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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신화 스크랩 아소카 왕
일 행 추천 0 조회 224 12.02.22 07: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아소카왕

“그리스인 왕 안티오코스가 다스리던 곳에서, 또한 프톨레마이오스, 안티고노스, 마가스, 알렉산드로스 등이 다스리던 땅을 넘어서, 남쪽으로는 콜라스와 다얀(인도 남부의 왕국)과 탐라파르니(스리랑카)까지, 수만 리에 걸친 드넓은 땅과 국경에 걸쳐 정법(正法)이 다스리게 되었다.” (아소카 법칙(法勅) 가운데)

인도 최초의 통일 제국 마우리아 왕조와 찬드라굽타

석가모니가 최초로 설법을 시작한 곳으로도 유명한 사르나트의 고고학미술관에는 윗부분에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자리한 돌기둥 유물이 있다. 아소카왕 석주(石柱)로 불리는 이 돌기둥의 사자상은 인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 제국인 마우리아 왕조(또는 제국)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유물이자, 오늘날 인도의 국가 상징이다. 마우리아 왕조를 창건한 찬드라굽타(기원전 4세기말~3세기초)는 마가다 왕국의 크샤트리아 계급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독자적인 세력을 키워 기원전 322년~317년 사이 마가다 왕국의 난다왕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조를 창건했다.

 

이 시기 인도 북서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공과 철수, 그리고 이에 따른 그리스 세력의 영향력이 남아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 찬드라굽타는 그리스 세력을 견제하면서 인더스강과 갠지스강 유역의 넓은 지역으로 지배력을 확장시켰다. 오늘날 인도 비하르주의 주도 파트나시 지역에 자리했던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 파탈리푸트라페르시아, 그리스 상인을 포함한 다양한 인종과 종족 출신 사람들이 왕래하는 국제도시로서 번영을 누렸다.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시리아왕 셀레우코스 1세의 사절로 찬드라굽타의 궁정에 파견되었던 메가스테네스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파탈리푸트라는 570개의 누대와 64개의 성문을 갖춘 약 35제곱킬로미터 규모의 도시로, 인구도 40만 명에 달했다. 메가스테네스는 파탈리푸트라의 이러한 규모도 규모지만, 찬드라굽타의 정부 및 통치가 고도로 조직화, 체계화되어 있다는 점에 경탄했다. 이러한 조직화된 통치에 따라 국민들 사이에 질서와 기율이 잘 잡혀 있어 절도를 범하는 이가 드물 정도였다.

대제국을 이룩한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아소카왕


마우리아 왕조는 제3대 아소카왕 시대(약 기원전 273~232년)에 전성기를 누렸다. 아소카왕 시대에 제국의 판도는 서쪽으로는 오늘날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동쪽으로는 오늘날의 방글라데시와 인도 아셈주 지역, 남쪽으로는 타밀나두 지역을 제외한 인도 남부 케랄라주에 이르렀다. 남부의 일부 지역을 제외하면 사실상 인도아대륙(亞大陸) 전역을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왕자 시절 아소카는 부왕(父王) 빈두사라의 팽창 정책을 도우며 명성을 쌓아나갔다. 마우리아 제국의 넓은 판도를 전적으로 아소카왕이 이룩한 것은 아니며, 아소카왕이 선대의 정복 사업을 계승하여 마무리 지었다고 보는 편이 낫다.

 

그의 명성이 높아짐에 따라 수시마 왕자를 비롯한 형제들의 견제와 시기도 커져갔다. 왕위 계승을 둘러 싼 형제들의 견제가 심해진 끝에 아소카는 남부 지역으로 사실상 추방당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했지만, 빈두사라는 반란이 일어나자 아소카를 다시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빈두사라가 세상을 떠난 뒤 장남 수시마는 아소카를 제거하려 했지만, 아소카는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공격하여 수시마를 비롯한 다른 왕자들을 모두 죽였다. 부왕의 팽창 정책을 계승한 아소카왕은 즉위 뒤 1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 정복왕으로서 위명을 떨쳤다.

아소카왕의 이상(理想). 다르마에 바탕을 둔 정치를 꿈꾸다


아소카왕은 인도 남동부의 칼링가 지역을 치열한 전쟁 끝에 정복했다. 칼링가 측 10만 명, 아소카왕의 부하 1만 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그는 남쪽 일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지만, 전쟁의 피비린내 나는 참상은 그를 번민하게 만들었다. 정복지를 돌아보며 그는 말했다. “이런 것이 승리인가? 이것은 정의(正義)인가 불의인가? 이것이 용기라면 무고한 아이와 아녀자들을 죽이는 용기가 아닌가? 내가 한 일은 제국을 넓히고 번성시키기 위한 것인가? 다른 왕국을 파괴하기 위한 것인가? 남편 잃은 여인, 아버지를 잃은 사람, 아이 잃은 부모. 이것은 승리의 징표인가 패배의 징표인가? 시체에 몰려드는 독수리와 까마귀들은 죽음과 악(惡)의 사자들이 아닌가?”

 

이제 아소카왕은 불교를 깊이 받아들이고 기원전 260년경부터 불교를 제국의 공식 종교로 만들었다. 그리고 새로운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르마(Dharma)에 바탕을 둔 정치였다. 다르마에는 다양한 뜻이 있지만, 아소카왕에게 그것은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윤리이자 석가모니의 가르침’이었다. 아소카왕이 인도 각지에 세운 비석과 돌기둥에는 다르마의 의미와 법칙(法勅)이 새겨져 있다. 그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다.

