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 다보탑
경덕왕 때 세워진 불국사는 불전(佛殿, 현 대웅전) 동·서에 불탑이 배치되는 전형적인 신라 통일기의 쌍탑가람이다. 하지만 일반적인 쌍탑가람과는 달리 동·서에 배치된 탑이 서로 다른 양식을 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동쪽에는 국보 제20호 다보탑이 있고, 서쪽에는 국보 제21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이 위치한다.
다보탑은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양식의 석탑이다. 탑의 전체 높이는 약 10.4m이며, 아래 기단 폭은 약 4.4m이다. 기단 4면에는 계단이 설치되었고, 기단과 탑신 위에는 난간이 돌아가 마치 목조건축의 모티브를 따르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기단 위에는 원래 4구의 사자상이 있었는데, 현재는 1구만 남아 있다. 사자상은 크기가 비록 작아 보여도 결코 작지 않다. 특히 앞다리를 세우고 가슴을 활짝 편 채 밖을 응시하는 모습은 마치 다보탑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보인다.
불교와 사자
백수의 왕으로 알려진 사자는 우리나라에서는 서식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자는 『삼국사기 (三國史記)』나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같은 옛 문헌 속에 등장하기도 하며, 고대 불교문화재나 고분에서 그 이미지가 많이 활용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사자의 존재는 이미 고대부터 인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불교 전래 이후 주로 불법을 수호하는 상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불교에서는 사자의 두려움이 없고 모든 동물을 능히 다스리는 용맹함 때문에, 석가모니(부처)를 인중사자(人中師子)로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듣고 모든 만물이 귀의한다는 뜻으로 사자의 울음에 비유하여, ‘사자후(獅子吼)’라고도 부른다. 따라서 불교에서 사자는 단순한 육식동물이 아니라, 불법을 수호하는 용맹스러운 수호신이자, 나아가서는 부처와 동일시되는 매우 영험한 존재이자, 제왕으로 상징되었다.
돌사자상의 운명
1904년 간행된 세키노 타다시(關野貞)의 『한국건축조사보고(韓國建築調査報告)』에는 다보탑의 돌사자상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 확인된다. 이 책에는 “다보탑 기단 모서리 4곳(四隅)에 석사자(石獅)가 있다”라고 되어 있다. 적어도 1904년 무렵에는 사자상 4구 모두 온전히 제자리를 지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후 발간된 세키노의 저서 『조선의 건축과 예술(朝鮮の建築と藝術)』에는 다보탑의 돌사자 1쌍이 없어졌고, 나인(일본인)에 의해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조선고적도보』에도 다보탑의 사자상이 실제 2구만 확인된다. 다보탑 돌사자상이 세상에 처음 소개된 지 불과 10여년 만에 1쌍(2구)이 사라졌다. 1925년 다보탑은 일본인에 의해 전면 해체 수리되었다.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도 이전에 사라졌던 1쌍의 사자상은 찾지 못했고, 오히려 탑 내 봉안되어 있던 사리장엄구마저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1929년 동아일보에 수록된 현진건의 「고도순례 경주 (古都巡禮 慶州)」에는 남아있는 1쌍 중 또 1구의 사자상이 사라진 것으로 확인된다. 현진건은 “두 마리는 동경의 모 요리점의 손에 들어갔다 하나 숨기고 내어 놓지 않아 사실 진상을 알 길이 없고,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런던(倫敦)에 있는데 다시 찾아오려면 오백만 원을 주어야 내놓겠다고 하다던가?”라고 하였다. 당시 현진건의 말대로라면 일제강점기 외국인(일본인, 영국인)에 의해 소중한 문화유산인 돌사자상 3구가 분실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사자상 1구는 남았을까?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간한 수리보고서에는 사자상의 정수리, 꼬리, 입, 가슴부위, 대좌 등에서 부분적인 결실흔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어쩌면 남아있는 사자상은 분실된 3구의 사자상에 비해 결실과 파손이 심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수탈을 면한 것은 아닐까? 생각할수록 참 안타까운 사실이다.
돌사자상의 위치
앞서 소개한 1904년 발간된 『한국건축조사보고』에는 다보탑의 돌사자상이 기단 모서리(귀퉁이) 4곳(四隅)에 있다고 기록한다. 따라서 가장 오래된 기록을 참고로 하면 사자상의 원위치는 기단 귀퉁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1쌍을 분실하고 난 후 촬영된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1구는 원래의 자리인 모서리에 있지만 다른 1구는 기둥 사이 안쪽에 있어 서로 어울리지 않고 어색함을 느끼게 한다. 당시 돌사자상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마저도 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상태가 더 양호한 사자상이 분실되면서 결국 짝을 잃은 사자상 1구만 남게 되었고,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고도순례 경주」에서 현진건은 다보탑 돌사자상의 수탈에 대해 한탄하는 듯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도 모르고 함부로 굴리며 어느 틈에 도적을 맞았는지 모르니 이런 기막힌 노릇이 또 있느냐. 이 탑을 이룩하고 그 사자를 새긴 이의 영이 만일 있다 하면 지하에서 목을 놓아 울 것이다.” 소중한 물건을 소중한 줄로 알며 귀중하게 여기는 마음, 이것이 바로 21세기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문화시민으로의 역할일 것이다.
글. 김동하(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불교문화재담당)
첫댓글 고맙습니다 ------------!!!
잘 읽어 보았습니다 ---------------!!!
감사합니다.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