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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을 잇는 지구 최남단의 섬 티에라 델 푸에고의 피요르드 해안 부룩스 베이. 거대한 빙하가 시퍼런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k.co.kr |
톡 치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가늘고 긴 나라 칠레. 지구 정반대에 있어 우리와는 계절도 시간도 정반대인 나라. 최근 와인, 자유무역협정(FTA), APEC 회담 등으로 조금씩 소개되고 있지만 너무 멀어서일까 칠레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칠레는 안데스 산맥을 등뼈로 사막에서 빙하까지 아우르는 방대하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자연을 품고있는 곳이다. 그 미지의 나라 칠레로 떠나는 여행을 2회에 걸쳐 소개한다.
16세기에 찾아낸 유럽에서 오리엔트로 가는 지름길, 마젤란 해협. 길이 600㎞인 해협의 한가운데에 인구 12만 명의 크지 않은 도시가 있다.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 지구 최남단의 땅끝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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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위 가득한 얼음덩이들을 헤치고 고무보트가 나아가고 있다. |
푼타아레나스의 공기는 극점을 닮아 맑고 햇빛은 거칠 것 없어 눈
부시다. 수평선이 예사 바다와 달리 부옇지 않고 날렵한 선으로 들어오는 것도 그 이유다.
이 도시에서 시퍼런 해협 너머 보이는 산등성이는 티에라 델 푸에고(Tierra del Fuego) 섬. ‘불의 땅’이란 뜻이다. 마젤란이 이 해협에 이르렀을 때 섬의 원주민들이 의식을 치르느라 밤새 불을 피워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대륙과 남극을 잇는, 빙하와 피요로드 등 수만년 시원(始原)의 자연을 품고있는 티에라 델 푸에고를 탐험하기 위해 크루즈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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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달레나 섬은 펭귄의 왕국이다. 선원의 선글래스에 비친 설산과 유람선 아우스랄리스호. 바다꼬끼리 가족이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
▲ 출항 첫날
마레 아우스트랄리스(Mare Australis) 호에 오른 건 이른 저녁이다. 안전교육을 받고는 모두 빠짐없이 장화 한 벌씩을 받아들고 배정된 선실로 들어섰다.
희뿌연 하늘에 검은 벨벳이 깔리고 별들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오후9시, 드디어 출항의 기적이 길게 울렸다. 푼타아레나스의 고즈넉한 야경을 뒤로하고 배는 빠른 속도로 마젤란 해협으로 빠져들었다. 밤하늘에 높게 뜬 남십자성도 서둘러 쫓아왔다.
▲ 출항 이틀째
설산 사이로 난 해협을 내달리다 닻이 내려진 곳은 피요로드 해안 아인스오르트 베이(Ainsworth bay). 바다코끼리가 둥지를 틀고 있는 거대한 빙하의 땅이다. 모두 털모자에 장화, 장갑 등 중무장을 하고 보트에 올라탔다.
설산 너머 거대한 빙하에서 녹아 내려온 바위만한 얼음 덩이가 바다 한 구석을 가득 메웠다. 이끼밭 위로 트레킹이 시작됐다. 봄을 맞은 툰드라 이끼는 빨갛게 꽃을 피웠고 바닥은 양탄자를 밟듯 푹신거렸다.
이끼를 잔뜩 뒤집어 쓴 절벽 옆에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모두 눈을 감았다. 웅덩이로 쉼 없이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남극의 바람, 새소리와 어울려 천연의 멜로디를 이루며 잔잔하지만 진한 감동을 준다.
비버가 나무를 온통 갉아버린 습지를 지나 돌아오는 길에 바다코끼리 가족을 만났다. 숫놈 한마리가 암놈 네 마리, 새끼 한 마리와 함께 여유롭게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보트가 매여진 곳에는 추운 몸을 녹이라고 따뜻한 커피와 함께 술이 한잔씩 준비됐다. 빙하에서 긁어 온 얼음을 띄운 온더록 위스키. 수만 년의 시간이 위스키에 녹아 감미롭게 목을 넘어갔다.
오후 크루즈의 닻이 다시 내려진 곳은 브룩스 베이(Brookes Bay). 눈부신 햇살을 받으며 뱃전에 오르니 사방이 빙하에 포위됐다. 이번에는 빙하 5m 앞까지 접근이 가능했다.
그 곳에서 바라 본 거대한 빙하는 경이 그 자체. 시퍼런 속살에 시커멓게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은 빙하는 그냥 얼음 덩어리라기보다는 암반에 가까워 보였다. 마냥 턱을 내려놓고 있는 사이 갑자기 빙하 한 곳이 무너져 내리며 ‘구구궁…’ 산사태가 난 듯 굉음이 울렸다. 동토의 땅에 부는 봄기운에 빙하가 여기 저기서 조금씩 녹아 내리고 있었다.
▲ 출항 사흘째
새벽 찬바람을 맞으며 보트를 타고 도착한 곳은 ‘펭귄의 왕국’ 막달레나(Magdalena) 섬이다. 마젤란 해협 한가운데 있는 이 섬은 약 60만 마리의 펭귄이 섬 전체를 점령한 펭귀 서식처다.
