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옥 시집 {그대를 소각한다} 출간
심현옥 시인은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고, 현재, 공주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자연이 건네는 작은 울림을 끊임없이 시와 수필로 길어 올리며 창작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글로벌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우암송시열 문학상, '시학과 시' 신인문학상(시 부문), 작가상(수필 부문) 등을 수상했다. 시집 {바람이 전하는 시작}과 수필집 {우리, 빠끔살이 할래?}를 펴냈다 심현옥 시집 {그대를 소각한다}는 본질적 가치 지향의 정서와 사랑의 미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공주문인협회회원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심현옥 시인의 시를 읽으면,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조화를 아름답게 느낄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평범한 일상어들을 갈고 닦아서 유리그릇에 넣듯이 시의 언어들이 잘 정돈된 진열장을 연상케 한다. 그것은 때 묻지 않은 심 시인의 평소의 삶이나 그가 추구하는 가치관의 영향도 있겠지만, 심 시인이 자라고 생활해 온 청정지역 같은 시골 풍경이라든가, 이순耳順이 지난 나이에 아직도 천진한 그의 성격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심 시인은 산과 들과 꽃과 하늘이 만들어준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 시인 시의 첫 번째 소재는 자연이다. 그것은 시 창작의 전통과도 상통한다. 희랍의 석학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저서 시학(詩學 Poetics)에서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Art is an imitation of nature)”라고 하면서 시는 지연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았다. 물론 지금은 개인보다는 사회가 우선되고, 인간보다 자연(神)이 우선시되는 시대의 주장과 같을 수는 없다 해도, 자연과의 교감은 시인에게 삶을 노래하는 텃밭이 될 것이다. 심 시인은 유독 자연을 소재 삼아 고운 정서를 유감없이 표현한다.
봄보다 먼저 마실 나온/ 수선화 한 송이/ 푸른 잎 사이로 노란 웃음 하나/ 사랑이요 꿈이다/ 겨우내 묻어둔 숨결을 깨우며/ 동토 위에 소롯이 안긴/ 사랑 한 점/ 향기로운 봄의 서곡이다/
우표를 붙여놓은 듯/ 가슴에 꽃을 새기고/ 사랑초의 귓속말에/ 나는 오늘도/ 가슴 속에/ 계절 하나를 피워낸다 -- [봄이 오는 문턱에서] 1연, 4연
수줍게 피어오르는 수선화 한 송이라는 작은 자연에서 시인은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봄이라는 계절이 탄생함을 고운 시어들로 지어낸다.
햇살 손끝이/ 가을을 짙게 채색한다/ 금빛 햇살이 비껴간 볼에/ 붉은 숨 하나/ 가을의 품으로 흘러들고/ 나뭇가지 끝에서/ 세상의 마지막 미소처럼/ 너는 빛을 품는다/ 익는다는 건/ 스스로를 녹이며/ 향기로 사라지는 일/ 그 짧은 찰나의 향기 속에/ 시간은 제 몸을 불태우고/ 불붙은 낙원 향긋한 내음에/ 오늘도/ 조용히 저물어 간다 --<능금> 전문
자연은 계절을 만들지만, 햇빛은 능금을 여물게 한다. 햇빛에 능금이 발그레 익어가며 가을이 깊어지는 모습이 스로우 비데오 영상처럼 펼쳐진 예쁜 작품이다. ‘너는 빛을 품는다 / 익는다는 건 / 스스로를 녹이며 / 향기로 사라지는 일’ 사과 한 알 익어가는 자연의 모습에서 생명의 잉태와 출산의 신비를 노래하고,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출산의 생명을 건 산고를 처절히 치른 후에 향긋한 내음을 맛보는 희생적 사랑이 절절하다. 그렇다고 자연은 우리에게 결국 해피엔드Happy End로 기쁨만 주는 존재만은 아닐 것이다. 다음 시에서 우리는 또 다른 자연의 정서를 느낀다.
하얀 향기는 약속이었다/ 시들기 위해 피어난다는/ 그 은밀한 맹세를/ 네 몸은 믿지 않기로 했다// 오월의 소녀/ 꽃을 입었다고/ 꽃이 된 건 아니야/ 피지 않은 너의 마음이/ 이미 봄을 넘어선 거야 -<꽃을 입은 소녀에게> 부분
꽃과 소녀는 이미지의 공통점이 많아 보인다. 피지 못하고 져버린 소녀의 모습과 벌써 진 것처럼 햇살을 피해 고개 숙인 꽃이 오버랩 되어 안쓰럽게 느껴진다. 그러나 시인은 그 어두움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향한 용기가 넘쳐남을 느끼게 한다.‘피지 않은 너의 마음이 이미 봄을 넘어선 거야’라는 시인의 노래는 우리 마음에 깊은 쉼을 주고 있다. 시간의 잿빛 강가에 그대를 사른다 심어놓은 사랑이 시공의 틈새에서 울음을 터뜨리고 삼천 날의 바람이 내 어깨를 감싼다
후르르 내뱉는 잎사귀의 속삭임에 긴 밤의 번민이 물결처럼 밀려와 불빛으로 피어나던 가로등조차 푸른 그늘 속에 누워버린다
그대의 호흡, 내 가슴을 적시던 그 미세한 온기 이제는 심연 깊은 곳에서 되돌아온 메아리일까 하얗게 씻긴 내 가슴 위에 안개꽃 한 송이 박혀 유린된 마음의 젖은 멍울이 애증의 칼날이 되어 나를 돌아본다
그대의 그림자를 끌어안고 고목의 향기 속으로 스며든다 아직도 그대는 내 안에서 무심한 세월의 바람이 흔들릴 때마다 언 땅이 녹고 내 안의 잿더미로 다시 불씨가 되어 피어난다 --<그대를 소각한다> 전문
심 시인이 살아온 삶의 여정은 어렵고도 험난한 일상이었다. 그것은 심 시인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대부분 사람들의 공통된 삶의 추억일 것이다. 어떤 역사학자는 전쟁 후의 가난 속에서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 과정을 살아온 분들을 ‘위대한 세대’(The Greatest Generation)라고 높여 불렀다. 그들에게는 그 어려운 세대를 살아가면서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고, 그 매듭이나 삶의 옹이들이 고질병처럼 풀리지 않은 것이 어찌 없었으랴.
--심현옥 시집 {그대를 소각한다}, 도서출판 지혜, 값 12,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