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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24 - 도쿠가와 막부는 도요토미씨를 오사카 전투에서 멸망시키니 안정되다!
1467년 아시카가 쇼군의 후계를 두고 삼촌과 조카가 써운 “오닌의 난(응인난)“ 이래 200여개 나라로 갈라져
120년간을 싸우니 센고쿠 시대인데, 통일을 연 세 사람은 도카이도(東海道) 아이치현 사람들이니 서부
오와리국 (나고야) 의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 그리고 동부 미카와국 도쿠가와 이에야스 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1597년 9월 16일 명량해전에서 대승했지만 왜군은 300척이나 남은지라 진도를 돌아와 포위되면
전멸할 것을 우려해 배를 돌려 하루종일 굶고 싸우며 거친 명량의 풍랑에 지쳐 녹초가 된 병사들을 독려해
우수영에 들르지도 못하고, 죽어라 노를 저어 당사도와 어의도를 거쳐 멀리 금강 하구 군산 선유도로 후퇴합니다.
조선의 형조좌랑 강항은 고니시등 일본군 5만 6천이 전라도를 점령해 들어오니 식솔 60명이 배 2척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피신했다가 역사적인 명량대첩 7일 후인 9월 23일 이순신 장군을
추격해 올라온 일본 수군에 영광 앞 바다에서 나포되어 무안항에 끌려가니 왜선 300척이
정박중이라고 했으며, 일본에 끌려가 주자학을 전하고 귀국해 간양록을 지어 임금 선조에게 올렸습니다.
성호 이익은 강항이 히데요시와 이에야스 인물됨을 평한 것을 보고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면서도
조선에 거짓말은 안했는데, 김성일은 대신이면서도 그걸 공갈이라고 속였으니 소견이 좁았다”
고 힐난하고, 히데요시에 대해 “이놈이 만약에 중국에서 태어났다면 정말 크게 한가닥하고도
남았을 놈이다. 하여튼 인물이나 역량이 보통 인간하고는 달라도 확실히 달랐던건 맞다.” 고 평했습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의 18만등 일본 전국 도처에서 30만 대군이 동서 양군으로 나뉘어 싸웠는데
주 전장인 세키가하라 전투가 동군의 승리로 끝나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서군 가문
100여명 660만석을 개역(추방) 또는 감봉, 전봉하였으며.... 도요토미씨의 영지도
오사카성과 일대 65만석(본래는 220여만석) 으로 축소하고 일족과 중신들을 요지에 배치합니다.
1603년에는 세이이다이쇼군 (征夷大将軍, 정이대장군) 에 취임하고 에도 (도쿄) 에 바쿠후 (幕府
막부) 를 열었으며.... 1605년에는 쇼군 직을 삼남 27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오고쇼 (大御所)' 라고 칭하며 은퇴하니, 도쿠가와 정권은 도쿠가와씨 자식들이
세습한다는걸 보여준 것인데...... 또 도쿠가와 막부는 대외적으로는 전쟁이 아닌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이에야스는 죽기 전에 아들에게 지위가 계승되는 것을 확실히 해두고 싶었던 것인데,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해 숙청당한 것은 도요토미파 중에 이시다의 문치파 뿐이고,
동군 승리는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하면서도 이시다의 문치파가 싫어서
돌아섰던 무단파 다이묘들의 힘이 적지 않았기 때문에 도요토미 가문은 부담스러운 존재였습니다.
이런 와중에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가 장성해 우대신에 취임하고 이에야스가 머문 교토 니조성
에 인사차 찾아오니 연도의 백성들이 열렬히 환연하는 모습에서 불안감이 더해졌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직함인 쇼군은 오랑캐 토벌 대장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간파쿠는 덴노의 전권 대리인이라 권위가 더 컸기 때문에 막부가 완전히 안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기존 공경 귀족들 처럼 대항할수 없도록 싹을 뽑아놓던지 아니면 아예 죽여버리는 수준까지 짓밟지
못하면, 슬금슬금 젊은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관위가 오르다가 간파쿠에 복귀하는 순간....
