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년생 조우제는 하버드에서 동아시아 사상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영민 님의 좀 알아듣기 어려운 책을 읽고 요약했습니다. 2022.10.31. ㈜사회평론아카데미 발행, p.306, 16,000원
○프롤로그 : 중국 북송의 문인, 학자, 정치가였던 소식(蘇軾 1037-1101)은 그의 적벽부(赤壁賦)에서 인생의 허무라는 주제를 다룬다. 그는 조정을 비방하는 시를 써서 황주로 유배되었다. 그 때의 농사짓던 언덕을 동파(東坡)라 하고 그의 호로 삼았다. 그는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다양한 해답을 검토하고, 마침내 자기만의 결론을 내리면서 마무리한다. 이 책 역시 그와 같은 흐름에 맞추어 구성했다.
제1장 허무의 물결 속에서
-이 광활한 우주는 마음이 없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 만물에 맡길 뿐, 사사로이 간섭하지 않는다. 이 무심한 세상에서 반성하는 마음을 가진 희귀한 존재인 인간은 불가피하게 묻는다. 세상에는 악이 창궐하고, 마음에는 번민이 해일처럼 넘치고, 모든 것이 늦봄처럼 사라지는데, 어떻게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가능한가?
-정말 그리기 어려운 것은 ‘없음’ 혹은 ‘不在’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빗질 자국조차 없는 마당보다 빗질 자국이 있는 마당이 깨끗해 보인다고 했다. 인간이 만든 문명의 흔적을 그리되 인간은 그리지 않을 때, 인간의 부재는 한층 더 도드라진다. 신비주의자들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不在 혹은 없음 속에서 神이 인식된다고 보았다.
-갱생(更生)의 상징으로는 물에 빠지는 것이 비행기에서 떨어지는 것보다 적합하다. 모세나 심청은 물에 빠진 뒤,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제2장 부(富)와 명예와 미모(美貌)의 행방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피하고 죽음으로 인해 인생은 거품이 된다. 죽음은 부귀와 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아직 미망(迷妄)에 사로잡힌 우리 보통 사람들은 富와 명예와 美貌를 위해 바쁘게 움직이지만, 시체가 되고 해골이 될 죽음을 앞두고, 오늘도 허무한 일상 속을 그림자처럼 걷고 있다. <맥베스> 주인공의 말처럼, 인생이란 걸어 다니는 그림자! 무대 위에서는 이 말 저 말 떠들어대지만, 결국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정적(靜寂)이 찾아올 뿐이다.
제3장 시간속의 필멸자(必滅者)
-삶이란 미리 정해놓은 목표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제2의 인생, 갱생이 시작된다. 유학시절 공부를 치열하게 하던 한 후배는 좋은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라고? 그런데 어느 한 학생은 공부하는 순간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오! 그런가? 이 대답은 오랫동안 뇌리에 남았다.
-인간은 자신이 순간을 살다가는 불나방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기에, 자기를 닮은 자식을 생각한다. 그와 한 배를 타고 정체성(正體性)을 공유하여 자신을 다음 세대로 연장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힘을 내어 고되고 허망한 삶을 견디어 나가지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결국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이른다.
