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는 내년 2월부터 신종 코로나(COVID 19)) 백신 접종(확인) QR코드의 도입을 추진 중이다. 정부가 제출한 QR코드 관련 법안의 심의에 들어간 국가두마(하원)는 내달 첫 독회를 가질 예정이다. 러시아 하원의 법안 채택은 으례 3차례 독회를 거친 뒤 표결을 통해 이뤄진다.
러시아가 도입 추진 중인 QR코드는 우리가 현재 사용하거나 생각하는 것과는 쓰임새가 다르다. 추후 감염 경로 추적을 위한 QR코드가 아니라, 특정 장소의 출입용 QR코드다. QR코드가 없으면 출입 자체가 금지되니, 러시아 QR코드는 백신 접종을 끝냈거나 감염후 완쾌를 확인해 주는 증명서다.
러시아 QR코드 확인 모습/유튜브 캡처
현지 언론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의 코로나 방역 담당 타티아나 골리코바 부총리는 지난 12일 법안 제출에 맞춰 QR코드 설명회를 가졌다. 관련 부처 장관들과 함께 나온 골리코바 부총리는 “국민이 백신을 맞고 필요한 절차를 거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내년 2월 1일부터 QR코드를 시행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또 QR코드가 필요한 방문 대상지 선정은 각 지자체가 지역의 위생 및 역학 상황을 고려해 최종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원에 제출된 QR코드 법안(초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우선 공공 행사(장) 참가를 비롯해 극장과 같은 문화예술시설, 카페와 레스토랑 등 요식업체, 식품점을 제외한 일반 상점과 쇼핑센터 등을 방문할 경우, 백신 접종(완쾌) 여부를 확인하는 서류(QR코드)를 (신분증과 함께) 제시하도록 했다. 비 소지자는 출입 자체가 아예 금지된다. 정식 도입(내년 2월 1일) 전까지는 지금처럼 PCR(유전자 증폭)검사 음성 확인서로 방문 가능하다.
그러나 약국이나 의료기관, 식품점 방문 시는 QR코드 제시를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더욱 철저한 방역수칙 준수를 요구할 것으로 전해졌다.
QR코드 설명회에 나선 골리코바 부총리(가운데)/사진출처:현지 매체 rbc 동영상 캡처
골리코바 부총리, QR코드 도입을 내년 2월 1일까지 유예기간을 두겠다고 설명/얀덱스 캡처
법안은 또 철도 및 항공기 탑승(국제선 포함)시 QR코드를 제시하도록 했다. QR코드 미소지자는 탑승이 금지된다. 역시 내년 2월까지는 음성 확인서로 대신한다. 설명회에 나온 비탈리 사벨리예프 교통부 장관은 "철도및 항공권 구매 단계에서 QR코드를 확인하는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라며 "이미 솔루션 개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러시아 정부는 QR코드 도입을 "어려운 방역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적 긴급조치"라고 규정짓고, 일단 내년 6월 1일까지 한시적으로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QR코드의 광범위한 도입은 백신 비접종자들에게는 모든 국가 인프라에 대한 봉쇄조치나 다름없다. 백신을 접종하지 않을 경우, 집 밖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강력한 제재 신호다.
현지 언론에는 QR코드 도입 설명회 후 '하루 백신 접종자가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지역들이 심심찮게 소개된다. 도입 예고만으로도 러시아의 낮은 백신 접종률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러시아는 현재 확진자와 사망자가 급증하는 코로나 4차 파동에 대응하기 위해 일부 지역에서는 QR코드 제시를 의무화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진 상태다. 그러나 QR코드 법안이 제정돼 발효할 경우,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사회적 파장이 예상된다.
사벨리예프 교통부 장관, QR코드는 탑승권 구매시부터 적용될 것이라고 설명/얀덱스 캡처
실제로 QR코드 전면 도입 시 예상되는 사회적 혼란과 국민 불편에 대한 우려가 적지 않다. 전 국민의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해주는 (QR코드) 데이터베이스를 매일 업데이트하고, 이를 현장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접속 장애나 서버 다운 등 각종 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수 있다. 또 인터넷 접속 자체가 원할하지 않는 오지에서는 QR코드 자체가 무용지물이 될 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각 지역 수장들에게 QR코드 적용 범위에 대한 결정권을 위임했다는 점이다.
