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수확하며 드는 생각
팔월이라 서리 내리려 할 제
동산의 밤이 비로소 벌어졌네
어제는 반쯤 푸르던 것이
오늘은 벌써 다 누레졌구나
산바람이 한 번 살짝 불자
주운 밤이 바구니에 한가득
종에게 나무 위로 올라가 따게 했더니
잽싸게 긴 장대를 휘두르네
공중에서 밤톨이 비 오듯 떨어져
떼굴떼굴 굴러 땅에 가득 빛나네
언덕 미끄러워 쉬이 굴러가고
풀 무성하여 잘도 숨누나
크고 작은 것 쓰임 구별하여
한데 모았다가 따로 담아서
안 좋은 것은 안주로 삼고
좋은 것은 제사에 올린다네
일일이 동복에게 타이르네
쉬지 말고 부지런히 수확하라고
八月霜欲降 팔월상욕강
園栗初坼房 원율초탁방
昨日半靑者 작일반청자
今日已全黃 금일이전황
山風一微過 산풍일미과
動手拾盈筐 동수습영광
課奴上樹摘 과노상수적
揮霍飛竿長 휘곽비간장
雨落空中實 우락공중실
磊磊遍地光 뇌뢰편지광
厓滑自易流 애활자이류
草深或善藏 초심혹선장
小大當異用 소대당이용
鳩聚又各囊 구취우각낭
下以供餖飣 하이공두정
上以助烝嘗 상이조증상
一一飭僮僕 일일칙동복
辛勤收未央 신근수미앙
- 신광수(申光洙, 1712~1775) 『석북집(石北集)』 권3 「밤을 따며[摘栗]」-
지금은 한창 밤을 수확하는 계절이다. 예전에 국민 드라마이자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전원일기’가 있었다. 농촌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 437화인 ‘밤을 따는 노인’ 편이 있다. 마을의 청년들이 산(山) 주인의 부탁으로 장대를 들고서 줄지어 밤을 털러 가다가 밤을 주우러 가는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임자 없는 밤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묻고는 곧장 밤나무를 찾아가는데, 어떤 사람들이 가지를 꺾고 돌로 나무를 쳐서 몰래 밤을 따는 것을 보고는 말 못 하는 나무도 생명이므로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고 쓴소리를 한다. 그러고는 땅에 떨어진 밤만을 주워다가 모두 양로원과 고아원에 가져다준다.
이 시도 ‘전원일기’의 극 중 한 장면처럼 밤을 따는 이야기를 자세히 묘사하였다. 주인은 바람이 불어서 땅에 떨어진 밤을 주운 뒤, 종을 시켜 나무 위로 올라가 장대로 밤을 털게 해서 우수수 떨어진 밤을 한데 모은다. 그래서 흠이 없이 깨끗하여 제사에 올릴 것과 상하거나 벌레가 먹어 술안주로 할 것을 따로 구별한다. 그런데 불청객이 등장한다. 바로 밤을 탐내는 동네 아이들이다.
어린아이들 앞뒤로 와서/ 조금씩 나무 옆에 모여드네
처음에는 못 오게 엄히 꾸짖었는데/ 점점 막기 어려움을 깨닫네
머뭇대며 살짝 경계를 침범하다/ 여기저기서 순식간에 들어와
맨몸으로 가시를 무릅쓰고/ 버선발로 밤껍질 위를 달리네
마침내 더는 두려워하지 않고/ 주인 얼굴 보며 멋대로 날뛰네
주인은 매로 땅을 치면서/ 성난 얼굴로 황급하게 몰아내지만
약은 놈들 달아났다 곧바로 와서/ 전처럼 모여 장사진을 이루네
저렇게 벌떼처럼 달려와 훔치니/ 동쪽이든 서쪽이든 막을 수 없네
마침내 한 번 웃고는/ 분수껏 가져가게 내버려두네
주인이 어느 정도 밤을 줍자 아이들이 슬금슬금 모여든다. 썩 꺼지라고 엄포를 놓고 매를 들고 땅을 치면서 소리도 쳐 보지만 소용없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여기저기서 순식간에 밤나무 밑으로 와서 손이나 발이 밤톨에 찔리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둥지둥 밤을 줍는다. 주인은 더는 막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실소(失笑)하며 분수껏 가져가도록 내 버려둔다. 주인은 이 광경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태곳적에는 열매를 따 먹을 때/ 너와 나의 소유가 따로 없었네
그래서 사람들 다투는 일 없어/ 산 과일 마음껏 가져다 먹었지
순박한 풍속은 나날이 쇠퇴하여/ 원림에도 사적인 영역이 생겼네
대추와 배 감과 복숭아도/ 엄한 말과 표정으로 못 가져가게 막았네
이를 생각하니 절로 얼굴 붉어져/ 괴롭게 따지고 싶지 않구나
머뭇거리다 밤을 두고 가니/ 아이들이 미친 듯 뛰며 춤추누나
아주 오래전에는 누구든 산에 난 과일을 따서 먹을 수 있었는데, 이러한 순박한 풍속이 점점 사라져서 저절로 자라는 과수(果樹)도 남들이 못 가져가게 막았다. 주인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런 각박한 풍속을 생각하니 너무도 부끄러워 남은 밤을 두고 떠난다.
공(公)과 사(私)의 구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졌다. 예전에는 여럿이서 함께 먹거나 함께 즐기던 것이 이제는 혼자서 먹거나 즐기게 되면서, ‘우리’라는 공동체보다 ‘나’라는 개인으로 우리의 언어와 인식이 바뀌었다. 1인 가구의 증가와 핵가족화는 시대의 흐름이니 어쩔 수 없지만, ‘전원일기’의 노인이나 이 시의 밤나무 주인처럼 내 속에 ‘나’로만 다 채우지 말고 ‘우리’라는 공간을 조금 마련하면 어떨까?
글쓴이 최이호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