럼 질서정연하다 그 나란한 행렬들을 바라보는 것도 눈맛을 즐겁게 해준다 동쪽행각에는 일화문이 있고 서쪽에는 월화문이 있다. 일화문으로는 주로 문반들이 드나들고 월화문으로는 주로 무반들이 드나들게 되어 있다고 한다.
근정전 행각은 근정전을 중앙에 두고 동서남북으로 행각이 건축되어 있다 남행각은 근정문 좌우의 15칸 월량이고 북쪽 행각은 사정문 좌우의 15칸 행각이다. 동과 서의 향각은 42칸씩이며, 아주길다. 남쪽끝에서 근정전 주변 마당과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동향각을 잠시 비교해 보면 재미가 있다.사정문 좌우 향각으로부터 근정전의 마당은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생긴 박석을 깐 마당이 점점 경사진 흐름으로 남쪽 행각에까지 계속되고있다.우리 눈에는 경사진 것이 크게뜨이지 않지만 빗물이 마당에 고이지 않을 만큼 급하게 잡혀져 있다. 측정하면 1m가 넘는 정도이다. 그런 지형에다 행각을 지었다. 행각은 마당처럼 경사진 터에 지을 수 없으므로 수평으로 고르게 지어야 한다. 그로 인해서 동행각은 두 번 꺽이면서 지형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렇긴 하지만 두 번꺽이면 80 cm정도가 조정될뿐다. 적어도 20-30cm의 차이가 생기는데 그것은 행각의주초석을 엄밀하게 수평선상에 맞추고 기둥을 세운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10-15cm이상 경사지게 설치하였음을 의미한다. 만일 마당이 경사졌는데 집을 엄정하게 수평을 맞추면 사람의 착시현상에 의해 낮은쪽 지붕이 상대적으로 치솟이 보인다 한쪽 어깨가 올라간 꼬이 되면서 이상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착각을 한다. 아무리 야무지고 또똑해도 착시를 한다. 집에는 여러부위에서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중국의 자금성인 경우 용마루 좌우 끝이 쳐져 보이는 착시도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착시를 교정하는 기법은 아주 고급스러운 기술이다 동행각에서 전혀 이상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착시를 교정하였기 때문이다. 착시를 교정할 줄 모르는 건축수준과 능숙하게 교정하는 기술을 발휘한 건축의 수준이 어떤가는 자명한 일이다. 동행각 하나만에서도 이런 놀라운 숨은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 무심히 보면 전혀 눈에 뜨이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니 우리의 근정전이나 우리 건물의 용마루는 양 끝이 조금 올라간다.이는 멀리서 봤을 때 가장 안정정으로 보이게 하는 의도에서이다. 다시한번 조상의 지혜에 감탄을 금치 못한다.
행각의 개조
태조때 처음 조영되었던 행각은 1칸짜리의 "단량"이었다 고종은 그것을2칸통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복량"이라 한다 지금 행각의 주춧돌을 보면 마당쪽의 것은 둥글 게 다듬은 것이고 중앙과 바깥 가장자리 것은 네모난 초석이다. 주춧돌에서도 민족성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경복궁에서나 마찬가리로 둥글 게 다듬은 초석의 궁굴림을 도두룩하고 후하게 하였다.마치 여인의 장생긴 유방과 같다.그런데 이웃나라 자금성에 가서 보면 초석은 기둥을.세우는 자리를 둥글 게 한 것은 같은데 둥글 게 다듬으면서 훌쳐 깎아내어서 우리의 봉긋하고 도톰한 맛과 달리 가차없는 냉혹한 분위기가 풍긴다. 그만큼 다른 성향알 지녔다. 행각은 바깥쪽은 벽을 치고 중방 위로 공창을 내었다 어둡지 않게 빛이 들어오고 답답하지 않게 바람이 통하게 하려는 배려이다. .
이광창을 외부에서 바라다보면, 그 구성에 정성을 쏟았음을 볼 수 있다. 가운데 기둥을 잘살펴보면 네모난 주춧돌은 완벽하게 다듬은 것이 아니다. 그위에 세운 기둥의 아랫도리를 보면 더러 파내었던 자리를 후에 메우놓은 흔적이 발견된다 기둥의아랫도리를<중종(조선초)이 왕세자의 스승을 위해 근정전에서 연회를 열고 있는 장면/근정전 월대가 없으며/행각도 지금과 틀리다>보면 더러 파내었던 자리를 후에 메워놓은 흔적이 발견된다. 기둥밑둥에 하방을 끼웠던 자리를 일제가 용도변경을을 하면서 필요 없어진 문지방과 중방 그리고 인방을 뽑아내고는 그것들이 꽃혀있던 홈을 메워놓았다.원래는 네모난 주춧돌이 있는 곳에 벽체를 시설하였던 것이다 칸막이가 있는 행각의구조가 거기에 있었다. 그것을 일인들이 박물관 전시실로 개조한답시고 옛날 구조를 헐어내면서 변형시킨 것이다 남쪽 행랑의 주춧돌에는 네모난 것이 없다. 그쪽엔 행각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다 무심히 보면 같은 것 같아도 실제로 이렇게 다르다.
