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와인과 시가
justinKIM편집
와인 마니아 중에는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아도 와인을 마실 때 굵은 시가를 입에 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스름한 조명 속 찰랑이는 와인과 함께 피어오르는 그윽한 시가 연기, 시가의 깊은 맛과 와인의 향긋함이 주는 묘한 어울림에 매료되는 까닭이다. 특히 와인 향이 입안에 남아 있을 때 시가의 구수한 향이 파고들면서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는데, 이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이라면 와인과 시가의 '마리아주’를 다시 한번 찾지 않을 수 없다.
시가와 와인은 닮은꼴 시가와 와인은 닮은 점이 많다. 둘 다 혀가 아니라 코로 즐긴다고 할 만큼 향이 뛰어나다. 와인과 마찬가지로 시가 역시 입으로 빨아들이는 것보다 불을 붙였을 때 피어나는 연기와 내뿜는 향이 먼저다. 시가는 담배와 달리 입안에서 연기를 머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아로마와 맛을 즐길 수 있다. 소믈리에가 코로 먼저 와인을 음미하고 혀로 확인하는 것과 같은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맛을 평가하는 표현도 비슷하다. “향이 강하다”, “풀 보디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그 좋은 예다. 또 시가와 와인의 퀄리티는 좋은 토양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훌륭한 시가와 좋은 와인이 자주 비교되는 이유다. 호텔 리츠칼튼 서울의 은대환 소믈리에는 “와인과 시가의 큰 공통점은 품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토양”이라며 “재배 조건은 다르지만 최고의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좋은 토양은 가장 기본적이며 핵심적 요소”라고 말했다. 숙성과 보관에서도 시가는 와인만큼이나 까다롭다. 시가의 숙성은 라벨을 붙인 후 짧게는 3주, 길게는 1년 이상 걸린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숙성 정도와 함께 보관을 어떻게 하느냐가 시가의 질을 결정하는데, 시간과 장소에 민감한 점이 와인과 꼭 닮았다. 또 시가는 와인과 비슷한 상태로 보관해야 하며 습도는 70%, 온도는 17~18℃로 맞춰야 한다. 이런 환경이 안 되면 와인 냉장고에 보관할 수도 있지만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주는 시가 전용 저장고인 휴미더(humidor)에 넣어두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
와인과 시가, 환상의 찰떡궁합 와인이 그렇듯 시가도 토양과 재료에 따라 견과류, 꿀, 가죽, 유제품 등의 다양한 향을 품는다. 와인을 마실 때처럼 시가 향을 표현할 때도 커피, 땅콩, 후추, 호두, 계피 등 다양한 재료가 등장하는 이유다. 이런 향을 바탕으로 순한 맛에서 시작해 중간에는 강한 맛이 살아나는 시가가 ‘블렌딩이 제대로 된’ 시가로 평가받는다. 시가는 와인뿐 아니라 코냑, 위스키, 커피 등 여러 종류의 음료와 함께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와인은 은은한 향이 있고 입안에서 맴도는 알싸한 느낌과 약간 텁텁한 맛을 함께 즐길 수 있어 좋은 궁합으로 꼽힌다. 은대환 소믈리에는 “와인과 시가를 함께 즐길 때는 서로의 밸런스를 많이 고려해야 한다”며 “어느 한쪽이 너무 무겁거나 가벼운 맛이면 서로의 특성을 살려주기 어려우므로 비슷한 성격을 가진 시가와 와인을 맞추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 그랜드인터컨티넨탈 호텔의 엄경자 소믈리에 역시 “시가가 워낙 향이 강한 만큼 좋은 와인을 마신 후 입속에 와인 향이 남은 상태에서 시가를 즐기는 것이 좋다”며 “시가를 피울 때는 입안에 남는 잔향이 길고, 강한 단맛과 알코올 도수가 높은 와인이 알맞다”고 말한다.
시가의 최고 단짝은 포트 와인 이렇게 따져볼 때 시가와 가장 잘 어울릴 만한 와인으로 그윽한 향과 달콤한 맛의 포트 와인이 자주 거론된다. 포트 와인은 포르투갈에서 생산되는 알코올 강화 와인을 말한다. 그 역사도 상당히 깊다.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 와인의 영국 수입이 전면 중단됐다. 이때 영국의 와인 수입업자들이 찾아낸 대안이 바로 포르투갈 와인인 것이다. 하지만 긴 여정 탓에 와인이 자주 변질되곤 했다. 수입업자들은 와인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알코올을 첨가해 알코올 도수와 당도를 높였다. 당시 포르투갈의 리스본 다음으로 큰 항구였던 오포르토(Oporto)에서 와인을 실어 나르다 보니 ‘포트 와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국내에서는 포트 와인의 맛이 달콤하고 목 넘김이 부드러워 식사 후 치즈나 케이크를 곁들여 마시는 디저트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유럽에서는 예전부터 포트 와인과 시가의 마리아주에 빠진 명사가 많았다. 오죽했으면 카를 마르크스가 힘든 현실에서 고통을 덜어줄 유일한 탈출구로 포트 와인 한 잔과 시가 한 개비를 꼽았을까. 단, 포트 와인과 시가를 함께 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포트 와인의 달콤한 맛과 시가의 향에 끌려 계속 와인을 마시다 보면 취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 포트 와인의 알코올 함량이 17도를 넘기 때문에 ‘적당히’ 음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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