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원한 거북선의 수모
임병식 rba1144@daum.net
허접하고 가치 없는 것이 수모를 당하는 건 상관이 없을 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것이 아닌, 한 나라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거북선을 이름인데 그것이 하찮은 취급을 받는 게 여간 어이가 없고 분통이 터지는 것이 아니다.
한때는 지역 홍보물로써 다투어 건조를 했는데 지금은 흉물이 되어 방치거나 해체가 되고 있으니 속이 상한다. 어디 거북선이 퇴치되는 대접을 받아야 할 것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발명품은 한글과 금속활자, 그리고 거북선이다. 그 중에서도 거북선은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였을 때 앞장서 구출해 낸 구국의 함선이다. 그런데 그런 거북선이 애물단지에 그치지 않고 흉물의 대명사가 되고 있어 안타깝다. 전남의 사정이나 경남의 사정이 두루 마찬가지다.
나는 몸통은 딱히 거북을 빼닮지 않았지만 치켜든 머리가 영락없는 거북이 형상을 하고 있는 수석 한 점을 소장하고 있다.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당파전술( 撞破戰術)을 구사하던 모습이 그려진다.
임진왜란을 말하면서 거북선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거북선은 주력전함으로서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전투 시 연전연승을 거두게 한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거북선 진수식은 임진년 4월 12일 가졌다. 왜군이 처 들어오기 바로 하루 전이었다. 그렇지만 왜적을 맞아 싸운 첫 옥포해전에는 거북선을 출동시키지 않았다. 5월 29일, 두 번째 전투인 사천해전에 본영의 거북선과 방답진 거북선을 출동시켰다. 이때 귀선돌격대장은 이기남과 이언량이었다.
여러 기록을 감안할 때 거북선의 크기는 선체길이 약 21.5미터, 너비는 7.36미터, 높은 부위는 6미터로 추정된다. 승선인원은 130명 정도, 노 젓는 격군은 90여명, 포수 30여명, 사수 10여명. 이 대형 거북선은 온몸이 무기나 다름없는 무적의 돌격함이었다.
입에서는 연막을 품어내고 등에는 철갑을 씌우고 도추(刀錐)를 꽂았으며 옆구리에서는 대포를 쏘았다. 거북선이 크게 맹위를 떨친 전투는 한산도 대첩이었다. 학의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서서 거북선으로 하여금 쳐들어가게 하여 적선을 깨 부셨다.
이리하여 대승을 거둔 만큼 임진왜란을 말 하면서 거북선 활약을 빼놓고는 얘기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여러 지자체에서는 거북선을 내세워 자기고장을 홍보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남에는 여수에 2척, 해남우수영에 1척이 있으며, 경남에는 통영을 비롯하여 거제 등 도합 8척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바다에 띄워져 노를 저으며 운용하는 배는 한척도 없다. 거의가 그냥 물에 띄워놓거나 육지에 끌어올려 전시용으로 놔두고 있을 뿐이다.
전시용 거북선은 1986년 여수에서 먼저 만들었다. 이태 전 여수와 돌산 간 대교가 준공되자 관광객 유치를 목적으로 향토예술인 정홍수 선생과 김종길 여수건재회장이 의기투합해 건조했다.
이때 철저한 고증을 위해 전남대연구소에 용역비 8,300만원이 지불되었다. 건조시 감독은 주로 정홍수 선생이 맡고, 목재와 자금조달은 김종길 회장이 부담했다. 들어간 금액은 밝히지는 않았지만 그로인해 한동안 경영이 휘청거릴 정도였다고 알려졌으니 얼추 30억여 원이 들어가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 거북선은 한때 여수를 알리는 상징물 역할을 했다. 외형은 거북 형태에다 외판에는 못이 박혀있고 돗대가 달려있다. 돌출한 거북 입에서는 포를 쏘게 되어있고, 배 양옆에는 각각 여덟 개의 포문과 여덟 개의 노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닺은 용머리 밑에 거치했다.
내부 구조는 2층으로 되어 있으며 1층 평형수가 채워지는 공간은 대신 군량미와 부식, 식수, 취사도구, 병장기와 병사 숙소로 사용했다. 그리고 2층은 노 젓는 격군, 포수와 궁수, 화약보관과 환자치료 공간, 휴게장소, 관측, 지휘소 등으로 활용하였다.
여기서 잠깐, 의문을 가질 법 하다. 배 양편에 기껏 8개씩 모두 16개의 노로써 어떻게 130명이 탄 큰 배를 움직였을까. 그것은 노를 젓는 숫자에 있다. 하나의 노에 적어도 4~5명이 달라붙었던 것이다. 격군의 노동강도는 무척 심해여 도망자가 나오곤 했는데 붙잡아 처형했다고 한다.
또한 포를 운용하는 것도, 지자 총통은 거북선 입이나 후미에 거치하고, 구경이 작은 현자총통은 옆구리에서 쏘았단다. 기록에 보면 거북선 내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숫자가 보이는데, 이는 적의 화살이 총구를 통해 날아들었음을 보여준다.
여수시에서는 돌산 거북선이 민간인에 의해 만들어진 이후, 2014년 다시 26억 원을 투입하여 거북선을 건조해 중앙동에 설치했다. 이것이 2019년 방문객이 추락하는 사고가 나자 4억 6천만 원을 들여 보강공사를 마쳤다.
그러나 이것은 노도 설치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배의 골조에 해당하는 용골은 반드시 황장목을 써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전체 재질을 수입목재로 만들어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고 있다.