QR코드 도입으로 가장 큰 혼란과 불편, 혹은 피해가 예상되는 곳은, 역시 항공및 철도 교통 분야다. 사벨리예프 교통부 장관은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으로 심한 타격을 입은 항공사와 철도청이 지난해 10월 이후 팬데믹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중"이라며 "QR코드 도입으로 새로운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탑승권 구매시 백신 접종 여부를 확인하는 정부 시스템과 연결하는 솔루션을 개발중"이라며 "내년 2월부터 시스템 가동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동석한 골리코바 부총리는 시벨리예프 장관을 향해 "탑승권을 구매하는 과정이나 탑승시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줘서도,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혼란이 있었어도 안된다"며 철저한 준비를 거듭 당부했다.
러시아 공항 항공사 등록데스크 모습/유튜브 캡처
항공업계는 걱정이 태산이다. 러시아 최대 민간항공사인 시베리아항공(S7그룹)은 "QR코드 도입으로 국내선 여객 수송량이 반토막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는 "항공권 구매시 QR코드를 확인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며 "혼란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항공기 탑승시 혹은 등록 데스크에서 '체크 인' 과정에서 QR코드를 확인하는 방안을 그 대안으로 제시했다.
피부에 와 닿는 걱정은 해외에서 입국한 러시아인들과 외국인들에 대한 처우다.
현지 유력경제지 코메르산트는 “법안에는 해외에 거주하는 러시아 국민에 대한 규정이 없다"며 "그들이 (러시아) 백신을 맞지 않았을 경우, PCR검사 음성확인서만으로 러시아에 입국할 수는 있으나, 다른 도시로 이동할 수는 없다"며 "모스크바 등 입국한 도시에서 백신 접종을 받고 약 2주를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또 "철도 여행의 경우, 많은 기차가 인터넷이나 통신이 전혀 안되는 작은 역에 정차할 경우, QR코드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궁금하다"고도 했다.
또다른 한 언론도 이같은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러시아에 등록되지 않은 외국산 백신을 접종한 국민의 경우, 그 인증서와 PCR 음성 확인서로 QR코드를 대신하는 방향으로 법안이 수정될 것"으로 전망했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공항/사진출처:공항 SNS
러시아에 입국한 외국인도 비슷한 처우를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가 백신 접종 확인서의 상호 인정을 협의 중인 유럽연합(EU) 회원국의 경우, 협상 타결과 동시에 QR코드 발급이 확실시된다. 그러나 그 전까지, 또 러시아에서 승인되지 않는 외국산 백신을 접종한 외국인들에게는 PCR 검사의 음성확인서로 QR코드를 대신할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음성확인서의 유효 기간과 그 형식은 방역 최고 책임자가 결정하도록 법안은 명시하고 있다.
향후 예상되는 가장 유력한 방안은 해외에서 발급된 백신 접종 확인서와 PCR 음성 확인서를 바탕으로 외국인에게도 거주등록을 하듯, QR코드를 발급해 주는 것이다. 이때 체류 기간이 1주일 이내일 경우, 굳이 QR코드 등록을 강제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내 단체 여행객(미 접종자 포함)은 대부분 러시아에서 1주일 이상 머물지 않기 때문에, PCR 음성 확인서만으로 자유로운 여행이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러시아가 절대 인정하지 않는 백신의 접종자에 대한 처우는 달라질 수 있다. 소위 '백신 냉전' 체제의 피해자다. 외국인 유학생이 많은 모스크바 므기모(국제관계대학)는, 일단 유학생들에게 화이자 등 외국산 백신 접종자도 스푸트니크V 접종자와 마찬가지로 '대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와 비슷한 사례가 러시아 곳곳에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 식당에서 QR코드를 확인하는 모습/유튜브 캡처
QR코드 도입 반대 목소리도 터져나오고 있다. 러시아공산당과 '정의 러시아당-진실을 위하여'(러시아 정의당)는 QR코드 도입에 반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절대 다수당인 집권 '통합 러시아당'이 법안 통과를 밀어붙일 경우, 법안 통과는 확정적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QR코드 도입이 불러올 각종 부작용과 우려에 대해 "항공 운송 및 공공 장소 방문에 대한 QR코드 도입은 이제 세계적인 관행이 되고 있다"며 법안 통과를 기정사실화했다.
QR코드가 내년 2월~6월, 즉 4개월간 한시적으로 사용될 것이라는 법안 설명에 대해 'QR 코드는 앞으로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반박도 일각에서는 제기된다. 백신 접종 등 개인의 각종 데이터를 확보한 당국이 이를 '디지털 ID 문서'로 사용하려는 유혹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QR코드 도입으로 '빅 브라더'의 출현이 멀지 않았다는 걱정도 떨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