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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옛날하고 아주 오랜 옛날 충효예의 사상을 중요시 여기고 의복을 잘 차려 입고 다니는 민족이였습니다 이번에는 여자 장신구를 소개 해볼까 합니다 여자들도 그 옷에 맞게 장신구도 중요시 여겼는데요 그럼 우리나라의 전통 장신구가 어떤것이 있는지 한번 알아 봅시다
비녀 : 한국 여성들의 대표적인 장신구로 삼국시대 때 부터 사용 하기 시작했다 주로 여성의 쪽진 머리를 고정할 때 쓰던 장신구이며 일반적으로 비녀는 잠(簪)과 채(釵), 두 종류로 나뉜다. 잠은 길쭉한 몸체에 비녀머리가 있고, 채는 ∩형 몸체 위에 장식이 달렸다. 비녀의 모양은 단조로운 것도 있지만 고급진 것들은 소재도 귀한 걸 쓰고, 끝부분이나 윗부분에 다는 장식들의 숫자도 엄청 늘어나서 매우 호화로운 모양이 된다 비녀 재료로는 산호 호박 백동 금 나무 옥으로 만든다
뒤꽂이 : 쪽찐 머리 뒤에 덧꽂는 비녀 이외의 장식품으로 머리를 더욱 화려하게 꾸며주는 장식적인 것과 실용적인 면을 겸한 귀이개·빗치개 등이 있었다 일반 뒤꽂이의 대표적인 것으로는 ‘과판’이라 하여 국화 모양의 장식이 달린 것이 있었으며, ‘연봉’이라 하여 피어오르는 연꽃봉오리를 본떠 만든 장식이 달린 것과 매화·화접(花蝶)·나비·천도(天桃)·봉(鳳) 등의 모양을 장식한 것들도 있었다.이 것들은 주로 산호·비취·칠보·파란·진주 등의 보패류로 만들어서 여인의 검은 머리를 더욱 화사하고 아름답게 꾸며주었다. 조선시대의 의식 때 왕실이나 상류계급에서 큰머리나 어여머리에 꽂았던 떨잠도 꽂는 장소야 어디든지 뒤꽂이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이 것은 나비모양·둥근모양·사각모양 등의 옥판(玉板)에 칠보·진주·보석 등을 장식하여 만든 것으로 큰머리와 어여머리의 중심과 양편에 하나씩 꽂았던 최고의 수식품이다. 실용을 겸한 뒤꽂이로는 빗치개와 귀이개가 있다. 빗치개는 가리마를 탈 때나 밀기름을 바르거나 빗살 틈에 낀 때를 빼는 데 필요한 것으로, 다른 화장도구와 함께 경대에 두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언제부터인가 머리를 장식하기에 알맞은 형태로 만들어서 머리 수식물의 하나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귀이개는 원래 귀에지를 파내는 기구인데, 이 것도 장식물로서 쪽찐 머리에 꽂게 된 것이다. 이에는 귀이개와 함께 꽂이가 가지처럼 달린 것이 있었다.
