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석리[Songseok-ri, 松石里]
대부분 낮은 구릉과 평지로 되어있다. 서쪽은 서해안과 맞닿아 있다. 고라실골, 송석들 등이 있다. 자연마을로는 갈목(노항, 노항리), 눈들(와석), 송내, 슴갈목섬이 있다. 갈목은 갈대가 많은 목에 마을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눈들은 마을에 넓은 바위가 누워있다 하여 붙여졌으며, 송내는 솔밭에 둘러쌓여 있다 하여 붙여졌다. 슴갈목섬은 지형이 갈매기의 목같이 생겼으며, 갈대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출처:(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서천군[舒川郡]의 역사[歷史)
서천군 내에는 비인면 · 종천면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해 있어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주민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에는 이 지역에 비미국(卑彌國)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서천이 백제의 설림군(舌林郡)이었으며 한산에는 마산현(馬山縣)이, 비인면에는 비중현(比衆縣)이 있었다. 특히 백제시대에 크게 발전한 곳은 한산으로, 이곳의 건지산성은 백제의 서쪽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백제 멸망 뒤에도 그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756년(경덕왕 15)에 서림군(西林郡)이라고 하였고 한산은 가림군(嘉林郡)의 영현이 되었으며, 비중현은 비인으로 개칭되어 역시 가림군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서천은 이 지방 출신인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에게 공로가 있다고 하여 지서주사(知西州使)로 승격되었다. 한산은 고려시대에 붙여진 이름으로 뒤에 지한주사(知韓州使)로 승격되었으며, 감무가 있어 홍산을 겸무하였다. 비인은 1018년(현종 9)에 가림현에 속하게 되었으며, 뒤에 따로 감무가 두어졌다. 한산 출신인 이색(李穡)은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으로 뒤에 한산백(韓山伯)이라는 작위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서천군으로 개칭되었고 한산현이 한산군으로 승격되었으며, 비인은 비인현으로 하여 홍주진관에 속하게 하였다가 그 뒤 비인군이 되었다. 비인현의 만호 김성길(金成吉)은 1419년(세종 원년)에 왜선 50여 척이 침입하자 이를 물리쳤다. 비인은 그 전에도 해적이 자주 침입했는데 이를 방비하기 위해서 1421년에 성을 쌓았다. 성의 길이는 3,000m, 높이 2m 정도였다. 한산 출신인 이상재(李商在)는 한말 구국운동의 선구자였다. 그는 독립협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했으며,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898년에 그는 독립협회사건으로 붙잡혔으며, 1902년에는 개혁당 사건으로 다시 구금되기도 하였다. 1913년에 서천군 · 한산군 · 비인군이 합쳐져 서천군이 되었다. 1930년 장항항이 개항하였고 1931년에는 장항선 철도가 개통되었다. 1938년 서남면 일부와 마동면 일부가 장항면에 편입, 읍으로 승격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6년에 설립된 군내의 장항제련소는 광복 후에도 발전을 거듭하여 구리 · 아연 · 주석 등의 전문제련소가 되었다.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조정으로 마서면 남산리가 서천면에, 화양면 구동리가 한산면에, 기산면 이사리와 한산면 송림리가 마산면에, 종천면 흥림리가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1979년 5월 1일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으며, 1983년 문산면 등고리와 금덕리가 판교면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기산면 내동리 일부가 화양면 금당리에 편입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4-10-21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