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弟子에 의한 再承
남도 학문은 15세기와 16세기가 절정기였다고 볼 수 있다. 전수의 제1세대는 무오 및 갑자사화의 피화자인 최부(崔溥)와 김굉필(金宏弼). 제2세대는 피화자가 아닌 송흠(宋欽)․박정(朴禎)과 박상(朴祥) 등이 학문을 전수했다고 볼 수 있다. 제3세대는 최산두(崔山斗)․양팽손(梁彭孫)․윤구(尹衢)․이항(李恒)․임억령(林億齡)․김린후(金麟厚)․이중호(李仲虎)․유희춘(柳希春)․양응정(梁應鼎)․백광홍(白光弘)․기대승(奇大升)등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가 타 지역에 비해 남도학문이 약진했던 때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오․갑자․기묘․을사 등 거듭된 사화를 거치면서도 전라도학문의 전통은 꺼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589년의 기축옥사로 말미암아 남도학문의 불꽃은 시들어갔다. 아니 시들 정도가 아니라 기축옥사가 학문의 맥을 끊어버렸다는 말이 오히려 적절하다. 이후 임진왜란․병자호란․한일합방 등 국가적 위기를 맞아 의병활동에 나서지만 관직에 진출해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인재의 씨가 마른 탓인가? 아니면 반역향 출신을 기피해서 일어난 현상인지 모른다.
1) 俛仰亭 宋純(1493~1582)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호는 면앙정(俛仰亭)이다. 눌재에게 배워 1519년(중종 14)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출사했다. 사헌부 집의․충청어사․부제학․경상도관찰사․사간원 대사간․전라도관찰사를 역임했다. 그는 1533년 41세 때 김안노(金安老) 일파가 세력을 잡자 관직을 사퇴하고 귀향해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면앙정(俛仰亭)을 짓고 학문에 힘썼다. 당시 희락당(希樂堂) 김안노는 부마(駙馬)로 권력을 남용하고 있었다.
면앙정은 김안노가 물러간 후 다시 복직했다. 1547년에는 주문사로 명나라에 다녀와 개성부유수 1550년에 이조참판․1569년(선조 2) 대사헌과 우참찬 그리고 기노소에 들어갔다. 이조참판으로 재직 할 때 이기(李芑) 일파로부터 죄인의 자제를 등용했다는 탄핵을 받고 유배를 당했다. 그는 임억령․김인후․양산보․고경명․정철․기대성․박순 등과 면앙정에서 수창하며 가단을 이뤘다. 그는 강원도가(江原道歌)의 선두주자로 시조에 뛰어났다.
송순의 제자는 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노진(盧稹)․박순(朴淳)․정철(鄭澈)․고경명(高敬命)․송정순(宋庭筍)․임제(林悌)․임형수(林亨秀) 등 전라도를 대표하는 명사들이 줄비하다. 이들 중 벼슬하지 않는 제자가 없을 정도로 당대 국가의 명사들을 배출한 것이다. 환갑을 넘기 어려운 시대에 90세의 연치를 누릴 정도로 장수했다. 그의 90세 생일잔치에는 내로라는 명사들이 스승을 가마에 태우고 마을을 돌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2) 懶翁 柳成春(1495~1522)
자는 천장(天章) 호는 나옹(懶翁)이다. 어려서 아버지 유계린(柳桂麟)에게 배워 1514년(중종 9) 생원시에 이어 별시문과 병과에 급제해 사가독서와 이조정랑을 지냈다. 1519년 기묘사화 때 대사헌 이항(李沆)과 대사간 이빈의 합계(合啓)로 파직된 후 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최산두․윤구와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로 학문이 출중했다. 그가 고작 27세를 일기로 떠나니 세인들이 모두 아쉬워했다.
안항공파 32세.전남 강진출생.서울 거주.
15세기와 16세기 남도의 학문 절전기 시대를 공부하고 갑니다
부장공/35세/63년/김천생/일산거주
면앙정 송순과 나옹 유성춘은 90세와 27세로 연수는 천차만별이란도 학문의 깊이는 비슷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해답이라 사료됩니다.
행원/ 대전 / 괴봉공파 35세
나옹 유성춘은 미암일기로 유명한 미암 유희춘과 형제로 미암일기의 유희춘은 몇번 들어봤지만 유성춘은 낯서네요. 담양에서 창평가는길에 미암 관련 유적의 이정표를 본적이 있습니다... 아직 살펴보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짬을 내어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