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伊洛淵源錄』,卷九,謝良佐,遺事와 사량좌 폄훼
2026년 8월 28일
주희는 41-47살(1170-1176)에 편집한 『伊洛淵源録』에서 謝良佐의 遺事를 채집하면서 사량좌가 이정(二程)에게 받았던 높은 평가보다는 폄훼하는 기사를 많이 싣고 비판하였습니다. 주희가 62살(1191) 겨울에 지은 「사량좌 사당기(應城縣上蔡謝先生祠記)」에서 사량좌를 찬양한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첫째, 靜坐입니다. 주희는 이정이 초기에는 정좌(靜坐) 공부를 가르쳤으나 나중에는 주경(主敬) 공부를 가르쳤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량좌가 靜坐에 치중하였는데 이것은 이정의 말년 종지(主敬)에 어긋났다는 것입니다.
둘째, 사량좌의 공부 병인(病因)은 배운 것을 외워 기억하는 기문(記聞)이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래서 완물상지(玩物喪志)의 병인을 드러냈습니다. 다시 말해 사량좌는 배운 것을 기억하던 잘못된 학습 방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정좌를 실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셋째, 사량좌가 정좌 공부하여 얻은 선종(禪宗)의 “절념(絶念)” 체험 관점에서 『시경』의 “하사하려(何思何慮)”를 대답하였다가 정명도 또는 정이천에게 꾸중을 들었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사량좌가 말한 절념은 육조 혜능(六祖慧能) 선사가 “선정 상태에서 착하고 좋은 기억이 떠올라도 사량(思量)하지 말고 나쁘고 괴로운 기억이 떠올라도 사량하지 말라(『六祖壇經』, 「行由品」 : 不思善,不思惡)”는 뜻이며 망념을 분별하는 사량에 집착되지 말고 분별을 내려놓으라(放下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제6식 견분이 망념(妄念)의 상분을 분별(分別)하지 않아야 높은 단계의 선정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정(二程)이 사량좌에게 “너무 높은 경지를 말하였다(發得太早)”고 말한 비난을 채록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사량좌가 실토한 내용을 보면 그는 지관(止觀) 공부에서 “선정(禪定, 止)에 들어가더라도 선정 상태에서 마음의 관(心 : 觀, 慧)을 작용시켜야 한다.(心有止,只爲用他,若不用,則何止?)” 그런데 “제6식이 사라져서 묘관찰지(妙觀察智)를 얻은 보살 단계가 아니면 관혜(觀慧)를 발휘할 수 없다(未到此地,除是聖人便不用)”고 정혜 겸수(定慧兼修)를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사량좌가 정좌하더라도 관혜(觀慧)를 위하여 지각(知覺)을 주장한 까닭입니다. 정이천이 성리(性理) 본체론을 발휘하였다면 사량좌는 마음의 작용(心用: 知覺)을 제시하여 본체론에 치중한 것을 보완하는 인식론을 펼쳤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사량좌가 지(止) 상태에서도 마음(心)을 작용하여야 한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마도 지자대사(智顗) 『육묘문(六妙門)』 수준은 알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량좌는 이정(二程) 문하에서 “정좌를 배워 20년이 넘었으나 여전히 절념(絶念) 또는 ‘하사하려(何思何慮)’ 경지에는 들어가지 못하였다(當初曾發此口,被伊川一句壞了二十年)”고 한탄하였습니다. 심한 폄훼도 있는데 이 채록은 사량좌가 20년 동안 정좌 공부를 열심히 하였더라도 성과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사량좌는 정이천이 세상을 떠난 뒤에 불교에 빠졌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정(二程) 살아생전에 벌써 불교의 선법(禪法)을 이해하고 실천하였습니다.
사량좌의 실토는 자신의 체험 사실이나 실제로 이런 경지를 바라며 자신의 문제점을 걱정하는 단계에 올라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설사 윤돈(尹焞)이라도 사량좌의 정좌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였고 양시(楊時)는 더욱 그렇습니다.
넷째, 이정(二程)의 학술 종지 구인(求仁)의 깨달음(見得)에 관하여 사량좌는 “이것저것을 낱낱이 들어가며 떠들었는데(上蔡則不然,有問則歷歷言之)” 오히려 “양시(楊時)가 유마힐처럼 묵언하였다(龜山語至此,更不說破,謂說時只是眼前事,不如使人自體認)”고 채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량좌의 공(空) 체험의 수준이 낮다는 뜻입니다. 설사 양시가 공(空)을 말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하였더라도 정말로 양시 마음속이 공(空)이었을까요? 말장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량좌는 이정(二程)의 학술 종지 구인(求仁)에서 멀어졌다는 폄훼입니다.