가락지 : 여자들의 손가락에 끼우는 장신구로 안은 판판하고 겉은 퉁퉁하게 만든 두 쪽의 고리로 되어 있다. 한 짝으로 된 것은 반지라고 한다. 지환(指環)은 가락지와 반지의 총칭이면서, 가락지만을 뜻하기도 한다. 가락지의 유물은 조선시대 이후의 것만 볼 수 있다. 당시 가락지는 기혼여자만이 사용할 수 있었고, 미혼여자는 반지를 사용하였다.이로써 볼 때 가락지는 조선시대가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 사상이 생활윤리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이므로, 혼례를 인간 대사의 하나로 삼는 가운데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가락지는 한 짝의 고리인 반지를 두 짝으로 한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반지나 가락지나 그 재료나 기교면에서는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유물에 의하면 재료는 도금(鍍金) 또는 은(銀)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명나라에 대한 진공(進貢)이 어려웠을 뿐더러 면진공정책(免進貢政策)을 위해서도 금의 사용을 금하였기 때문인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밖에 칠보·옥·마노·호박·비취·진주·구리 등으로 만든 것도 있다. 상류사회나 궁중에서는 그 재료에 따라 계절에 맞추어 끼었다. 헌종의 후궁 경빈김씨(慶嬪金氏)의 『사절복색자장요람 四節服色自藏要覽』에도 “가락지는 10월부터 정월까지 금지환을 끼고, 2월과 4월은 은칠보지환을 낀다. 5월 단오 견사당의(絹紗唐衣)를 입을 때에는 옥지환이나 마노지환을 낀다.또 8월 한더위에는 광사당의(光紗唐衣)를 입을 때에 칠보지환을 끼어 9월 공단당의(貢緞唐衣)를 입을 때까지 계속한다. 규칙이 이러하니 여름에는 금을 못 끼고, 겨울에는 옥을 못 끼나 춘추에는 옷에 따라 마음대로 낀다.”라고 되어 있다. 이렇게 다양하였던 조선시대의 가락지는 기교면에 있어서는 전대의 것에 비하여 단순한 면이 있어, 오히려 그 단순성이 조선시대의 특징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말엽 순종이 세자 당시 가례 때 빈궁(嬪宮)에게 내린 가락지는 다음과 같다. 재간택(再揀擇) 후 순금산호지환·산호지환 각 1쌍, 삼간택 후 진주장도금조이지환(眞珠粧鍍金―指環)·산호지환·밀화지환(蜜花指環)·순금지환 각 1쌍, 가례 때에 진주장산호지환·진주장금패지환(眞珠粧錦貝指環)·진주장자마노지환·비취옥지환·밀화지환·옥지환·공작석지환(孔雀石指環) 각 1쌍 등이다. 이것들이 조선시대 가락지의 대표적인 것들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노리개 : 여성의 몸치장으로 한복 저고리의 고름이나 치마허리 등에 달았던 패물. 외형상 섬세하고 다채로우며 호화로운 장식품이었다. 정신적인 의미로는 불로장생의 이미지로도 쓰였다고 한다. 궁중에서는 물론 상류층과 평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애용된 장식품으로 그 기원은 삼국 시대의 요패에서 찾기도 하며, 고려도경에도 고려시대 귀부인들이 허리띠에 금방울이나 비단 향낭을 찼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고려 후기에는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지자 허리띠에만 차던 것을 옷고름부터 차기 시작하더니 조선시대부터는 대부분 옷고름에 달게 되면서 현재의 노리개가 나타난다. 노리개 하나를 단작 노리개라고 하며, 사진과 같이 세 개의 노리개를 묶은 것을 삼작 노리개라 하여 예복에 착용하였으며, 5작 노리개도 있었다. 장식용이기는 하지만 장도 노리개, 침통 노리개 등 실용적인 목적의 노리개도 있었다. 사향같은 향을 따로 주머니에 넣고 다니기도 했지만 이 노리개에 넣어 들고 다니기도 했는데 이를 향갑 노리개라 한다. 여러 가지 전통적인 매듭 기법이 필수적으로 쓰이는데 이게 다 수공예로 만들기 때문에 제대로 만들면 수백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노리개 하나만 만들어도 손가락 관절이 다 나갈 정도로 손에 무리가 많이 가는 것이 매듭짓기다. 양반 사대부가 여성의 품계에 따라서 신분에 따라서 패물의 숫자랑 매듭의 모양이 다르다고 한다
