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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4-15
기도란? / 박경수 목사
목적 : 내 기도의 목적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어야만 한다.
벼룩이 하나님께 소원을 빌었다. “나는 소가 되고 싶습니다.” 그러자 바로 소가 되었다. 다른 벼룩이 소원을 빌었다. “새가 되고 싶어요.” 그러자 또 새가 되었다. 그걸 본 다른 벼룩은 “쥐”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진짜 쥐가 되었다. 또 다른 벼룩이 소원을 빌었다. “나는 소, 새, 쥐 세 가지가 다 되고 싶어요.” 그러자 그 벼룩은 소시지가 되었다.
기도가 어렵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자기가 기도하면서도 무슨 내용인지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뭘 해주시기를 원하시는지 알지도 못한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자기들의 목소리를 저 높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올리려니 힘들 수밖에. 반대로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을 강제로 이 땅으로 끌어내리려니 힘들 수밖에.
기도는 세 단계가 있다고 했다. 나를 위한 기도, 남(you)을 위한 기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도이다. 가장 쉬운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도이다. 하나님의 뜻에 동참하는 기도이다. 내 마음속에 이미 성령님께서 기도하고 계신다. 그 분의 기도에 동참하기만 하면 된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잘못된 내 모습을 보이신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내 기도가 바뀌게 된다. 이것이 가장 쉬운 기도이다.
인간이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소설이 있다. 그것처럼 언제나 “예수님이라면 내가 어떻게 기도하기를 원하실까?”라고 기도하면서 물어보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면 된다. 이것이 곧 기도이다. 그 생각을 가슴에 품고 있는 한 모든 행동이 기도이다. 모든 장소에서 기도하게 된다.
옷깃을 여미고 기도의 골방에 무릎 꿇고 있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내 생각 속에, 내 영혼 속에 하나님을 품고 행하는 모든 행위가 곧 기도이다.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님을 느끼고 그 분의 기도에 동참하는 모든 행위가 곧 기도이다.
어느 기도원에서는 “개도 하는 방언 사람이 못하면 개만도 못하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개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기도를 한다. 그 기도원에서는 방언을 가르치는데, 조교가 “라라라……”라고 하면 따라서 하는 방식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많다. 주기도문 100번을 하라는 등의 이야기부터 주기도문을 빨리 발음하면 된다는 따위의 이야기들이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뿌리 채 뽑으면 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내가 해봤다. 그러나 나무도 뽑히지 않았고, 방언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죽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칼을 품고 달려가도록 만들었던 사람을 진심으로 용서하게 되었다. 그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입에서는 방언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특별할 것 없는 할머니가 계시다. 그분이 성경에 맛들이면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보이지 않던 눈이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80 넘은 분인데 돋보기를 벗어던지고도 깨알 같은 글씨의 성경을 읽는다. 며느리도 실을 바늘귀에 잘 꿰지 못하는데, 이 할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바늘귀에 실을 꿴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마 7:7~11).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답이 없어 보인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응답을 않으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한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까닭이다.
할머니 권사님이 손자를 위해 기도하신다. 제발 이번 대학입시에서 떨어지라고. 모두가 의아해한다. 그런데 권사님에게는 간절하다. 늘 1등만 하던 손자가 너무 인생을 만만하게 본다는 것이다.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해 대학입시에서 손자가 떨어지던 날, 권사님은 할렐루야를 외쳤다.
남들 대학갈 때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은 아니다. 중요한 시기에 1년 또는 2년 재수한다는 것이 어떻게 쉬운 일이겠는가? 그러나 인생에는 돌아갈 수밖에 없는 길에서, 상황에서 배워야 할 것이 참 많다. 사람들 보기에는 둘러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지름길인 경우가 훨씬 많다.
한나가 울면서 기도한다. 참 오랫동안 기도한다. 벌써 몇 년째인지도 모른다. 그 길고도 긴 세월 동안 하나님께 자식 주시기를 기도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시지를 않는다. 이 정도면 하나님께서도 반응을 보이실 만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남들이 다 쉽게 낳는 아기라고 해서 한나에게도 쉬운 일은 절대 아니다.
오래고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렸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주신 아들, 사무엘은 다른 아들들과 같지 않았다. 사사요, 선지자였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었다. 오랫동안 기도하게 하신 이유, 그것은 기도의 사람 사무엘을 얻기 위한 산고였다. 그래서 그토록 기도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가장 큰 죄는 교만함이다. 하나님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자기의지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은 당연히 기도한다. 기도하지 않으면 자기가 죽을 것 같은데, 부족하기만 한데 어떻게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기도하는 것이 당연하다.
노아 때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땅 밑에 있던 지하수도 솟구쳐 나오기 시작했다. 옷이 젖으면서, 안방에 들어온 물을 퍼내면서 한 마디씩 한다. 언제나 비가 그칠 것인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 비는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 내릴 것이기 때문이다. 살고 싶다고? 그러면 지금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내 생명줄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죽음과 고통을 그저 껴안고 버팅기는 것인데, 결국은 지쳐서 넘어지고 쓰러지고 고통과 아픔 때문에 울게 될 것이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죄이고, 기도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음이며,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교만함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움 없이도 버티어 볼 수 있다는 어리석음이다.
보통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저축한다. 영악한 사람들은 땅을 사거나 주식에 투자하여 좀 더 높은 이자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은행이 망하여 돈을 떼이는 경우도 있고, 주식의 가치가 떨어져 종잇조각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대비해 돈을 저축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만이 미래에 대한 완벽한 대책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기도 저축’이다.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기도를 통해 옥문이 열리고 간수가 예수를 믿는 사건이 벌어진 것은 한 번의 기도와 찬양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늘 기도하였던 두 사람이 쌓아둔 기도 저축 덕분이다. 상황이 닥쳤을 때 갑자기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쌓아둔 기도가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적당한 때에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를 할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평소에 기도를 열심히 해서 저축해 두면 생각지 않았던 기적들이 터지게 된다. 기도 저축이야말로 바로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대비책이다.
