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무 살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용산에 있는 학교에 다녔다. 졸업하면 취직을 시켜 준다는 것이 당시엔 매력적이었다. 시골에서 한양으로 유학 갔다고 좋아할 수도 있으련만, 적성에도 맞지 않았고 막상 공고를 나와서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학교 다닐 때는 실망도 많이 하고 정신적으로 방황도 많이 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창의 고향 집에 내려가서 집안일을 도우면서 발령 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확하진 않지만 1984년 7월에 발령이 났다. 마산에 있는 부산지방철도청 마산역 신호분소에 발령을 받았다. 분소장 포함하여 직원은 8명 정도 되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철도 신호 보수와 관리하는 일이었다. 사전에 신호가 고장 나지 않게 예방하는 일과 고장이 나면 보수하는 일이었다. 처음 발령을 받아서 일을 배워야 하는 부분도 있었기에 주로 3~4명이 같이 하는 작업을 주로 했다.
처음 발령을 받아서 일을 잘 모르는 데다가 나이도 제일 어려서 일을 할 때 공구를 가져오라고 하면 가져다주고 작업에 대해서 지시를 받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경상도 사투리를 처음엔 알아듣기 매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고 욕을 많이 먹었다. 여간 곤혹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같은 대한민국인데 이렇게도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어이가 없기도 하였다.
군대에 가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입대하기 전에 있어야 할 곳이 필요했다. 창원역 철길 옆에 비어 있는 방이 하나 있어서 마침 직장 선배들이 권하기에 그곳으로 정했다. 어차피 몇 달 후에 군대에 가야 하는 상황이어서 거기에서 잠을 자고 생활하였다. 밥은 창원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대놓고 먹고 한 달에 한 번씩 월급이 나오면 계산하곤 하였다. 그 식당에서는 주로 선짓국밥을 많이 먹었다. 그렇게 생활한 것이 8개월 정도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억이 별로 없는데 광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작은 창원역 앞 그리고 그 옆에 내가 대놓고 밥을 먹던 식당이 있었다. 식당 여주인은 어린 딸이 하나 있는 과부라고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무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외에는 전혀 아는 것이 없으니까.
당시에 창원 그리고 마산은 나에겐 낯선 곳이었다. 또한, 한편으론 신비롭기도 한 곳이었다. 고향인 고창 그리고 고등학교 다니느라고 지냈던 3년간의 서울 생활 외에 다른 곳에서 생활해 본 적이 없던 나였다. 당시에 나는 야간 대학을 가겠다고 공부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낮에는 일하고 퇴근 후에 공부해야 했기 때문에 일도 공부도 잘 안되었던 것 같다. 공고를 졸업한 나는 대학이라는 곳을 그렇게도 가고 싶었다. 당시엔 대학이라는 곳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었다. 부모님께서 네가 대학에 가면 우리 집에 돈이 없어 학비를 지원하려면 집이 망한다고 대학에 가지 말라고 말렸기 때문에 더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주로 직장에 갔다 오면 공부했다. 직장 때문에 학원을 다닐 시간이 나지 않아서 주로 혼자서 공부했다. 논술은 신문 사설을 열심히 읽으며 연습하곤 하였다. 수능 시험을 보기까지는 퇴근하고서도 다른 것을 할 여력이 생기지 않았다. 혼자서 하는 공부였지만, 나름으로 열심히 공부해서인지 마산에 있는 어느 대학에 합격했다. 나중에 군대 갔다 와서도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준비를 더 하면, 그보다 더 나은 대학을 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이 당시에는 있었다. 또한, 나는 문학과 관련한 과를 가고 싶었으나 마침 그 대학의 야간에는 국문과나 영문과가 없어서 법학과를 지망해 합격하여 등록하지 않고 그냥 군대에 가버렸다. 스무 살, 나는 대학에 가서 국문과나 영문과에 가서 글 쓰는 법을 배워서 작가가 되고 싶었다.
군대 가기 몇 달 전에는 마산 시내에 있는 기타학원에 등록해서 통기타를 배웠다. 보름 정도 기타를 배우다 그만두었다. 처음이라서 주로 스트로크하는 법을 배웠는데 그때 강사가 기타를 제대로 배우려면 멜로디를 배우지 왜 스트로크로 배우느냐고 했던 말이 생각이 난다. 당시에는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에야 강사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하루를 마치고 이부자리에 누우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덜컹거리던 소리가 나던 곳. 일하는 곳과 집이 잘 구분이 안 되던 그곳. 철길 옆에는 노란 개나리가 피어 있곤 했다.
신호가 제대로 작동에 필요한 본드 선이 제대로 붙어있나 보려고 철길을 걸으면서 살피곤 했었고, 때로는 신호기에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었다.
분주하고 바빴던 나의 스무 살, 나의 일과 나의 사회생활은 다음 해에 군대에 가면서 마침표를 찍게 되었다.
인천작가회의│양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