이번엔 동쪽행각 바깥벽 중방 위에 설치된 광창의 모습이 서로 다르다. 광창은 여닫을 수 없게 붇박이로 살대를 꽃아 설치한 창이다. 그 창의 틀을 동행각에서는 단순한 네모반 듯한 윤곽으로 만들었는데 남쪽의 것은 네모의귀를 죽이듯이 접은 미묘한 변화를 주었다. 두 광창의윤곽이 다르듯이 상대도 하나의 넉살무늬이고 또한 가지는 빗살무늬이다. 두 살대의 의도는서로 다르다. 그런 창에는 필요에 따라 창호지를 바를수도있는데 우리는 살대가 외부로 노출되게 바르나 이론에서는 살대가 안에서 보이도록 바르는것이 보편적이다 나라마다 특색이 여기에서도 나타난다.
근정전안으로
건물은중층이지만 내부는 통칸으로 되어있다 중앙데는 닫집이 있고 그아래 옥좌를 마련하였는데 옥좌는 복련과 앙련을 새긴 연화대좌로 꾸며져 있다. 보좌 위에는 난간을 둥글다 그 뒤에 세폭짜리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데, 이를 삼절병풍이라고 한다 갖가지문양이 아름답다. 삼절병풍 뒤 벽면에는 일월오악병이 펼쳐져 있다. 이 그림은 왕을 상징한다.
왕이 궁밖으로 행차할떄 이 그림도 임금이 머무는 곳으로 함께 옮겨진다."오봉상일원"도 또는 "일월 곤륜도"라고도 하는 일원오악도는 왕의 권위의 상징이면서 왕에 대한 송축의 의미를 담고 있다.오악은 동악(금강산) 남악(지리산) 서악(묘향산) 북악(백두산) 중악(삼각산)을 가리킨다.오악은 우리의 토속신앙인 산신숭배사상과도 일맥이 닿아 있다.
이 그림은 정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덕궁 대조전의 대청에도 마련되어 있다.전각 내부에는 높고 강건한 여러개의 고주가 버티고 서 잇는데 그 기둥은 천장 위까지 닿아 있다 천장 중앙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황룡이 조각되어 있다 황룡은 청룡보다 급수가 높다 황룡은 천자이지만 청룡을 외호신이다. 그래서 청룡은 근정전 바깥 월대에 위치하면서 황룡을 지커주고 있다 반룡이라고도 하는 이 황룡은 헝원경이라는 거울을 갖고 잇는데 이는 왕의 정통성을 상진한다. 왕을 상징하는 용은 오조룡이라 하여 대개 발까락이 다섯이다..그건데 근정전의 용은 발까락이 일곱이나 된다. 정궁의용이라서 그랬을까? 반면에 사찰의 호법룡은 발가락이 대개 넷으로 나타나 있다. 급이 낮은 호법신장이기 떄문일까
월대오르기
단층이었던 근정전 월대는 대원군 떄 상하층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월대는 왕과 신하의 공간을 구획지어준다. 아래 위 월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고 계단 가운데 답도가 있다. 글자 그대로 푼다면 밟고 가는 길 이지만 실제로는 답도의 계풍면에 봉황이 조각되어 있어서 밟을 수 없고 또한 밟아서도 않된다. 계단 소맷돌에는 해치가 길 게 엎드려 있다. 해치목에 걸린 쌍방물이 얄밉도록 앙증맞아서 발길을 멈추게 한다.
월대의 석수들
윌대둘레에는 난간을 두르고 돌계단 양쪽에는 엄지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머리에는 여러 동물조각을 얹었다 근정전 석수는 크게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청룡(동), 백호(서), 주작(남), 현무(북),"등 사방신이 그 하나요 "십이지신" 이 그 둘이다. 십이지신은 저마다 고유한 방위가 있는데 근정전 십이지상들은 급수가 높은 사방신 때문인지 자신들의 자리를 못찾아 헤매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 한 가지는 이름과 역할이 분명치 않은 여러 가지 석수들이다. 월대의 기단 모서리에는 새끼를 거느린 석수 한쌍이 있다. 암컷 가슴에 착 달라붙어 젖을 빨고 있는 새끼 석수도 매우 재미있다. 관광객들은 그들에게 운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 버린다. 그게 섭섭해서인지 수컷은 지나가는 관광객들을 보며, 날좀보소 하고 일년 삼백예순날 하냥 애소하고 있다. 이들 가족은 근정전의 위엄과 경건한 분위기와는 달리 정감어리고 해학적인모습들이다.
