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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64편 2절-5절: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2절: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요란하다는 것은 큰 소리를 치면서 떠드는 것을 말한다. 많은 사람이 모이면 떠드는 소리가 더 크게 요란하다. 그러면 어떤 때 큰 소리를 치고 요란하냐? 싸울 때다. 싸울 때 서로 자기가 옳다고 큰 소리로 떠든다.
세상에는 떠드는 소리가 많은데, 보면 자기가 세상에서 잘났다고 떠드는 소리가 많다. 어린아이로부터 늙은 노인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불문하고 잘났다는 소리가 많다. 그런데 대부분 하나님의 의사성, 뜻과는 반대가 되고 대적하는 소리들이다. 세상과 세상의 것을 자랑하는 소리, 종교계에서 큰 것을 자랑하는 소리, 기독교 안에서 종교적인 명예와 영광과 권세자랑이 많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의사성과는 정 반대가 되는 소리들이다.
교회에서 세상자랑을 하는 것은 목동이 소를 몰고 가는 것처럼 교인들을 세상 쪽으로 몰고 가는 소리들이다. 이런 소리들로 성도들을 생명 길에서 이탈시키고, 이룰구원 성화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하는 교회라면 이는 교회가 아니라 예수이름을 빙자한 하나의 무리들이다.
우리는 무리의 성격 성질을 가진 교회를 알아야 한다. 교회라고 할 때는 하나님의 본질을 향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향해서 가는 것인데, 이렇게 나가는 성도들을 무리들이라고 하지 않고 교회라고 하고, 회중이라고 하고, 성도라고 하고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세상사람은 교회의 간판보고, 십자가를 보고 교회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지는, 참 사람으로 만들어지는,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는 주장이 아니라면 성격 성질상 교회의 정신이 아니니 이런 교회는 하나의 무리들일 뿐이다. 무리들이란 하나님의 뜻으로 단일이 아닌 여러 가지 세상소원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
우리교인들 속에 하나님의 의사 단일성으로 된 것이 아닌 자기의 어떤 주장이 들어있다면 그것은 세상성적인 무리들과 섞일 수 있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거다. 이러면 자기의 성격과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만 그들에게 섞이게 된다. 자기가 어느 쪽의 성격과 성질을 많이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많이 가지고 있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어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이걸 무시하면 예수를 똑바로 못 믿는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놓는 일은 이방 불신자들이 하는 게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고 있다. 거짓된 종들이나 이단자들이 이런 일을 한다. 거짓된 종들은 이단자들과 잘 통한다. 겉으로는 달라 보지이만 그 속성은 이단자들과 같다. 그 속에 든 것은 이단자들과 똑같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이나, 기독교 신비주의자들이나, 기독교 구복주의자들은 속이 똑같다. 어떤 면이 똑같으냐? 한 마디로 전부가 예수이름으로 세상에 속한 것을 추구한다. 이런 것은 하나님의 의사의 본질에 안 맞는 신앙들이다. 이게 거짓 교인들이고, 거짓 복음이고, 이단자들이고, 주님과 상관없는 짓을 하는 무리들이다.
우리는 교회가 뭔지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본질을 찾는 거다. 본질이 없이 ‘뭘 합시다. 뭘 합시다. 전도합시다. 사회에 나가서 봉사합시다’ 하는 것은 교회가 할 짓이 아니다. 교회가 하는 일은 이방세상이 못하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다. 자타의 속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닮아지는 일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아니면,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면 어떻게 되겠으며, 교회가 아니면 이 일을 어디서 하겠느냐?
3절: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자기의 혀를 칼 같이 연마했다’는 것은 거짓되고 이단성을 가진 악한 자들이 진리와 생명의 복된 말씀을 대적하기 위해, 자기들의 이론과 주장을 세우기 위해 이에 관한 공부를 많이 했다는 거다.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었다’는 것은 상대의 허점을 찾아서 그 면에 대해 집중적으로 공격을 한다는 거다. ‘독한 말’이란 공갈 협박적인 말이라는 거다.