교회는 기도하는 집이며, 기도 은행이다. 우리는 얼마나 기도은행을 자주 들락거리는가? 나의 기도 통장
에 기도 입금을 많이 해두면 기도의 부자가 되어 필요할 때는 빼어 쓸 수 있고, 자녀와 다른 사람도 도울 수 있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더 좋은 때에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시는 분이시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서도 응답을 받았는지조차도 알지 못하는 자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응답을 알아보는 눈을 갖는 것은 더 중요하다. 그 눈으로 바라보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더 좋은 것’ 속에는 기도하지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시는 것들이 더 많음을 알게 된다.
대학 수능시험을 앞둔 고3의 마음이 착잡하다.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너무 짧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기도했다. 한 달, 아니 보름만이라도 시간을 더 달라고. 하나님께서 금세 응답하셨다. “너는 그동안 아주 착하게 살아왔구나. 또한 기도가 아주 간절하니 특별히 1년이란 시간을 주겠다. 내년에 시험을 보도록 하여라.”
은진이가 배가 고프다는 전화를 했다. 전화가 끝나는 순간부터 사모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한다. 은진이가 먹을 것을 이것저것 준비하기 때문이다. 은진이는 배가 고프다는 한 가지만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모는 참 많은 것을 준비해야만 한다. 아들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기에.
어린아이가 요구하는 것만 주는 부모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실상 아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빙산의 일각이요, 나머지는 모두 부모가 알아서 마련해 준다. 만약 어린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만을 얻는다면 그 어린아이는 제대로 자랄 수 없다. 어린아이가 구하는 것은 없어도 괜찮은 것들이요, 부모가 미리 알아서 준비해 주는 것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많은 것을 기도하는 것 같지만 우리가 기도하므로 얻는 것은 실은 미미하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서도 물과 공기 그리고 태양을 얻는다. 이것들은 모두 생명과 직결된 것들이다. 어찌 그뿐이겠는가? 이른 비와 늦은 비,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들, 아름다운 꽃과 나무들, 사랑하는 부모형제, 정다운 친구들…….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서도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이 귀중한 것들을 얻는다.
만약 지금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것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우리는 한 시간도, 단 일 분도 살아남을 수 없다. 이처럼 우리가 구하는 것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들이요,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것들이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와 함께 맡겨진 사명에 진정으로 충성을 다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구하기 전 이미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마 7:11~12).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러므로”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구하던 그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내게 주신다. 하나님께서 주실 더 좋은 것에는 내가 구하지 않은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아무 염려 말고 해야 할 일을 행하라는 말씀이다. 사람을 대접하는 인생을 살라는 말씀이다.
내가 사랑 받고 싶고, 내가 높임 받고 싶고, 내가 위로 받고 싶은 그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높이며 위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책임져 주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시기까지 사랑하신 사람을 사랑하며, 사람을 위하여,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직접 천국과 지옥을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제 아무리 아방궁 같은 저택에서 산다 해도 부부의 사이가 나쁘면 그들은 지옥 속에 있는 것이다. 반면에 초가삼간이라도 서로 사랑하고 위하면 그곳은 천국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사랑의 관계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인생을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신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의 기도에 하나님께서는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 내게 축복을 주시는 이유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장의자에서 앉아 기도하는 게 좋을까, 바닥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게 더 좋을까? 소리를 지르면서 기도할까, 묵상하면서 기도할까? 상관없다. 이런 것들은 상황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왜 기도하느냐 하는 것이다.
기도하면서 돈을 구해도, 성공을 구해도, 지위를 구해도 상관이 없다. 기도 제목으로 삼겠다는데 그걸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단, 기도의 목적이 내 밥그릇을 크게 하기 위한 것이라면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무당한테 가서 비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한 기도여야 한다. 형제교회에서는 이것을 ‘사람을 세운다’고 표현한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가 하나님 앞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도
록 기도해주고, 관심을 갖고 사랑의 거름을 준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께서 놀라셨다. 감동 받으셨다. 솔로몬을 위해 뭔가 특별한 선물을 주시고 싶으셨다. 그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물어보셨다. 솔로몬이 당연히 구할 것은 장수의 축복, 물질의 축복, 원수 갚는 것이 아닐까? 전혀 아니었다. 솔로몬이 대답한다.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왕상 3:9).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지혜를 간구하는데 하나님께서 싫다고 하실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이제 나는 네 말대로,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준다. 너와 같은 사람이 너보다 앞에도 없었고, 네 뒤에도 없을 것이다. 나는 또한, 네가 달라고 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화도 모두 너에게 주겠다. 네 일생 동안, 왕 가운데서 너와 견줄 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네 아버지 다윗이 한 것과 같이, 네가 나의 길을 걸으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네가 오래 살도록 해주겠다.”(왕상 3:12~14). 구하지 않은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는 주고 싶다. 우리의 기도가 바로 이러한 기도여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나에게 무엇이 있어야 할 지 아시기 때문에 분명히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신다. 내 생각대로 응답이 되지 않는다고 불평 원망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 깨닫고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한다면 차라리 기도하지 않는 것이 낫다. 개가 토한 것을 자신이 도로 먹음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살아 있는 시체이다. 그런 기도도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감정과 환경에 맞춘 기도도 필요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맞춘 기도가 맞다.
하나님께서는 내 기도가 살아있기를 원하신다. 행함이 있는 기도,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기도, 큰 사람 되기를 소원하는 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