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운전자공고 제13회 회고 2014. 8. 23 1. 입학 및 졸업 년도 가. 입학 : 1962. 3. 3 나. 졸업 : 1965. 1. 28 2. 재학 당시의 주변상황 회고 가. 회고해보면, 우리 광운전자공고 제13회 회원들은 49년 전인 1965년 1월에 졸업했으니 내년이면 졸업 반세기, 즉 50주년이 된다. 나. 그 사이 마흔네(44)분이 이미 영면에 들어 저 세상으로 떠나셨다. 또 적잖은 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 등으로 이민울 가셨고, 또 고향으로 내려가 정착하신 친구들도 상당 수 있다. 주간부의 경우 360명이 입학하여 232명 정도가 졸업했으나 현재 동기회에서 연락이 되는 동기생 수는 130명 정도에 불과하다. 3. 입학 당시 학교 상황 가. 입학 당시 학교명은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로 당시 선박을 비롯하여 국내<전보; 유선>는 물론 국가간 주 통신수단이었던 모르스부호(CW; Continuous Wave; 지속파), 즉 키(電鍵)를 사용하여 ·-··, ··-·, ·----, --, ·, ·-, - 등의 문자나 숫자, 혹은 부호를 모르스부호를 이용하여 송수신하는 무선통신사(通信 士)를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학교였는 바, 이런 학교로는 우리들의 모교인 서을의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와 인천에 있는 인천무선공업고등학교 뿐이었다. 나. 입학 당시에는 ‘학과‘ 구분이 없이 오직 무선통신사를 양성하는 고등학교였다. *후에 산업화의 발달로 제조업 중심으로 전자산업이 일어나면서 학과의 구분이 생겨 ‘통신과’와 ‘기술과’로 분리됨. 다. 국내 유일의 군(軍) 위탁 국비장학생; (1) 제12회 입학년도인 1961년에 최초로 육군의 통신요원을 양성하기 위한 위탁 국비장학생이 국내에서 유일하게 탄생하였는 바, 우리 모교가 그 효시였다. (2) 첫 해에는 입학에 임박하여 그런 제도가 생겨 전국적으로 알려지지 않아 선발된 학생 수가 서울을 위주로 약 70명에 불과했고, 제2회 입학인 제13회부터 본격적으로 주요 일간지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적으로 모여들었으며, 제2기는 100명이 선발되었으나 중도 자퇴자와 신병훈련소 입소 신검에서 일부 귀가조치되어 최종적으로 93명이 사병으로 입대했다. *사병 복무 연한 + 고교 수학(修學)기간 3년 복무 (3) 해병대국비장학생 제1기 출범; 특히 육군에 이어 해병대 위탁 국비장학생이 1962년에 새로 생겨 제13회가 전국 유일의 해병대국비장학생 제1기가 되었는 바, 30여 명이 선발되었고, 졸업 후 입대했는 바, 육군과는 다르게 하사관으로 입대했다. (4) 때마침 당시 문교부의 교육정책이 바뀌어 1962년에는 다른 도(道)로 진학할 수 없도록 금지했으나 해당 도에 없는 학교(수산/해양고등학교나 무선통신공업고등학교 등)는 도지사의 승인을 받아 지원할 수 있었다. (5) 또한 1962년에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전국에 걸쳐 연합고사로 실시하여 모든 학교가 동일한 날짜에 동일한 시험문제로 입시를 치뤘고, 합격자 발표도 같은 날 이뤄졌다. 이후 이 제도는 곧바로 없어짐. (6) 당시만 해도 한국전쟁, 즉 6.25가 휴전한(1953) 지 불과 9년 째였던,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절이어서 중학교 진학도 못하는 학생이 많았으니 고등학교 진학은 동네에서 잘 사는 집이 아니면 꿈을 꾸기 어려운 시절이었으므로 국비장학생에 대한 인기는 전국적으로 대단했다. (7) 그나마 이런 뉴스가 중학 졸업생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아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지방에서는 극히 일부; 동네에서 1명 정도>이나 일부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공지한 