무단파 다이묘들의 지지를 받고 도쿠가와 쇼군의 머리 위에 올라서는 악몽이 현실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야스는 이러한 악몽이 현실화되기 전에 미리 손을 썼으니....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에 명 왕조
와의 교섭을 진행해 명군 포로들을 송환하면서 명 왕조로 부터 책봉을 받아 관백이 되려
한게 바로 그것인데 하지만 명은 히데요시의 선례 (책봉 후 재침공 개시) 를 이유로 책봉을 거부합니다.
1607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에 사과 의사를 표하고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개인의
뜻이고, 참전한 다이묘들은 강압에 출전한 것이며 자신은 참전하지 않았음을 해명하면서,
소 요시토시를 시켜 납치된 조선인과 약탈품을 일부 송환했으며, 도요토미계 잔당과
후예들을 '수적' 이라고 칭하면서 그들을 소탕해 씨를 말렸다고 알리니 양국 관계가 회복됩니다.
처음에 이에야스는 '히데요시가 저지른 전쟁을 왜 조선에 간 적도 없는 내가 사죄하는가' 라는 생각이었는데,
쌀 생산이 모자라 굶주리는지라 양국 수교에 목숨이 걸린 대마도주는 두 나라의 국서를 위조함으로써
조선에는 '일본이 사죄했다', 일본에는 '조선이 일본의 국교 회복요청을 받아들였다' 는 거짓말을
했는데, 양국은 대마도주의 농간을 알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 삼을 처지가 안되는지라 넘어갔다고 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이 승리했다면 실질적 리더였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수많은 조선인들을 살육하는 일에 동참한 것 때문에 조일관계 개선이 도요토미 정권이나
이시다 정권이 19세기에 서양세력이 몰려와 멸망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가문의 재력과 장성한 히데요리를 보며 숙청해야 할 위험으로 생각했으니, 먼저
도요토미 가문을 안심시킬겸 손녀 센히메를 히데요리와 결혼시키면서 도요토미를 따르는
무단파를 조금씩 숙청하거나 자연사 하면서 약해져가는 도요토미가를 처단할 궁리를
했는데, 도요토미 가문은 엄청난 재화를 쌓아놓은데다가 사카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교역항이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이를 소모시키기 위해 내놓은 책략이 '호코지(方広寺) 종명 사건' 이었으니, 도요토미 가문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건설이라 건축허가를 미루다가 도요토미의 재력을 소모시키기 위해 허가하였고 도요토미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호코지 대불전을 건립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호코지 대불전의 범종에 새겨진 명문이었습니다.
글귀 가운데 "國家安康, 君臣豊樂 (국가안강 군신풍락)" 이란 문구를 두고 이에야스 (家康) 의 이름을
두 글자로 쪼개고, 도요토미 (豊臣) 가의 이름을 거꾸로 넣은 것이므로, 이것은 이에야스를 저주
하고 도요토미가의 부흥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는 역저주라는 음모론적으로 해석해 트집을 잡습니다.
저렇게 한문을 뒤집어 억지 해석을 한 유학자가 궁금한데 .... 바로 영광 앞 바다에서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간 조선 선비 강항이 교토 후시미성에서 유학자 후지와라 세이카 (藤原惺窩) 에게 주자 (朱子) 의
주석에 따라 훈점 (訓点) 을 표시한 “사서오경왜훈 (四書五經倭訓)” 을 만들어 주니, 이에야스가 스승
으로 모시려고 하자 거부하고 제자를 천거하니, 4명의 쇼군에게 시강한 하야시 라잔 바로 그 사람 입니다.
이를 빌미로 전운이 감돌자 도요토미측 화평파가 방문해 오해를 풀려고 했으나 정작 이에야스측은 사죄한다면
자신이 지정한 지역으로 전봉을 요구하는데, 도요토미는 이에야스가 전봉시킨다면 시코쿠나 규슈등 재기를
노릴수 없는 지역으로 보낼것이 뻔하니 거부했고.... 1614년 겨울에 이에야스는 오사카 토벌의 군을 일으킵니다.
