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에서 철새들의 이동이 시작된 것은 한여름인 8월말이었다. 10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꽁꽁 얼어붙는 레나강과 콜리마강. 북극이 지척인 동토의 땅에선 봄인가 싶으면 여름이고 가을도 없이 겨울이 엄습한다. 철새들은 당장은 따뜻해도 곧 떠나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머뭇거리다간 소금 바다마저 얼어붙게 만드는 칼바람을 맞게 된다.
레나강과 콜리마강의 가창오리떼도 머나먼 비행길에 나섰다. 번식기인 지난 6월 알을 깨고 나온 새끼는 두 달이면 다 자라 어미와 함께 비행을 해야 한다. 겨우 두 달된 오리들이 얼마나 머나먼 길을 떠나는 걸까? 가창오리의 목적지는 서산의 천수만이다. 동서 7,000㎞, 남북 3,500㎞인 시베리아를 가로지르고, 몽골 대평원을 지나 한국까지 내려간다.
철새들이 천수만을 다녀온 기억으로 항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대로 물려받은 감각에 따라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기고 떠나는 게 분명하다. ‘대륙에서 대륙으로.’ 거칠고 험한 비행이지만 이동 자체가 철새의 삶이다.
가창 오리떼들의 중간 기착지는 바이칼호다. 둘레가 2,200㎞, 면적이 3만1천5백㎢로 세계에서 가장 큰 호수인 바이칼은 물을 좋아하는 오리류에겐 천국이나 다름없다. 오리떼에겐 야윈 배에 다시 기름살을 붙이고 기나긴 비행을 준비하는 정류장이다. 드넓은 호수에는 예부터 가창오리떼가 유난히 많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이 가창오리에게 붙인 이름이 바이칼 물오리란 뜻의 ‘바이칼 틸’(Baikal Teal)이다. 가창오리 외에도 꽁지가 긴 고방오리, 청록색 목이 고운 청둥오리 등이 초가을부터 바이칼호에 모여든다.
중국, 러시아, 몽골을 가로질러 태평양으로 흐르는 아무르강줄기에 머물던 가창오리떼도 9월이면 이동을 시작한다. 아무르강은 철새들의 주요 이동경로다. 길이 4,350㎞의 아무르강은 세계에서 8번째로 길다. 중국 이름은 헤이룽강이다. 아무르강은 몽골 대초원의 젖줄이다. 결빙기간은 레나강이나 콜리마강보다는 짧지만 12월부터 얼어붙는다. 10월이면 가창오리 외에도 시베리아를 떠나 남으로 가는 철새들로 북적거린다.
아무르는 새들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철새들은 아무르에서 목적지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 흑두루미 대부분은 동진(東進)해서 태평양을 건너 일본의 홋카이도로 떠난다. 흑두루미의 목적지는 홋카이도 이즈미와 한국의 순천만이다. 이즈미는 전세계 흑두루미의 90%가 겨울을 나는 곳으로 현지 주민들이 철마다 찾아오는 흑두루미에게 먹이를 주었더니 두루미가 두루미를 불러모아 세계 최대 흑두루미 도래지가 됐다. 재두루미는 일본과 한국의 철원 등으로 갈린다.
몽골대평원을 넘어서면 시베리아 곳곳에서 몰려든 가창오리떼들이 자연스럽게 수백마리씩 무리를 지어 비행에 합류한다. 처음에는 가족단위로 움직였다가 나중엔 수백마리가 무리를 지어다닌다. 힘이 센 수컷이나 암컷들이 앞장을 선다. 맞바람을 헤치며 남으로 방향을 잡다 지치면 다른 새가 바통을 이어받아 선두에 선다. 바람을 타지 못하고 바람에 휩쓸리면 먼지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이 철새의 운명이다.
붉은 햇덩이가 수평선 위에서 끓어 오르고 있는 저물녘의 천수만. 대륙을 횡단해온 철새들이 천수만에서 합류한다. 해질 무렵 가창오리떼들은 화려한 군무를 펼친다. 노을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새들의 춤판은 머나먼 비행을 무사히 마친 동료들을 위한 잔치인지도 모른다.