경우 이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8) 당시 거의 모든 중학교에서 1~2등을 하던 학생들이 대학을 가지 못할 형편이면 지원했던 사범학교(당시엔 교육대학이 없었고 고등학교인 사범학교를 졸업하면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됐었다)가 1961년에 없어졌고, 또 나라에서 학비를 지원하던 체신부 산하의 체신고등학교와 교통부 산하의 교통고등학교 관비생<官費生>이 1962년에 모두 사라지는 바람에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에 생긴 육군 위탁 국비장학생이 거의 유일한 진로였던 셈이다. (9) 지금은 고등학교 학비라는 게 가계소득 대비 대수롭지 않은 수준이지만 당시엔 학비를 부담할 능력이 없어 진학을 하기가 어려웠던 시절에 학비 전액에 매월 용돈마저 제공됐었으니 가히 파격적이라 할것이다. (10) 물론 재정보증인 2명씩을 세웠고, 졸업 후 입대하여 의무복무기간(당시 30개월)에 수학기간 3년을 가산하여 군에 복무하는 조건이 붙여졌었지만 합격만 하면 감지덕지했던 게 당시 현실이었다. (11) 5년6개월 이상 군에 복무해야 하는 부담에 중도에 탈퇴하여 다른 학교로 옮겨간 학생도 상당 수 발생했으나 재정보증을 서 준 분들에게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하여 뒤따르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후에 이들 자퇴자들에 대한 구상권 행사가 전혀 없었다는 것을 알게된 후 아쉬움을 느낀 동기들이 많았으니, 당시 군의 부실한 행정을 짐작할 수 있다. 4. 당시의 모교 상황 가. 동국무선공업고등학교 실태 (1) 1962년; 당시 본교는 남대문~서울역 사이에 위치한, 운동장이 전혀없는 2층건물을 교사(敎舍)로 사용하는 2부(야간부)가 있었고, 그 본교에는 또 남대문중학교가 함께 썼었고, 고등학교 1부(주간부)는 당시 연촌역<현 성북역/광운대입구역>에서 가까운 현 모교 위치에 있었다. 장위천 둑에 울타리를 둔 서울 교외지역의 학교였다. <2층 목조 본청 건물> (2) 대학은 없었고, 행정구역상으로도 경기도에 속했으며, 장위천을 분계선으로 남쪽은 성북구<현 강북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군 ??면 월계리에 속했었다. (3) 교사<敎舍>는 왜정 당시부터 있었던(?) 2층 목조건물의 본청 외에, 신축 실습관이 흰색 3층 콩크리트건물로 건립되어 자랑스런 모습을 하고있었으며, 뒷산 꼭대기에는 - 한 번도 가보진 못했지만 - 무선송신탑이 멀리서도 뚜렷이 보였었다.
<체육관/기숙사 건물와 본청 건물> <2층 콩크리트 실습관 건물과 당시 새로 건축된 3-4-5층 신축 실습관> (4) 그 실습관 앞에는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했던 SCR-584라는 레이더가 트레일러 형 박스카에 설치된 채 옥외에 비치돼 있었는 바, 실제 레이더의 정상적 기능은 수행할 수 없었지만 안테나는 회전이 가능하여 외부 손님들이 내방할 땐 자랑스레 안테나를 가동시켜 신기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5)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당시 모교에는 다른 학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전신타자기(Teletypewriter;TT)가 있었고, 공군 통신장교 대위로 전역한 이희한 선생님이 가르치고 계셨다.) (6) 특이하게도 지금의 체육관 위치에 2층 목조건물의 기숙사가 있었는데, 당시 서울이 아닌 경기도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기숙사 입사도 경제적 부담 때문에 엄한 기강에도 불구하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이 건물엔 체육관이 있었고 유도부도 있었다. (7) 1962년에 당시 혁명정부에서 설립한 1년짜리 직업연수원이 설치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 