도요토미가는 막대한 재산을 이용하여 키무라 시게나리등 기존 가신들과 사나다 유키무라라고도 불리는 사나다
노부시게 등 이름난 낭인들을 고용해 부족한 장수들을 보충하고 병졸을 모아 10만의 군을 동원하며 거병합니다.
이에야스는 사나다 노부시게가 유폐된 구도야마에서 나왔다는 소식에 가장 위험시한 사나다 마사유키
가 오사카에 합류한줄 알고 식겁해 했으나...... 마사유키가 죽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안심한
이에야스는 자신을 따르는 다이묘들에게 토벌령을 내려 오사카로 집결시켜 20만 대군을 직접 이끕니다.
히데요시의 두번째 부인 요도도노등 도요토미 가문의 상층부는 참으로 무능했지만 현장 지휘관인
오인중 과 사나다 노부시게가 축성한 사나다마루 라는 외성에다다 히데요시가
만들어둔 2중 해자라는 인공지형, 오사카성의 천연지형 덕에 이에야스 진영을 여러번 패퇴시킵니다.
오사카성 전투에서 맹활약을 해서 일본 제일의 무사로 이름을 떨친... 사나다 유키무라 (真田幸村)
로도 알려진 사나다 노부시게는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시 불과 2천 수비병으로
3만 5천 도쿠가와 히데타다군의 공격에서 우에다성 (上田城) 성을 지켜냈으며,
오사카성 전투에서도 불과 5천으로 사나나마루에서 하루만에 도쿠가와군 1만을 몰살시킵니다.
그 전에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패하니 유키타카는 할복해야 했지만 도쿠가와의 중신 혼다
다다카쓰의 딸 고마쓰도노와 결혼했던 친형 노부유키가 동군에 참여했던지라 탄원한
덕분에 부친과 기이 구도잔 (九度山) 에 유배되는데 불문에 출가해 고하쿠라는 법명을 얻습니다.
1614년 도쿠가와의 에도 막부가 히데요시의 아들 오사카성의 히데요리를 치려고하자 다급해진 요도도노가
낭인을 모으니 유키타카는 법복을 벗고 구도잔을 탈출해 아들 유키마사와 함께 오사카성 (大坂城) 에
입성해 군장을 빨간색으로 통일한 “사나다의 아카조나에 (赤備え)” 라는 부대를 조직해서 성을 사수합니다.
하지만 겨울이 깊어지고 전쟁이 장기화되며 진척이 없어 도쿠가와군은 병량 부족과 사기 저하로 전의를 상실
했고, 이러다가는 호령에 모인 다이묘들이 다른 마음을 먹을지도 몰랐는데, 반대 측인 도요토미군은
군량은 막대한 재화로 사들여 2년 이상 버틸 식량이 있었으나 장기간 농성으로 인한 화약 부족이 문제였습니다.
유키타카는 오사카성 다마즈쿠리구치 밖에 별성을 건축하고 철포부대를 이용해 에치젠의 마츠다이라 부대,
가가의 마에다 부대를 격파했지만 도쿠가와의 사탕발림에 넘어간 어리석은 아녀자 요도도노가
휴전을 하면서 강화조건으로 오사카성의 해자를 메우게 되니 이때 별성인 사나다마루도 같이 허물게 됩니다.
