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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병인박해 1.시대상황 2.박해의 원인 3.박해의 전개과정 4.박해의 결과 Ⅱ. 절두산 순교 성지 1.절두산 역사 2.병인박해와 절두산 3.절두산 순교자 4.절두산 기념성당과 기념관 |
Ⅰ.병인박해
1. 시대 상황
조선 제 25대 철종(재위 기간 : 1849-1863)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풍양 조씨인 신정왕후는 철종의 8촌인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을 왕으로 지명하여 자신의 부군이었던 익종(순조의 아들)의 대통을 계승하도록 하였다. 이에 1863년 12월 13일에 창덕궁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등극하게 되니 이가 곧 제 26대 고종이다. 대왕대비는 고종의 배후에서 수렴청정을 하다가 1866년 2월에 수렴청정을 끝내고 물러나자 신왕의 생부인 이하응 대원군이 1873년까지 통치권을 장악하여 사실상 섭정을 행하였다.
당시 조선을 둘러싼 주변 나라의 상황은 西勢東漸으로 열강들의 이권 다툼으로 각축장이 되어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동북 아시아의 종주국이었던 중국은 아편전쟁(1839-1842)에서 패하여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서구 열강과 불평등 조약을 맺었고, 1860년에는 프랑스와 영국 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점령되기도 하였고, 국내적으로는 태평천국의 난 등 반란의 세력이 일어나 심각한 위기에 처하여 있었다. 이에 서양 세력의 침입에 맞서 서양의 기술을 배워 익히려는 洋務運動을 전개하며 自强運動을 펼치며 개방정책을 추진하였으나 국운은 점점 기울기에 조선에 대해서도 예전같이 강하게 관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본은 명치유신을 표방하며 부국강병과 문명개화를 목표로 하여 정치, 외교, 경제, 군사, 교육 등 다방면에 걸쳐 서양문물제도 도입 및 실행에 적극적이어서 강력하게 근대화를 추진하여 실효를 거두면서 힘있는 나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조선 역시 서세동점의 시대적 상황에 싸여 조선 해안에 프랑스, 영국, 러시아, 미국 등 異樣船의 출몰이 잦았으니 1832년에서 1860년 까지 무려 30여 차례에 이르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양선의 출몰로 인한 민심의 동요와 서양 열강의 실제적인 무력 위협은 조선 사회를 상당히 불안하게 하는 실제적인 대외적 요인이 되었다. 국내적으로는 계속되는 세도정치아래 악화된 탐관오리들의 폭정으로 동학과 농민들의 봉기와 民亂이 계속되어 더욱 사회의 혼란은 가중되어 가고 있었다. 19세기 말 조선 사회는 이처럼 내외적으로 참으로 어려운 시기였기에 이러한 난제들을 과감하게 해결할 인물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시기였다.
이 때 집권한 인물이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었다.
2.박해의 원인
철종은 부인과 며느리가 천주교를 신봉한 것 때문에 사약을 받은 정조대왕의 서제 은언군의 손자이었다. 헌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강화도 시골에 있던 은언군의 손자인 이원범(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독살당한 은언군 일가의 죄를 풀어주고 사당에서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이런 배경 하에 천주교는 무서운 박해에서 숨을 돌릴 수 있었고, 교우들은 공개적인 활동은 할 수는 없었으나 1859년 베르뇌 주교의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조선 교구는 전국적인 교회 조직을 갖추면서 신자수 16,700명을 헤아릴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천주교에 대하여 관대할 수 밖에 없었던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등극하며 실제적인 실력자인 대원군의 집권은 한국천주교 역사상 가장 가혹한 박해의 풍파를 몰고 왔다. 이 시기의 박해를 병인박해라 칭하는데 통상 병인박해라 함은 1866년의 박해만이 아니라 대원군 집권 시기에 걸쳐 일어난 1866년에서 1873년 까지의 박해를 모두 지칭한다.
