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울로 보는 역사
고린도전서 10: 1-11
1.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2.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3.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4.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5.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6.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7.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8.그들 중의 어떤 사람들이 음행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음행하지 말자
9.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
11.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보기가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
오늘 성경말씀 6절과 11절에 ‘본보기’라는 단어가 2번 나옵니다. 이 단어는 개역한글 성경에는 ‘거울’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출애굽 과정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들을 거울삼아 하나님을 섬기자는 영적 교훈입니다. 사람이 영원히 보지 못하는 것이 자기 얼굴입니다. 영원히 보지 못하면서도 가장 예쁘게 꾸미려고 노력을 합니다.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반사작용을 하는 다른 물체에 자기 얼굴을 투영시켜서 되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 자기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이란 무엇인가?
자기 얼굴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기구가 됩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매일 거울을 보아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울을 쳐다보게 됩니다. 얼굴 화장을 오래하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거울 앞에서 하루 시간의 십일조를 바치고 살아갑니다.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여신도들의 가방 속에는 거의 다 거울이 들어있을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성경말씀은 고린도전서인데 본래 이 말씀은 구약에 있었던 실제 사건을 기억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민수기 25장, 출애굽기 17장의 있는 말씀을 반복한 것입니다.
내용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함으로 받았던 심판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그런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역사의 거울을 보라는 영적 교훈입니다.
지금 우리들의 삶 가운데 거울로 나타나는 교훈은 365일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경우가 나의 거울이 되는 일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음주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은 나에게 거울입니다.
‘아! 나는 절대 음주 운전은 하지 말자.’라고 사람들이 마음을 먹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도박을 즐기다가 가정 파탄이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나에게 거울이 되어서 ‘절대로 도박은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국제적인 거울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세계 6대 강국이던 아르헨티나가 빈민국이 되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집회에 갔을 때 그곳 지도자들이 해준 말이 있습니다.
“이 나라는 강성노조와 힘에 겨운 복지정책이 이 국민을 게으름뱅이로 만들어서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이 꼴이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거울의 역사입니다.
공산당 사회주의 국가는 다 망했습니다.
대부 역할을 하던 소련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러시아로 재탄생을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런 이데올로기는 하지 말아야지.’ 거울이 됩니다.
원전이라고 하는 과학이 그렇게 유익한 문명이지만 후쿠시마 원전이 터지니까 지상 낙원이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원전과 일을 잘해야지.’ 이런 거울이 됩니다.
반대의 거울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이 미국의 유명도시 리오에서 큰 호텔 뒷마당에 리어카 하나를 갖다놓고 호떡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몇 십 년 후에 그 호텔 주인이 되었습니다. 저는 부흥회를 가서 그 호텔에서 잠을 잤는데 로비에 가보면 그 사람의 그러한 역사가 사진과 설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보고 ‘아! 나도 열심히 해서 이 사람과 같이 되어야지.’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의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에는 우리나라 교과서에 덴마크를 모델로 가르쳤습니다.
지상 천국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달가스의 녹화운동과 그룬두비 목사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하자는 덴마크의 삶의 원칙이 천국으로 만들었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제가 덴마크에 갔을 때 그룬두비 목사의 흔적을 찾아보고 돌아온 적이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누구나, 어느 나라나 거울을 찾아 헤맵니다.
요즘에 우리나라에 ‘멘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말은 내가 닮고 싶은 거울의 인물을 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에도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곤란한 문제이면 다른 나라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 멘토를 잡지 않습니까?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렇게 했고 영국에서는 이렇게 했다고 항상 방송하는 것입니다. 거울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과거 불행의 사건을 계속 이야기하면서 거울을 제시합니다.
여기 보면 2만3천명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죽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민수기 25장의 역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한지라. 그 여자들이 자기의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모압 여자들이 누군가를 밝혀야 설교가 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을 향해서 갈 때 외로워서 조카 롯을 아들 삼아 데리고 갔습니다. 롯이 성장을 했을 때 아브라함과 롯은 생업의 재산권 때문에 다툼이 생겨져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롯은 아브라함을 배반하는 분위기로 헤어집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리라.” 말했습니다.
그들은 피차 유목민이기 때문에 양떼를 기르는데 절대 필요한 풀밭과 물 근원이 필요합니다.
“네가 좋은 땅을 선택하라.”
그러면 롯도 말해야 합니다.