제4장 오래 살아 신선(神仙)이 된다는 것
-인생이 고해(苦海)라면서 오래 살고 싶어 하다니? 현자들은 죽음은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고 했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고, 정작 죽으면 죽음을 경험할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로마의 루크레티우스는 노년이 두려운 것은 그것이 쇠퇴와 허약과 결핍을 뜻하기 때문이라고 했고, 반면 키케로는 노인은 욕망으로부터 해방되어 판단력이 필요한 일들이나 새로운 공부, 교육, 상담 등에 더욱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노인은 퇴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노인은 그 퇴행을 적극적으로 즐길 필요가 있다. 학위, 청혼, 글쓰기 등으로---
-필멸자인 인간이 不死의 존재인 神仙이 되겠다는 것은 망상(妄想)이 아닌가? 마치 애벌레가 자라서 나비가 되는 것처럼---
제5장 하루하루의 나날들
-그리스의 <시시포스 신화>를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 화가 타치아노는 바위를 언덕 위로 굴러 올릴 때의 어두운 표정과 불거진 근육에 집중했지만, 20세기 프랑스 문단의 총아 알베르 까뮈는 바위가 아래로 굴러 떨어진 뒤 터덜터덜 걸어 내려오는 과정에 주목했다. 자살하지 않고 끝나지 않는 고통을 향해서 다시 걸어 내려올 수 있는 실존의 위대함을 알린 것이다.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한 시간은 실로 공포스럽게 한다. 지나친 여가는 인간을 공허하게 하고 낭비하게끔 한다.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에서 올 것이다. 재미있는 공부를 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인생의 덧없음을 구름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 이기심이 양심을 가리는 것은 마치 구름이 태양을 가리는 것과 같다고도 한다. 정말 얽매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구름 같은 사물이 아니라 마음을 갈고 닦을 수 있는 인간이다. 사람의 마음만큼은 노력 여하에 따라 훨훨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제6장 관점의 문제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 울지 않았다. 우리는 인생을 보다 큰 흐름의 일부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짧은 인생에만 집중하지 말고 인생의 이전과 이후까지 시야를 넓혀야 한다. 인생도 그저 순환하는 에너지 흐름의 일부일 뿐이라고---
-황룡사 벽, 솔거의 <老松圖>에 새들이 날아와 부딪혔다. 노송도는 세상에 복제물을 하나 더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소식(蘇軾)은 외부대상을 창의적으로 소화한 다음에 그린 그림이야말로 훌륭한 작품이라면서 <雪竹圖>를 그렸다.
-또 소식은 여산 서쪽의 서림사 벽에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는 건, 내가 여산 속에 있기 때문”이라는 시를 써 붙였다. 우리가 알고 싶어서 애태우는 것들, 人生 ‧ 未來 ‧ 神 ‧ 宇宙 ‧ 道 같은 것들도 다 이와 같지 않을까? 그런 것들의 진짜 모습은 변화무쌍하여 미약한 인간이 파악하기에는 너무 크고 깊고 어렵다. 한국에 산다고 한국을 알겠는가? 살고 있다고 삶을 알겠는가? 그러면 아예 안다는 것을 포기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道는 아예 알 수 없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장님이 해를 보기 어렵다고 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제7장 허무와 정치
-중국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은 국가를 경쟁체제로 개혁하여 발전을 꾀했다. 이에 소식(蘇軾 1037-1101)은 왕안석을 비판하는 뜻을 담아 <적벽부(赤壁賦)>를 썼다.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라고 읊었다.
-세상에는 제로섬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영역도 있지만, 희망 ‧ 자신감 ‧ 정의 등 비물질적인 가치와 같이 제로섬 경쟁이 작동하지 않는 영역도 있다.
-“제 의도는 그렇지 않았는데, 그런 결과를 빚게 되어 죄송합니다.” 이 말은 좋은 의도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것을 말한다. 대체로 인간은 큰 흐름과 우발적 사건의 비빕밥 속에서 선택과 습관을 오가면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산다. 그러다가 정신 차려보면 어느새 죽을 때다. 그러므로 현실에 대응할 수 있는 판단력과 상상력과 유연성과 탄성이 필요하다.
