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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건축가” “에덴 남녀”의 저자이며, 기독교 복음주의 상담심리학자인 “래리 크랩 박사”의 “아내의 히스토리 남편의 허스토리”를 보면, “불행히도 내게는 누구의 옷이든지 빨면 줄어들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직업상 일주일에 2~3일은 출장을 다녀야 하기에 결국 세탁 일은 남편의 몫이 되었다. 얼마 전 나는 순면으로 된 검은 바지 한 벌을 샀다. 그 바지는 줄어들면 절대로 안 되는 옷이었다. 나는 아무도 집에 없고 다른 빨랫감이 없는 날, 그 면바지를 세탁기에 넣었다. 그리고 잠깐 일을 보러 나갔다. 바지는 탈수하지 않고 집에 돌아온 즉시, 건조대에 널어서 말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 후 귀가했을 때, 건조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남편이 집에 들어와 있었다. 검은 면바지는 이미 똘똘 말려 건조기 안에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가족들의 옷을 여러 번 줄여 놓았다. 반면, 남편은 그 많은 빨래들을 기꺼이 잘해 왔다. 여기서, 내가 남편에게 이 문제로 시비를 건다면, 지난 21년 동안 서로가 저지른 세탁 실수를 다 들이대면서, 비난하는 큰 싸움으로 번질 것 같았다. 문득 지난 주일 예배 시간에 들은, 갈 5: 22 - 23의 설교가 생각났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였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괜찮아요’ 이 말을 순간, 서로 격렬하게 한판 붙어 보려고 머리 속에 준비한 모든 비난거리가 싹 씻겨 버렸다. 내가 남편의 불완전함과 잘못에 부딪쳤을 때, 성령의 열매를 묵상하자 성령께서 나의 본성을 뛰어넘는 온유함으로 반응하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다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쟁에 대해 말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였고, 어린아이와 같이 성숙하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들이 교회에서 분쟁을 일으킨 원인은, “파당”때문입니다. 이러한 파당의 이유는, 인간적인 자랑 때문입니다. 본장인 3: 22에서, 사도 바울은, 그들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로 나뉘어 파당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파”는 그들이 바울에게서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것을 자랑했고, “게바파”는 유대인의 율법과 전통을 자랑하며, 눈에 보이는 표적을 자랑했습니다. 또, “아볼로파”는 헬라의 지식과 지혜를 자랑했습니다. 이러니,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하나가 되겠습니까? 이에, 사도 바울은 3: 23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며,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통하며, 하나님만이 그 중심에 계심으로 정리합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는, 인간적인 모든 자랑을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함을 말합니다. 하지만, 본문 1절에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며, 아직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에 비유합니다. 그들은 이처럼, 신앙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아이와 같았고, 본문 3절에서는,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며, 겉으로는 성도이지만, 믿음적으로 아직도 세상의 때를 벗지 못한 세상사람 즉, 일반인과 같았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시간이 가면, 저절로 자라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하나님 안에 거하며, 일반인으로 지냈던 어린아이의 일을 끊임없이 버리고, 믿음의 성숙을 향해 노력하며 달려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의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다면, 그것은 참으로,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축복과 칭찬과 격려만 좋아합니다. 여러분, 성도된 우리는 오직, “인생과 신앙과 교회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행위의 주체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에, 모든 성도와 사역자들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공로의식이 아닌 은혜의식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 역시, 오직 하나님께만 목표를 맞추고,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시면,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일치와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을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본문에서의 “육신에 속한 자”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며, 2: 14에 언급한 “육에 속한 사람”과는 구분됩니다. 이유는, 헬라어 원어로 볼 때, 2: 14절에서 언급하는 “육에 속한 사람”은, “비 기독교인”을 말하지만, 본문에 언급된 “육신에 속한 자”는 성령으로 거듭났으나, 아직 신앙의 미성숙으로 인해, 여전히 육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연인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켜, “육신에 속한 자”라고 한 것은, 그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표면적인 문제가 표출되면, 사람들이 그것을 인식하기 전에, 내면에는 이미 독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의 분쟁은, 분쟁이 앞선 것이 아니라, 시기가 앞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의 표출을, 사도들에게로 돌린 것입니다. 그랬기에, 사도 바울은 “사람을 따라 행함”이라고 한 겁니다. 결국, 고린도 교인들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한다면서, 실제로는 하나님의 종들을 따라 행하였던 겁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비롯한 아볼로나 게바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도록 가르쳤지만, 성도들은 사역자들이 보이고 실천하는 믿음과 섬김의 본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인 그들을 따랐던 겁니다. 오늘날까지 많은 이단들이 출현했다가 사라졌지만, 이단들이 출현할 때마다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면서, 하나님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람을 따른 현상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교주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거나 하나님보다 더 상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우상숭배입니다. 그러기에,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도 바울은 본장의 끝 절인 23에서,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며,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께로 통하며, 하나님만이 그 중심에 계신다고 못 박은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은 결코, 어떤 한 개인의 생활을 보며, “사람이 저만큼 착하게 살 수 있구나!”라며 감탄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선하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스스로 인의 장벽을 치는 일입니다. “저 사람은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만큼 거룩한 사람이다”라며, 찬사를 던지는 순간, 그의 신앙은, 그 순간 멈추고 끝나게 됩니다. 