천수만이 가창오리떼들의 마지막 목적지는 아니다. 2~3주 정도 몸을 추슬렀다가 다시 비행을 시작할 것이다. 시베리아에서 불어온 북풍이 거세져 천수만의 바람이 매워지면 해남의 고천암호로 몸을 피해야 한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다시 천수만에 들렀다가 머나먼 시베리아로 여행을 해야 한다. 날개에 바람을 얹고 사는 철새 가창오리의 보금자리 천수만. 텅 빈 들판과 개펄뿐인 천수만은 새들이 있어 따뜻하다.
▲천수만 길잡이
▶교통
서해안고속도로 홍성IC에서 빠진다. 톨게이트를 나오자마자 고가도로 아래서 좌회전, 다시 안면도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하면 천수만으로 가는 길이다. 서산방조제로 막혀 있는 간월호 안에 철새들이 많다. 현재 약 40만마리의 철새가 모여있으며 11월 초순부터 해남으로 이동을 시작한다. 11월말이면 30%만 남는다. 지난 1일까지 가창오리 30여만마리, 노랑부리 저어새 70마리, 황새 2마리, 재두루미 67마리, 고니 2마리가 관찰됐다. 두루미도 많이 보인다. 이밖에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등도 많다.
천수만에서는 11월말까지 세계 철새기행전을 연다. 새들이 잘보이는 둑방을 따라 3개의 탐조대를 마련했다. 추수를 끝낸 논에 물을 넣어 오리류가 모이게 한 무논탐조대에는 청둥오리와 고방오리가 빼곡하게 앉아 있다. 조심성이 많은 가창오리는 호수 안쪽 모래톱에 십 수 만마리씩 모여 있다. 행사장 투어 버스를 이용하면 둑방에 설치한 새들을 관찰할 수 있다. 5,000원. 8개동의 전시관도 만들었다. 전시장은 안내관, 철새주제관, 새소리 동영상관, 철새영상관, 실시간 동영상관, 사진전시관, 홍보관 등으로 이뤄져 있다. 입장료는 2,000원. (041)669-7744
▶먹거리
천수만으로 가기전 남당포구에는 먹을거리가 많다. 12월초까지 대하가 나온다. 행사장에서 가까운 간월도 맛동산(041-669-1910)은 굴밥이 별미. 청국장도 판다. 홍성읍의 홍성온천 (041-633-6666)은 피로를 풀기에 좋다. 옆에 여관도 붙어 있다. 간월도에도 민박집이 많다.
▶볼거리
간월암은 천수만에 붙어있는 작은 암자다. 썰물 때는 뭍이지만 밀물 때는 섬이다. 간월암은 태조 이성계를 도와 한양을 도읍으로 정했다는 무학대사가 수도했던 곳이다. 간월(看月)이란 달을 보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뜻이다. 간월암은 단출하다. 절 마당에는 근사한 사철나무 한 그루가 서있고 대웅전과 산신각, 기도각 등 3동의 법당이 있다. 암자에 들어서면 마치 선상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바람이 심해 기와를 철사로 묶었다.
▲가창오리 ‘일본대학살’새들도 일본을 버렸다
한반도로 몰려오는 까닭 - 가창오리는 대부분 한국행이다. 전세계 가창오리의 90%가 한국에서 겨울을 난다. 한반도가 가창오리의 주요 서식지가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아무도 정확하게 모른다.
한때는 아시아 전역에서 발견됐다. 일본 역시 중요한 도래지 중 하나로 흔하게 가창오리를 볼 수 있는 곳이었지만 언제부턴가 가창오리는 일본을 등졌다. 1947년 일본 서남부에서 사냥꾼들에 의해 하루에만 5만마리가 잡혔으니 그럴 만도 하다. 80년대엔 일본 전역에서 겨우 1,000마리 정도밖에 관찰되지 않았다. 새들은 본능적으로 삶과 죽음의 냄새를 정확하게 맡는 모양이다.
가창오리는 이미 한국을 찾는 대표 철새가 됐다. 북한에서는 얼굴이 태극모양을 하고 있어 태극오리, 반달오리라고 부른다. 그만큼 외모가 근사하다.
뒷머리는 진주처럼 까맣게 반짝거리고, 눈 아래로는 황금빛 털이 복스럽게 자란다. 위장한 인디언처럼 얼굴에는 하얀띠가 생긴다. 가슴은 붉은 포도주빛으로 윤이 난다. 비록 몸집은 작지만 고니나 두루미 못지 않게 곱다. 이미 오래전 국제 보호조로 지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