다섯째, 사량좌에 대한 최종 평가는 정이천이 사량좌에게 “경세(經世) 능력을 가졌다(有王佐才)”고 말한 적이 없다는 증언을 채록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사량좌가 “권력욕과 이익 욕심을 버리는 데 10년 걸렸다(勢利如何?曰:打透此關,十餘年)”고 말하였더라도 여전히 권력욕과 탐욕이 남아있는 자로(子路)와 염유(冉有)와 같다(由、求之徒)라고 폄훼하였습니다.
끝으로 사량좌는 이정(二程)의 가르침을 굳게 믿지 않고 사실상 반신반의하였다는 것도 채록하였습니다.(良佐每常聞先生語,多疑惑。今次見先生,聞先生語,判然無疑,所得如此。) 이렇다면 사량좌가 과연 이정의 문인이라고 평가할 수 있겠냐는 회의(懷疑)입니다.
程顥(1032-1085)
謝良佐(1050-1103),元豐八年(1085)中進士
遊酢(1053-1123),1082年,中進士
楊時(1053-1135),熙寧九年(1076),進士及第。
尹焞(1071-1142),字彥明,一字德充,號和靖,洛陽人。
--------------------------------------
「謝學士」︰
【名良佐,字顯道,上蔡人。與游察院(游酢,1053-1123)、楊文靖(楊時,1053-1135)同時受學,歷仕州縣。建中召對,除書局官。後復去,爲筦庫,以飛語坐繋詔獄,褫宮。有論語說、文集、語録行於世。游公爲誌其墓,今訪求未得。】
「遺事」︰
1、明道初見謝子,語人曰:此秀才展拓得開,將來可望。【見上蔡語録。】
2、謝顯道習舉業,已知名,徃扶溝見明道先生(1075-1080年任縣令),受學,志甚篤。明道一曰謂之曰:爾輩在此相從,只是學某言語,故其學心口不相應。盍若行之?請問焉,曰:且靜坐。伊川每見人靜坐,便歎其善學。【見祁寬所記尹和靖語。】
3、明道知扶溝縣事(1075-1080年任縣令),伊川侍行。謝顯道將歸應舉,伊川曰:何不止試於太學?顯道對曰:蔡人尠習『禮記』,决科之利也。先生曰:汝之是心,已不可入於堯舜之道矣。夫子貢之高識,曷嘗規規於貨利哉?特於豐約之間,不能無留情耳。且貧富有命,彼乃留情於其間,多見其不信道也。故聖人謂之不受命。有志於道者,要當去此心,而後可語也。顯道乃止。是歲(1085)亦登第。【見程氏遺書,下同。】
4、蔡州謝良佐,雖時學中,因議州舉學試得失,便不復計較。
5、明道謂:謝子雖小魯,直是誠篤,理會事有不透,其顙有泚,憤悱如此。【見侯子雅言。】
6、朱公掞(朱光庭,1037-1094,字公掞)以諫官召,過洛,見伊川。顯道在坐,公掞不語。伊川指顯道謂之曰:此人爲切問近思之學。【見程子外書。】
7、謝先生初以記聞爲學,自負該博,對明道先生舉史書不遺一字。明道曰:賢卻記得許多,可謂玩物喪志。謝聞此語,汗流浹背,面發赤。明道卻云:只此便是惻隱之心。及看明道讀史,又卻定行看過(逐行看過),不差一字。謝甚不服。後來省悟,卻將此事做話頭,接引博學之士。【見胡氏傳家録。】
8、昔日作課簿,以記日用言動視聽是禮與非禮者。昔日學時,只垂足坐,不敢盤足。又云:昔者用功處甚多,伹不敢說與諸公,恐諸公以謂須得如此。【見上蔡語録,下同。】
9、謝子與伊川别一年,徃見之。伊川曰:相别又一年,做得甚工夫?謝曰:也只是去箇矜字。曰:何故?曰:子細點檢得來,病痛盡在這裏。若按伏得這箇罪過,方有向進處。伊川點頭。因語坐同志曰:此人爲學切問近思者也。胡文定公(胡安國,1074-1138)問:矜字罪過,何故恁地大?謝曰:今人做事,只管要誇耀别人耳目,渾不關自家受用事。有底人,食前方丈,便向人前喫,只蔬食菜𡙡,卻去房裏喫,爲甚恁地?