중 선발된 인원이 국비로 무선통신 기능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있었으며, 약 1년 후 이 연수원을 모체로 2년제 전문학교가 창립되었으며, (8) 이 전문학교를 모태로 현 광운대학교 위치에 왜정 당시 있다가 전쟁통에 쓰러진 채 높은 붉은벽돌 굴뚝만 남아있던 운모(雲母)공장 터에 4년제 단과대학인 광운전자공대가 창설되었고, 뒤에 종합대학인 광운대학교로 발전했으며, 학군단(ROTC)도 창설되면서 명실상부한 대학교로 발전을 계속했다. (9) 교명 변경; 5.16혁명 이후 산업화가 되면서 제조업을 중심으로 기술분야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전자분야가 급속히 우리 주변에 자리잡게되면서 우리 학교도 무선통신과에 추가하여 자연스레 전자과(이전엔 기술과라는 이름으로 생겼었다.)가 생겨났기 때문에 자연스레 교명도 ‘동국전자공고‘로 개명되기에 이르렀으며,<졸업 앨범도 동국전자공업고등학교로 돼 있음.> 모표도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高’자 밑에 ‘無線‘을 붙였던 것에서 전자(電子)의 궤도 속에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높을高자가 들어있는 현재의 모표로 바뀌에 되었다. <졸업앨범에 들어있는 '동국전자공업고등학교 교기> 즉 광운전자가 아니었다. (10) 뒤에 3학년 때 교명으로 학교 창시자이며 초대 및 전 교장인 조광운 당시 이사장님의 함자를 빌려 ‘광운전자공고‘라는 이름이 대두되어 여론조사 형식을 거쳐 교명으로 채택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11) 교사 중엔 모교 선배도 여러 분 계셨고, 일부는 대학을 졸업하신 분도 계셨으나 일부는 대학을 나오지 않은 분이 계셨다. (12) 후일 모교에 월계국민학교<현 초등학교>도 생겨났고, 남대문중학교도 옮겨왔다. (13) 그 후 자동차과도 생겼고, 실내스케이트장도 생겼으며, 고등학교가 전국 고교축구대회에서 우승하고, 히말라야도 등정했다는 등 자랑스런 뉴스도 많이 접했지만, 재단의 일부 부끄러운 기사도 읽을 수 있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5. 제13회 졸업생이 사회에서 걸어온 길 가. 1965.1.28.일부로 졸업한 뒤 사비생 출신은 광운대학 등 대학에 진학한 동기생이 일부 있었고, 상당 수는 시험 등을 통해 공사직에 진출했는 바, 당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나름대로 생산현장에 진출한 경우가 많았던 것은 시대적으로 다행스런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나. 육군장학생 98명은 졸업 후 1개월만인 1965.2.26.일 논산훈련소 수용연대에 개별적으로 입소하여 입영신체검사를 거쳐 그중 93명이 입영가능 판정을 받아 3.1절이 지난 3월2일부로 소위 와리바시<혹은 젓가락> 군번이라는 1142xxxx 8계단 사병군번을 부여받았고, 5명은 폐 등의 질환이 발견되어 귀가조치되었다. 다. 93명은 당시 훈련 군기<軍紀>가 세기로 악명이 높았던 제2훈련소 제30교육연대 8중대로 배치되어 6주간의 신병훈련을 마치고 후반기교육은 대전에 있던 육군통신학교에 입교하여 6주간 무선통신병과정(ROC) 교육을 거쳐 각자 실무부대로 배치되었다. 라. 해병장학생 30명은 해병 하사관후보생 교육과정을 거쳐 하사로 임용되어 군 복무를 시작했는 바, 육군과는 차원이 다른 길을 걷는 행운을 얻었다. 마. 졸업하던 1965년 봄 파월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병으로 복무하면서 자의던 타의던 파월장병으로 복무한 경우도 많았다. 마. 그 후 각자의 걸어온 길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일부는 군복무 5년6개월이 그토록 긴 세월인 줄을 뒤늦게나마 깨닫고 육군의 경우 간부후보생<정규과정인 갑종(당시엔 제2, 제3사관학교가 생기기 전), 혹은 단기 훈련을 마치고 특별히 임관시킨 특수간부후보생>에 지원하여 장교로 임관된 경우가 많았고, 해병대의 경우에도 3분의 1이 임관하여 장교로 복무했다. 6. 