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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 말 중에서 ‘기다림’이란 단어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은 수많은 기다림으로 이어집니다. 떠나간 사람을 기다리기도 하고, 더 나은 내일을 기다리고, 내 꿈이 이루어질 그 날을 기다리기도 합니다. ‘기다림’이란 말 속에는 기대도 있고 설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림 속에는 오늘을 견디는 힘이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 우리는 봄을 기다립니다. 그 기다림은 우리에게 추위를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물론 인내가 필요한 기다림은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림은 아름답습니다. 기다림은 흔들리기 쉽고 무너지기 쉬운 우리들의 삶을 붙들어 줍니다.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교회력의 한 해는 대림절로 시작됩니다. 오늘은 대림절 제1주입니다. 기다릴 대(待), 임할 림(臨),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라는 의미입니다. 대림절이 끝나고 나면 성탄절입니다. 대림절이 오면 교회에서는 성탄절에 연주할 칸타타도 준비하고, 교인들은 성탄절에 주고받을 축하 선물도 준비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다리는 것은 성탄절만이 아닙니다. 이미 이 땅에 오셨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묵상하며 그날을 기다리고 축하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또 다른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제자 공동체의 기다림은 그리스도의 재림 약속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에 ‘내가 다시 오겠가’고 하는 주님의 약속이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실 때,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기를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다고 사도행전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것은 곧 희망이요, 오늘을 살아가는 힘이었습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장을 보면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22:20, 21) 이렇게 신약성경이 끝을 맺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요한은 탄원하고 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것은 대림절에 우리가 드리는 기도이며, 묵시문학의 전형적인 탄원입니다. 박해와 고난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시 오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기다림이 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고난과 절망, 그리고 아픔을 견디며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린도 전서 1장 첫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고린도서는 잘 아시는대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사실 저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미안한 오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본받을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고약한 교회라고 하는 편견입니다. 오랫동안 그런 오해를 가지고 있었기에,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미안한 것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사도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러 사역했던 곳입니다. 사도행전 18장에는 그 당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에서 1년 6개월을 머무르며 바울은 말씀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유대인들이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끌고 가서 바울을 처벌해 달라고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 아가야 지역의 로마 총독이었던 갈리오는, 이 고발의 내용이 단순히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어난 종교적인 문제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것은 너희가 알아서 스스로 처리하라’며 그들을 재판정에서 쫓아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법정 앞에서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서 심하게 폭행을 하였습니다. 아마도 유대교의 회당장이었던 소스데네는 바울에 대해서 호의적이었고, 그가 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장 첫머리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이 편지를 쓴다’고 발신인을 밝히고 있는데, 소스데네라는 이름이 당시에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흔한 이름이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바로 그 당시 바울을 대신하여 유대인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고 고난을 받았던 바로 그 인물일 것입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이처럼 처음부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았고, 고난 가운데 시작된 교회였습니다.
그리스 중남부 지역 고린도 도시가 위치한 펠로폰네소스반도는, 고린도 지협을 통하여 그리스 본토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고린도의 동쪽에는 에게해로 진출하는 겐그레아 항구가 있고, 서편으로는 아드리아해로 나가는 레기움 항구가 있었습니다. 이 두 항구를 통하여 아시아와 유럽에서 각종 물품들이 고린도로 들어와서, 로마와 그리이스 전역으로 활발하게 유통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국 내 각 지역으로부터 몰려온 상인들로 인하여 고린도는 언제나 활기에 차 있었고, 당연히 고린도는 경제적으로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또한 이 도시는 우상 숭배의 도시였습니다. 아프로디테 신전이라든가 포세이돈 신전 등, 여러 신들의 신전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 신전에만 1000명이 넘는 여성 사제들이 있었고, 이들을 중심으로 종교라는 미명 하에 매춘행위가 공공연하게 성행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Corinthian이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린도인’이라는 뜻과 함께 ‘방탕한’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당시 고린도는 환락과 우상숭배가 성행하고 방탕한 문화가 지배하는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물질문명과 도시문화 속에서, 갓 태어난 고린도교회는 교회의 거룩함과 성결을 지켜나가기에는 너무나도 미숙한 어린 아이였습니다. 당연히 유혹과 시험도 많았고, 그래서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고린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는 교회의 지도자였던 인물들을 중심으로 분파가 생겨나서 서로 갈등하고 있었고, 부자와 가난한 자, 주인과 노예와 같은 소유와 신분에 따라서 계층 간의 갈등도 있었습니다. 탐욕과 정욕으로 인한 여러 가지 도덕적인 문제도 발생하였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사소한 이익이나 명예 때문에 서로 다투고 교회 밖 세상 법정에 나가서 소송을 벌이기도 하였고, 또한 교인들 중에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음행을 저지르기도 하였고, 근친상간도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고나 이들을 치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수차에 걸쳐서 긴 편지를 써서 이러한 문제들에 관하여 권면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이 고린도교회는 결코 모범적인 교회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고 축복한 것입니다. 