지붕위의 잡상
석수들은 근정전의 숨막히는 긴장을 한껏 느슨하게 풀어주고 있지만 근정전의 용마루는 위엄을 갖추기 위해 다른 전각보다 높이 올렸다. 용마루 양끝에는 취두가 얹혀져 있고 내림마루에는 잡상들이 장식되어 있다. 취두는 머리가 독수리처럼 생긴 상상의 동물로 삿된 것을 물리친다는 벽사의 상이다. 잡상은 용마루를 제외한 합걱마루와 처마마루를 장식한다. 잡상은 궁궐의 전각 뿐만 아니라 남대문과 같은 성문이나 사찰의 전각마루에서도 간간이발견되고 있거니와 최근에는 장식용으로 많이 얹어 놓는다 잡상의숫자는 전각의 성격이나 규모와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잡상의 하나 하나에 대한 이름은 문헌마다 각각 다르게 나오는데 어우야담에는 이들이 서유기에 나오는 인물들로 소개되어 있다. 잡상맨 앞에 패랭이를 쓰고 앉아있는 상은 "삼장법사"이며, 잡상중의 원숭이상은 손행자(손오공)이란 설명이다. 근정전의 옹기로 구운 토수도 볼만하다. 의 합각에 삐죽이 나온 나무를 "사래목"이라고 하는데 토수는 이 사래목이 비바람에 상하지 않도록 씌운 장치다. 용의 얼굴을 한 토수는 그러한 실용적인 용도외에도 건물을 보호하고 삳된 것을 막는 벽사의 기능도 함꼐 갖고 있다
정(鼎)과 드므
월대 좌우에는 향로같이 생긴 그릇이 놓여 있다. 세 개의 발이 있고 배가 부르고 귀가 둘 달려 있으며, 게다가 그 안에 흙까지 담고 있으니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향로이지만 사실은 향로가 아니다.이것은 정이라는 그릇이다. 이것의 고향은 먼 중국인데 정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상징적인 솥이다. 중국 하나라 떄는 지방의 아홉 제후가 쇠를 모아 천자에게 바쳐서 정을 만들었다고 한다. 왕도(道)을 뜻하는 구정이라는 용어도 여기에서 나왔다. 정이 있는 아래 계단 좌우에는 드무가 놓여있다. 드무는 가마솥같이 생긴 무쇠 항아리로 이곳에는 물을 채워둔다 말하자면 방화수같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이를 문해라고 하고 우리나라에서는 길상항이라고 한다 관악산의 화마가 궁궐로 침입해올떄 드무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간다는 속설이 있다. 그런데 많은 관광객들이 쓰줄 알고 자꾸 쓰레기를 버려 지금은 관리자들이 사람들 발길이 아예 닿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렸다.이런 것을 향로로 표기가 되어있다 (안내판 왈" 이향로는 국가의 중요한 행사가 있을떄 근엄한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향을 피웠다고한다...")중요한 행사가 있었을 때 필요한 향로라면 이렇게 붙박이로 만들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정말 향로가 필요한 종묘에도 붙박이로는 만들어 놓지 않았다.
또한 실록에 의하면, 제사를 지낼 때에는 향로는 방안에서 피운다다라고 되어있고 세종실록에는 "제사 전 일 주루의 상수 1각에 유사가 향축안을 근정전 한가운데에 남향으로 놓는다 향안을 앞에 설치하고 전하배위를 월대 한가운데에 북향하여 설치한다.."라고 쓰여있다.하지만 근정전 바로앞에 많은 관광객들은 당연히 향로로 생각하고 있다.국가의 중요한 행사에 외 향을 피울까 향은 사당에서나 피우는 것 아닌감....????
근정전의 수모
일제 강점 5년을 기념하기 위해 요즘의 엑스포처럼 "조선물산공진회"가 경복구에서 열렸을 때 그 개장식이 이곳 근정전에서 치러졌고 그때 일본 데라우치 총독이 황제나 않는 용산에 턱하니 버티고 앉아 일장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굴욕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근정전은 언제 보아도 당당고 근엄하다.
........................다음카페 '인천중년행복의징검다리"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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