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복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사회복지사는 무엇으로 사는가?
참을 수 없는 사회복지의 매력
계속되는 프로그램과 평가. 서류업무를 위한 야근. 심지어 주말에도 나들이 행사.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받는 급여. 그렇다 사회복지사의 현실이다. 공기업처럼 칼퇴근 할 수도 없고, 대기업처럼 연봉이 후하지도 않다. 물론 요즘처럼 청년실업 200만 시대에 몸담고 나닐 직장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지는 모르나, 역시 처우를 생각하면 이런저런 불평이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사회복지사가 현장을 떠날 수 없는 이유. 사회복지직을 떠날 수 없는 사회복지의 매력은 과연 무엇일까? 힘들고 고되다가도 모든 피로와 스트레스를 한방에 물리쳐 주는 그것이 있으니 바로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 그렇다면, 사회복지사여 당신은 언제 보람을 느끼는가?
지역자활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참여주민이 열심히 기술을 배워서 창업했을때
사회복지사 박모씨는 지역자활센터에서 근무한다. 박씨는 자활센터의 참여주민이 열심히 기술을 배워서 창업했을 때 가슴 가득히 보람을 느꼈다. 박씨가 근무하는 센터에 우여곡절 많던 세탁소사업장이 있었다. 비록 같은 지역의 세탁소들로부터 민원도 많이 들어오고 다른 지역으로 옮기게 됐지만, 지금은 어느 정도의 수익을 유지하는 사업장이 되어 참 흐뭇하기만 하다. 용산으로 나간 지 3년 된 컴퓨터 사업장도 운영이 잘되어, 그곳에 계신 분이 수급권자에서 벗어나시기도 했다. 자활 사회복지사라면 누구나 바로 이럴 때 가장 보람을 느끼지 않을까.
노인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어르신이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며, 속이야기를 해주실 때
노인복지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최모씨. 최씨는 기관에 들어온 후 처음 1년 동안은 생활지도원으로 일했다. 처음에는 어르신도 본인도 서로 대하기가 어색하고 어려웠다. 심지어 어떤 어르신은 생활지도원 대하기를 마치 하인 대하시듯 했다. 치매가 심하신 또 다른 어르신은 센터에 처음 들어오셔서 적응이 잘 안되셔서 최씨에게 욕을 퍼붓기도 하셨다. 그러시던 분들이 함께 생활하면서 언제부터인가 최씨를 가족처럼 편하게 대해 주시며, 속이야기를 해 주실 때 마음 속 깊이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어디서 이런 자식들을 만나겠느냐”며 친자식보다 좋다고 하실 때면, 이미 최씨의 마음 속에도 어르신은 최씨의 가족 그 이상이다.
또한 자원봉사자나 후원자들이 센터에 오면 이곳은 생활시설이라고 생각해서 무엇인가 봉사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곳을 복지시설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어르신의 집에 놀러왔다고 생각해달라고 말씀드린다. 그들이 돌아갈 때 시설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편하고 재미있게 많이 배우고 돌아간다고 얘기할 때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지역아동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어둡던 아이가 밝고 명랑하게 변화된 모습을 볼 때
지역아동센터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임모씨는 이곳에 오는 30여명의 아이들을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안아준다. 이 센터의 이념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야 합니다.’ 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는 정서가 불안한 아이들이 시간이 지나 안정되고, 밝아진 모습들을 보면 임씨는 이보다 더 행복할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만 생활하던 한 아이는 처음에 센터에 왔을 때 굉장히 불안해하고, 센터에 오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아버지에 대한 모델링이 없고 어머니와만 생활하다보니, 어머니에게는 분리불안 장애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센터에 올 때마다 팔 벌려 안아주고, 동시에 부모 교육을 진행하니 아이는 아버지의 죽음도 받아들이고, 어머니도 자녀와 감정을 상하지 않고 말하는 방법을 배우게 됐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학교에도 안가고 어둡게 지내던 아이가 1년 6개월 정도 만에 바뀌었다. 아버지는 안계시지만 센터의 남자 사회복지사를 통해 모델링도 하고, 아이가 사랑받는다는 것을 충분히 느끼며 지내고 나니 지금은 센터 내에서도 가장 명랑한 아이가 되었다. 기관의 이념이 바뀌지 않는 한, 임씨는 보람있고 계속 만족하면서 근무할 수 있다고 한다.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도움을 주었던 클라이언트가 잊지 않고 지금도 연락할 때