그것은, 그 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자신과의 직접적인 교제의 신앙을 포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사도 바울이 23절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역자나 성도나 모두가 하나님의 것임으로 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7절을 보시면,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는 사역자들은 물론이요, 성도들에게도 계속해서 사명을 주시며, 일하시기를 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을 따라 일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가 성장하는 것은, 심고 물주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성경을 알아야 신앙이 성장한다며, 어디든 성경을 가르치는 곳이 있다면, 그 곳으로 달려갑니다. 또는, 성경을 가르쳐 달라고 강요를 합니다. 물론, 성경을 배워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부수적인 일입니다. 부식이 주식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어떤 식당이든 메인 요리보다, 다른 무엇이 우선될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배우고자 하는 것은, 설교로서도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설교가 성경 본문에 충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설교가 성경 본문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로 감동을 주거나 지식의 만족을 느끼게 한다면, 설교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설교 한 편을 작성하기 위해, 일주일을 본문과 씨름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며, 묵상하는 가운데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를 들을 때, 다른 생각을 하거나 졸아서는 안 됩니다. 설교를 설교자를 통해, 본문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아니며, 설교자 역시, 그것을 자신의 권위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의 명을 받아 타국으로 출장 간 대사가 그 곳에서 전하는 말이 자신의 말이겠습니까? 왕의 명을 받아 타국으로 간 사신이 자신의 말과 뜻을 전하겠습니까? 그와 같은 겁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한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장하기 원하십니까? 우리가 더욱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성도가 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지 기도하며, 하나님 앞에서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에서도 찾으시기 바랍니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가득할 겁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돌리지 않고, 매사에 불만불평을 늘어놓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 없다거나 모르겠다고 하는 것은, 본문의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처럼,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설교자는 설교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믿음을 심고 또, 물을 줄 뿐입니다. 이로 인해서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겁니다. 사역자나 우리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우리의 공로가 되어, 하나님 앞에서 겸손이 아니라, 우리의 공로를 앞세우는 공로의식일 뿐입니다. 여러분, 믿음 성장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에서 사람의 수고나 노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 성장을 위한 우리의 모든 수고나 노력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수고와 노력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가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교회가 성장하길 원하십니까? 교회의 성장을 사람의 수고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봄이 되면, 농부들이 땅을 일구고 파종합니다. 그리고, 물을 뿌리고, 해충제도 뿌림으로, 해충의 피해가 없이 곡식이 잘 자라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한다고 해서, 곡식이 잘 자랍니까? 농부의 이러한 수고와 노력은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셔야 합니다. 또, 적절한 태양 빛을 주셔야 합니다. 그러기에, 곡식이 파종에서 열매를 맺게 되기까지의 궁극적인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주체로 여기지 않을 때, 우리의 신앙은 신본주의를 떠나 인본주의로 흐르게 되고, 우상숭배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의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꼭 기억하셔서, 오직,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돌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9절을 보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 합니다. 성도된 우리는 한 마음으로 합력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동역자입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가 세 번 반복됩니다. 성경에서 두 번이상 반복되는 것은, 강력한 강조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서 아주 강하게, 사도 바울이 힘을 주어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사역자들은 사역자들대로, 성도는 성도들대로, 제각기의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행하는 겁니다. 다시 본문을 보시면, 바울 자신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라는 하나님의 밭과 집에서, 하나님을 위해 함께 일하도록 부름을 받은 일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이 사역자들의 의사와 전혀 관계없이, 스스로 바울파니 아볼로파니, 게바파로 나누어 다투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임을 내포합니다. 본문의 첫 부분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역자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고 합니다. 여기에는, 동료 동역자들에 대한 시기심이나 경쟁심이 전혀 있지 않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말이 좀 어눌하다고 하여, 능변이 좋은 아볼로에 대해 어떤 경쟁심이나 질투심을 갖지 않았고, 또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여 설립한 자라고하여, 그 어떤 우월감도 갖지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밭이며, 하나님의 집인 고린도 교회를 위해 함께 애쓰고 수고하는 동역자로서의 의식만을 가질 뿐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교회의 참된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통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믿음의 자세입니다. 따라서, 성도된 우리는 교회의 모든 것에 대해, 세상적 관점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밭이라는 성경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주인의 밭을 위해 함께 수고하는 종들과 같은 마음으로 동역자의식을 가지고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로서 오직 하나님의 뜻과 영광만이 드러냄으로, 오직 은혜와 진리 속에서 성숙한 성도가 되시어, 하나님께만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