연일 이에야스가 야간에 병력들을 동원해 소리를 질러대거나 땅굴을 파는 듯한 공갈과 대포 사격등
심리적 압박감으로 지쳐 있던 중에 이에야스가 서양인에게서 구입한 신형 대포의 포탄
한발이 혼마루에 떨어져서 시녀 한명이 죽자 새파랗게 질려 기겁을 한 요됴도노가 무릎을 끓는 것입니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 미쓰나리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총대장
모리씨도 수행했을 것이니 전투에서는 이길 가능성이 높았고, 이후 1615년의 오사카성 전투에서
사나다 유키무라의 요청대로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전장에 나갔더라면 결과는 달라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도도노(요도기미)는 2번에 걸쳐 자식의 안위만을 염려해 허락하지 않아 결국에는 패배하고
말았으니.... BC 31년에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함대가 운명을 걸고 악티움 해전을
할때 처참한 전투현장을 보고 겁에 질린 클레오파트라가 자기 함대를 끌고 달아나자
전선에서 싸우던 이집트 함대 40척도 돌아서니 안토니우스의 함대는 순식간에 괴멸당하고 말았지요?
전쟁이란 것은 흔히 눈앞에서 사람이 칼에 찧리고 포탄에 살이 찢어져 옆 사람 얼굴에도 피가 튀는
것이거늘.....두 여성이 전투에서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려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는데,
이에야스는 혼마루의 수비가 강화된 것을 보고 요도도노가 겁에 질린 것을 알아
채고는 더욱 압박해 강화 교섭을 진행해 1614년 12월 20일 서약서가 교환되면서 전쟁은 끝납니다.
당시 양 군에 부과된 조건에서 히데요시 가의 의무는 본성을 제외한 둘째 성곽 (二の丸) 과
셋째 성곽 (三の丸) 을 철거하고, 바깥 해자를 메울 것이먀며 어머니 요도도노 (淀殿)
를 인질로 삼지 않는 대신에 도요토미 가의 중신이 인질을 낼 것이고 도쿠가와 가의
의무는 히데요리의 신변의 안전과 영지의 보장에 성 중에 누구에게도 죄를 묻지 않을 것입니다.
강화의 조건으로 성곽의 철거를 요구하는 것은 보편적이었고 수비측에서 자발적으로 진행하는
의례적인 면이 강한 것이었으나, 이에야스는 공사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가신들에게
철거를 명령해 철저히 시행했으며 영지로 돌아가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진척을 확인했습니다.
도쿠가와 측이 전쟁 준비를 중단한건 아니었고, 도요토미 가문에서도 고용된 낭인들을 해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의 긴장감은 해소되지 않은 상황레서 이듬해 4월 오사카측이 교토 일대를 약탈하거나
방화를 저지른 사건에 해자를 다시 파내며 수비를 정상화 하려던 행동이 도쿠가와측에 빌미를 제공합니다.
이에야스는 이전과 같이 오사카 측에 병사들의 해고와 영지 이전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한 도요토미 가에 대해 이에야스는 교토 교외에 휘하 다이묘들을
집결시켜 무력으로 이를 압박하였고 5월 초에는 다시 오사카 여름 전투가 벌어집니다.
겨울 전투에서 가장 활약하던 사나다 노부시게도 오사카성은 해자가 다 메워져 벌거벗은 상태라 방어에
취약했으니 농성이란 무리라... 전세를 읽을줄 알던 병졸 낭인들과 주민들은 탈출하기 시작했으며,
오사카성 병력은 5만 5천명 정도가 동원될 정도로 줄었고 사나다 노부시게는 농성이 안되니 외부
관문을 요새화해 버티는 전략을 짰지만 초반부터 고토 마타베등 장수들이 전사하며 계획이 틀어집니다.
역전의 한방을 노려야만 했으니 모리 카츠나가가 도쿠가와군을 붙잡아 두는 사이 사나다 노부시게와 수하가
특공대로써 도쿠가와 본진에 쇄도하여 이에야스를 칠 계획을 짰으니 이는 큰 성공을 거두어 노부시게는
이에야스 본진 돌격을 세번이나 감행해 이에야스의 깃발이 넘어지는등 세번 모두 이에야스를 위기에 빠뜨립니다.
미카타가하라 전투의 재림이라 할 정도로 이에야스는 도망치기에 바빴고, 노부시게가 코앞 까지
돌격해 오자 이에야스는 할복을 각오했는데, 그러나 네번째 돌격을 준비하며
만신창이 상태로 쉬고 있던 노부시게의 병력을 이에야스군이 기습공격해
노부시게가 전사해버리니, 그렇게 오사카 수비의 핵심 장수들인 오사카 오인중이 전부 전사합니다.