“삼촌은 나의 아버지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성장한 것은 삼촌의 은혜입니다. 좋은 땅과 물 조건은 삼촌이 차지하십시오. 나는 젊었으니까 사막으로 가도 견딜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해야 하는데 롯은 자기가 좋은 땅을 차지하고 늙은 삼촌 아브라함을 사막으로 내쫓았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그가 선택한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지금까지도 사람이 살 수 없는 영원한 심판의 대명사같이 되었고 거기에 가서 부를 장식했던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롯은 두 딸과 자식을 번식시켜서 큰 딸 후손이 모압이고 작은 딸 후손이 암몬 족속이 되었는데 이 두 족속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바알 종교의 핵심 세력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듣고 모압 여자들이 계획했습니다.
“이스라엘을 무너뜨리는 방법이 뭐냐? 바알에게 제사하도록 하자.”
모압 종교인 바알을 섬기도록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습니다.
바알 예배의 마지막은 남녀가 성을 교환하는 것입니다.
교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종교는 절대 없어지지 아니하고 힘을 가지고 많은 유대인들의 영적 유혹에 힘을 썼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치고 생활의 윤택함이란 아무것도 없던 이스라엘의 건강한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이 예쁘게 하고 와서 제공하는 바알 제사에 다 빠져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우상 숭배의 죄를 저질렀던 과거 역사의 거울을 잊어버렸느냐?” 그리고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7절 말씀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이렇게 과거 역사 교훈을 참고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9절 말씀에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물려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그들과 같이 시험하지 말자.”
출애굽해서 광야를 지나갈 때 백성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광야에서 불러내서 광야에서 죽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 원망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원망하는 자들을 물어 죽게 하신 그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려운 고난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오늘의 갈 길을 정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사건이 나에게 거울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를 보면 대한민국 민족의 갈 길의 거울이 되고 야곱의 생애를 보면 나의 생의 거울이 되고 모든 역사가 우리 앞에 보이는 거울 본보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수감사절 때마다 ‘청교도’라는 말을 쓰는데 왜 말하는 것입니까?
그들을 거울삼으라는 뜻입니다.
어느 때 하나님이 복을 내려주셨으며 어느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성경과 역사는 세밀하게 우리들을 가르치고 있는 거울입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인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아니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 성경은 두 가지 갈래의 길을 언제나 우리 앞에 제시합니다.
대표적인 의식화 작업이 신명기 11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 사건입니다.
애굽에서 민족 이동을 한 유대 민족은 그들이 목적을 하는 땅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우리 민족의 삶의 방향은 무엇인가?’
하나님은 영적 의미의 의식화 작업 하나를 그들에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유대 나라에 가면 그리심산이 있고 에발산이 있는데 마주 보고 있습니다.
열두 지파에서 대표자들을 선출했습니다.
“절반으로 나누어서 여섯 지파는 그리심산에, 여섯 지파는 에발산꼭대기에 올라가라. 그리고 그리심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라. 에발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하라. 가운데 있는 군중들은 아멘으로 화답하라.”
이런 영적 의식화 작업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심산과 에발산은 같은 지역이면서도 서로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심산은 아침 해가 떠오를 때 먼저 햇살을 받는 동편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신선해 보이고 비교적 초목이 우거져 있고 물줄기가 연결되어 있어서 사랑받는 산입니다.
반면에 에발산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되어 있어서 아침 햇살을 받지 못하고 나무가 없는 황폐한 그늘 산입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대표들이 소리를 쳤습니다.
축복 선언입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여호와를 사랑하고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이 그리심산과 같이 아침 해가 떠오르는 축복을 받을 것이요 그래서 초목이 무성하고 물줄기가 생길 것이며 풍족하게 되리라.” 이렇게 선언하면 골짜기에 있는 모든 백성은 “아멘”하고 화답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에발산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선포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거나 다른 신을 섬기면 이 에발산과 같이 해가 질 것이요 이 땅과 같이 물이 없는 황폐한 땅이 되리니” 이렇게 선언하면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아멘”하는 일종의 부흥회를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물 길러온 여인과 대화를 길게 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하더이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리심산은 사마리아에 있습니다. 그 산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제일 먼저 들어와서 예배드린 성지로 취급을 받습니다. 남쪽 유대 사람들은 이 사마리아 사람과 관계하지 않았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사마리아 땅은 밟지도 말라.”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았고 사마리아 사람과는 말조차도 안하는 그런 관계로 지내고 있는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지역적 자부심 하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가나안 땅에서 최초로 예배드린 성지가 그리심산이라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와서 이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 최초의 하나님께 감사예배를 드리지 않았느냐? 그리고 거기서 영적 부흥회를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그 그리심산이 여기 사마리아에 있다.”
그러니까 이 여인은 예수님을 보고 “그리심산이 성지인데 왜 당신들은 하나님께 예배할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고집합니까?”