그러기는 통영과 거제의 거북선도 마찬가지다. 경남 통영시는 제대로 된 거북선을 재현한다면서 ‘1592년 거북선’이란 이름을 붙여 배를 건조했으나 금년 7월 11일 이 거북선을 부숴서 불태우고, 쇠는 고철로 처분했다.
경남도는 2008년 거북선 제작을 추진하면서 철저한 고증은 물론, 목재도 금강송을 사용하겠다며 16억 원을 들여서 2011년 완성했으나 실상은 값싼 수입 소나무를 81%나 사용한 것이 드러났다. 그 바람에 한동안 명품으로 추앙받다가 짝퉁거북선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한편 거제에서는 거북선을 지세포 앞 바다에 띄웠으나 바닥에 물이 차오르면서 선체가 옆으로 기울어져 버렸다. 거북선을 넘겨받은 거제시는 그것을 끌어올려 놓았지만 그간 유지비로 1억5천 만 원을 썼지만 썩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후 경매시장에 내놓아 154만원에 낙찰된 수모를 겪었고 그것마저 나중에 인수자도 포기해 버렸다.
여수 돌산의 거북선도 10년 전 헐값 2억 원에 낙찰되었다. 그러나 그 인수자도 영업이 시원치 않아 지금은 매물로 내놓고 있으나 매수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나마 여수의 거북선은 물은 새지 않는데 수령이 오래된 탓에 장기 보존은 어려운 실정이다.
왜 거북선이 이토록 수난을 당하는 것일까. 그런데는 이유가 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값이 비싸게 나가는 황장목을 쓰지 않는데다 한 선을 제대로 만드는 기술자가 없다는 것이다. 30여년 전만해도 바닷가에 나가면 배를 만드는 기술자를 볼 수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가 없다. 굳이 그런 기술자의 손을 빌리지 않고도 손쉽게 합성재료로 써서 배를 만들 수 있어서다.
안타까운 일이다. 옛날의 지폐에는 거북선이 있었고, 정주영 회장은 그 지폐를 가지고 외국은행에서 당당히 조선소 건설 자금도 조달받았다는데 그런 명물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냥 놔 두고 보아야 할까.
이미 430년 전에 튼튼한 거북선을 만들어서 싸웠는데 지금은 그럴 능력도 노하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인가. 용맹을 떨치던 거북선은 1597년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며 빼앗겨 버렸는데, 그 참담함을 겪은 이후로도 제대로 복원된 배를 만들지 못한단 말인가. 여기저기의 배들이 모양과 크기도 각기 다른데 그것조차도 날림으로 만들어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수모를 겪고 있으니 보는 마음이 안타깝고 씁쓸하기만 하다. (2023)
첫댓글 거북선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관심에
감탄이 절로나옵니다. 이순신학교에서
공부를했다는 수강생들도 아마 이런정도의
지식과 괸심은 없을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을 이순신 학교 단톡방에
공유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수에 거주하는 사람으로서 평소에 관심이 많아서 써보았습니다.
부족한 부분도 많고 독단으로 비춰지는 부분도 있을 것인데
그런 부분은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황장목은 진남관이나 거북선 건조에 필수품입니다.
당시 금오도는 봉산으로 지정하여 황장목을 키우고 민간인 출입도 엄금하여
황장목이 울창하여 거무섬으로 불러지기까지 했으니 국가의 관심을 알 수 있지요.
오늘에 와서도 황장목의 재목 우수성을 생각해 봅니다.
황장목으로 진짜 거북선다운 배가 건조되어 이순신장군의 위상과 여수의 호국 의지가
만천하에 드러나길 기원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수 거북선은 금호도의 황장목이 쓰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느 기록에도 나무를 가져온 곳이 나타나 있지 않는데, 몇년뒤에
진남관이 건립시는 금호도의 황장목이 쓰였다고 하더군요.
물길이 바뀌는 날을 측정하여 금호도에서 나무를 띄워보내면 그것이
여수 좌수영앞으로 도달했다고 하더군요.
아직까지 제대로 복원된 거북선이 하나도 없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거북선에 대한 선생님의 애착과 안타까운 심정이 재게 전이된 것같습니다 거북선을 논하기 전에 역사 속에서 전라도인의 기개와 지조, 우국충정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거북선은 이곳 여수에서 건조되었고 구한말까지도 전라좌수영에 보존되어 있었지요. 이는 구한말의 관료이자 문장가였던 김윤식의 시문을 비롯하여 여러 문헌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거북선의 본향에서 비록 전시용일지라도 철저히 관리해야 함은 두 말할 나위가 없을 뿐더러 원형 복원에도 심혈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여기저기 재현해 놓은 거북선은 모형이 제각각이고 관리상태도 부실하여 눈살을 찌뿌리게 합니다.
사용한 나무도 수입목을 써서 견고하지도 않고 허술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투를 했던 거북선은 1597년 칠천량 패전을 끝으로 자취가 사라졌습니다.
기록에 보면 정조때만 해도 50척 가까운 거북선이 있었고, 조선말 '매천야록'을 쓴 황현선생 글을
보면 노는 젓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 격꾼들이 드러누어 허리를 굽혀 앉았다 누웠다한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조선말까지도 임진왜란때의 거북선은 아니지만 이후의 거북선이 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선생님 거북선 안목이 대단하십니다 황장목도 처음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김선생님, 읽어주시고 댓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2023 여수문학발표. 2023여수예술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