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23 - 히라카타에서 버스로 왕인묘를 참배하고는 백제왕 신사에 가다!
오사카 여행 3일째인 2024년 11월 27일 요도야바시역 (淀屋橋) 에서 게이한 본선(京阪本線) 을 타고 옛날
에 백제인들이 건설한 도시 히라카타시역 (枚万市駅) 에 내려, 남광장 1번 승차장에서 나카마치
(中町) 행 63번 버스를 타고 백제왕신사가 있는 나카미야 (中宮)를 지나 키타후지사카 (北勝阪) 에 내립니다.
거리에 왕인묘 표시가 보이는지라 왕인공원에 들어가 찾아보니 없는지라 나와 어떤 할머니가
자기 가던길과 반대로 7~ 8분이나 걸어 골목길에 도착해 방향을 가르켜 주니 그 후는
우리끼리 10분을 더 걸어서 왼쪽 주택가 언덕길을 한참 올라가 왕인묘에 도착하는데.....
여기 왕인묘 (王仁墓) 주소는 2 chome -17-4 Fujisaka Higashimachi hirakata. 입니다.
왕인은 5세기 초인 405년에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 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와 오진왕 (応神天皇 응신
천황) 의 태자에게 글을 가르치고 일본에 한문(漢文) 과 유학(儒學) 을 가르쳤다는데
김종필 총리가 찾아와 식수를 했으며 부여와의 인연으로 문화교류를 한 흔적인 사진이 게시되어 있습니다.
일본은 712년에 엮은 고사기와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라는 역사서에 왕인 박사 얘기가 나오니,
일왕(응신천황) 은 일본에 사신으로 온 아직기에게 더 나은 박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는 왕인을
초청한 것인데.... 정작 1145년에 편찬된 우리나라 삼국사기에는 왕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는 일본 보다 425년이 늦은 고려 중엽에 김부식 등이 편찬한 삼국사기인데
하지만 왕인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일본서기가 왜곡이 심하다고 심지어 위서로 까지 폄하하면서도
정작 저 왕인에 대한 기록은 그대로 옮겨 우리나라 교과서에 까지 실었으니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도쿄 우에노 공원은 특히 온시코엔 (上野恩賜公園) 이라고 하는데.... "일왕(천황) 이
천황가의 토지를 시에 기증했으니 임금이 선물한 우에노의 공원" 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공원에는 왕인 박사의 비 (博士王仁碑) 가 넒은 부지를 차지하고 서 있습니다.
이제 백제왕 신사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야하기로 주민에게 물으니 올라가라기에
100미터를 가니 큰 도로가 나오고 버스정류장이 있기는
한데.... 우리가 탈려는 버스가 없을뿐더러 배차 간격도도 엄청 긴지라 돌아섭니다.
다시 조금 전에 우리가 내렸던 버스 정류소를 찾아가는데.... 주택가를 내려와 우회전을 해서는
병원을 지나 공원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정류소가 보이지 않는지라 다시 좀 전에
내렸던 키타후지사카 (北勝阪) 정류소에 도착해서 보니 여기는 “하차 전용” 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하차 전용 정류소 라니.... 가만히 생각하니 여긴 도로가
좁은지라 내리고 타면 시간이 많이 걸리니 뒤에 차들이 많이 기다려야
하는지라 불편하니 그런 모양인 것 같아 작은 도로를 내려가 큰 도로를 만납니다.
도로를 건너가니 버스 정류장이 있는지라 20분 가까이 기다려서는 버스가 오기로
타면서 히라카타역으로 가느냐고 물으니 운전수는 아니라며 길을 건너 가랍니다.
해서 다시 길을 건너 와 반대쪽으로 50미터를 가서 버스 정류소에 도착했는데....
우리 상식으로는 일본은 좌측 통행이니 그럼 여기에 서는
버스는 150미터를 내려가 좌회전을 하면 좀 전에 우리가 내렸던 정류소 인데?
10여분을 기다려서는 도착한 63번 버스는 이 버스 전면에 히라카타역이라 적혀 있는지라
안심을 하며 타고는 150미터를 가기로 주의깊게 살피니 버스는 왼쪽 길로 좌회전을
하는게 아니라.... 그냥 큰 길로 쭉 내려가니 우리가 왔던 것과는 반대 방향이라 안심합니다.
이윽고 나카마치 (中町 중정) 정류소에서 내려서는 50미터를 걸어서 백제왕신사
로 찾아 가는데 일본의 신사는 아주 적은 곳은 신관이 상주하지
않는데.... 그래도 여긴 흰적삼에 붉은 치마를 입은 신녀가 상주하는 모양 입니다.
우리가 신사로 들어가니 여긴 평소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지라 저 신녀가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가 모처럼 방문객이 들어오니 자리를 잡으며 오미쿠지 부적을
팔 준비를 하는데.... 우리 마눌은 독실한 크리스챤이니 저 건물을 피해 옆으로 가버립니다.
나는 엉거주춤 서 있는데.... 여긴 다른 곳도 아니고 백제왕 신사이니 백제 조상들을 모시는
곳이라 저기 가서 오미쿠지나 아닌 다른 소품이라도 하나 팔아 주어
자리를 잡고 바라보는 신녀를 무안케 하지않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마눌이 삐칠 것이라.....
