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할머니의 팔순 기념 제주 여행을 왔다가 할머니가 정신 착란 증상을 보여 필자의 진료실을 찾았던 가족이 있었다.
갑자기 생긴 정신착란은 그 원인을 빨리 찾아 치료해야 한다. 천만다행으로 할머니의 ‘귀 밑에 붙은 노란 패취’를 찾아내어 떼어낸 것으로 사태가 잘 마무리됐다.
제주도 비행기 여행으로 멀미가 날까 걱정했던 할머니는 여행 전날 멀미약을 사서 귀 뒤에 붙였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록 떼어내지 않아 이런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이 약의 제조사는 한동안 제품 제대로 사용하기 캠페인까지 벌였다고 하니, 이런 경우가 드물지는 않은 모양이다.
문제가 된 멀미약의 약효 성분은 스코폴라민(scopolamine)이다. 스코폴라민은 그 성분을 추출한 식물 ‘스코폴리아 카르니올리카(Scopolia carniolica)’의 이름에서 왔다. 이 식물의 학명은 카르니올라(Carniola; 지금은 슬로베니아 땅)에서 식물과 곤충을 연구하고 채집했던 이탈리아 출신의 의사 지오반니 스코폴리(Giovanni Scopoli; 1723~1788)의 이름에서 왔다.
스코폴리(Giovanni Scopoli) → 스코폴리아(Scopolia carniolica) → 스코폴라민(scopolamine)
칼 린네(Carl Nilsson Linnæus; 1707~1778)는 이 식물을 분류하고 학명을 붙일 때 스코폴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과 그가 연구했던 땅의 이름을 썼다. 두 사람은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한번도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스코폴리는 자신이 발견하고 기록한 식물과 곤충의 자료를 린네와 공유했다. 15세 연상인 린네는 스코폴리의 연구에 관심이 많았고 그를 존경했다. 이에 그의 이름을 식물에 남겨 후세 사람들이 영원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린네의 숭고한 뜻과는 달리 사람들은 스코폴라민은 웬만큼 알아도 스코폴리의 이름은 잘 모른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앞으로 그러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스코폴리(좌)와 린네(우). ⓒ 위키백과 자료
스코폴라민이 유명한 이유는 그 독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코폴라민은 스코폴리아 외에도 벨라돈나(Atropha belladonna), 사리풀 히오시아무스 니게르(Hyoscyamus niger), 흰독말풀 다투라(Datura stramonium)에서도 추출되는데 이들은 모두 가짓과에 속한다.
슬로베니아 마취-중환자의학회의 로고는 스코폴리아 카르니올리카다. 카르니올라는 지금의 슬로베니아 땅이고 스코폴라민은 한 때 마취의사들에게 아주 중요한 약이었다. 사진은 학회 홈페이지. ⓒ http://www.szaim.org
그런데 가짓과 식물에서도 스코폴라민 만큼 유명한 약효 성분이 추출됐다. 바로 아트로핀(atropine)이다. 오늘날 응급실이나 집중치료실에서 심폐소생술 때 널리 쓰는 강심제 주사, 바로 그 성분이다.
가짓과 → 스코폴라민, 아트로핀 추출
오래 전부터 가지과 식물은 독초로 유명했다. 그 뿌리나 추출물을 먹으면 불안, 감각마비, 환각, 기억상실증을 일으켰다. 심지어는 목숨도 앗아갔다. 클레오파트라는 적당한 자살약으로 이것을 시험했고, 셰익스피어도 자신의 걸작에 이 것을 등장시켰다.
이성을 사로잡아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 독초(insane root)라도 먹은 거요?
- 셰익스피어, 『맥베스』, 마녀들의 등장 장면에서
이렇게 무시무시한 독초들에 붙은 학명 또한 재미있다.
벨라돈나는 오래 전부터 그 즙을 눈에 떨구면 눈동자가 커져 눈이 이뻐진다고 미용 목적으로 널리 썼다. 그래서 이탈리아어로는 아름다운 여인을 뜻하는 ‘벨라돈나(bella donna)’로 불렸다. 하지만 즙을 먹으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린네는 이 풀의 학명을 Atropha belladonna로 붙였는데 ‘아름다운 여인의 목숨을 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운명의 여신’ 중 아트로파(Atropa)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그리스신화에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세 자매 여신이 등장하는데 ‘모이라이(Moirae)’로 부른다. 세 자매의 이름은 ‘실을 뽑는다’는 뜻의 클로토(Clotho), ‘추첨’이란 의미의 라케시스(Lackesis), ‘돌아오지 않는다’란 뜻을 지닌 아트로파(Atropa)이다.