동창회 발족 1989년, 사비생 출신으로 개인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룩한 전병순 동기생이 소위 제13회 동창회를 결성하여 개별 연락을 취하고 총회 등을 소집하여 동창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 후 매 2년 단위로 매년 1월 신년회 겸 정기총회를 개최해왔고, 2년 단위의 임기를 지켜 대를 이어와 2014년 현재는 제14대 회장으로 양준석 회장이 중책을 맡고 있다. 광운전자공고 제13회 역대 동창회장 1989년 ?월~1992년 ?월 | 제1~2대 | 전병순 | 1992년 ?월~1993년 5월 | 제3대 | 이성종 | 1994년 5월~1998년 5월 | 제4~5대 | 조영재 | 1998년 5월~2000년 5월 | 제6대 | 윤우로 | 2000년 5월~2002년 5월 | 제7대 | 윤우로 | 2002년 5월~2004년 5월 | 제8대 | 황윤희 | 2004년 5월~2005년 12월 | 제9대 | 변기영 | 2006년 1월~2008년 2월 | 제10대 | 이성종 | 2008년 2월~2012년 1월 | 제11~12대 | 이인성 | 2012년 1월~2014년 1월 | 제13대 | 임택호 | 2014년 1월~ 현재 | 제14대 | 양준석 |
7. 결어 이제 70줄에 접어든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기본적으로 가정이 있고, 건강 잘 챙기면 그 다음은 여생을 즐기는 것일게다. 그러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친구이고, 그 친구도 고향친구와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정말 성장기에 허물없이 동고동락했던 고등학교 동기생이 그 어느 인연으로 맺어진 친구들보다 더 죽마고우의 허물없는 친구가 아닐까싶다. 이제 우리 모교가 개교 80주년을 맞는다. 즉 고등학교 입학 시의 나이를 일반적으로 17세로 계산하면 제1회 졸업생의 평균적 나이가 이제 97세가 된다는 이야기다. 이 의미있는 시점을 계기로 후배들이 의미있는 일을 추진한다기에 멀리 아득해져가는 추억을 되살려 다소 길게 기술했다. 당시를 함께 겪어온 친구들이 읽고 그 옛날을 되씹어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기를 바라는 바이다. 끝으로 우리 동문의 무궁한 발전과 화합, 그리고 선후배 동문 제위의 건강과 댁내 화목을 축원합니다. 2014. 8. 23 제13회 졸업생 임 택 호 삼가 올림 |
첫댓글 옛 기숙사 건물
사연 많은 기숙사 생활.
집은 성북구 미아리요. 직선거리 학교까지 4 km.
오죽하면 2 학년 초 여름부터~ 가을 기숙사가 폐쇄 될때까지 기숙사 생활 사연도 많았다오.~~
수고하셨습니다.
'광운80년사'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참 잘했어요, 이쁜도장 꾹!!!
우리집 컴의 한글 프로그램에 문제가 있어 한 밤중에 2시간여를 고생해도 사진을 옮기지 못했습니다,
능력 부족 이지요, 그렇게 올린글에 친구들 댓글이 있어 삭제하지 못했어요,
택호 고문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러고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 하세요.
나와군생활하면서 임택호 똑똑한놈이라고 상관들한테 칭찬많이 한다는 소리 들었는데
오늘글읽어보니 기억력좋고 모드자료 잘활용하고 세심한관찰력에 찬사보내내
우리기를 대표해서 수고한것도 칭찬할만하고 고마우이
좋은 말씀 올려주신 분 모두 감사합니다. 부끄럽지만 용기를 얻습니다.
KW13 정례 9월산행 중 우연히 회고록 발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서 해병대장학생 출신 유성동 동기가 해병대장학생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귀한 지적을 해주어 내용을 수정.보완하였습니다. 해병동기생들, 죄송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