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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크다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2장 눈물로 채운 마음의 강
다들 중노동에 지쳐 몸이 여위어 가는데 나는 줄곧 72킬로그램을 유지해서 다른 죄수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체력만은 남부럽지 않던 나도 딱 한번 학질에 걸려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한 달 가까이 학질을 앓으면서도 내가 일을 못하면 내 몫까지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죄수들 생각에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힘이 좋은 나를 두고 '철근같은 사나이'라고들 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힘든 중노동이라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감옥이든 강제노동이든 그런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채찍이 제아무리 무섭고 환경이 모질다 해도 가슴에 확고한 뜻이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암모니아는 유산硫酸이라고도 불립니다. 일본의 가와사키 철공소에서 일할 때 탱크에 들어가 유산을 청소하다가 독성 때문에 죽은 사람들을 여러 명 보았지만, 흥남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혹독했습니다. 유산이 닿으면 머리가 빠지고 피부에서 진물이 날 정도로 해로워서 유산 공장에서 6개월만 일하면 대부분 각혈을 하고 죽어나갔습니다. 손가락을 보호하느라 골무를 끼지만 가마니를 묶다보면 독한 유산에 닿아 금세 구멍이 나버렸습니다. 그러니 입고 있던 옷은 유산에 녹아 다 뭉개져버리고 살이 갈라져 피가 흐르거나 뼈가 드러나는 경우도 예사였습니다. 살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가 뚝뚝 흐르고 진물이 질질 나와도 단 하루도 쉬지 못하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하고도 하루에 작은 밥공기로 두 그릇이 채 못 되는 배급을 받았습니다. 반찬은 아예 없고 국은 무청이 든 소금물이 전부였습니다. 국물은 목이 타들어갈 정도로 짰지만 그나마 돌처럼 딱딱한 맨밥을 그대로 넘길 수 없어서 어느 누구도국물 한 방울 버리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밥그릇을 받으면 모두들 순식간에 통째로 입 속에 털어넣었습니다. 자기 밥을 다 먹고 나면 남들이 밥 먹는 모습을 목을 빼고 바라보다가, 어떤 때는 자기도 모르게 남의 밥그릇에 숟가락을 넣어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함흥에서 나와 함께 지내던 어떤 목사는 "나한테 콩 한 알만 주면 밖에 나가서 소 두 마리를 주겠소" 하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죽은 사람의 입 속에 있는 밥알까지도 끄집어내 먹을 정도였으니 그때의 배고픔은 그만큼 처절했습니다.
배고픈 고통은 실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밥 한 알도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지금도 흥남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듭니다.밥 한 알이 그렇게까지
온 신경을 자극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겠지만 배가 고프면 눈물이 쏟아지게 밥이 그립습니다. 어머니보다
더 그립습니다. 배가 부를 때에는 세계가 큰 것 같지만 배가
고프면 밥 한 알이 지구보다 더 큽니다. 밥 한 알의 가치가 그렇게 엄청납니다.
감옥에 들어가던 첫날부터 배급받는 주먹밥의 절반을 떼어 동료들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먹었습니다. 그렇게 석 달쯤 훈련을 한 뒤에야 비로소 주먹밥 한 개를 다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 몫을 먹는다고 생각하면 배고픔을 견디기가 한결 수월했습니다.
감옥살이는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합니다. 죄수의 절반이 일 년 안에 죽어나가는 바람에 매일같이 감옥 뒷문으로 시체를 넣은 널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습니다.온 몸의 기름기가 다 빠지도록 일만 하다가 죽어서야겨우 감옥 문밖을 나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무자비하고 냉혹한 정권이라도 그건 분명 인간의 한계선을 넘어선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죄수들의 눈물과 한이 담긴 암모니아 포대는 항구를 통해 러시아로 옮겨졌습니다.
ご飯粒一つが地球よりも大きい
自叙伝107
どの囚人も重労働で疲労困憊して痩せこけていくのに、私は体重72キロをずっと維持して、囚人たちの羨望の的でした。体力だけは維持して少しも他人が羨ましくなかった私も、1度だけマラリアにかかってとても大変だったことがあります。1ヶ月近くマラリアにかかっていても、私が仕事をできなければ他の囚人たちが私の分までやら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うならないように、1日たりとも休み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に体力があったので、私は「鉄筋のような男」と呼ばれました。いくらつらい重労働であっても我慢できました。監獄であろうと強制労働であろうと、この程度は問題になりません。どんなに鞭が恐ろしく、環境が悲惨だとしても、心に確固たる志があれば動揺しませんでした。
日本の川崎鉄工所で働いた時、タンクに入っていって硫酸を清掃しましたが、毒性のために死んだ人を数人目にしました。しかし、興南工場は、それとは比較にならないくらいひどい所でした。硫酸は有害で、触れると髪の毛が抜け、皮膚から粘液が流れます。硫安工場で6ヶ月も働けば、喀血して死ぬ人もいます。指を保護しようと指貫をはめても、かますを結んでいると、有毒な硫安に触れてすぐに穴が空いてしまいました。着ていた衣服は硫安で溶けて擦り切れてしまい、肉がひび割れて血が流れるか、骨が露わになる場合もありました。肉が削げ落ちたところから血がどろどろと流れ、粘液がだらだら出てきても、1日たりとも休まずに仕事をし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
それだけ仕事をしても、ご飯は1日に小さな茶碗で2杯にならない配給しかありません。おかずはほとんどなく、スープは大根の葉の入った塩水がすべてでした。スープはちょっと口にしただけでも塩辛かったのですが、石のようにごつごつしたおかずなしのご飯はそのままではのみ込めないので、そのような塩辛いスープでさえも貴重で、誰一人としてスープの汁を無駄にする者はいませんでした。
ご飯茶碗を受け取ると、どの囚人も1瞬にして丸ごと口の中に入れます。自分の分を食べ終わると、他の人がご飯を食べる姿を、喉を鳴らして眺めています。ある時は、我知らず人のご飯茶碗にスプーンを突っ込んで、争いが起きることもありました。同囚のある牧師は、「豆一粒だけくれたら外に出てから牛2頭あげる」と言ったほどです。死人の口の中に残ったご飯粒まで取り出して食べるほどでした。興南工場で味わった空腹は、それほどまでに凄絶でした。
空腹がもたらす苦痛は、実際に味わってみなければ分か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空腹が極まったときは、ご飯粒一つでもどれだけ貴いかしれません。今も興南のことを思うだけで気持ちがさっと引き締まります。ご飯粒一つがそこまで人間の全神経を刺激できるということが信じられませんでした。おなかが空けば涙が出るほどご飯が恋しくなり、母親よりもっと恋しくなります。おなかがいっぱいのときは世界の方が大きいのですが、おなかが減ればご飯粒一つが地球よりもっと大きいのです。ご飯粒一つの価値とは、そのように驚くべきものです。
興南監獄では、配給された握り飯の半分を同僚たちに与え、残りの半分だけを食べました。約3週間そうやって実践した後、初めて握り飯一つを全部食べました。二人分のご飯を食べたと考えれば、空腹に耐えることがとても楽になります。