어린이재단 소속 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오모씨는 2004년도에 처음 사회복지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처음 1년 동안은 서울에 발령이 안나서 천안에서 근무했다. 그 때 만난 한 할아버지는 평생을 호적도 없이 떠돌이 극단 생활을 하시던 분이었다. 주민등록이 되어있지 않아 아무리 어려워도 수급권자가 될 수 없었고, 병원에 가도 의료보험혜택을 전혀 적용받을 수 없었다. 동사무소에 가니 호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주민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호적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함께 동사무소, 경찰서를 수차례 방문하고, 고향에 연락해 보아도 호적은 없었다. 갑자기 발령이 나서 서울로 오게 됐는데 어느 날 TV를 보니 그 할아버지가 호적을 찾고 수급권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참 감동적이었는데 할아버지가 오씨와 함께 동사무소랑 경찰서를 돌아 다니면서 거절도 많이 당하고 우여곡절 많이 겪었던 것들이 고마웠던지 오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고맙다고 전화를 했다. 지금도 잊지 않고 일 년에 한두 번씩 전화를 주시는 데 그때마다 함께 고생했던 그 때를 생각하면서 뿌듯하기도 하고 보람으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그동안 몸이 아프셔도 의료보험 혜택이 안되어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파는 약으로만 참고 사셨던 할아버지의 칠십여 평생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지금에라도 할아버지가 주민등록번호를 갖고, 어느 정도 정부로부터 보조를 받고 사실 수 있게 된 것은 오씨가 사회복지사로 일하게 된 것에 대해 가장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었던 사건이다.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클라이언트의 인생에 도움이 되었을 때...
그리고 클라이언트가 나를 신뢰하고 있다고 느낄 때마다
종합사회복지관에서 근무하는 이모씨는 그동안 변화 가능성이 많은 클라이언트들을 만난 편이라고 한다. 이씨가 사례관리 하는 한 클라이언트는 개입당시 위기상태였다. 당장 거주지가 강제퇴거 위기에 있었고 그 시기에 맞물려서 클라이언트의 청각장애가 있는 아들도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했다. 게다가 클라이언트는 약간의 정신질환도 있었다. 복지관 내에서 동료들과 계속 함께 상의하면서 클라이언트의 위기상황들을 풀어나갔다. 먼저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모 재단의 지원사업과 연계를 시도했다. 지원을 통해 부채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재단이 3분의 2정도의 경제적 지원을 해주면 나머지 3분의 1은 본인이 해결하고, 주거 안정을 위해서 임대료와 관리비를 앞으로 내주는 형식이었다. 그것 말고도 파산신청도 같이 하고,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의 도움도 받고 해결해 나갔다. 그런 과정을 거쳐가면서 클라이언트도 이씨를 신뢰하게 됐고, 클라이언트도 본인이 소일거리 통해서 3분의 1을 해결해서, 임대아파트 재계약을 맺게 됐다. 또한 그의 아들도 삼성의료원의 지원으로 귀 수술을 받게 됐다. 워낙 큰 수술이라 여러 번 나누어서 받고, 내년에도 지원받을 수 있을 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다른 사람의 인생에 도움을 줄수 있다는 사실에 참 행복하다. 계속 ‘나는 할 수 없다’며 자신이 없어하던 클라이언트에게 ‘할 수 있다’고 강점에 대해서 계속 강조하며 그 분의 삶에 개입해서 신뢰관계를 쌓아갔던 과정들 중에서도 매순간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이씨는 어려운 사람의 모든 면을 도울 순 없지만, 사회복지를 통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고 그로 인해 다시 살아보겠다는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에 매우 행복해 하고 있다.
이상으로 본 사회복지사로서의 보람은 어느 때에 있을까? 자신만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닌 다른 사람 즉, 클라이언트의 행복을 위해 사는 사회복지사에게 있어서 역시 가장 큰 보람은 클라이언트와 관계 맺고 소통하는 가운데 클라이언트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바로 그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한 보람들로 사회복지사에게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일에 대한 자부심과 만족감이 있다. 그렇다. 사회복지사는 자부심과 만족감으로 오늘도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
★ 본 기사는 서울특별시 사회복지사 협회 기사를 참조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