박해의 원인에 대하여 교회사가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첫째, 서양 세력의 문호 개방 압력이다. 먼저 부동항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들 수 있는데 러시아는 중국과 1860년 애로우호 사건에 따라 천진조약을 맺고 연해주 지방을 차지하면서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조선과 접경하게 되었다. 1864년(고종 1년)에 러시아는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였는데 조선은 위기의식만 느끼고 근본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못하고 러시아와 손을 잡은 조선인 2명을 죽여 버렸다. 1865년 9월과 11월에는 러시아인 수십 명이 경흥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66년 1월에는 러시아 군함 한 척이 나타나 러시아 상인의 통상할 수 있는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는 편지를 조정에 보냈다. 당시 조선의 대외정책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事大交? 정책을 고수하면서 당시의 시대 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폈다.
그러나 이때 조정에 있던 신자가 러시아 이외의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음으로써 러시아의 남하를 막는 방법을 강구한 듯하다. 즉 프랑스 선교사의 도움으로 프랑스의 힘을 빌어 러시아의 진출을 막는 防俄策을 제시한 것이다.
1865년 12월 말경 김면호(토마스)와 홍봉주(토마스),이유일(안토니오)는 ?러시아를 막아내는 방법은 프랑스, 영국과 동맹을 맺는데 있고, 이를 손쉽게 하려면 서양 주교의 힘을 빌어야 한다?는 글을 베르뇌 주교와 의논한 뒤에 대원군 사돈 조기진을 통하여 전달하였다. 대원군은 이 글을 읽고 아무런 말없이 무릎 밑에 깔고 앉았다고 한다. 이틀 후 대원군의 부인(부대부인)은 고종의 유모인 박마르타(1868년 순교)에게 ?러시아를 막으려면 주교님이 필요한데 그분들이 지방에 출장 중이니 그 분을 모셔오고, 서한을 만들어 대원군에게 제출하라. 나는 성공을 보장한다.?고 말하였다. 박마르타는 이를 베르뇌 주교가 거처하고 있던 홍봉주에게 전하였고, 홍봉주는 승지였던 남종삼에게 청원서를 작성할 것을 간청하였다. 남종삼은 이러한 뜻의 청원서를 작성하여 직접 대원군에게 올렸고 대원군은 주교를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만일 러시아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겠다고 하였다. 대원군과 이런 대화 내용이 알려지자 천주교인들은 종교자유의 날이 가까워진 것을 알고 기뻐하였다. 남종삼은 사람을 보내어 곧 황해도 평산에 베르뇌 주교와 충남 내포에 있는 다블뤼 주교를 서울로 모셔오게 하여 1월 25일과 30일에 도착하였다. 대원군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러 운현궁에게 들어가니 대원군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즉 주교들이 한양에 돌아왔을 때는 러시아인들이 물러가 국경이 잠잠해져 위기를 모면하였기에 프랑스 선교사들과 접촉할 긴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니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둘째, 북경에 간 사신이 보고한 편지에서 1866년 1월 하순 중국에서 자행된 서양인의 살육사실이 천주교 박해의 주요한 자극제가 된 것이다. 즉 중국인들의 서양인들에 대한 태도 변화에 대한 내용으로 북경에 파견하였던 사절단은 중국 정부가 외국선교사들을 근절시키고 천주교를 금지한다는 소식을 보고하였다. 이 소식은 대원군에게 영향을 미쳤고, 천주교를 반대하는 관리들을 고무시키게 하였다. 1860년 10월 영국과 프랑스에 의한 북경함락은 종교 자유에 좋은 계기가 되었으나 얼마 안가서 그들은 무서운 보복을 받게 되었다.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중국 도처에서 벌어져 외국인 선교사와 중국인 신부, 신자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는 내용을 보고하였다.
셋째, 대원군이 정권을 유지를 하고 정적들의 비난을 일식시키기 위함이다.