이런 일들이 종교적 사업주의자들이, 인본주의 신앙자들이 교회에서 하는 짓들인데, 이런 자들은 물질과 활동 면의 충성봉사를 강조하고, 이런 걸 많이 하면 상급이 많다고 하는데, 이것이 성도들에게 공갈 협박을 하는 거다. 필연적으로 이렇게 된다. 듣기에는 칭찬 같은데 꾸중이 들어있는 말이 있느냐? 씨름을 할 때 힘 있는 선수가 상대편을 높이 드는 것은 자기가 힘이 세다는 것을 자랑하려는 게 아니라 상대를 땅바닥으로 패대기치려고 들어 올리는 거다.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다.
우리는 진리이치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자가 되어야 하는데, 자기의 행동과 활동은 자타의 이룰구원 성화구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서 바로 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는 교인들에게 공갈 협박이 필요가 없고 바른 신앙의 이치만 가르쳐 주면 된다. 바른 것을 알게 되면 스스로 알아서 하게 된다.
목사는 교인들에게 말씀의 뜻을 잘 가르쳐서 교인들이 말씀의 이치를 따라 살게 하면 되는 거지 ‘열심히 충성봉사하면 축복 받고 상급이 많다’ 라고 하는 것은 공갈 협박이다. 일반사람들은 이걸 전혀 모른다. 세상 학박사도 이 성질을 전혀 모른다. 하나님의 정확한 본질을 모르면 이런 교훈들이 하나님 앞에 비뚤어진 것인지 안 비뚤어진 것인지 전혀 모른다. 성령의 머리라야 알 수 있다. 성령에 감동된 자라야 알 수 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진리이치 생명이치 도덕이치에서 어그러지면 이 사람의 얼굴은 똥이 되는 거다. 나쁘게 말하면 괴상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에 있어서 이치에 허점이 있어서는 안 되겠고, 인인관계에 있어서 도덕성이 건전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다른 사람을 자꾸 깎아내리는 사람은 어떤 허점이 있는 거냐? 자기는 허점이 없이 완벽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는 거냐, 자기를 못 보는 거냐? 자기를 못 보는 허점이 있는 거다. 자기를 못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모른다는 말이다. 그래서 허점투성이인 자기는 못 고치고 남만 깎아내리는 거다. 이런 마음은 사단 마귀가 들어올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잘 되거나 잘 안 되는 것을 볼 때 그것에 대해 부러워하거나 비난하기에 앞서서 그걸 보면서 자기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자기의 허점을 못 고친다. 이렇게 되면 내가 다른 사람을 보듯이 또 다른 사람이 내가 남을 보는 것처럼 나를 보게 된다.
4절: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진리를 대적하는 악한 자들이 숨은 곳이 어디이겠느냐? 악한 자들이 어디에 숨어야 자기 스스로가 ‘나는 지금 안전하다’ 하며 마음을 푹 놓겠느냐? 악한 자들이 숨어서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어디일까? 첫째는 합법적 제도를 이용하는 거다. 기독교 안의 거짓된 자들이 이런 짓을 한다. 거짓 종들이나 이단자들은 혼자 있는 경우가 드물다. 큰 숲으로 들어간다. 단체가 큰 곳에 들어간다. 남들이 다 인정해 주는 어떤 제도 속에 들어있으면 ‘우리 편이거니’ 하게 된다.
그러면 합법적인 제도 속으로 들어가서 무슨 일을 하느냐? 그 속을 뒤집는다. 이게 뭐냐? 겉으로는 호응을 하면서 속으로는 대립이다. 호응적 대립이다. 이게 아주 고차원적인 마귀의 수법이다. 진리인 척하면서 육에 붙는 속성이 이렇다. 이단자들과 거짓된 자들이 기독교라고 하는 제도 속으로 들어와서 교인들 간에 얼마든지 싸움을 일으키고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뭘 가져가려고 했느냐? 예수님께서 가룟유다에게 헌금통을 맡으라고 했을 때 가룟유다의 마음이 기뻤을까, ‘내가 안 맡으면 좋겠는데’ 라고 했을까? 마음이 기뻤을 거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가룟유다의 이 마음을 아실까, 모르실까? 안다. 그러면 잘 알면서 왜 헌금통을 맡긴 거냐? 돈을 좋아하는 가룟유다의 마음을 고치게 해 주려고 맡긴 거다. 그러나 이 마음을 못 고치니 결국은 돈을 받고 스승을 파는 인신매매의 죄를 짓고 그 돈을 쓰지도 못한 채 목 매달아 죽고 말았다.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완전한 자’란 악한 자기 입장에서 볼 때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악한 자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고 하나님 앞에도 정직하게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냐? 후자다.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쏘려하다가 갑자기 쏜다는 것은 활을 겨누고 기회를 엿보다가 기회가 포착이 되면 ‘이 때다’ 하고 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상대를 쓰러뜨리려고 얼마나 기회를 엿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카멜레온이 기회를 잘 포착해서 순간적으로 혀를 내밀어서 곤충을 잡아먹는다. 이런 것을 보면서 신앙적으로 누가 자기를 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라.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얼마나 낮이 두껍고 뻔뻔스러우냐? 그러고서도 자기는 당연하다는 자세다.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내가 잘 했다’ 이 말이다. 사람이 악한 짓을 하고도 왜 이런 생각이 들까?