문제 많은 교회, 결코 모범적이라 할 수 없는 이 교회지만, 바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고린도교회는 고린도 땅에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 교회 교우들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구원을 얻고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일부 교인들의 부도덕한 일탈들은 비판받아야 하고, 그들의 범죄는 교회 안에서 정화되어야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졌고, 그래서 성도라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교회들이 있고, 그 가운데 목사나 교인들의 일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의 비도덕적인 행태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교회 자체를 부인하거나 비난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구별된 거룩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회를 생각하며 사도 바울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가 받은 바 은혜들을 생각하며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받은 바 은혜가 무엇입니까? 다음 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는 온갖 언변과 온갖 지식이 풍족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온갖 언변에 능하고 온갖 지식이 풍부하다는 것은 충분히 의미있는 일입니다. 자기의 생각을 전달하고 남을 설득하기에 유용한 도구입니다. 고린도교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온갖 풍부한 언변과 지식으로 인하여,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좀 더 견고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물론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능한 언변 또한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입장이나 주장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전락되기 쉽고, 그래서 불필요한 논쟁만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적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사 나를 대속하셨고, 부활하사 나의 그리스도가 되셨음을 아는 것입니다. 언변이나 아름다운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바울이 말하는 ‘가장 고상한 지식’입니다. 우리의 언변과 지식은 오롯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사랑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특징 중 하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사역도 여러 가지이지만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주셨고,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은사들을 하나님은 고린도교회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기에 교인들 중에는 자신이 받은 은사를 자랑하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폄훼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랑 안에서 다른 사람의 은사를 존중하고 자신이 받은 바 은사를 가지고 교회를 섬기며 함께 연합하여 그리스도의 뜻을 세워나가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들을 허락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양한 은사를 받은 고린도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또 하나의 은혜는, 고린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고린도교회에 베푸신 은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고, 그리스도의 증거가 그들 가운데 견고하게 되며, 고린도교회 안에서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고, 그래서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교회로 인하여 감사하는 이유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무엇을 기다리십니까? 고린도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실 것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이 오늘의 나태나 무사안일의 핑계가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 생각이나 준비 없이 막연히 기다리는 것은 진정한 기다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예수님의 말씀하셨습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이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그의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기리라” 맡겨주신 그 일을 힘써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오늘 힘써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사람들은 주님이 언제 오시더라도 편안히 그 날을 맞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기다림이 우리를 슬픔과 절망으로부터 일으켜 주고, 그 기다림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맡겨주신 소명을 붙들고 헌신하며 살아가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지금까지 내가 꿈꾸며 기다렸던 어떤 소망이 여러 가지 경험들과 함께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미래의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그것, 우리가 기다리는 그 기다림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지어 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날을 바라보며 믿음을 지키고, 맡은 바 은사에 더욱 확실하게 응답하며, 소명을 좇아서 끝까지 달려갈 길을 다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줄 것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분이 다시 오시는날에 우리가 흠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끝까지 우리를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기에, 조금도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림절,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교회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일탈적인 믿음의 행태를 보이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과 교인들 때문만은 아닙니다. 기다림의 신앙을 오롯이 삶으로 담아내지 못하는 우리들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허락하신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 그리고 다양하고 풍부한 은사를 가지고, 주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사람들답게 더욱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늘푸른교회가 되고, 늘푸른교회 성도가 되기를 다시 한 번 다짐하고 나가는 이 절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