모이라이 여신이 한 여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장면. 좌로부터 아트로파, 라케시스, 클로토. ⓒ 위키백과 자료
클로토가 인간의 삶을 옷감 짜듯 실로 짜내면(명줄을 이어가면), 어느 순간 라케시스가 실을 잘라야 할 때(죽어야 할 때)를 표시하고, 아트로파가 그곳을 가위로 싹둑 자르면(명줄을 끊으면) 한 인간의 삶이 마감된다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믿었다. 이 세 여신들의 이름은 나중에 clothes(옷), lot(추첨) 그리고 아트로핀(atropine)으로 남았다.
모이라이 여신 세 자매에서 온 이름
클로토(Clotho) → 옷 (clothe)
라케시스(Lackesis) → 추첨(lot) → 복권(로또; lottery)
아트로파(Atropa) → 아트로핀(atropine)
그런데 린네는 왜 이렇게 벨라돈나의 학명을 살벌하게 만들었을까?
의사이기도 했던 린네는 벨라돈나의 즙을 먹고 목숨을 잃은 가련한 여성들을 알고 있었던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뻐지려다 죽을 수도 있다는 경고로 Atropa belladonna 라는 섬뜩한 학명을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적당한 번역어가 없어 벨라돈나풀이라 불리는 이 식물을 우리는 ‘미인박명초(美人薄命草)’라 부르면 어떨까?
한편 사리풀의 일종인 히오시아무스 니게르(Hyoscyamus niger)의 이름에도 숨은 뜻이 있다.
어원은 그리스어 hyoskýamos로 돼지(hyós)+콩(kýamos)의 합성어와 라틴어로 검은 색을 뜻하는niger의 조합이다. 돼지에게 먹이면 독성이 있다는 경고가 숨었다.
Scopolia carniolica 스코폴리아를 기억하라!
Atropha belladonna 미인박명을 기억하라!
Hyoscyamus niger 돼지에게 먹이지마라!
1831년에 ‘미인박명초(?)’ 뿌리에서 유효성분인 아트로핀이 분리됐다. 50년이 지나서는 가지과 식물에서 스코폴라민도 분리됐다. 이 둘은 구조가 비슷했고 약효도 닮았다.
20세기에 들어서 아트로핀과 스코폴라민의 정확한 작용 기전이 밝혀졌는데 말초신경계에서는 부교감신경의 기능을 방해했다.
부교감신경은 몸의 안정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기능하므로 그 작용을 방해하면 놀란 사람처럼 눈동자는 커지고, 장운동은 멈추며, 심장이 흥분된다. 반면 중추신경계는 억제해 진정제, 특히 멀미약으로 효과가 좋았다. 하지만 이 효과가 지나치면 ‘정신착란’을 일으킨다.
중추신경계 억제 작용은 스코폴라민이 아트로핀보다 더 강했다. 그래서 멀미약으로 귀아래에 붙인 스코폴라민이 연로한 할머니에게는 너무 강해 정신착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래서 노인들은 멀미약도 아주 조심해서 써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맛있게 먹는 가지는 괜찮을까?
다행히 우리가 나물로 무쳐 먹는 가지(eggplant)의 학명은 Solanum melongena 로 독성을 일으키는 가지과 식물과는 관련이 없다. 많이 먹는다고 중독이 되지 않고 미인도 되지 않는다.
다만 독성이 있는 스코폴리아 카르니올리카(Scopolia carniolica)와 친척뻘인 ‘미치광이풀(독뿌리풀; Scopolia japonica)은 우리나라의 야산에도 흔한 토종 자생식물이다. 이 역시 이렇게 험한 이름이 붙은 이유를 짐작할 것이다.
흔히 먹는 가지는 독성이 없지만 일부 가짓과 식물은 독성이 있다. ⓒ 박지욱 / ScienceTimes
아직도 종종 봄나물로 오인한 사람들이 중독을 일으켜 문제가 되고 있다. 소가 이 풀을 뜯어먹으면 미친 듯이 날뛰었고,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한방에서는 이것의 뿌리를 말려 낭탕근(莨菪根)이라는 약재로 썼다.
마지막으로, 아트로핀과 스코폴라민의 흥미진진한 사연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교훈이 있다. 근세기의 의사, 화학자, 연금술사인 파라켈수스(Paracelsus; 1493~1541)가 남긴 만고불변의 진리다.
약은 조금 쓰는 독. Sola dosis facit venenum
(약과 독의 차이는 바로 용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