천주교를 반대하는 정부 고관들은(정원용, 김좌근,조두순, 김명학) 천주교와 접촉하고 있는 대원군에게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당시 위정자들 역시 기존의 박해 시대 위정자들처럼 천주교를 사교라고 단정하고 있었다. 천주교는 아버지와 임금도 없는 종교(無父無君之敎), 황당무계한 궤변을 주장하는 정도가 아닌 외도(荒唐怪說不經之外道), 이것을 믿으면 저절로 사람이 오랑캐나 짐승이 된다는 종교(悖倫亂常自陷於夷狄禽獸之敎)로 취급되었다. 특히 外道는 능지처참할 정도의 외도로 취급되었으니 천주교인은 외국인과 내통하는 자(통외분자), 오랑캐를 불러드리는 무리(초구지도)라고 규탄되어 지배층의 반감은 박해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운현궁에도 천주학쟁이가 출입한다는 소문이 퍼져 있으니 - 사실 민대부인은 베르뇌 주교에게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미사를 드려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대원군을 정치적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 된 것이다.
1866년 8월 17일 중국 예부에 보낸 문서에는 1865년부터 凶徒匪類가 있어 조사해보니 외국인들이 불법으로 입국하여 천주교를 전파하고 가르치며 이들이 작당하여 비밀리에 나쁜 일을 하므로 박해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대비까지도 천주교의 책동을 비난하기에 이르자 대원군은 정치적인 생명의 위협을 느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대원군은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고 정치력을 만회하려는 의도로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책으로 급선회하게 된 것이다.
3. 박해의 전개 과정
(1) 1866년 봄
1866년 2월 14일 포졸들이 두 차례나 장 베르뇌 주교가 머물고 있는 홍봉주 집에 찾아와 경복궁의 중건을 위한 원납전을 추렴하러 왔다고 하면서 조사를 하고 갔다. 이어 천주교 탄압 명령이 내려지자 2월 23일 베르뇌 주교를 필두로 홍봉주, 이선이 등이 포청에 잡혀감으로써 본격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홍봉주의 집을 포졸들이 쉽게 찾아 온 것은 홍봉주가 대원군을 만나고 집에 갈 때 대원군이 그 하인 장갑복을 미행시켰기 때문이다. 홍봉주는 주교에게 피신을 권하였으나 ?나를 반드시 찾을 것이니, 내가 피신하면 사방을 나를 찾기 위해 뒤져 큰 박해가 일어날 것이다.?면서 피신하지 않았다.(대원군의 부인은 주교의 체포 소식을 듣고 매우 비통해 하며 장남에게 강한 항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날 문초에서 이선이가 배교하여 남종삼을 고발하였다. 2월 25일 정부는 외국인을 데리고 온 곡절을 철저히 규명할 것을 포도청에 명하는 동시에 남종삼이 제천에 내려갔다는 소식을 접하여 그를 격식을 갖추고 잡아 오도록 하였다. 3월 1일 남종삼이 잡히게 되었고, 선교사 3명과 정의배, 전장운, 최형 등도 체포되었다. 이들에 대한 심문을 혹독하게 하고, 압수된 천주교 서적과 그 판본을 불태우며, 전국에 분포된 천주교 서적을 일체 압수하여 소각하라고 명하였다.
3월 7일 남종삼과 홍봉주는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고, 같은날 새남터 병영에서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 도리, 볼리외 등 4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군문효수 되었다. 3월 9일에는 최형과 전장운이 서소문에서 참수, 3월 11일에는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가 새남터에서, 3월 30일에는 다블뤼 주교, 위앵, 오메트르 신부와 장주기, 황석두 등이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프랑스 선교사와 많은 신자들이 희생당하였으며, 아직 체포되지 않았던 선교사로는 리델, 페롱, 깔레 신부가 있었다. 리델 신부는 극적으로 조선을 탈출하여 박해 사실을 프랑스 공사관과 해군 사령부에 알림으로써 프랑스의 개입이 시작되어 병인양요가 발발하게 되었다.
