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소금강산( 小金剛山 /177m)
경상북도 경주시의 북동쪽에 있는 용강동·동천동과 천북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소금강산은 금산, 금강산 등으로 불리었다. 『삼국유사』에 신라 6촌 중의 하나인 금산가리촌(金山加里村)에서의 금산이 "지금의 금강산으로 백률사 북쪽에 있는 산이다."라는 기록과 "6촌 중의 하나인 명활산고야촌장인 호진(虎珍)이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금강산은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아주 가깝기 때문에 『삼국사기』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에도 소금강산이 아니라 금강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세주에는 "경주 중심지의 북쪽 7리에 있는데, 신라에서는 북악(北嶽)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 수도의 중심지에서 북쪽에 있는 돌산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지도에는 금강산이 나오는데, 소금강산이라 기록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일제시대 이후 강원도에 있는 금강산이 알려지면서 소금강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 백률사(栢栗寺) 경상북도 경주시 동천동(東川洞) 소금강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법흥왕 14년(527)에 불교의 전파를 위하여 이차돈(異次頓)이 순교를 자청했을 때, 그의 목을 베자 흰 우유가 솟았고, 잘린 목은 하늘 높이 솟구쳐 올랐다가 떨어졌는데, 바로 그 떨어진 곳이 지금의 백률사 자리였다고 한다. 이를 본 사람들이 슬퍼하여 다음해인 법흥왕 15년(528) 그 자리에 절을 세우니, 그 절이 자추사(刺楸寺)로서 훗날 백률사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한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곧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의미인 것이다.
헌덕왕 9년(817) 이차돈을 추모하여 석당(石幢)을 세웠으며,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이 절을 1600년경에 경주 부윤(府尹) 윤승순(尹承順)이 중건하고 대웅전을 중창한 기록이 있다. 대웅전 동쪽 암벽에 삼층탑이 음각되어 있으나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알아보기 힘들다. 신라시대의 작품이며 대웅전 앞에 탑을 건립할 자리가 없어 소금강산 암벽에 만들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경내에는 옛 건물에 쓰였던 것으로 보이는 초석과 석등의 지붕돌 등이 남아 있다.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금동약사여래입상(金銅藥師如來立像:국보 28)과 이차돈의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이곳에는 마애삼존좌상(磨崖三尊坐像)·마애탑(磨崖塔)·굴불사지석불상(窟佛寺址石佛像:보물 121), 기타 선원(禪院) 1동과 석탑·석등재(石燈材)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