이중 해자가 없는 오사카 성은 방어를 할수 없었으며 요도도노를 비롯한 상층부는 군 전문지식 조차 없이
오인중의 전략, 전술을 방해나 하던 이들이었으니..... 결국 저항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며 단 사흘
만에 5월 7일 성이 함락되었고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요도도노는 자결하니 도쿠가와의 천하가 완성됩니다.
도요토미 가문이 2대만에 몰락한 것은 히데요시 본인과 미츠나리의 삽질이 문제였으니, 어린
친자를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서라 해도 히데츠구와 관계자들을 숙청하는게 지나치게
잔혹하고 급진적이라 다이묘들 상당수가 도요토미 가문에 앙심을 품게
만들었고, 히데요시 사후 그나마 남아있던 울타리인 마에다 토시이에도 얼마 못가 죽었습니다.
히데요시에게 앙심을 품은 이들을 모을 이에야스까지 있었으니 도요토미 가문의 멸망은 필연
이었던 셈인데, 히데요시와 미츠나리 2명이 연달아 큰 사고를 치지만 않았어도
마에다 토시이에나 가토 기요마사에 후쿠다 마사요리 같은 다이묘들을 주축
으로 히데요시 생전 수준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세력을 보전할 수는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에야스는 작정하고 도요토미 가문의 위세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는데, 도요토미 가문이
멸망한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뜻에 따라, 미즈노오 천황(일왕) 의 칙허를
얻어, 도요쿠니 다이묘우진의 신호는 박탈되었고, 도요쿠니 신사 자체도 폐기됐습니다.
이제 신이 아니게 된 히데요시는 '국태원준산운용대거사 (国泰院俊山雲龍大居士)' 라는 불교 계명을
받았으며, 이에 맞추어, 히데요시의 영혼은 대불전 뒤쪽 남동쪽에 세워진 오륜석탑 (도요쿠니 신사
보물관 뒤쪽) 으로 옮겨졌고 히데요시 유체 자체는 사당과 함께 아미타가봉 산 꼭대기에 남겨졌습니다.
그러나 1868년 무진전쟁 반란에서 승리한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주축인 신정부는 메이지
유신과 대정봉환 이후, 도쿠가와 가문과 에도 막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대두되고
존황양이 사상이 커짐에 따라, 막부를 세우는 대신 관백직에 오른 히데요시를
재평가해 신호가 재추증되었으며 토요쿠니 신사와 그의 묘도 재건되어 크게 꾸며집니다.
이에야스는 슨푸(駿府 시즈오카) 로 돌아가 오고쇼로 국정을 관장하니 금중병공가제법도 (禁中並
公家諸法度) 를 제정하여 천황(일왕)가와 쇼군가의 군신 관계를 명확히 하였고, 무가제법도
(武家諸法度) 를 제정하여 쇼군가와 다이묘가의 군신 관계를 정했으니 일인지하만인지상의
명분을 쌓은 것이고, 실질적으론 허수아니 천황(일왕) 아래 쇼군 중심 체제를 확실히 한 것입니다.
이에야스는 노인이니 이듬해인 1616년 1월 매사냥 도중에 쓰러졌고, 3월 21일에는 조정으로부터
태정대신 (太政大臣) 에 봉해졌으며, 4월 17일 슨푸성에서 74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장례는 슨푸 교외의 쿠노산 (久能山) 에서 행해졌고, 1주기에 닛코의 닛코 동조궁으로 이장됩니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길을 가는 것이니 서두르지 마라.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음을 알면 오히려 불만을 가질 이유도 없다.
마음에 욕심이 차오를 때는 빈궁했던 시절을 떠올려라.
인내는 무사장구의 근본이요, 분노는 적이라고 생각해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것을 모르면 반드시 해가 미친다.
오로지 자신만을 탓할 것이며 남을 탓하지 마라.