(2) 1866년 가을
병인양요가 일어난 이후의 박해이다. 이 시기에 박해는 더욱 치열해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리델 신부는 조선 신자 11명과 함께 배편으로 탈출하여 7월 7일 중국에 도착하여, 천진으로 가서 프랑스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에게 박해의 사실을 알렸다. 그런데 이 때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조선으로의 출동이 늦어지게 되자 함께 왔던 조선인 중 8명은 귀국하고, 3명은 수로 안내인으로 동행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로즈 제독은 1866년 9월 17일 체푸항을 떠나 22일 작약도에 정박한 다음 한강을 거슬러 26일 양화진을 거쳐 서강에 다다랐다. 10월 11일에는 로즈 제독은 7척의 군함을 이끌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으면서 강화도를 점령하는 병인양요를 일으켰다. 프랑스 군인들은 강화읍에 들어가 관아와 무기고를 점령하고, 화약고를 폭파시켰고, 강화행궁을 불태웠으며, 외규장각의 고문서를 약탈하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강화도에서 프랑스군을 몰아내었는데 프랑스 함대가 한강 양화진에까지 진출한 것을 보고 이는 분명히 천주교 신자가 개입하였기에 가능한 것으로 보고 그 곳을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 장소로 지시하였다. 이에 이의송, 김이쁜 부부와 아들 이붕익을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병인양요 이후 박해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11월 문경에서는 이제현, 김예기, 김인기 등이, 12월 전주 숲정이에서는 조화서, 조윤호, 이명서, 정문호, 정원지, 손선지, 한원서 등이 순교하였다. 병인양요로 인하여 쇄국양이 정책이 더욱 확고하게 되었고, 천주교를 더욱 박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3) 1868년 4월(음력)
대원군의 천주교 말살 정책은 1868년 4월 ?오페르트 남연군 묘 도굴사건?으로 인하여 더욱 가혹해졌다. 오페르트는 대원군 부친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여 그 유해를 미끼로 하여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연군 묘를 도굴하던 중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고 말았으며, 이 사건은 당시 국제적으로도 매우 불미스러운 일로 치부되어 오페르트와 그 일당들은 중국 주재 영사관에서 재판에 회부되기도 하였다. 천주교로써도 안타까운 일은 이 일에 1866년 중국에 피신하였던 페롱 신부가 가담하였다는 데 있다. 이 사건으로 페롱 신부는 조선교구에서 인도로 선교지가 바뀌게 되었다. 이 사건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가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도굴 사건의 안내자는 반드시 천주교 신자가 개입되었다고 보았다. 이로써 잠시 주춤하였던 박해는 더욱 가열되었고, 장치선, 최인서, 김계교, 이신규 등이 처형되었다.
(4) 1781년 辛未洋擾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어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평양군민들에 의해 화공을 당하여 강 위에서 불타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을 개항시킬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계획 아래 북경 주개 미국 공사 로우와 미국 아세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군함 5척을 거느리고 침략하여 왔다. 그러나 병인양요 이래 성곽을 수리하고 포대를 축조하는 등 외국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오던 대원군은 강화도 광성진 전투와 갑곳에 상륙한 미군에게 타격을 가하여 미군을 물리쳤다. 열강과의 무력 충돌에서 연전연승한 대원군과 조야의 민심은 배외의식으로 충만하고 서양은 오랑캐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잔존해 있는 천주교인을 색출하여 처형시켰다.
