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만 바꾸면 된다!(마26:36-46)
2024.3.24 종려주일,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스웨덴의 화학자 알프레드 노벨(Alfred Bernhard Nobel, 1833~1896)은 33세의 젊은 나이에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벨은 신문에 자신의 부고 기사가 난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신문사에서 노벨의 형의 죽음을 노벨로 착각하고 기사를 낸 것이다.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을 죽었다고 기사를 낸 것도 그렇지만, 노벨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기사의 제목 때문이었다. 신문에는 큰 글씨로 이런 제목이 있었다.
“다이너마이트 왕,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 죽다!”
그 제목을 본 노벨은 충격을 받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만약 내가 오늘 죽는다면, ‘죽음의 사업가’, ‘파괴의 발명가’라는 기사가 진짜 사실이 되지 않을까?”
노벨은 이 일을 계기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되었고,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노벨재단을 만들어서 자신의 재산을 헌납했고, 매년 세계적으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노벨상을 수여하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파괴의 발명가가 아니라, 인류발전에 기여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비단 노벨뿐만 아니라 죽음은 누구에게나 큰 두려움과 충격을 준다. 그래서 “잠자듯이 편하게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버튼에 숫자 “4”가 없는 곳도 있다. 왜 숫자 4를 꺼려할까? 대답을 들어보나 마나 ‘죽을 사(死)자’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죽을 사(死) 자는 ‘하나 일(一)’과 ‘저녁 석(夕)’ 그리고 ‘비수 비(匕)‘자의 조합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이란 한 밤중에 갑자기 날아오는 비수(화살)와도 같아서, 피할 수 없다는 뜻이다.
특히 코로나를 거치면서 죽음에 대한 현실감을 더욱 커졌다. 인생의 황혼에 예수님을 영접한 고(故) 이어령 교수는 그의 마지막 저서(인터뷰)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에서 죽음학의 권위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지금까지 보았던 ‘타인의 죽음이 동물원 철장 속의 호랑이 같다면, 나 자신의 죽음은 철창을 뚫고 나에게 덤벼드는 호랑이 같다‘고 했다. 그만큼 죽음의 공포는 큰 충격과 두려움을 준다.
그런데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을 뜻한다. 오늘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이고, 금주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받기 직전에 겟세마네라는 곳에서 기도하시던 장면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현실로 다가온 죽음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셨을까? 오늘 본문 38절에 이렇게 적고 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마26:38)
놀랍지 않은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죽음에 대해서 하나도 걱정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예수님도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쉬운성경]에서는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라고 번역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도 되시지만, 참 인간도 되시기에, 죽음을 앞두고 그 마음이 괴로우셨던 것이 분명하다(“아하!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그렇기에 우리들에게 죽음이나 죽을 것같은 상황들(질병, 실패, 배신, 낙심 등)이 내 앞에 한 밤중에 비수(화살)처럼 밀려왔을 때, 그것 때문에 고민하고 힘들어한다고 해서, 너무 자기 자신을 믿음이 없거나, 신앙생활을 잘못해서 그렇다고 자책하거나 타인을 정죄하지 않기를 바란다. 죽음이나 죽을 것같은 고난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그것이 단지 나에게도 온 것뿐이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만 하면 된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기도로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고, 마침내 하나님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겟세마네의 기도를 보면, 주님의 마지막 기도에는 특별한 점이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반복하여 기도하신 것이다(마26:39, 42).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마26:39)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특히 그것이 죽음과 직결된 일이라면 더욱 그렇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죽겠다는 각오가 분명하게 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기도는 그 마음에 오직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철저히 인정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정하고, 결심할 때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성숙이다. 성숙이란 내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 것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이 점이 오늘 우리들이 놓쳐서는 안 될 핵심이다.
예전에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우리도 한 번 잘살아보세”라고 노래하던 때가 있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그때는 수출 100억불이 되면, 선진국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100억불을 넘어 지금은 수출 6천800억불이 훨씬 넘는 시대에 살고 있다(6천839억 불, 2022년 통계). 그런데 지금 잘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성도에게 있어서 잘사는 것은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하는 것이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알고보면, 하나님 앞에서 잘산다는 것과 잘 죽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한결같이 이처럼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철저하게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와 수많은 기적들(승리, 치유, 죽음을 이길 힘 등)을 나타내셨다.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던 요셉이나 포로로 잡혀갔던 다니엘이 총리된 것도, 무시무시한 이방의 선지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던 엘리야의 대결, 홍해가 갈라진 것, 성가대를 앞세웠던 여호사밧의 승리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물 위를 걸어간 베드로, 스데반의 순교, 사도 바울이 체험했던 놀라운 기적들 등을 비롯한 수많은 치유와 기적의 일들이 오직 하나님만이 주인 됨을 인정하고, 바라볼 때 일어났다.
역으로 인간의 모든 실패와 고난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래서 마귀 사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지 못하게 방해하고, 우리의 영적인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한다. “두 주인(재물과 하나님)”을 섬기도록 미혹하는 것도 영적인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마귀의 전략이다(마6:24).
그래서 일찍이 다윗은 깊은 고통 속에서도 단호하게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반석과 구원과 요새라고 고백했다(시62:1-2).
“1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시 62:1-3)
이 말씀을 자세히 보라. 다윗이 이런 고백과 결심을 했을 때는 평탄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같은 상황 속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기로 결심했다. 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잠시 흔들릴 수는 있을지언정 넘어지지는 않는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다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의 죽음을 앞둔 예수님의 기도나 믿음의 선진들이나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결국 영적인 결론은 이것이다.
“주인만 바꾸면 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들이여, 하나님은 겟세마네의 기도처럼 내 뜻을 내려놓고, 주인 되신 하나님의 뜻만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한 사람에게 성령충만을 주시고, 천군천사를 보내 돕게 하시고, 각종 역사와 기적들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그러므로 오늘 종려주일과 고난주간에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 마음의 주인을 바꾸기로 결단하자. 예수님처럼 우리들도 매일 매 순간 나의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끌어내리고, 나와 하나님 사이를 떼어 놓으려는 마귀 사탄의 미혹과 간계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삶을 살겠다고 결심하자.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난다. 이 시간 이러한 결심과 고백을 주님께 올려 드리자(찬양,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이 우리와 늘 함께 하신다.
*** 찬송 :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PkacB03O3H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