지역 우월성을 예수님께 설명하는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심산과 에발산 양쪽에서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가 번갈아 선포되고 백성들은 화답하게 하신 이 영적 의미의 예식은 간단합니다.
“너희 앞에는 항상 두 갈래의 길이 있다.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이다. 선택의 자유와 기회는 너희들 자신이다.”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복과 저주는 내게 임한다고 하는 영적 교육을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드라마식으로 엮어서 자신들의 연출과 주연 배우 역할로 의식화 작업을 하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복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것은 내가 만드는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행하는 대로 나는 복과 저주를 내릴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하나님의 백성은 분명해 졌습니다.
“나의 인생을 빛나게 만들 사람은 나 자신이며 그늘지게 만들 사람도 나 자신입니다. 갈보리교회를 훌륭한 교회로 빛나게 할 사람들이 갈보리 교인들이며 대한민국을 위대한 나라로 만들 사람들이 대한민국 사람들이다. 일본이나 필리핀 사람이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겠느냐? 너 자신에게 달렸다. 네 책임이다.” 그런 뜻입니다.
한 지혜자가 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어려운 문제를 그 지혜자에게 가서 상담 받았습니다.
“이번에 내가 이런 어려움을 당했는데 이러한 어려운 문제 해결을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면 그 지혜자는 아주 심각하게 질문하는 그 내용을 듣고 지혜의 문을 열어서 갈 길을 그에게 정해주어서 온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지혜자는 시각장애인이라서 만물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시각장애인 지혜자를 싫어하는 장난꾸러기 청년들이 “저 사람은 날마다 우리 청년들을 꾸짖고 세상을 보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무슨 지혜가 있다고 사람들이 존경하는가?” 그래서 그 지혜자를 골탕을 먹이려고 청년들은 시각장애인에게 계획적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카나리아’라고 하는 새 한 마리를 손에 들고 갔습니다.
“지혜자시여! 우리 손에 들고 있는 이 카나리아가 죽겠습니까, 살겠습니까?” 그렇게 물었습니다.
청년들은 그가 “죽을 것이다.”라고 대답하면 날려 보내서 “당신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무색하게 만들어 골탕먹여주기로 계획했고, 만약 “살 것이다.” 대답하면 들고 있는 새의 목을 꽉 눌러 그 자리에서 죽여 “당신은 지혜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골탕을 먹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시각장애인은 심각한 얼굴을 하더니 말했습니다.
“얘들아, 그 새의 생명은 너희 손에 달려있느니라.” 얼마나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내일은 또 6·25 기념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6·25를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70세 이상 된 사람만이 현장을 보고 느낀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6·25를 기념하는 것은 어두운 과거의 역사를 거울로 다시 한 번 보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우리나라는 이념적으로 과거로 되돌아가는 느낌마저 듭니다.
이데올로기 전쟁은 한반도에서 1940년대 다 끝났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이념 갈등이 과거로 돌아가서 진보와 보수라고 하는 이름으로 계속되고 있습니다. 6·25 세대들은 생명을 걸고 보수를 택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습니다.
순교당해 죽는 것이 훨씬 편안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경험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어제 날짜로 대한민국은 2050이 되었다고 자랑하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국민 소득 2만 달러에 인구 5천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은 사실 대한민국도 강대국이 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인구 5천만이 되었고 국민 소득이 2만 달러가 되었으며 모두 거기에서부터 강대국이 시작되었다. 이런 나라는 세계에서 일곱 개국 밖에 없다.” 이렇게 선전하지 않습니까?
우리나라가 사실상 강대국이 되었는데 한 가지 조건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강대국들은 모두 핵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직 핵이 없습니다.
그런데 앞으로는 일본이나 한국도 어쩔 수 없이 핵을 만들어야 될 것입니다.
일본이 핵을 만들려하면 몇 년 안에 몇 천 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력을 다 갖추고 있고 한국도 핵을 만들려고 결정하면 북한보다 10배나 더 만들 수 있습니다.
안 만들고 있을 뿐입니다.
인구 5천만에 2만 달러 이상의 강대국이 되었음을 선포하지만 인구가 1억이 넘어도 GNP가 모자라기 때문에 절대 강대국이 안 되는 나라들이 세상에 수두룩합니다.
또, GNP는 좀 올라갔지만 인구가 너무 적어서 강대국이 안 되는 나라도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그 조건에 부합했기 때문에 자랑스럽게 선전하는 것입니다.
북한은 국민소득이 대한민국의 20분의 1밖에 안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따라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은 어떻게 시작이 되었습니까?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는 공산당 최고인민회의가 열렸습니다.