이로써 쇄국 정책은 더욱 굳어졌고, 斥洋의 결의를 다지고자 전국 각 요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쳐들어 올 때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해야 한다.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4. 박해의 결과
1866년 초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병인양요,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 신미양요 등을 거치면서 사건이 발생할 때 마다 프랑스 선교사와 내통했다는 미명아래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가열되었다. 신미양요 이후 1873년 대원군의 실각으로 병인박해는 멈추게 되었으나 이 기간 동안 교회는 기해와 병오 박해 이후 재건되었던 모든 인적 물적 재원들을 모두 잃게 되었고 교회 조직은 완전히 무너졌다. 처형된 순교자만도 조선에서 활동하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과 남종삼 등을 비롯하여 80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겨우 살아남은 교우들은 집과 모든 재산을 잃고 초근목피로 생계를 이어나갔고, 1876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게 되었고 교회재건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순교자들의 피로 자란 한국교회는 1886년 한불조약 이후 다시 생기를 찾게 되었다.
1890년 제 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는 시복 수속을 위해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기록을 모아 <치명일기>를 간행하였고, 여기에 수록된 순교자 877명 가운데 24위가 1968년 복자품에, 1984년 성인품에 올랐다.
Ⅱ. 절두산 순교성지
1. 절두산 역사
한강에 위치한 절두산은 陽花津이라 불리었다. 즉 버드나무가 우거진 나루터란 뜻이다. 또한 양화나루의 동쪽 언덕에 우뚝 솟은 봉우리는 그 생김새가 누에를 닮았다고 해서 蠶頭峯 혹은 용의 머리같다고 하여 용두봉 혹은 용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조선조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는 잠두봉 혹은 용두봉이라 기록되어 있고, 우리말로는 들머리(쳐들고 있는 머리), 가을두라고 불리었다. 양화진의 역할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사신 접대 장소
조선시대 양화진과 잠두봉은 경치가 수려하여 고관들과 사대부들이 별장을 지어 놓고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로 유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접대를 하며 唱和를 주고받으며 船遊를 즐긴 접대장소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 한 예로 명나라 문인 기순이 성종 때 사신으로 왔다가 이곳의 풍광을 읊은 시가 전해지고 있으며, 문인들의 시 속에 자주 등장할 만큼 빼어난 명승지였다. 때로는 국왕이 신하들에게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잔치를 베풀던 곳으로도 기억되는 의미였던 곳이기도 하였다.
둘째, 浦口
양화진은 한성부로 들어가는 중요한 관문의 하나로서 한강을 횡단하는 나루터였을 뿐만 아니라, 인접한 西江, 마포와 함께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와 도성으로 운반되던 충청, 전라, 황해도의 稅穀船이 도착하는 漕運의 종점, 西湖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일대는 한강 하류의 교통, 상업, 무역의 중심지를 이루어 여행자와 상인, 각종 物貨가 모이는 번화한 浦口였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양화진을 포함한 京江의 서호는 해로를 통하여 운송된 모든 세곡과 화물을 쌓아두는 光興倉을 비롯하여 운송된 세곡을 점검하던 점검청이 위치하고 있었다. 또한 전국의 선박을 관리하는 典艦司가 있었고, 밤섬에는 다수의 造船所가 있었다. 또한 궁중에서 설치되었다가 양화진으로 옮겨진 內氷庫와 개인이 운영하는 私氷庫가 있었다. 18-19 세기에 들어와서는 점차 번화한 상업도시로 변하면서 개항 이후 외국상인들의 눈길도 이곳으로 쏠리게 되었다. 일본, 청국과 서구열강들은 도성에 가까운 양화진과 마포를 차례로 개항장으로 요구하여 그들의 상품시장으로서 이곳을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국의 상선들이 서울과 인천 사이를 정기 운행하는 기착지로 되었다.
셋째, 군사 요충지
양화진은 범죄자와 정치적 모반자를 감시하고 단속하던 검문소였고, 水軍을 훈련하던 군사 훈련장이었으며, 수도 서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최후의 방어진지였다. 동시에 이곳은 만약의 경우 도성이 함락되어 국왕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강화로 피난할 때면 거쳐야 할 중요한 길목이었다. 때문에 양화진은 조선시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이에 군대의 주둔지로서 鎭이 설치되어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다.