그래서 신녀에게 가는 것은 안되지만 배전은 구경하자 싶어 신녀가 잇는 옆 건물은 외면
하고 직진하여 전면 건물에 가서 조상님들이 계신 곳이니 손만 모으고는
동전을 찾아보니.... 백엔은 없고 십엔과 1엔짜리 몇개라 무안치만 그것이라도 넣습니다.
660년에 백제가 망했을 때 부여성과 웅진성이 함락됐으니.... 소정방은 의자왕등 왕족과 귀족에 부유층등
12,000명을 붙잡아서 당나라 군대가 철수하자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러니까
소정방은 전리품과 1만 2천 포로를 잡아 중국 대륙을 몇달 걸어 장안에서 황제에게 승리를 복명한 것입니다.
당나라군이 거의 철수하고 신라군도 많이 돌아가니 부흥운동을 일으킨 왕족 복신은 일본 왕(천황)
에게 왕을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사이메이 여왕은 인질로 와 있던 의자왕의 동생
(삼국사기에는 아들로 나옴?) 풍에게 5천 왜군을 주어 한반도로 나가 백제 왕위를 잇도록 합니다.
그러고는 수도를 나라현 아스카에서 규슈 후쿠오카로 옮긴 다음에 총동원령을 내려 배와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비축해서는 663년에 1천척 배에 3만 왜군을 한반도로 보냈으니 백강(금강) 하구에서
당나라 수군의 화공을 당해 대패한후 철수하니..... 수많은 백제인들이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합니다.
백제인들은 나당연합군의 침략전쟁과 이후 부흥운동에서 많이 죽었으며 왕족과 귀족에 최상류층 1만 2천명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중산층은 663년에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대거 일본으로 도망쳤으니 한반도에 남은건
서민들이라.... 오늘날 우리나라 성씨 4천여개 중에 백제인을 조산으로 둔 성씨는 2~3% 에도 못미치는데
전주 이씨등 충청과 호남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도 거의 대부분은 지배자인 "신라 사람들" 을 조상으로 합니다.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 (善光) 일족도 일본으로 건너오니 백제인들의 거주 지역이 확대 됐는데
백제 왕족인 선광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제사로 모시고 있는 사당도
히라카타 (枚方) 에 큰 터를 잡고 있으니 사당이 바로 여기 ‘백제왕신사’ (百濟王神社) 입니다.
구다라오진자 (百濟王神社 백제왕신사) 는 나라시대 활동한 백제왕 (百済王, 구다라노코니키시) 가문 조상신
을 모시는 사당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백제왕 경복 (百済王敬福) 이 죽었다. 그 선조는 백제국
의자왕 으로 부터 나왔다… (중략) 덴표 연간(729∼748) 에 벼슬이 종 5위상 무츠노카미 (陸奥守) 에 이르렀다.”
이 때 쇼무 덴노가 도다이지 대불을 만드는데 주조를 끝낼 즈음에 칠할 금이 부족하였다. 이에 무츠국
(陸奥國) 에서 역마로 달려와 오다군 (小田郡 : 미야기현 도다군 (遠田郡) 동부로
일본 최초의 금광, 코가네야마 산금유적 (黄金山産金遺跡) 국가사적) 에서 나온 황금 900냥을 바쳤다.
우리나라 (일본) 에서 황금은 이 때부터 나오기 시작하였다. 쇼무 덴노가 매우 가상히 여겨
종3위를 주고 궁내경 (宮内卿) 으로 옮겼다가 얼마 되지 않아 가와치노카미
(河內守 오사카동부) 를 더하였다 - 속일본기 권27 쇼토쿠 덴노 덴표진고 2년(766) 6월 28일
백제 왕족인 부여선광이 처음으로 백제왕 (百済王, 구다라노코니키시) 의 씨족명을 받은
것으로 보아 그를 모셨을 가능성이 크니 부여선광 가문은 원래 셋쓰국
(摂津国) 백제군 (百済郡 오사카시 덴노지구와 이쿠노구 일부) 에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749년에 그의 후손인 백제왕경복 (百済王敬福) 이 궁내경과 가와치국의 책임자인
가와치노카미 (河内守) 에 임명되면서 그의 일족이 현재 구다라오 신사의
소재지인 여기 가와치국 (河内国) 가타노군 (交野郡) 에 정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왕 가문은 헤이안 초기 까지는 황실의 외척이자 상위 귀족으로 권세를 누렸지만, 이후 사서에서
기록을 찾아보기 어려워질 정도로 쇠퇴했으며 백제왕 가문의 후손을 자처하는 미츠마츠씨의
가계도에는 백제왕 경복의 4대손 풍준 (豊俊 ) 이 성을 미츠마츠(三松) 로 바꾸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에도 미츠마츠 가문이 대를 이어 제사를 지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토지 조사 때에 이 지역
의 땅을 몰수당하고 인근의 오가이토 (大垣内 히라타카시 大垣内町) 로 이주했다고 합니다.