도투락댕기
고이댕기
떠구지댕기
매개댕기
드림댕기
말뚝댕기
제비부리댕기
네가닥댕기
팥잎댕기
앞댕기
댕기머리(모델 : AOA 설현)
댕기 : 댕기(唐只)란 길게 땋은 머리 끝에 드리는 장식용 끈을 말한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사용되었다. 쓰임에 따라 쪽댕기·제비부리댕기·큰댕기·앞댕기·어린이용 댕기가 있다한자어로는 취음하여 ‘당지(唐只)’라 쓴다. 머리를 흩어지지 않게 묶기 위해서는 헝겊이나 끈이 필요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댕기는 여자의 수발(修髮)과 함께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북사』 열전에 백제의 처녀는 머리를 뒤로 땋아 늘어뜨리고, 부인은 두 갈래로 나누어 머리 위에 얹었다고 하고 있다. 신라에서는 부인들이 머리[髮]를 땋아 머리[頭]에 두르고 비단과 진주 등으로 장식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끈으로 장식한 모습이 있어,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이 모두 댕기를 사용하였음을 볼 수 있다. 『고려도경』 부인조에 처녀는 홍색 나(羅)로 머리를 묶고, 남은 머리는 뒤로 내려뜨렸으며, 출가하면 머리를 틀어 나로 묶고 작은 비녀를 꽂았다고 하였으니, 이는 제비부리댕기와 쪽댕기를 연상시킨다. 고려 후기는 몽고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변발(辮髮)이 일반화되어 댕기는 필수품이 되었다.조선시대도 처녀와 총각은 물론, 부인의 쪽머리나 얹은머리도 변발을 하게 됨에 따라, 댕기는 더욱 중요한 수식품(首飾品)의 구실을 하였다. 개화기 이후 단발머리와 서구식 리본이 들어오면서 댕기는 차차 사라지고, 요즈음 특수한 예복을 입는 경우에만 사용되고 있다. 댕기는 실용성과 장식성을 겸하며, 신분이나 길흉사에 따라 색과 재료를 달리 사용하기도 하고, 가식된 문양에 따라 상징성을 가지기도 한다. 댕기는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으며, 그 종류는 다음과 같다. 예장용(禮裝用)으로, ① 떠구지댕기 : 궁중의식에 비(妃)·빈(嬪)이 큰머리[巨頭味 : 떠구지머리]에 사용하였던 자주빛 댕기이다. ② 매개댕기 : 궁중의식 때 어여머리[於由味]에 더하여 떠구지를 할 때 연결부분에 사용하는 너비가 좁은 검은 댕기이다. ③ 도투락댕기 : 큰댕기 또는 주렴(朱簾)이라고도 한다. 예장하였을 때의 뒷댕기로서 검은자주색 비단류로 만든다. 보통 댕기보다 넓으며 길이는 치마길이보다 약간 짧고 두 갈래로 되어 있으며, 겉에는 금박을 찬란하게 하였다. 윗부분에는 석웅황(石雄黃)이나 옥판(玉板)을 달고, 아랫부분에도 석웅황·밀화(蜜花)·금패(錦貝)로 만든 매미 5마리를 달아 두 갈래진 댕기를 연결해주었다. 서북지방에는 이와 비슷한 것이 있어 고이댕기라고 하였다. ④ 드림댕기 : 혼례복에서는 뒷댕기인 도투락댕기와 짝을 이루는 앞댕기로, 다른 예복에서는 뒷댕기 없이 이 앞댕기인 드림댕기만을 하는데, 검은자주색에 금박을 하였으며, 갈라진 양끝에는 진주·산호주 등의 장식을 하였다.일반용으로, ① 제비부리댕기 : 변발한 처녀나 총각이 하였는데, 처녀는 붉은색, 총각은 검은색이었다. 또, 총각은 포백(布帛)으로 하고 아무런 장식이 없는 것이었으나, 처녀는 비단으로 하여 때로는 금박을 하기도 하고, 댕기고에 옥판이나 옥나비 또는 칠보나비를 붙이기도 하였다. ② 도투락댕기 : 예장용의 도투락댕기와 같은 것을 어린이용으로 만든다. 뒷머리가 짧으므로 댕기 위에는 조그만 깃을 달아 뒤통수 귀밑머리 밑에서 바짝 달아주게 되어 있다. ③ 말뚝댕기 : 어린이용으로 도투락댕기와 비슷한 것인데, 도투락댕기의 시기를 지나 제비부리댕기를 드리기 전에 하였다. ④ 쪽댕기 : 쪽찔 때 사용하는 것으로, 머리를 땋아가다가 끝 부분에서 끼워 넣어 쪽이 곱게 틀어지게 하였다. 색은 젊은 사람은 홍색, 나이가 든 사람은 자주색, 과부는 검정색, 상제는 흰색이었으며, 8,90세 노인도 내외가 함께 생존하고 있으면 자주댕기를 하였다. 궁녀용으로, ① 네가닥댕기·두가닥댕기 : 나인(內人)들이 자주색의 무늬 있는 사(紗)로 만들어 새앙머리에 매었다. ② 팥잎댕기 : 팥잎처럼 가장자리가 말린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궁중의 무수리와 세수간의 나인들이 사용하였다.