2. 병인박해와 절두산
병인년 (1866년, 고종 3) 음력 8월 18일에 프랑스 군함이 양화진 앞을 지나 서강에 머물자 강가에는 엄청나게 많은 군중이 불로 움직이는 배를 구경하러 모여 들었다. 이에 어영중군 이용희-요즈음의 수도권 방어 사령부에 해당되는 총융진이 설치되어-가 약 1,200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진하여 쌍방간에 대포사격이 3-4 차례 벌어졌다. 밤이 되자 함대는 陽花津에 머무르며, 프랑스 군인들은 수심을 측정하고 산의 높이를 재며, 도면을 그리고 여러 방향을 확인하였다.
조정에서는 계속 많은 군인들을 증병하여 방어하다가 9월 15일에 총융진 군병들에 의해 양화진두에서 공개적으로 천주교도를 처형하였다. 이후 10월 17일 까지 약 한 달 동안에만 7-8회의 공개적인 처형이 거행되었다. 따라서 양화진 일대에서 행해진 천주교도 처형은 대부분 총융진 군사들에 의하여 집행된 것이다.
리델 신부의 1866년 11월 27일 서한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대원군은 여자와 어린아이까지도 포함해서 모든 신자의 씨를 말리겠다고 공식적으로 단언했다고 합니다. 10월 말에 황해도 양반 박영래 요한과 이덕보 마태오와 함께 북쪽 지방에 복음을 전했던 이의송 프란치스코가 아내와 아들 이붕익 바오로 가 혹독한 고문을 당한 후 서울에서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대원군은 나라의 관례를 엄청나게 위반하여 이 5명의 수형자들의 형장을 새로 택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한달 전에 프랑스 함대 2척이 서울 앞에 정박했던 바로 그 곳 강기슭에 있는 양화진으로 끌려왔습니다. 조정의 포고에는 ?천주교인들 때문에 오랑캐들이 여기까지 왔다. 그들 때문에 강물이 서양배로 더렵혀졌으니 그들의 피로 더러움을 씻어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답니다. 바로 양화진에서 군사들이 야영지를 만들고 그들 중에 천주교인을 발견하면 거리낌없이 죽여버리라고 명령이 그들에게 내려졌다고 합니다. ?
대원군은 프랑스 함대의 본격적인 조선 침공이 시작된 지 약 10일 후인 10월 22일 攘夷保國를 다짐하면서 ?고통을 참지 못하여 화친을 허락한다면 이는 곧 매국이다. 독함을 참지 못하여 교역을 허락한다면 이는 곧 망국이다. 적이 경성에 핍박하였을 때 자기 고을을 버리고 간다면 이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만약 술수를 부려 적을 쫓는다고 하더라도 다음 날의 폐해는 邪學보다 더 심할 것이다? 등의 4개 조항을 돌려 보도록 하였다. 이는 외세침략에 대한 일종의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워주려는 한 정책적 방편이었다. 동시에 그의 집권을 불안하게 하는 모든 요인들을 한꺼번에 일신하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즉 병인년 음력 9월 중순부터 양화진 일대에서 가열된 천주교도 박해는 프랑스 함대의 내침에 대한 대응양식이었다. 병인년 천주교 신자 이전에도 양화진에서는 사형을 집행하고 시체를 효시한 일이 있었다. 조선 중기 사람으로 고양 땅에 묻혀 있던 남효온의 시신을 연산군이 양화진에서 剖官斬屍한 일이 있었다. 고종 때에는 김옥균의 시신을 효시하기도 하였다.