興南の実態は残酷の一語に尽き、実際に体験したことのない人には想像すらできないでしょう。囚人の半数が一年以内に死んでいきます。死体を入れた棺桶が毎日のように監獄の裏門に運ばれていくのを見つ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全身のあぶらが一滴残らずなくなるような仕事ばかりさせられて、死んで初めて門の外に出ていくことができたのです。いくら無慈悲で冷酷な政権であっても、それは明らかに人間としての限界線を越えたものでした。そのように囚人の涙と怨念がこもった硫安入りの叺は、港からソ連に運ばれていきました。
A Grain of Rice Is Greater than the Earth
As a Peace-Loving Global Citizen
Pages 97-99
Everyone grew thin under the pressure of hard labor. I was the exception. I was able to maintain my weight at 159 pounds, making me an object of envy for the other prisoners. I always excelled in physical strength. On one occasion, though, I became extremely ill with a symptom similar to tuberculosis. I had these symptoms for nearly a month. However, I did not miss even a day of work at the factory. I knew that if I were absent other prisoners would be held responsible for my share of the work. People called me, “The man like a steel rod” because of my strength. I could endure even the most difficult work. Prison and compulsory labor were not such a big problem for me. No matter how fierce the beating or terrible the environment, a person can endure if he carries a definite purpose in his heart.
Prisoners were also exposed to sulfuric acid, which was used in the manufacture of ammonium sulfate. When I worked at the Kawasaki steel mill in Japan I witnessed several instances in which a person cleaning vats used to store sulfuric acid had died from the effects of acid poisoning. The situation in Heungnam was far worse. Exposure to sulfuric acid was so harmful that it would cause hair loss and sores on our skin that oozed liquid. Most people who worked in the factory would begin vomiting blood and die after about six months. We would wear rubber pieces on our fingers for protection, but the acid would quickly wear through these. The acid fumes would also eat through our clothing, making them useless, and our skin would break and bleed. In some cases, the bones would become visible. We had to continue working without so much as a day’s rest, even when our sores were bleeding and oozing pus.
Our meal rations consisted of less rice than it took to fill two small bowls. There were no side dishes, but we were given a soup that was radish greens in saltwater. The soup was so salty it made our throats burn, but the rice was so hard we couldn’t eat it without washing it down with the soup. No one ever left even a single drop of the soup. When we received our bowl of rice, prisoners would put all the rice into their mouths at once. Having eaten their own rice, they would look around, stretching their necks sometimes to watch how the others ate. Sometimes someone would put his spoon in someone else’s soup bowl, and there would be a fight. One minister who was with me in Heungnam once said to me, “Let me have just one bean and I will give you two cows after we get out of here.” People were so desperate that if a prisoner died at mealtime, the others would dig out any rice still in his mouth and eat it themselves.
The pain of hunger can only be known by those who have experienced it. When a person is hungry, a mere grain of rice becomes very precious. Even now, it makes me tense just to think of Heungnam. It’s hard to believe that a single grain of rice can give such stimulation to the body, but to a hungry person a grain of rice is bigger than the earth. A grain of rice takes on enormous value to someone who is hungry.
Beginning with my first day in prison I made a habit to take half of my ration of rice and give it to my fellow prisoners, keeping only half for myself. I trained myself that way for three weeks and then ate the whole ration. This made it easier to endure the hunger.
Prison life is so terrible that it cannot even be imagined by someone who has not experienced it. Half the prisoners would die within a year, so every day we had to watch as dead bodies were carried out the back gate in a wooden box. We would work so hard, and our only hope for leaving was as a dead body in that wooden casket. Even for a merciless and cruel regime, what they did to us clearly went beyond all boundaries of humanity. All those bags of fertilizer filled with the tears and grief of the prisoners were loaded onto ships and taken to Rus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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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배고픈 고통은 실제 겪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는 밥 한 알도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