푸른 잔디로 뒤덮인 섬은 온통 펭귄이 둥지 튼 구멍으로 숭숭 뚫려있다. 펭귄들은 연신 가슴을 치며 ‘꾸꾸’ 소리를 질러댔고 그 소리가 한데 뭉쳐 마치 벌떼가 날아다니는 것처럼 섬 전체가 웅웅거렸다. 섬 한가운데의 빨간 지붕을 한 예쁜 등대는 펭귄 박물관으로 꾸며졌다.
펭귄 섬을 마지막으로 크루즈는 푼타아레나스를 향해 키를 돌렸다.
뱃전에서 아쉬움을 삭이며 남극 바람을 맞고 서있으려니 해협 멀리 원유를 뽑아올리는 파이프가 어렴풋이 보인다. 불을 피워대던 원주민이 사라진 티에라 델 푸에고에는 이제 석유굴착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염이 이글거리고 있다.
파타고니아(Patagonia).
남아메리카의 남위 39도 아래 지역을 일컫는다. 서(西)로는 안데스의 빙하가 만든 피요로드 지형이, 동으로는 끝모를 대평원이 펼쳐진 지역이다. 19세기 후반에야 문명의 손길이 뻗치기 시작한 세계 최남단의 처녀지로 여름 평균기온이 섭씨 9도에도 못미쳐 어떤 농작물도 재배가 불가능한, 황량한 바람의 땅이다.
‘빅 풋(Big Foots)’이란 의미의 파타고니아는 1520년 마젤란이 이곳을 처음 찾았을 때 덩치 큰 원주민이 눈밭에 남긴 커다란 발자국을 보고 놀랐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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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빚은 조각품 토레스 델 파이네의 봉우리가 살짝 구름옷을 벗고 있다. |
척박한 원시의 땅에 대한 동경으로 작가와 탐험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파타고니아에서도 최고의 절경으로 꼽히는 ‘토레스 델 파이네(Torres del Paine)’ 국립공원을 찾아 먼 길을 나섰다.
푼타아레나스에서 5시간을 내리 달렸다. 안데스의 눈 덮인 연봉과 평행해 달리는 길 양 옆으로 평원 가득 회색의 덤불과 초록의 풀밭이 뒤엉켜 펼쳐졌다.
마주치는 차량도 없는 적막한 길, 언제나 이슬에 덮여있을 것 같은 슬퍼보이는 땅이다. 비포장길을 달려오는 이방인이 신기해 마중 나왔는지 콘도르 한 마리가 유유히 하늘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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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호에 호수에서의 아침. 한 관광객이 파이네의 일출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
드디어 스텝의 초원 한가운데 우뚝 솟은 토레스 델 파이네가 눈에 들어왔다. 육중한 설산, 강인해 보이는 봉우리가 예사롭지 않다. 조각칼로 쳐낸 듯한 화강암 돌기둥이 왕관처럼 둘러쳐져 있고, 눈 덮이 꼭대기는 신령스럽게 구름을 가득 이고 있었다. 해발 50m의 초원에서 거의 수직으로 치솟은 3,000m 높이의 산덩어리, 그 장대함에 온 몸이 떨려온다.
페호에(Pehoe) 호숫가에서 밤을 보낸 뒤 새소리에 아침을 맞았다. 여전히 꼭대기를 구름으로 가린 파이네는 에메랄드 빛 호수 위로 웅장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파이네 산자락이 품고 있는 거대한 빙하에서 흘러내린 물이 여러 호수와 강을 만드는데 그 위치에 따라 물빛이 다르다. 빙하의 침전물 입자 크기가 작아지면서 상류는 우유빛으로 중간쯤은 에메랄드빛, 바다와 맞닿는 하류는 남극의 하늘보다 진한 코발트빛을 띠고 있다.
공원의 다양한 트레킹 코스는 야생동물과 직접 만나는 ‘사파리’를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산자락에는 라마와 비슷한 과나코(guanaco), 남미의 타조 낸두(nandu)가 떼를 지어있고 호수에는 플라밍고, 백조, 기러기 등이 망중한을 즐긴다. 여우도 지천이고 간혹 퓨마도 만날 수 있다고 한다.
그레이(Grey) 강가로 트레킹 코스를 잡았다. 출렁다리로 냇가를 건너고 짧은 숲길로 된 언덕을 넘어서자 널찍한 하구가 나타났다. 멀리 거대한 그레이 빙하에서 시작된 강물이 거칠게 몰아쳐 내려오는데 빙하의 유빙이 하구 한 곳에 늘어서 스스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보트를 타고 나가보니 더욱 장관이다. 집채 만한 얼음 덩이는 물살에 깎여 고래 꼬리, 선박, 터널 모양 등의 얼음조각을 이루었고 눈부신 햇살을 받아 푸른빛으로 빛났다.
따뜻해 보이는 우유빛 강물에 무심코 손을 적셨더니 손가락이 끊어지는 듯 차가웠다. 저 멀리 그레이 빙하에서는 강물을 타고 코끝을 아리는 매서운 칼바람이 불어왔다.
설산을 뒤로 한 채 장쾌한 물줄기를 떨어뜨리는 파이네 폭포를 구경하고 공원을 나서는 길. 아쉬움에 뒤돌아본 차창 너머로 하늘 높이 콘도르가 다시 떴다.
“아디오스 파타고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