(모델 : 전인화(SBS 여인천하) 하지원(KBS 2 황진이))
가체 : 가체(加髢) 혹은 다리, 다래는 일종의 가발로, 근대 이전 한국의 여성들이 사용하였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여성들과 기생들이 가체를 사용하였다. 서양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여성들도 더 크고 무거운 가발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심해지자 1788년 조선 정조는 왕명으로 가체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라고 했다, 머리를 꾸미고 싶으면)당시의 가체는 그 길이가 무려 1척(30.3cm)에 이를 정도였다. 가체는 얹은머리형태로 양반층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층 부녀자에게도 크게 유행했으며 좋은 다래로 땋은 머리 를 틀어서 얹은 가체를 행사나 명절에 한번씩 사용하는 것을 큰 자랑이어서 일부 가정에는 재정적 부담이 과중해지는 결과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에 따라 당시에는 부녀자의 가체를 통해 그 집안의 경제 사정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 가체의 무게 때문에 시집오는 처녀가 혼례 중에 혼절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또한 국가 주요 행사시에 왕의 가족들이 착용할 가체제작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각종 공출을 통해 강제 수집하는 등 백성의 불만을 초래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19세기 들어 양반 계급의 여성들은 족두리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가체의 대용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생들은 계속해서 가체를 사용하였다. 여러가지 장식을 포함한 가체의 무게는 보통 3~4kg정도이다. 가체를 한 머리형을 가체머리 혹은 얹은 머리라고 불렀으며 현대에 와서는 사극에 출현하는 배우들이 가체의 무게에 따른 고통을 토로하기도 한다.
(모델 : 김혜수(KBS 장희빈))
떠구지머리 : 떠구지머리, 활머리, 큰머리, 거두미(巨頭味, 擧頭美)는 조선 시대 궁중에서 왕비와 왕세자빈 등이 예장할 때 이용하던 머리모양이다. 떠구지는 어여머리 위에 올리는 비녀로, 떠받치는 비녀라는 용어에서 비롯되었으며 머리모양은 세조 당시 중국 명나라의 면복계양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중기 이전에는 가체(加髢)를 이용했으나 조선 후기 '가체 금지령(加髢 禁止令)'이 내려진 이후에는 오동나무로 만들어진 떠구지를 이용하였다.
적관
대수머리 : 대수머리(大首머리)는 조선시대 왕비가 대례복을 입을 때 하던 머리모양이다. 왕비가 대례복인 적의(翟衣)을 입을 때 머리에 쓰던 적관(翟冠)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이후 궁중의 제식을 정비하던 중 적관을 구할 수 없게 되자 가체(加髢)의 한 종류인 대수머리를 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첩지 : 첩지는 한복에서 족두리나 아얌 등 머리장식을 할 때 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착용하던 머리 장식을 말한다. 첩지는 머리를 단정하게 하기 위해 머리 정 가운데에 꽂았다. 