모자라는 것이 넘치는 것보다 낫다.
자기 분수를 알아라. 풀잎 위의 이슬도 무거우면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후 이에야스의 손자이자 에도 막부 제3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동조궁을 대대적으로 개축
했는데, 현재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골은 5m 높이의 청동탑 안에 보존되어 있으며, 여기
까지 이어진 길에 수백개의 계단에 옆에는 삼나무가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어 인기
관광지로 통하고 있으며 이장을 재현하는 천인무자행렬 (千人武者行列) 이라는 행사가 유명합니다.
이에야스가 이전부터 위암 증세를 보였고, 직접 약을 조제해 치료하려고 했던 것으로 볼 때 사망 원인이
위암일 가능성이 높다는것이 중론인데..... '이에야스가 덴푸라 먹고 쓰러짐 → 처음엔 식중독, 독살
이라 생각했지만 먹은 사람은 증상이 없음 → 증상을 살펴보니 위암' 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숨지기 전에 남겼다는 사세구 로는 두 수가 전해집니다.
"기뻐하다가 다시금 잠을 깨어 다시 잠든다. 덧없는 세상 꿈은 새벽하늘과 같네."
"먼저 떠남과 뒤에 남겨지는 건 결국 같은 것. 함께 가지 못함을 이별이라 여기네."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감과 같다. 서두르지 마라. 부자유를 늘 있는 일이라
생각하면 부족함이 없다. 마음에 욕망이 일거든 곤궁할 적을 생각하라. 인내는
무사함의 기반이며, 분노는 적이라 여겨라. 이기는 것만 알고 지는 일을
모른다면 몸에 화가 미친다. 자신을 책할지언정 남을 책하지 말라. 부족함이 지나침보다 낫다."
1617년에는 토쇼다이곤겐 (東照大権現) 이라는 신호(神号) 와 신계[神階] 정일위가 추증되었으며 이후
에도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시조로 신군 (神君) 혹은 곤겐 님 (権現様) 등으로 불리며 숭배되었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인 전쟁고아 “줄리아” 를 규슈 우토성(宇土城) 에 데려가
자신의 처인 쥬스타에게 맡기니 1596년 5월 베드로 모레홍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그후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궁의 시녀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했으니 1612년 절해 고도인 고즈시마(神津島) 에 유배 되어 죽었는데 지금도
매년 5월 셋째주 토, 일요일 “줄리아 축제” 가 열리니 도쿄에서 180km 떨어진 뱃길인데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하는데 일본의 밴드“서던 올 스타스” 가 작사· 작곡한 노래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입니다.
돌아가라 나의 푸른 새 메마른 느릅나무의 가지 곁으로
네가 없는 오오 세상 속은 아침 해 조차 떠오르지 않아
불타라 여름의 십자가 남쪽하늘 높이
밤의 어둠을 비추는 별자리는 눈물의 상들리에
마치 무지개처럼 꿈으로 사라진 줄리아.
사랑의 끝을 알리듯이 찢겨진 나의 로자리오
세월이 흘러 나가사키현 시마바라 반도는 키리시탄이던 아리마씨가 전봉된후 마츠쿠라씨가 들어와
천주교도를 무지막지하게 탄압했고 농민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린데다가 키리시탄의 본거지
필리핀의 루손을 공격하겠다면서 전쟁세 까지 부과하며 운젠 지옥 (雲仙地獄)
고문이라 부르는 악행을 저지르니 1637년 말 키리시탄 농민 2만여명이 무장 봉기를 일으킵니다.
바다 건너 아마쿠사섬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옛 영지로 가톨릭이 융성했지만 테라자와가 들어와 종교
박해를 자행하자 시마바라의 키리시탄 반란에 동조해 봉기해서는 혼도성을 함락하고
도미오카성 (富岡城)을 공격하는데 이곳을 손에 넣으면 바닷길로 나가사키로 건너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도미오카성은 정상에 자리해 난공불락이라 엄청난 희생자를 낸후 기리시탄 농민 반란군
은 동쪽 오니이케항에서 바다를 건너 시마바라 반란군에 합류하는데 지도자는 하느님의
대리인 이라고 불리던 세례명 '예로니모' 의 아마쿠사 시로 도키사다 라는 16세 소년이었습니다.