3.절두산 순교자
천주교 신자의 처형 집행지가 이전의 서소문 밖 네거리나 새남터 등에서 양화진으로 옮겨진 것은 로즈 제독이 프랑스 함대를 이끌고 병인년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침입을 시도한 때문이었다. 오랑캐가 이곳 양화진까지 침입하게 된 것은 천주교인 때문이며, 그들로 인하여 양화진이 더렵혀졌으니 천주교인의 피로써 씻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처형지가 양화진이 된 것이다.
황해도 사람으로 시흥 봉천동에서 잡혀온 이의송(프란치스코)과 그의 아내 김엇분(마리아),아들 붕익(바오로)이 양화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달레의 기록에 의하면 1866년부터 1868년까지 약 500명의 신자가 서울에서 처형당하였으므로 그 중에 상당수는 양화진 일대에서 순교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수백 명에 이르렀을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1868년 9월에 벌써 박해에 희생된 사람이 2,000명이 넘었는데, 그 중에 500명이 바로 서울에서 죽었다. 1870년에 조선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산에서 굶주림과 곤궁으로 죽은 모든 사람을 빼고도 희생된 사람의 수가 8,00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관찬기록과 교회기록에 그 처형사실이 기록된 천주교인은 29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대원권이 집권할 때에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공개적, 비공개적으로 형식과 절차를 따지지 않고 일어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처형당한 이들은 다음과 같다.
† 1866년 음 9월 15일 : 이의송 프란치스코, 이붕익 베드로, 김엇분 마리아, 김한여
베드로, 최경원 야고보
† 1866년 음 9월 17일 : 김중은 베드로, 박영래
† 1866년 음 10월 5일 : 김진구 안드레아, 최수 베드로, 김인길 요셉, 김진 베드로
† 1866년 음 10월 10일 : 강명흠 베드로, 황기원 안드레아, 이기주 바오로, 김진의 처
김가녀 마리아
† 1866년 음 10월 14일 : 이용래 아우구스띠노, 원후정, 박성운 바오로
† 1866년 음 10월 18일 : 성연순, 원윤철 사도요한
† 1866년 음 10월 : 박래호 사도요한
† 1866년 : 유바오로
† 1867년 음 8월 2일 : 강 요한, 조 다테오, 이들과 함께 치명한 5명
순교자들이 처형된 장소에 대한 관찬 기록은 '陽花津頭'로 되어 있다. 이는 양화진을 지칭하는 곳으로 그곳의 어떤 특정한 장소만을 한정해서 지적하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곳은 양화진 어디였을까? 양화진두에서 공개적으로 처형했다고 할 때 모래사장에서 처형했을 가능성이 높기는 하지만 반드시 그랬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약간 높은 둔덕이 진 곳에서 처형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곳에서의 처형 장면이 군중들에게 더욱 잘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양화진에서 처형된 사람들 중 대부분은 先斬後啓의 간단한 절차를 거치거나 아니면 그것마저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상황에서 적당히 처형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바로 이 지역에서 구전으로 전해오는 노인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이러한 형태의 처형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즉 잠두봉 높은 곳에서 목을 쳐서 강물에 시신을 던져 버리거나 아니면 그냥 결박당하여 산 채로 떠밀려서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러므로 잠두봉 꼭대기가 비공식적인 처형장이었을 것이다. 즉 프랑스 함대 내침 이래 서울로 잡혀온 천주교 신자들이 양화진에서 처형되었는데, 무수한 신자들을 참수되고, 또 일일이 많은 신자들을 죽일 수 없어서 그곳에 있는 산상절벽에서 마구 강물에 밀어 죽였기에 양화진의 지명이 저절로 사람의 목을 끊은 산이란 뜻을 지닌 절두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4. 절두산 기념 성당과 기념관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맞아 병인박해 때 가장 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절두산에 기념 성당과 기념관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신앙을 본받고자 하였다. 절두산의 원형을 조금도 변형시키지 않고 지형적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선조 신앙인들의 순교정신과 한국의 전통적인 고유미를 강조함에 역점을 두고 순례자들이 기도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킬 수 있도록 설계가 추진되었다. 설계는 이희태 건축연구소, 미술은 김세중 교수가 맡았고, 1966년 3월 10일 공사가 시작되어 1967년 10월 21일 성당과 기념관이 준공, 축성되었다. 이 날은 절두산에서 최초로 순교가 이루어진 날을 기념한 것이다. 순교선열들의 고귀한 신앙과 드높은 얼을 산 증거로 보여주며 그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이 땅의 모든 신자 공동체가 일치하여 성당과 기념관을 세운 것이다.