첩지를 착용하려면 가운데 가르마를 타고 뒤로 빗어넘겨 목덜미에서 하나로 묶은 다음 첩지를 가르마 중앙에 얼고 양쪽 끈을 묶었다. 조선 시대 왕비는 용의 모양을 한 용첩지를 당의와 함께 착용했고 상궁들은 옥색 저고리와 남색 치마에 당의를 입고 머리 장식인 개구리 모양의 첩지를 머리에 달았다.첩지는 양반 여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냈으며 한편으로는 여성을 옥죄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 머리 장식이 더욱 화려해지고 부녀자들 사이에서 다리 머리가 유행하면서 금 ·은 ·구슬·옥 등으로 만든 머리 장식으로 자신의 화려함을 표출했으며 이에 따라 첩지에도 더욱 화려한 장식을 쓰는 움직임이 가속화된다. 첩지는 정조의 가체금지령(加髢禁止令) 이후 장려되었다
아얌 : 아얌은 말 그대로 '이마를 가린다'는 뜻으로 액엄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1392~1910) 겨울에 부녀자들이 나들이할 때 춥지 않도록 머리에 쓰던 물건으로 이마만을 덮고 귀는 내놓으며, 뒤에는 아얌드림을 늘어뜨린다. 아얌은 장식용으로 이목을 끄는 장식용품이었기에 여인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때문에 남에게 잘 보이려고 간사스럽게 굴다라는 뜻으로 "아얌 떨다"라는 말을 썼으며 이 말이 나중에 "아양 떨다"라는 말로 굳어지게 되었다. 아얌은 겨울철의 추위를 막기 위해서 널리 쓰이다 나중에 조바위가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그 쓰임새가 줄어들면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아얌은 보통 젊은 층에서 썼으며 조바위는 노인층에서 쓰던 것이나 조바위가 널리 퍼지면서 금방 사라지게 된다 신분 상으로 아얌은 반인 부녀자들에게 널리 사용되었으며 신분을 나타내는 복식이기도 하다. 이서(吏胥)라고 하는 계급층이 조선 초기에 야마를 입었다고 언급하는 역사적 기록이 있지만 형상이 조선후기의 것과 동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조선 초기에는 아얌을 이서(吏胥)들이 착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남녀공용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특히, 서부 지방에서는 기생들이 흔히 썼고, 간이예복용으로도 사용하였다. 아얌의 일반적인 형태는 머리에 쓰는 부분인 모부(帽部)와 뒤에 늘어지는 댕기모양의 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모부의 위 4∼5㎝ 가량은 가로로 섬세하게 누볐고, 모부의 세로선은 앞이 뒤보다 짧다. 밑 가장자리선은 앞부분이 뒤보다 굴곡이 심하다 또한 앞뒤 세로선이 약간 곡선으로 되어 있어 착용하면 뜨지않고 잘 맞게 되어 있다. 재료와 빛깔은 겉감의 상단 누빈 부분은 흑색이나 자색 단을 썼고, 아랫부분은 흑색이나 짙은 밤색의 모피(毛皮)로 만들었다. 안감은 적색 융을 사용하였는데 누비지는 않았다. 앞뒤 상부중앙에 부착되어 있는 술은 대부분 적색이며, 앞뒤에 연결된 끈은 전부 납작한 끈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일부 기생들이 착용한 아얌에는 앞뒤 술에 화려하고 큰 보석(옥·석웅황·밀화 등)이 부착되어 있어 매우 사치스러웠다 뒤에 늘어진 드림은 9∼10㎝ 너비의 천 2개를 늘어뜨리고군데 군데 연결시킨 것과, 18∼20㎝ 너비 1개를 늘어뜨리되 중앙선을 접은 것이 있었다. 드림의 중앙선에는 옥·석웅황·밀화 등이 장식되어 있고 길이는 대부분 100㎝를 넘는다. 춘추용은 그 모양이 같으나 단(緞) 대신 사(紗)로 된 점이 다르다.
