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끼의 숨결 - 김명재
숲으로 들어선다. 어린 나뭇가지에 새순이 살랑거린다. 꽃바람이 겨울잠 자던 숲을 깨운다. 바람에 부서진 햇살은 땅 위로 떨어진다. 발밑의 그림자가 춤을 춘다. 가만가만 춤추는 나무를 끌어안는다. 거칠고 단단한 껍질이 나를 밀쳐낸다. 가만히 쓰다듬는다. 고요한 숨결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번진다. 순간 나무 밑에서 살아가는 생명 하나를 발견하였다. 이끼다.
길과 맞닿은 낮은 곳에 엎드려 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생명체에 시선이 멈췄다. 눈에 잘 띄지도 않았다. 시선은 늘 빛나는 곳에 머물렀다. 찬란함의 아래, 아무도 작은 생명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끼는 수만 종류로 나뉠 만큼 다양하다. 아주 오랜 옛날 가장 먼저 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 식물이다. 적당한 온도를 품은 그늘지고 서늘하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 온몸으로 물과 영양분을 흡수했다가 숨쉴 수 있는 산소를 다시 내뿜어주기를 반복한다.
숲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무들은 잎을 떨구기 시작한다. 무언가 끝나가는 듯한 이 계절에 이끼는 새로운 시작을 완성해 간다. 낡은 것들이 저마다의 시간을 마무리할 때 이끼 위에 자란 포자체는 익어간다. 포자체가 자라고 바람 속으로 작은 포자들이 날아간다. 한 생의 결실이 흩어진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 되어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어줄 준비를 한다.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아도 꿋꿋하게 거기에 있다.
숲이 침묵으로 덮인다. 얼어붙은 나뭇가지, 바람조차 날카로운 겨울의 끝자락이다. 지난 삶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멈춰 있다. 가지 끝은 마른 숨 고르기로 쓸쓸히 흔들린다. 이끼도 누운 채 아무 말이 없다. 죽은 듯이 그저 침묵으로만 일관하고 있다. 봄은 아직 멀기만 하다. 숨을 삼키고 자신을 안으로 접어두고 움츠린 생生을 한다. 이끼는 떠나지 않는다. 묵묵히 기다린다. 그건 ‘버팀’이다. 언 땅속에서 버티는 시간은 처절하다.
햇살이 사나운 바람을 밀어내고 나무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한다. 숲속에는 시나브로 봄이 깃들기 시작한다. 나뭇가지 사이로 희미한 빛줄기가 비스듬히 내려와 앉는다. 오래도록 얼어 있던 그늘 한 귀퉁이를 따뜻하게 적시고 있다.
포근한 공기 속에 떠다니는 물기를 먹기 시작한다. 이끼는 안에 눌러두었던 겨울 숨을 깊게 토해 낸다. 토해 내는 숨 끝에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춥고 긴 겨울을 뚫고 작고 부드러운 연두가 올라온다. 바위틈, 나무, 돌 위에서 고개를 천천히 든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낀다. 아직 완전한 생명의 모습은 아니다. 그동안 움츠렸던 자신을 세상에 내어줄 시기가 왔다는 걸 안다. 서두르지 않는다. 제 몫을 다할 채비를 조금씩 준비해 간다. 차갑게 가라앉은 얼어붙은 기억을 녹이고 있다. 흘러나오기를 기다린다. 쌓여가는 시간은 아주 깊고 무겁다. 그 속엔 깊은 용기와 단단한 시간이 숨겨져 있다. 계절은 늘 봄을 다시 불러오듯 인생도 순간들을 품고 흘러간다.
친구 얼굴이 떠오른다. 가끔은 느려 보이고 때로는 너무 조용해서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깊이가 없는 남의 말과 시선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걸어갔다. 세상이 자꾸 흔들고 시험해도 자기 자리를 꿋꿋하게 지켜나갔다. 조용하지만 강한 뿌리를 가진 그녀는 봄의 이끼를 참 많이 닮았다.
비가 내리면 이끼는 온몸으로 물을 품기 시작한다. 연두에서 초록으로 짙어진다. 햇볕이 머물고 바람이 스쳐 간 자리마다 빛난다. 나무뿌리 사이, 떨어진 잎이 깔린 바닥에 촉촉한 길을 내어주고 있다. 그 곁에는 또 다른 생명들이 모여든다. 씨앗들이 뿌리를 내린다. 숲속 개구리도 한참 숨을 고른다. 아낌없이 서로를 감싸안는다.
숲은 점점 짙어져 가고 모든 생명이 다투어 제 빛깔을 내느라 분주하다. 원사체 위에서 자라난 초록 잎들이 번져간다. 겹겹이 쌓인 이끼는 부드러운 융단처럼 바닥을 감싼다. 그 아래 작은 벌레들이 지나고 새순이 뿌리내릴 틈을 마련해 준다. 생명의 성장을 만들어 주는 푸르름이다. 스스로 초록을 덜어내며 아낌없이 제자리를 내어준다. 누군가를 쉬게 하고 자라게 하며 머물게 자리를 내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혼자 빛나기보다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겸손한 태도 속에서 깊은 공생의 지혜를 이끼는 이미 알고 있다.
숲은 이끼 없이 완성되지 않는다. 화려한 꽃도 우뚝 선 나무도 결국 그 아래 깔린 작은 생명 위에 존재한다. 어느 순간 나무에 기대어 자라기도 하지만 나무를 해치지 않는다. 오히려 나무가 마르지 않도록 습기를 지켜준다. 드러내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 어른스러움이다.
생명 사이의 공존과 배려, 자연 속 연대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작은 일 하나에도 박수를 갈구하고, 자신이 했다는 것을 알리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그들은 존재를 ‘드러냄’으로써 확인받고 싶어 한다. 부끄럽다.
다시 숲은 깊고 고요해진다. 공기는 낮게 깔린다. 이끼는 겉으로는 마르고 죽은 듯 보인다. 움직임도 점점 둔해지기 시작한다. 온몸을 오므리고 내내 숨을 쉬고 있다. 포자를 품고 있다. 스스로 숲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차가운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 머물며 숲을 감싸안는다. 빛도 닿지 않는 그늘 아래서 자신을 덮듯 세상을 덮는다. 얼었던 흙이 풀리고 따뜻한 빛이 내려앉을 그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