10、知命雖淺近,也要信得及,將來做田地,就上面下工夫。余初及第時,歲前夢入内庭,不見神宗,而太子涕泣。及釋褐時,神宗晏駕,哲宗嗣位,如此等事,直不把來草草看卻。萬事真實有命,人力計較不得。吾平生未嘗干人,在書局亦不謁執政。或勸之,吾對曰:他安能陶鑄我?自有命在。若信不及,風吹草動,便生恐懼憂喜,枉做卻閑夫,枉用卻閑心力。信得命及,便養得氣不挫折。
11、游子問謝子曰:公於外物,一切放得下否?謝子謂胡子曰:可謂切問也。胡子曰:何以答之?謝子曰:實向他道在上面做工夫來。胡氏曰:如何做工夫?謝子曰:凡事須有根,屋柱無根,折卻便倒。樹木有根,雖剪枝條,相次又發。如人要富貴,要他做甚,必須有用處尋討要用處病根,將來斬斷,便没事。
12、或問:謝子於勢利如何?曰:打透此關,十餘年矣。當初大故做工夫,揀難捨底棄卻,後來漸漸輕至,今日於器物之類置之,只爲合要用,卻並無健羡底心。
13、舊多恐懼,常於危階上習。又曰:六文一管筆,特地寫教不好,打疊了此心。
14、釋氏只要箇絶念。某初得似釋氏。明道問近日用心,對曰:近日只用何思何慮一句。伯淳曰:有此理,只是發得太早。(第15條、伊川曰:是則是有此理。賢發得太早)
(李按︰謝氏初學佛教靜坐之絕念,未熟悉靜坐方法,無入禪境,卻說出儒家之何思何慮,因而受到程明道嚴厲批評。)
15、問:太虚無盡,心有止,安得合一?曰:心有止,只爲用他,若不用,則何止?吾丈莫已不用否?曰:未到此地,除是聖人便不用。當初曾𮈏此口,被伊川一句壞了二十年。曾徃見伊川,伊川曰:近日事如何?某對曰:天下何思何慮?伊川曰:是則是有此理。賢發得太早,在問當初發此語時,如何?曰:見得這箇事,經時無他念,接物亦應副得去。問:如此卻何故被一句轉?卻?曰:當了終須有不透處。當初若不得它一句救拔,便入禪家去矣。伊川直是會煆鍊得人,說了又卻道恰好着工夫也。問:聞此語後如何?曰:至今未收。道到何思何慮地位,始初進速,後來遲,十數年過,卻如夢如挽,于到滿時,愈難開。然此二十年聞見知識卻煞長。【案:前段(第14條)與此小異,蓋前段(14)曾氏所記,而此段(15)胡氏所記也。未知孰是,姑兩存之。】
(14、伯淳曰:有此理,只是發得太早。)
16、馮忠恕(尹焞門人,『涪陵紀善錄』一卷)聞陳叔易言︰伊川嘗許謝良佐有王佐才,以是質於和靜(尹焞,1071-1142)。和靜曰:先生無此語。先生晚年,顯道授澠池令,來洛見先生,留十餘日,先生謂焞如見顯道,試問此來所得如何?焞卽徃問焉。顯道曰:良佐每常聞先生語,多疑惑。今次見先生,聞先生語,判然無疑,所得如此。具以告先生。先生曰:某見得它也是如此,雖甚喜之,但不聞此語耳。【見涪陵記善録。】
17、謝顯道建中間上殿不稱旨,先生聞之喜,巳而就監門之職。陳貴一問:顯道:何如人?先生曰:由、求之徒。【見程氏遺書。】
18、謝子見河南夫子,辭而歸。尹子(尹焞)送焉,問曰:何以教我?謝子曰:吾徒朝夕從先生,見行則學,聞言則識。譬如有人服烏頭者,方其服也,顔色悦懌,筋力疆盛。一旦烏頭力去,將如之何?尹子反,以告夫子。夫子曰:可謂益友矣。【見上蔡語録。】
19、謝先生監西竹木場,朱子發(朱震,1072-1138)自太學,與弟子權(朱巽)偕徃謁之。坐定,子發進曰:震願見先生久矣,今日之來,無以發問。不識先生何以見教?先生曰:好,待與賢說一部『論語』。子發私念:日刻如此,何由親欵其講說?已而具飲酒五行,只說他話。及茶罷,乃掀髯曰:聽說『論語』,首舉子見齋衰者與冕衣裳者與瞽者,見之,雖少必作,過之必趨。又舉師冕見,及階,子曰:階也。及席,子曰:席也。皆坐。子曰:某在斯,某在斯。子張問曰:與師言之道與?曰:固相師之道也。夫聖人之道,無微顯,無内外,由麗掃應對進退而上逹天道,本末一以貫之。一部『論語』只恁地看。【見上蔡語録後跂。】
20、學者必求仁,須將孔門問答仁處編類考察,自體認一箇緊要處方可。若不實見得分明,則流爲釋氏,是自家元不曾有見處。龜山(楊時)語至此,更不說破,謂說時只是眼前事,不如使人自體認。上蔡則不然,有問則歷歷言之。西人氣直,謂說後曉者,自是去做工夫,否則休耳。【見胡氏傳家録。】

첫댓글 좋은 말씀과 자료들, 대단히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 백화에 어눌하여 자료를 읽어내는 데는 어려움이 많습니다만,
시간을 두고 차근 차근 읽으면서 자료로 활용하겠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십시오.
이성두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