 

‘육식을 버리고 살생을 삼가며 흰개미에서 앵무새까지, 돌고래에서 하마까지 모든 생명을 보전하라.’ ‘종교들 사이의 소통은 선한 것이다. 다른 이들이 따르는 가르침에도 귀 기울이고 그것을 존중하라. 대왕께서는 모든 이가 다른 종교들의 선한 가르침을 잘 익히기를 바라신다.’ 다양한 인종, 종족, 문화, 종교 등을 포괄하는 광대한 제국을 다스리자면, 갈등을 지양하고 통합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아소카왕은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요컨대 아소카왕에게 불교는 제국의 통합과 통치를 위한 이념이기도 했다.

보편적 법치(法治)와 보편적 이익을 위한 정치를 행하다


‘법률은 한결같아야 하고 판결은 일관성 있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게 나의 신념이다. 사형 선고는 즉시 집행되어서는 안 되며 사형수는 감옥에서 적어도 사흘 이상 머물러야 한다. 이 기간 사형수의 친지들은 감형의 자비를 호소할 수 있고, 그렇게 호소하는 이가 없다면 사형수는 내세에서의 복락을 위해 금식을 포함한 (종교적) 의무를 지킬 수 있다.’

 

‘나는 길을 따라 반얀나무를 심어 모든 짐승과 사람들에게 그늘을 만들어주었다. 나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우물을 파고 쉼터를 짓고 물이 흐르는 곳을 만들어, 모든 짐승과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대단치 않은 업적이다.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이미 예전의 왕들이 행했던 것들이다. 내가 그러한 일들을 시행한 것은, 사람들이 다르마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소카왕의 중요한 업적으로 일컬어지곤 하는 것이 바로 재판의 공정성과 함께 보편적 법치(法治)를 시행하고자 했다는 점이다. 또한 그는 제국 각지에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관개시설을 만들었으며, 의료시설도 확충했다. 더구나 이런 모든 시설을 이용하는 데 차별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대제국을 운영하는 통치자로서의 고민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제국의 어느 지역에서나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적용되는 보편적 법치를 시행하고, 인프라와 공공시설을 종족이나 지역에 따른 차별 없이 건설하고 이용할 수 있게 했다.

 

아소카왕은 광대한 제국을 자아나파다, 즉 군(郡)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중요한 지역에는 왕족을 태수로 파견했지만, 그렇지 않은 지역에는 태수를 감시, 감독하는 관리나 밀정을 중앙에서 파견했다. 치안권, 행정권, 조세징수권을 지닌 태수 밑에는 다시 현(縣)을 다스리는 현령들이 있었다. 아소카왕 사후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태수와 현령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아소카왕처럼 능력이 탁월한 강력한 군주가 중앙집권적 통제를 효과적으로 운용, 유지하지 못하자 분열과 쇠퇴가 빠르게 진행되었던 것이다.

제국의 꿈, 전륜성왕의 꿈은 스러지고


아소카왕 사후 마우리아 왕조는 반세기 정도 지속됐다. 기원전 185년 마우리아 왕조의 마지막 통치자 브리하드라타가 군사령관 푸샤미트라 숭가에 의해 살해당했다. 브리하드라타 시대에 마우리아 제국의 판도는 크게 축소되어 사실상 수도 파탈리푸트라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특히 북서부에는 그리스계 인도 세력이 강해졌다. 푸샤미트라 숭가가 세운 숭가 왕조는 한 세기 조금 넘게 유지됐지만 그 영향력은 전성기 마우리아 왕조에 비할 수 없이 약했다. 이후 인도는 기원후 320년경 북인도를 통일한 굽타 왕조가 들어서기까지 분열되었고, 굽타 왕조의 판도도 마우리아 왕조에는 크게 못 미쳤다.

 

아소카왕은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佛典)에는 아육왕(阿育王) 또는 아수가(阿輸迦)로 기록되어 있다. 아소카왕은 불사리를 8만4천 개로 나누어 제국 각지에 탑파(塔婆)를 세운 것으로도 유명하다. 8만4천 개라는 숫자에는 과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를 통해 아소카왕은 제국과 주변 지역으로까지 불교를 보급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하는 아소카왕은 고대 인도 종교와 신화에서 세계를 통일, 지배하는 이상적인 제왕, 즉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이상을 충족시킨 인물, 즉 세속의 전륜성왕으로도 일컬어졌다. 전륜성왕은 무력이 아닌 정의와 정법(正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제왕이기도 하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통치이념으로 종교를 크게 장려한 군주들

아소카왕 아소카왕
인도 최초의 통일대제국을 건설하고 불교를 장려한 군주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1세
(재위 306∼337) 기독교 신앙을 공인한 로마황제
샤를마뉴 샤를마뉴
(재위 768~814) 신성로마제국 황제. 교황권을 수호하며 서유럽의 종교적 통일 이룸

 

 

 

표정훈 / 저술가, 번역가
글쓴이 표정훈씨는 서강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번역, 저술, 칼럼과 서평 집필을 하고 있다. 이를 위해 2만 권의 장서를 갖춘 서가를 검색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한국 예술종합학교에서 강의했으며 <중국의 자유 전통>,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등 여러 권의 책을 번역하고 <탐서주의자의 책>, <책은 나름의 운명을 지닌다>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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