조바위 : 조바위는 한국의 전통 복장 중 하나로서 여성의 쓰개 중 하나이다. 여자의 방한모의 하나로, 위는 터져 있으며, 아얌과 비슷하지만 제물 볼끼가 커서 귀와 뺨을 가리게 되어 있다. 겉감은 검은색 비단을, 안감은 비단이나 무명을 대었고 겹으로 만들었다 조선후기에 처음 등장한 이래, 아얌의 대용으로 널리 쓰였다. 주로 쓰는 계층은 평민 뿐 아니라 상류층까지도 착용하였지만, 외출 시에는 주로 당시의 양반층이 장식용으로 사용하였다. 특별한 행사에도 주로 쓰고 나갔다
남바위 : 남바위는 추울 때 머리에 쓰는 방한구의 하나로, 남녀 모두 사용했는데, 예복을 입을 때 쓰거나 무관이 군복을 입을 때 벙거지 밑에 받쳐 썼다. 앞은 이마를 덮고, 뒤는 목과 등을 내리덮는다.일명 ‘풍뎅이’라고도 한다. 조선 초기부터 있던 이엄(耳掩)에서 나왔는데, 처음에는 상류층에서 일상복에 사용하다가 후기에는 서민층이나 예복, 구군복의 벙거지 밑에도 사용하게 되었다.형태는 일반적으로 위가 뚫려 있고 아래는 3단계로 곡선을 이루고 있으며, 가장자리는 4∼7㎝ 너비의 모선(毛縇)이 둘려 있고 모정(帽頂)의 뒤 중앙은 4, 5㎝ 가량이 트여 있다.모정의 앞뒤에는 술과 매듭, 산호줄과 비취로 된 보패류가 장식되었고 양옆에는 앞뒤를 연결하는 끈이 있다. 양옆에 볼과 턱을 가리기 위한 볼끼가 부착된 것도 있어 필요에 따라 붙였다 떼었다 할 수도 있었는데, 주로 여자용에 있었다. 겉감은 대부분 단(緞)이 사용되고 안감은 융이 사용되었으나 겉감으로 면, 안감으로 모가 사용되기도 하였다. 겉감은 주로 검은색이, 안감은 검은색·초록색·적색이 쓰였으나, 겉감에 남색·자색·밤색·옅은보라·옅은녹색이 쓰이기도 하였고, 안감에 황색이 쓰이기도 하였다. 가장자리의 모피는 검은색·짙은 밤색·현색(玄色)이 사용되었고, 술은 분홍이나 진분홍이 사용되었다. 또한, 여자용에는 길상무늬·학무늬·나비무늬·봉황무늬·국화무늬 등을 부금하여 다양하고 색스럽게 장식하였다. 남바위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풍차라는 것도 있었는데, 이것은 볼끼가 모자부분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뗄 수 없는 것이 남바위와 다른 점이다.
풍차 : 조선시대 남녀가 추위를 막기 위해 머리에 쓴 것으로, 정수리 부분이 뚫려있고 머리에서 귀·뺨·턱까지 가리고 모자 뒤의 길이를 길게 만든 방한모의 하나다 풍차는 조선시대 남녀 모두가 착용했던 방한모로 남바위와 형태는 비슷하나, 모자 양옆에 볼끼를 달아서 귀와 뺨, 턱까지 가릴 수 있는 쓰개 형태이다. 볼끼를 사용하지 않을 때는 뒤로 젖혀서 뒤통수에 맸으며, 후대에는 모자와 볼끼를 함께 재단하여 만들었다. ‘풍뎅이’라고도 불렀다. 풍차는 조선시대 어휘집에서 풍령風領, 난이煖耳의 대역어로 기록되어 있어 귀를 가리는 볼끼가 더해진 방한구였음을 알 수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실태조사生活實態調査』에서도 풍차는 남바위와 비슷하나 볼끼를 위로 걷어 올린 형태로 나타났다.『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난이말겹호항난모변증설暖耳袹袷護項煖帽辨證說에서는 “우리나라는 난이 제도가 공사·귀천·문무에 따라 각기 그 모양을 달리했고 사가私家에서도 보통으로 착용했으며, 또 귀천·문무를 따질 것 없이 목을 두른 호이엄胡耳掩, 풍차 제도가 있었다. 혹 털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흑단黑緞이나 갈포褐布를 겹으로 하여 만들기도 하였다.”라고 하여 풍차의 재료와 착용 계층에 관해 설명하였다. 또한 나이가 많은 조사朝士가 대궐을 출입할 때는 소풍차小風遮를 착용했는데, 이를 항풍차項風遮 또는 삼산건三山巾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풍차는 착용자의 신분에 따라 크기나 명칭이 달랐다 풍차의 형태는 머리 위에 둥글게 공간을 두었고, 앞은 이마까지 오며 옆은 귀를 덮게 되어 있다. 또한 뒷중심선에 트임을 주어 착용하는 사람에 따라 머리둘레를 조절할 수 있게 하였다. 여기에 귀와 뺨, 턱을 가리는 볼끼를 달았는데, 이것으로 완전히 방한이 된다. 일반적으로 위로 접어 끈으로 매게 했으며, 날씨가 추울 때는 볼끼 부분을 양 뺨에 오도록 내려 턱 밑에 묶어 착용하였다. 겉은 주로 자주색·남색·검정색의 단緞으로 하고 안은 남색·초록색의 견을 넣어 만들었으며, 가장자리는 토끼나 여우 등의 모피를 둘렀다. 모피를 두르지 않고 안에는 융으로 대어 비교적 얇게 만들어서 봄철이나 늦가을에도 사용하였다. 이 밖에도 풍차의 재료로 모毛·흑단黑緞·겹의·갈포褐布 등이 사용되었다. 남자용은 이 위에 관이나 갓을 쓰며, 여자용은 방한모 정수리 트임의 앞뒤를 장식 끈이나 산호 등의 보석 구슬끈으로 연결하고, 장식으로 매듭과 장식 술, 비취나 옥판 등을 달았다.