-그 어떤 것도 시간과 더불어 지나간다. 분노도, 고통도, 증오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나쁜 일뿐만 아니라 좋은 일도 지나간다. 연애에도 권태가 찾아온다. 관계를 지속하고 싶다면 일정한 긴장을 부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여행이나 주말부부 등---
-어떤 멋진 정치적 이념이나 체제도 시간의 풍화를 견디기는 어렵다. 시간 속에서 권태와 타락을 방지하고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에 정면 도전하는 비판적인 존재, 기존 가치와 불화하는 이질적인 존재,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마저 환영하는 것이 좋다. 관건은 그러한 비판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듣기 싫겠지. 정말 쓴소리는---
-2차 대전 중 군용기 조종사로 정찰 비행 후 돌아오지 않은 프랑스의 작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는 <전시 조종사>에서 “완공된 성당의 관리자로 자기 소임을 다했다고 만족하는 사람은 그 순간부터 패배자다. 지어나갈 성당을 가슴속에 품은 자는 승리자다. 사랑이 승리를 낳는다. 지능은 사랑을 위해 봉사할 때에야 비로소 그 가치가 빛난다.”고 했다. 대성당을 마음속에 그린 사람들은 모두 험한 시간을 통과해 간 이들이었다. 가난에 시달리거나, 비참한 전쟁을 겪거나, 시대의 광기를 목도한 사람들이었다. 모두 ‘더러운 리얼리즘’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제8장 인생을 즐긴다는 것
-안나마리아 고치가 쓴 글과 비올레타 로피즈가 그린 그림책 <할머니의 팡도르>를 보면, 죽음을 기다리던 할머니가 사신(死神)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빵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며칠 더 이 세상에 머물다 가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빵은 생명의 음식이고 달콤함은 삶의 쾌락이다. 세상의 달콤함에 매료된 사신은 마침내 검은 망토를 벗어 던져버리는데, 할머니는 이제 갑시다. 찰다(과자) 속에 레시피를 숨겨두었으니, 이제 비밀은 아이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면서 이제 갈 시간이라고 말한다. 할머니는 삶과 죽음을 다 기꺼이 긍정하고 수용했다.
-무엇을 제대로 좋아하는 일은 어렵다. 너무 좋아하다보면 집착이 생겨 무리한 요구나 기대 등의 문제가 발생, 뜻대로 되지 않으면 크게 실망하기도 한다. 좋아하지 않으면 집착할 일도 없고 상심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 인생을 풍요롭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집착과 초연 중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소식(蘇軾)은 인간은 맛있는 것을 먹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포옹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속의 쾌락은 대상이 있어야 한다. 미식에는 음식이 있어야 하고, 연애에는 상대가 필요하다. 그러니 인생을 즐겁게 살려면 대상을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욕망은 끝이 없다. 그래서 소식은 <보회당기(寶繪堂記)>에서 “군자는 대상에 뜻을 깃들여도 되지만, 뜻을 대상에 머무르게 해서는 안 된다. 뜻을 대상에 깃들이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대상에 뜻이 머물게 되면 아무리 하찮은 대상이라도 병통이 될 수 있고, 아무리 대단한 대상이라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고 했다.
○에필로그 : 나는 산책 중독자다. 산책은 나에게 건강과 활력을 주는 구원이다. 산책은 나의 생업이다. 산책 중 떠오르는 망상은 메모가 되고, 글이 되고, 책이 된다. 내가 산책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산책에 목적이 없다는 데 있다. 나는 오랫동안 목적 없는 삶을 원해왔다. 왜냐하면? 목적보다는 삶을 원하기 때문이다. 목적을 위해 삶을 희생하기 싫다. 나는 목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다.
-목적이 달성되면 허무가 엄습한다. 실패해도 허무가 엄습한다. 산책을 마치면 나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위도식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열심히 일할 것이다. 나는 성취를 위해 태어난 것은 아니다. 성취는 내가 산책하는 도중에 발생한다. 행복이여! 너는 내가 살아가는 동안 부지불식간에 발생하도록 하게나!
(끝)
첫댓글 "노동을 없애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노동의 질을 바꾸는 것이 구원이다. 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 아니라 일을 즐길 수 있어야 구원이다. 구원은 비천하고 무의미한 노동을 즐길만한 노동으로 만드는 데에서 올 것이다. 재미있는 공부를 하고,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구원이다." 홍골 아재, 잘 읽었습니다, 9988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