개관 이후 신앙인들의 순례 물결이 끊이지 않아 절두산은 명실공히 신앙과 역사,교육, 선교, 문화의 장으로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인 1984에 순교자 103위의 시성식을 갖는 경사가 있었는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절두산 성지를 순례하셨다.
병인년 순교사의 잔혹한 형장의 하나로서 천주교 수난성지인 절두산은 그 이름이 말해주듯 무고한 백성들이 신앙을 가졌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목이 잘리는 세계사에 드문 형장이 되었다. 그것은 비단 신앙을 가진 교인이나 비교인이나를 막론하고 절두산은 한국 근대사에 피 흘린 수난 현장으로서 가치와 보존 의의를 지니기에 충분한 곳이었다. 집권자의 무도한 폭력이 무력한 백성을 처단한 곳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반성의 현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국여지승람 등 각종 기록에 관선과 사선이 드나들던 교통의 요지로서, 군사들이 주둔한 鎭으로서 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곳이다. 이에 1997년 11월 11일 절두산 순교 성지 일대인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을 문화재 보호법 제 6조에 근거 사적 제399호로 지정하였다.
(1) 성해실
성당 지하에 다음과 같은 28위의 순교 성인 유해가 모셔져 있다.
베르뇌 장 시메온 주교, 남종삼 요한, 허계임 막달레나, 다블뤼 안 주교, 최형 베드로, 이영희 막달레나, 볼리오 서 신부, 장주기 요셉, 이정희 발바라, 도리 헨리코 김 신부, 우세영 알렉시오, 오매트로 오신부, 손선지 베드로, 최경환 프란치스코, 위앵 민 신부, 이호영 베드로, 김성우 안토니오, 이명서 베드로, 한재권 요셉,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정원지 베드로, 황석두 루가, 이윤일 요한, 앵베르 범주교, 모방 나신부, 샤스탕 정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브르트니에르 백신부.
(2)순교기념박물관
1920년대부터 파리 외방 전교회 피숑 신부는 많은 교회 유물을 수집한 바 있으나 1945년 작고하고 나서 6.25까지 겹쳐 유물이 거의 분실되고 말았다. 해방 직후부터 순교자 현양회에서 다시 유품을 수집하기 시작하여 본 기념관을 개관할 때 그 일부가 기증되었다. 초대관장 최석우 신부가 그동안 수집된 것을 1968년에 전시하여 이를 전시하면서 다른 유품들을 수집 보충하였다. 그 후 오기선, 박희봉 신부를 위시한 순교자 유품 및 교회 사료 발굴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유물 수집이 큰 성과를 이루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기념관 소장품은 서적류, 지본, 교회사적 유물, 민속도자기, 민속품, 사진류, 회화, 야외 전시물 등 약 3000여점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 문헌*
샤를르 달레, 안응렬? 최석우 역주 『한국천주교회사』, 한국교회사 연구소, 2000.
최석우, 『한국 천주교회사의 역사』, 한국교회사 연구소, 1982
순교자 현양 천주학당 편집, 『한국천주교회사 교실』, 순교자 현양위원회, 2002.
윤선자, 『한국 가톨릭 문화유산과 절두산 순교기념관』, 절두산 순교기념관, 1999.
가톨릭 교리신학원, <한국 천주교회사 및 관계 문헌>, 가톨릭 교리 신학원 1학년,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