족두리 : 족두리는 족아, 족두, 족관이라고도 하며, 조선 시대 예복을 입을 때에 여성들이 쓰던 관이다. 검은 비단으로 만들며, 위는 대략 여섯 모가 지고 아래는 둥글다. 챙이 없는 작은 모자처럼 생겨 비녀를 질러 고정시킨다. 족두리는 속은 솜을 넣고 붉은 색으로 하고 겉은 검은 바단으로 만든다. 장식이 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패물로 장식하기도 한다. 족두리의 종류에는 용도에 따라 패물로 화려하게 장식한 혼례용과 장식이 없는 상례 및 제례용, 그리고 궁중이나 양반가에서는 일상용으로도 사용하였다. 틀의 형태에 따라 솜족두리, 홑족두리, 어염족두리로 분류되고, 꾸밈의 방식에 따라 외봉족두리, 다봉족두리로 분류된다. 족두리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혼례, 상례, 제례 등 여러 예식에 두루 애용되었으며, 오늘날에는 전통혼례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결혼한 여자들만 사용을 했으며 주로 혼례 등의 행사가 있을 때 사용하였다. 오늘날에도 결혼식 폐백 때 사용한다. 족두리의 기원을 몽골의 관모인 고고(또는 고고관, 고고리)으로 보는 설이 일반적이다. 초기 족두리는 궁중에서만 사용되었으나, 조선 영정조대에 부녀자들이 가체를 사용함으로써 들이는 비용과 그 폐단이 심해지자,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족두리의 사용을 명함으로써 양반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족두리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화관 : 화관은 한복에서 머리에 장식하는 쓰개의 일종으로 족두리와 유사한 형태를 띤 머리쓰개를 일컫는다. 화관은 장식용의 성격이 컸으며 당나라의 복식제도를 쓰면서 신라 문무왕 때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본다. 족두리와 마찬가지로 화관 또한 너무 많은 가체의 지나친 사용으로 문제가 되자 이를 경계하려는 정조의 명에 따라 일반에까지 확대된 것으로 추정된다. 화관은 족두리보다는 약간 큰 것으로 금이나 비취, 진주를 천에 장식하여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한복의 머리장식을 보면 위에 무엇인가 매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나풀거리는 것이 있다. 이를 보요라고 부르며 원래는 왕가나 반가의 혼례 때 등장하다 정조 때 이후로 서민들의 혼례 때에도 도입됐다.