또한 농민 반란군에 막부의 영지 재배치로 인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어 떠돌던
기독교 신자 사무라이들도 대거 참가했으니 반군의 병력은 3만 7천의
기리시탄 이었다는데, 시마바라번에서 3천명의 군대를 보냈지만 참패당합니다.
천주교도 반란군은 나가사키로 진출하는게 목표였지만 여의치 않자 시마바라반도의
남쪽에 있던 폐성이던 하라성을 보수해서 농성전을 시작하는데....
여기서 바티면서 필리핀의 스페인군과 마카오의 포르투갈 원군이 오기를 희망했습니다.
이후 기리시탄 농민 반란군은 3번의 공세를 시도한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이끄는 에도 도쿠가와 막부의
진압군을 궤멸시키자, 에도 막부는 놀라서 전국에서 군사를 끌어 모아 무려 무려 12만으로 병력을
증강 시켰고 마츠다이라 노부츠나를 새로운 사령관으로 임명하니 본때를 보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마츠다이라는 육지와 바다 양쪽으로 하라성을 포위해 봉쇄했으며 닌자들을 성내로 잠입시켜 정찰하니
천주교도 농민군들은 식량난에 시달리게 되었고 해초로만 연명하게 될 지경이 되자 막부군이
총공격을 감행하니 4개월 만인 1638년 4월에 하라성이 함락되는데 반군은 단 1명도
항복하지 않고 전부 전사했는데.... 막부군도 10,800명이 전사하고 11,000명이 부상 당했습니다.
2대 시마바라번 영주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 고문해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는데.... 무리한 축성으로 많은 돈이 소모
되면서 수탈이 더욱 심해졌으니 키리시탄 탄압 과정에서 운젠 지옥 고문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카츠이에는 기존의 고문에다가 미노오도리 라는 도롱이 옷을 입게 한뒤 불을 지르는 고문을 추가했으니,
일본의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들의 행태를 두고 '일본사에서 마츠쿠라 카츠이에 만큼 꺼려야 할
사람은 적다.' 라고 평했습니다. (원문: 日本史の中で松倉重政という人物ほど忌むべき存在は少ない)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인해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에 의해 가이에키
당하고 에도로 끌려가 참수당했는데 260여년 도쿠가와 맋부에서 참수된 유일한 번주라고
하며...... 시마바라번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도쿠가와씨의 방계인 마츠다이라 가문에 통치를 맡깁니다.
이 성이 함락됐으면 바로 여기서 배를 타고 나가사키를 점령하려 갈 계획이었지만 함락되지 않으니
오니케항으로 가서 배를 타고 시마바라로 건너가 합류했으며 거기서 4만여명의
천주교도 들은 12만 에도 도쿠가와 막부군을 맞아 단 한명도 항복하지 않고 전원이 죽었습니다.
4만여명에 달하는 기독교도 농민 반란군은 시마바라반도 남부 하라성에서 농성하면서
필리핀을 통해 로마 가톨릭에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고 예수회와 연이 깊던 마카오의
포르투갈군의 지원을 애타게 기다렸지만 포르투갈군의 일본 상륙이 저지되었고,
막부군은 다른 서양 세력인 나가사키 네덜란드 상관에서 대포 등 원조를 얻어 난을 진압합니다.
그리고 사쓰미번 (가고시마현) 은 에도 막부의 명을 받아 1609년에 군대를 보내 유구국(오키나와) 을
손에 넣고 식민지배를 하면서 사탕수수를 재배해 들여와 그 재력으로 근대화를 위한 준비를
하는데 유구국이 중국과 조선에 조공해 받아오는 하사품 때문에 겉으로는 독립국인 것 처럼 위장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