성경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임을 알면서도 무리들이 잘못된 것을 하자고 결정하는 일이 많다. 예수님을 죽인 일도 그렇고,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일도 그렇고,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모함한 일도 그렇고, 하만이 모르드개를 모함한 일도 그렇고, 잘못된 일임에도 아주 당연시 하며 떳떳하게 악한 짓을 많이 했다. 기독교 신비주의자들, 기독교 구복주의자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 기독교 극기 극복주의자들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아주 잘하는 것으로 알고 떳떳하게 그걸 주장하고 그 길로 가고 있다. 이런 걸 말하는 거다.
사람을 불 속에 집어넣는 것은 사람에게 고통을 줘서 죽이는 일인데, 다니엘에게 우상에게 절을 하라고 하는 것 역시 정신 사상 면으로 보면 불속에 집어넣어서 고통을 주는 것과 같은 거다. 그리고 목사가 ‘세상에서 부자가 되려면 예수이름으로 구하라’고 하면 분별력이 없는 교인은 ‘아멘’하고 돌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궁극적 결과적으로 사람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거다. 심판의 불속으로 몰아넣는 것과 똑같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질적으로 성도를 이런 자로 만드는 일이 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교회에서의 교훈의 성질이 불타질 것을 목적하는 건지, 하나님의 진리이치 신앙이치를 깨우치는 건지 알아야 한다. 내가 들어야 할 말인지, 안 들어야 할 말인지 알아야 한다. 그 교회에 나가야 할런지, 안 나가야 할런지 알아야 한다. 모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느냐?
5절: ‘저희는 악한 목적으로 서로 장려하며 비밀히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 보리요 하며.’ 악한 자들이 자기 양심에 악한 일인 줄 알면서도 함께 의논하여 악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우리는 본 절에서 이런 일반적인 차원만 알면 안 되고 성령의 눈을 가지고 신앙정신 사상 면의 악을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악한 것에 눈을 돌리고 함께 그 악을 행하는 것만 아니라 성령의 눈으로 한 차원 더 올라가서 교회적으로 신앙적인 면에서 그런 죄를 짓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성경은 일반차원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차원을 가지고 와서 교회의 정신상태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성경말씀을 성령의 눈으로 올라가서 영적인 면으로 봐야 한다.
연대를 따질 때 세상사람들은 ‘몇 년도, 몇 년도’ 하면서 달력의 날짜를 가지고 말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밝아지느냐, 어두워지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연대를 측정한다. 개인적 인생살이도 마찬가지다. 믿는 우리도 하나님께서 보시는 눈으로 사람을 봐야 하는데, 나이가 젊은 사람에게 ‘너는 왜 그렇게 늙어 빠졌느냐?’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중심, 즉 사람의 속 중심 사상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볼 때 말씀 깨우치는 것도 없고 깨닫는 것이 없이 사는 사람을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거다.