그 회의에 스탈린이 김일성과 박헌영을 손님으로 초대했습니다.
거기에 참석했다가 스탈린과 회담을 통해서 허락을 받고 돌아와서 9개월 후에 일으킨 전쟁이 6·25입니다.
6월 25일 일으킨 전쟁으로 서울이 무방비 상태에 있다가 3일 만에 함락이 되었고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겼고 10만 명 이상의 장애인이 생겼습니다.
본래는 8월 15일까지 완전 정복을 하려고 계획한 것인데 우리 국군들의 피나는 저지와 유엔군이 들어와 주어서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요즘 저 같은 6·25 세대들은 ‘이 나라 국가관의 방향성까지 잃어가나 보다.’ 생각합니다.
애국가를 부르느냐 마느냐 하는 것이 신문에 논란으로 일고 있습니다.
애국가 문제는 1945년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나오던 문제인데 요즘에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면 대한민국의 국가관은 뿌리째 뒤흔들리는 것입니다.
저는 대학의 이사장으로 지금 일하고 있는데 22년 동안 대학 이사회를 할 때 회의 할 때마다 첫 번째 순서가 애국가입니다.
애국가를 안 부르고 이사회를 시작한 적 한 번도 없습니다.
제가 사회를 보면서 22년 동안 “애국가를 부름으로 이사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그게 시작이었습니다.
국가관의 방향을 잃어버리면 혼란 국가가 됩니다.
여러분! 전 세계 사회주의 공산당 국가가 다 변했는데 북한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지금 기독교 핍박 국가가 20개국 이상인데 극심 핍박 국가가 10개국이고 절반 핍박 국가가 10개국입니다.
그런데 최고의 핍박 국가가 북한입니다.
왜 그러느냐? 핍박 국가일지라도 교회가 다 있습니다.
저는 그런 나라 모두 다니면서 세미나를 하고 부흥회도 했습니다.
핍박하지만 교회들은 다 있습니다.
많지는 않아도 교회가 모두 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핍박 1위 국가가 북한이 된 것입니다.
봉수 교회 하나 선전용으로 만들어 놨지만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6·25 전쟁 때에는 남한보다 북한이 교회가 더 많았습니다.
평양을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렀습니다.
압록강을 넘어 복음이 들어왔고, 대동강을 통해서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왜 없습니까?
공산당이 없애버렸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나도 없다는 그 한 가지만 봐도 평가는 분명하게 나지 않았습니까?
6·25는 우리 대한민국의 영원한 거울이 된 사건입니다.
6·25만 들여다보면 내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 나타나고 6·25 거울만 보면 우리 민족의 갈 방향이 분명해 집니다.
갈 길은 우리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6·25년 전의 방향 결정이 분명하게 정해지지 않았습니까?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 경제의 길을 갔고 북한은 칼 마르크스 철학에 근거한 사회주의 정치 이념에 따라가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오늘입니다.
그러면 판가름은 이미 났지 않습니까?
“네 인생은 너의 선택에 달려 있다. 너의 나라는 너의 민족에게 달려있다. 선택하라. 과거 거울을 보면서 갈 길을 정하라.” 그렇게 된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아주 옛날에 시골 농부 하나가 장가 간지 일 년이 되었다고 합니다.
나무를 해다 팔아서 그 당시 세상에 처음 등장하는 거울을 하나 사서 자기 색시에게 선물을 했다고 합니다.
색시가 거울을 들여다보더니 화가 나서 바가지를 긁기 시작합니다.
“장가 간지 1년 밖에 안 된 사람이 웬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부부 싸움을 하니까 시어머니가 “왜들 이렇게 싸우느냐?” 며느리가 “이걸 보세요. 또 여자를 데리고 왔어요.”
그래서 시어머니 할머니가 보더니 아들을 불러서 야단을 치는 겁니다.
“야, 이놈아! 색시를 데리고 오려면 젊고 예쁜 사람을 데리고 와야지, 웬 할망구를 또 데리고 왔느냐?”
집안이 난리가 나니까 시아버지가 “왜 집안이 이렇게 시끄럽소?”
할머니가 “이것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서 시아버지를 주니까 시아버지가 이렇게 들여다보더니 “아니다. 그래도 이 영감이 우리 아들을 많이 닮았다.” 그러더랍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역사의 거울은 넉넉합니다.
5천년 동안 겪어온 거울이 있습니다.
6·25 그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어떻게 해야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이 영원할 것인가, 어떻게 해야 세계 제1의 교회 성장이 계속될 것인가? 오늘 말씀이 우리 민족의 갈 길의 거울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영원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