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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꿈 보다 큰 `삶` 원문보기 글쓴이: 녹비
[한국사 미스터리]아라가야의 비밀, 함안 마갑총 | ||||
1992년 현충일인 6월6일 아침 7시.
모일간지의 함안지국 배달소년 이병춘군(함안종고)의 눈에 이상한 물건이 발견됐다. 신문을 돌리던 이군이 도항리 아파트 신축공사장을 막 지나던 순간이었다. “웬 철조각이야.” 아파트 뼈대는 다 들어선 상태에서 배수관 설치작업 중이던 현장. 소년은 포클레인으로 퍼낸 흙더미 속에서 철편을 우연히 보았다. 사학과(창원대) 출신 지국장으로부터 평소 함안이 아라가야의 중심이라는 말을 누누이 들었던 소년이었다. 소년은 철조각을 들고 곧바로 지국으로 달려갔다.
◇배달소년과 지국장의 위대한 발견=7시30분, “이거 뭔가 한번 봐주세요.” 생선비늘처럼 생긴 철편을 본 안삼모 지국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소년과 함께 현장으로 뛰었다. 철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8시, 심상치 않은 감을 느낀 지국장은 곧바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전화를 걸었다. 연구소엔 사학과 동기생들이 근무하고 있었기에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이 많았다. 마침 인근 성산산성(가야시대 산성) 조사를 벌이고 있던 창원문화재연구소 박종익 연구사가 그 연락을 받았다.
8시30분, 박 연구사가 현장으로 달려갔다. 처음엔 별 것 아니겠지 했다. 하지만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포클레인이 파 헤쳐놓은 흙더미 속에 미늘(비늘 모양의 갑옷 쇳조각)들이 보인 것이다. 지금까지 함안의 가야고분에서 철제갑옷이 출토된 적이 없었다. 그때가 아침 9시쯤. 공사 현장의 포클레인 기사가 막 공사를 재개하려던 순간이었다. 박종익씨는 당장 공사중단을 요청했다. 그 찬란한 가야시대 말갑옷이 환생하는 순간이었다.
만약 배달소년이 눈여겨보지 않았던들, 지국장이 역사학도 출신이 아니었던들, 공사가 재개되기 전인 아침 일찍 발견하지 않았던들 이 깜짝 놀랄만한 유물은 포클레인의 삽날에 무참히 깨져 흩어졌을 것이다. 10분만 늦었어도….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아라가야의 역사 편린은 이렇게 한편의 드라마처럼 1,500년 만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7월5일, “발굴이 끝났다”는 홍성빈 연구소장의 전화를 받고 현장에 간 필자는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입은 갑옷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 생생한 말갑옷이 발견됐단 말인가. 발굴현장에서 어떤 유물이 발견돼도 고고학자는 흥분해서는 안된다는 게 상식. 그런데 이같은 완벽한 형태의 말갑옷은 앞으로 더이상 볼 수 없을 것이기에 그만 ‘오버’한 것이다.
드라마와 같은 발굴비사를 현장 발굴자들에게 들은 필자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심정도 오버랩 되었다. 이미 무덤의 뒷부분과 함께 말갑옷 한쪽 부분이 포클레인의 삽날에 이미 없어진 채 깊은 상흔으로 남았기 때문이었다.
◇말갑옷에 얽힌 고대의 전투=말갑옷은 머리·목·가슴, 그리고 몸통 부분으로 확연히 구분되었다. 마갑의 부위별로 미늘의 크기를 달리해서 만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말의 얼굴을 가렸던 마주(馬胄)도 별도로 놓여 있어 말의 갑옷으로 더이상 완벽한 것은 없었다. 지금까지 동래·합천·경주 등지에서 말갑옷에 사용한 것으로 여겨지는 미늘편들이 가끔씩 출토된 게 고작이었다.
아시아 최고(最古) 마갑은 중국 후베이성에 있는 수현(隨縣) 증후을묘(曾侯乙墓)에서 발견됐다. 이 무덤은 증국(BC 450년)이라는 소국의 왕묘인데 부장품 중 소가죽으로 만든 인간용 갑옷과 말갑옷이 있었다. 이 갑옷은 전차전을 수행할 때 입었을 것이다. 또 가볍고 강한 소가죽을 바른 갑옷을 전차를 끄는 말에 입히면 전차와 말, 사람이 삼위일체가 되어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그런데 전차는 진(秦)·한(漢)대를 거치면서 소멸하고 서서히 기마병·보병으로 전쟁의 주력이 바뀐다. 기병의 발달과 함께 기마용 말갑옷이 발달한다. 말의 몸에 늘어뜨려 가슴까지 보호하는 가죽제 말갑옷, 즉 당흉(當胸)이 유행했다.
만약 기병과 보병이 뒤섞여 싸울 때는 긴 자루의 무기를 지닌 보병이 먼저 말을 공격하여 기병의 전투력을 잃게 한다. 이 경우 말의 앞다리, 머리, 가슴 부위가 공격목표이다. 보병의 경우 창(槍) 등으로 근육이 적고 타격에 약한 말의 앞다리를 쳐서 주저앉힌 뒤 말의 가슴을 찌르는 것이 가장 유력한 공격방법이다. 이런 보병의 공격을 막기 위해 기병은 말갑옷으로 앞다리, 머리 가슴부위를 싸넣은 것이다. 이 경우 보병은 앞다리 공격을 위해 자세를 낮추고 긴 창으로 다리 밑부분을 공격하게 된다.
그러나 이
◇아라가야의 위상 연구에 획기적인 자료=우리나라에 마갑이 보급·실용화한 것은 3국이 치열한 전쟁을 벌이던 4~5세기 무렵. 고구려 벽화 중 동수묘(冬壽墓)와 삼실총, 쌍영총 등의 벽화에 말에 마갑과 마주를 착용시킨 중무장한 전사의 모습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가야지역에서 출토된 마갑·마주 등은 AD 400년 고구려의 남정(南征) 때 수입된 게 아니냐는 분석도 할 수 있다. 어쨌든 말갑옷이 확인된 도항리 무덤은 대형의 나무곽무덤(大型木槨墓)으로 나무곽의 크기는 길이 6m, 너비 2m30㎝, 깊이 1m 규모이다. 중앙에 시신을 안치하고 오른쪽 가슴부위에 길이 83㎝의 금판을 장식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을 놓았다. 그 양곁으로 마갑을 펼쳐 놓은 것이다. 그리고 발치쪽에서는 ‘목긴 항아리(長莖壺)’ 등 토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을 종합하면 이 무덤의 조성연대는 4세기 후반~5세기 초반으로, 주인공은 최소한 수장급(首長級)으로 추정되고 있다.
말갑옷의 크기는 총길이 2m26㎝~2m30㎝, 너비 43~48㎝이다. 이 마갑총의 발굴조사는 가야 중에서도 함안을 중심으로 한 고대왕국 아라가야(阿羅伽倻)의 정치적 실체와 고구려·일본과의 교류를 구명하는 데 필요한 획기적인 자료를 학계에 제공했다.
한 가지, 이 마갑총을 발굴하는 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배달소년(이병춘군)과 신문지국장(안승모씨)은 함안군수로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안승모씨(41)는 그 인연 때문인지 현재 함안문화원 사무국장직을 맡고 있으며 배달소년 이병춘씨(29)는 창원에서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고향의 뿌리인 아라가야에 대한 이들의 가없는 애정, 그리고 문화유산을 지키려는 투철한 사명감은 영원히 고고학사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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