전모 : 조선시대 여성들이 쓰던 외출용 모자로 우산처럼 펼쳐진 테두리에 살을 대고 종이를 바른 뒤에 기름에 절여 만든다. 『가례도감의궤 家禮都監儀軌』 중의 행렬도에 보면, 의녀(醫女)와 기행나인(騎行內人)들이 전모를 착용하고 있어 궁중에서의 사용한 예를 알 수 있는데, 사대부가의 부녀들이 사용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윤복(申潤福)의 풍속도로 미루어 멋을 좋아하는 기녀들이 바깥나들이용으로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전하여지고 있는 조선 말엽의 전모를 보면, 박쥐·태극·나비 등의 예쁜 무늬와 수(壽)·복(福)·부(富)·귀(貴) 등의 글자를 써넣어 매우 장식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너울 : 조선시대 여성들의 쓰개류 중 하나로 광의의 너울은 드리우는 천과 입자를 총칭하며 협의의 너울은 드리우는 천만을 말한다. 국초에는 궁중과 양반계급 여인들이 사용하다가 국말에는 궁중가례(嘉禮)와 능행(陵行) 및 궐내에서 착용하였다. 가례때에는 비·비빈·상궁·시녀·유모·기행내인이 착용하였다.형태는 갓[笠子] 위에 사각형의 천을 씌운 것으로, 위보다 아래가 약간 넓은 자루형이며, 길이는 어깨까지 오며, 눈 위치에 밖을 내다 볼 수 있도록 비치는 옷감을 대었다. 너울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광해군 때 『지봉유설』(1614)에 보이나, 인조 5년(1627) 소현세자 『가례도감의궤』부터 영조 20년(1744) 『가례도감의궤』 총 10개에는 너불[汝火]로 기록되었고, 영조 35년(1759)∼광무 10년(1906) 순종·순종비 『가례도감의궤』 총 10개에는 너울[羅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례언해』(1632년)에 너울은 얼굴을 가리는 면사(面紗)와 같은 것이라고 하였고, 면사에 관한 기록은 태종 8년(1408)과 연산군 4년(1498)에 보인다. 입모(笠帽)에 관한 기록은 태종 9년(1409)·12년(1412), 세종 3년(1421)·11년(1429), 성종 10년(1479) 『대전속록』 등에 보인다. 조선 초기에는 입모(笠帽)·면사(面紗)라고도 하였으나 인조 때에 너울[羅兀]과 너불[汝火]이 혼용되었고, 영조 이후에 너울로 집약되었다. 너울의 기원은 『고려도경』(1123)에 흑색 라(羅) 몽수(蒙首)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몽수는 얼굴과 전신을 가리는 것으로 당(唐)의 멱리(冪䍦)에서 유래됐다고 보는 견해와 고려와 아랍과의 교류에 의해서 유행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당시 송에서 사용되었던 개두(蓋頭)를 주휘(周輝)의 『청파잡지 淸波雜志』에서 보면 사각형 자색라로 몸의 반[半身]을 가리는 것으로 당(唐)의 유모제(帷帽制)라고 하였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에 고려에서도 개두가 사용된 것을 『계림유사』(고려 숙종때(1093∼1105) 송인(宋人) 손목(孫穆)이 개성에 왔다가 개성말 360개를 한자로 기록한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송에서 고려에 개두가 들어와서 몽수와 개두가 혼용되었다. 또한 조선의 너울과 개두의 형태가 같았으므로 너울은 개두의 유제라고 본다. 가례시의 비의 너울은 자적라(紫的羅)에 자초립을 착용하고, 빈궁은 자적라에 청초립을, 기행나인은 흑주(黑紬)에 청상립(靑箱笠)을, 상궁·시녀·유모는 조라(皂羅)와 청상립을, 숙의·공주는 조라에 청초립을, 이상의 수종인들은 조주(皂紬)에 청상립을 착용한다. 궁인의 능행(陵行)시의 너울은 정조 능행도에서 보면 가례시와 동일한 형태의 황색 너울을 착용하였고, 한양가에서 보낸 대궐 내에서 착용하는 너울도 황색으로 같다. 창덕궁 소장 유물은 황색라 6폭이며, 위는 좁고 아래는 약간 넓은 자루형이다. 눈이 위치하는 부분에는 가로 24㎝, 세로 32㎝를 삼적 항라를 대어 투시할 수 있으며, 직경 3㎝의 황색 인화문(印花紋)을 사방 연속으로 노랗게 찍었으며, 궐내에서 착용했던 것이다.
사진 : 국립민속박물관 & Google
첫댓글 다음 시간에는 은장도와 낙죽장도를 소개 하겠습니다
이 처럼 우리 조상님들은 남녀노소 할것 없이 지금의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사람들 처럼 남들 앞에서 꾸미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겼습니다
아름다운 장신구들이 많이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