오가이토에도 작은 구다라오 신사 (百濟王神社 백제왕신사) 가 있는데, 1650년에 미츠마츠씨의
저택 내에 지은 사당이었다고 하며 이후 조상신의 사당으로서의 입지를 잃어버린
신사의 성격은 이 시기에는 인근 거주민들이 받드는 향토 신사로 변화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신사 건물은 대부분 에도시대 이후 지어진 것들이니,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신사 본전은 가스가타이샤,
곧 신전 건물을 20년마다 다시 짓는 시키넨조타 이 (式年造替) 전통이 있으니 교체하게
된 예전 건물은 인근의 신사에 내려주어 옮겨짓게 하는데.... 이것을 가스가우츠시 (春日移し) 라고 합니다.
그런 가운데 이축한 것으로 난간의 명문에 분세이 (文政) 10년(1827년) 이라는
글귀가 있어..... 1805년에 지은 것을 1827년에 옮겨온 것으로 추정합니다.
신사가 있는 히라카타시에서는 히라카타・백제 페스티벌 (枚方・百済フェスティバル)
이 해마다 열렸으나.... 코로나바이러스 유행 이후에는 열리지 않은 듯 합니다.
백제 왕족 선광왕의 신주를 모신 구다라오 신사 (百濟王神社) 는 저녁시간이 되면 종소리가
히라카타시역 주위에 울려퍼지니 민방위 훈련 소리만큼 크다고 하며, 신사 때문인지
아님 왕인묘 때문인지 여기 히라카타시 (枚万市) 는 전라남도 영암군과 우호 도시라고 합니다.
백제왕 신사에 현판을 보면 백제국왕, 우두천왕이라고 되어 있으니.... "우두천왕은 일명
스사노오미코토라고도 하는데, 656년에 이리지 라는 사신이 신라국 우두산에서
우두천왕을 모셔다가 현재 오사카 야사카 신사에서 주신으로 모시고 있다" 라는 기록이 전해집니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 이윤옥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 김영조 (푸른솔 겨레문화연구소장) 이 문화
저널 21에 기고한 "기온 마츠리의 기원은 고대 한국이었다" 라는 글을 보면 아래 내용이 나옵니다.
교토 최대의 축제인 기온 마츠리와 고대 한국과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이를 풀려면 다음 두 가지를 밝혀야 한다.
하나는 기온사 (현, 야사카신사) 의 유래이며 다른 하나는 기온사에 모시는 우두 천왕이 누구인가를
밝히는 것이니 기온사의 유래를 홍윤기 교수의《일본의 역사왜곡》, 학민사 222쪽을 참고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사이메이천황 (齋明天皇,백제계 여왕, 655~661 재위) 2년(656년) 에 고구려로 부터 왜나라 왕실에
건너온 사신 이리지는 신라국 우두산 (牛頭山) 에 계신 스사노오미코토신 (須佐之男明神)
을 야마시로국 (山城國, 교토의 옛이름) 의 야사카향 (八坂鄕) 으로 모시고 와서 제사
드렸다. 이리지는 왕으로 부터 야사카노미야스코 (八坂造) 라는 성을 받았다. (八坂神社, 《由緖略期》)
위 자료에서는 이리지가 우두산의 신 “스사노오미코토” 를 모셔왔다고 되어 있다. 곧, 스사노오미코토
= 우두왕으로 656년에 신라에서 모셔다가 현재 야사카신사에서 주신 (主神) 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신을 모셔왔다.” 라는 말을 요즈음 사람들은 실감하기 어려울 것이지만, 그러나 요즘도 장남이 모시던
제사를 못 모실 경우에 차남이 “모셔와서” 제사를 지내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차남이 모실 형편
이 안 되면 “절에 모신다.” 든가 하면서 “신을 이동시켜서” 라도 모시는 것이 제사의 끈질긴 생명력이다.
홍윤기님이 쓰신 "일본 천황은 한국인이다" 라는 저서 129페이지를 보면 메이지유신
때 기온사의 명칭을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의해서 '야사카 신사' 로 바꿔졌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본 3대 마쓰리 중에서 으뜸인 교토 기온 마쓰리가 한반도인을 모시는 축제라?
참고로 메이지유신의 아버지 요시다 쇼인은 조선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 (초대 조선통감, 안중근
의사에 의해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에서 죽음을 맞이함), 소네 아라스케 (2대 조선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초대 조선 총독) 등등 조선 침탈자들을 길러낸 일본 우익의 대스승이자 대부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정경모 선생님이 한겨레 신문에 연재했던 글 [길을찾아서]
조선 침탈 원흉 길러낸 ‘요시다 쇼인’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일본 백제왕 신사 탐방기를 쓰면서 느낀 점은 결국 현대 정치인들은 정치를 통한
국익과 집단의 이익 등 특정 정파를 위하여 정치를 하는 것이지 절대
아시아의 평화, 인류 평화 같은 절대 가치를 위하여 정치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홍윤기 한국외대 교수가 세계일보에 백제왕신사에 대한 글을 기고했으니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 오사카에 우리나라엔 없는 백제왕족 사당이… <21> 다라스의 유서 깊은 '백제왕 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