이런 눈으로 사람을 보면 육신의 나이는 늙었어도 젊은 사람이 있다. ‘육신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믿어갈수록 젊어져야 한다. 영적인 면에 이치적으로 깨닫는 것이 많으면 이 사람은 말에 힘이 있고 정신에 힘이 있다. 사람을 깨우치는 게 힘 있는 사람이요 능력 있는 사람이다. 이러면 점점 젊어진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사람을 깨우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내느냐? 세상에서는 돈, 권세가 크고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을 한다고 하겠지만 이런 것은 참 능력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깨닫게 해 주고 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땅이 아닌 천국을 향하게 해 줘야 하나님의 온전을 덧입는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 우리교회 성도들은 다 이런 능력자가 되어야 한다. 진리이치를 알지 못하면 늘 꼬리로 살게 된다.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덧입게 되면 이 자체가 꼬리가 아닌 머리다. 사람이 꼬리로 살면 안 믿는 사람의 뒤를 따라다니면서 밥이나 얻어먹는 식으로 살게 된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말과 행동으로 성도들을 말씀에서 빗나가게 하는 사단 마귀의 수단 방법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사단 마귀 편에 선 악한 자들은 대립적 대립이 되는 방법도 쓰지만 이 방법보다 호응하는 척하면서 이룰구원 면이 망하게 하는 방법도 쓴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방법에 거의가 넘어간다. 이런 방법은 성도들의 정신 사상을 세상에 감염을 시킨다. 정신 사상이 넘어지면 이 사람은 아무 힘이 없다.
이런 악한 자들은 교인들이 세상을 좋아하게 해서 이것을 위해 스스로 자기의 재산과 목숨을 바치고도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게 하고, 영원 궁극적인 영능의 실력을 망하게 하고, 기본구원을 입은 것에서 더 자라지 못하게 해서 불탈 구원, 부끄러운 구원이 되게 한다. 성도가 이렇게 되는 것은 인격의 수치다.
도덕성을 가진 인간은 인격의 수치가 죽는 것보다 더 고통이다. 사람이 죽더라도 자기가 입은 영광스러움은 없어지지 않듯이 인격의 수치는 이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예수 믿는 사람이 인격 면에 무덤덤하고, 인격 면에 인간의 가치를 못 느끼는 사람이 많다. 이런 사람은 먹고 마시는 현실에 국한된 것으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이 바람이 불면 이렇게 불려가고 저 바람이 불면 저렇게 불려가고, 이 사건에 이렇게 넘어지고 저 바람에 저렇게 넘어지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실한 종 모세를 따라 하나님의 약속된 가나안으로 올라간다. 홍해에서 세례를 받고,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고, 광야에서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먹으면서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약속의 땅을 바라보며 가는 도중에 그 길을 막는 자들과 싸우면서 연단이 되면서 만들어지면서 올라갔다.
이런 과정은 믿는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하는 신앙싸움을 말해주는 건데,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이룰구원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을 이스라엘 백성이나 주변의 나라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로막았던 것과 같은 거다. 이 일은 자기 속의 옛사람이 할 수도 있고, 타가 할 수도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면서 약속된 땅으로 올라가는 것은 선한 사상이다. 이것은 생명 길로 가는 거고, 의로운 일이요, 의로운 활동이요, 옳은 운동이요, 이 삶이 참 삶이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 일을 반대하며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어떤 자들이 누구를 끌어들여서 선도주자로 내세워서 이 일을 하게 할까?
모세를 따라가는 길은 생명 길 좁은 길이요,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길은 사망 길 넓은 길이다. 넓은 길은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길이다. 세상을 소원 목적하는 인도자들의 지식은 선악과 따먹은 저주받은 지식이요, 악령을 받은 사망운동이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아서 광야에서 다 죽는 운동이다. 이 이 일에 동참 협조하는 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다 죽는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믿으면서 세상축복을 목적으로 신앙하는 것은 다 넓은 길이요, 이 일에 물질을 바치고, 시간을 바치고, 전도를 하며 협조 동참을 한 자들은 다 죽는다. 죽었다. 뭐가 죽었느냐? 이룰구원 차원에서 이치를 깨닫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인생 나그네 길에서 광야교회에 다니면서도 이룰구원이 다 죽어버렸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마지막 시대인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사단 마귀 악령을 받은 자들의 활동이 마치 복음운동인양 사방에 깔려 있다. 애굽 같은 세상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정신 사상을 가지고 사단 마귀의 입장에 서게 하고 소속되게 하면서 종교적 사업을 크게 이루자고 하는 자들이 사방에 깔려 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의 진리본질을 이단시 하면서 이런 운동을 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으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