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 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 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 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 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입가에 물집처럼 / 김두안
달이 뜬다
해도 지기 전에 뜬다
나는 어둠이 보고 싶어
내 어두움도 보일 것 같아서
부두에 앉아 있는데
달이 활짝 뜬다
달빛은 심장을 욱신거리게 하고
희번득 희번득 부두에 달라붙고 있다
아 벌리다 찢어진 입가에 물집처럼
달빛은 진물로 번지고 있다
달은 어둠을 뻘밭에 번들번들 처바르고 있다
저 달은 환하고도
아찔한 내 안에 근심 같아서
어쩔 수 없이 초병에게 쫒겨가는
통제구역인 것 같아서
나는 캄캄한 나를
어떻게든 더 견뎌 보기로 한다
<심사평>
심사위원들이 골라 온 작품은 모두 11편이었다.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정철웅의 ‘철거민’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 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 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심사위원=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개기월식 / 곽은영
밤의 문이 열렸어요 이 세계를 견디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800kcal 가게 문을 열고 누가 왔어요 저녁을 먹다간 입가 훔치며 정육점 여자는 일어섭니다 반쯤 닫힌 문틈으로 둥근 밥상 가장자리가 보여요 오늘은 개기월식이 있겠습니다 어린 딸 리모콘을 눌러요 채널을 바꿔요
여자는 손님에게 웃어보이지요 붉게 물든 장갑을 끼고 비닐장갑을 또 끼고 차가운 살덩어리 하나 척 베어서 저울에 올려요 200g 중력이 달랑 하늘에서는 쓱쓱 사라지는 하얀 달조각 여자는 능숙하게 고기를 썰어요
엄마 나 쉬 마려 칭얼대는 딸 탁탁탁 도마에 칼을 부딪치며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꾸해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쓸어모아 검은 비닐에 담아 들려보내요 달랑 떠 있던 마지막 달 조각이 사라졌어요
달이 밟고 가는 모든 길에 검은 비단을 깔고 바람은 휙휙 채찍질 구름마저 쫓아버렸어요 이제 무엇을 바치오리까 보셔요 은빛 가면 벗고 강림하신 핏빛 달님 여자는 장갑을 벗고 선지 한 그릇 뚝 떠내요 스테인레스 밥그릇 안에 오늘은 핏덩어리 달이 잠겨요
36.5 365일
달님의 체온은 몇 도인가요
엄마 나 정말 쉬 마려 발 동동 구르는 딸 여자는 계집애 팔 잡고 한 볼기 때리고 바지를 까내리고 엄마 한 번 쳐다보고 제 오줌줄기 한 번 쳐다보고 바람이 보듬어가는 어린 것의 지린내 윤기나는 밤의 비단에 싸서 달님 앞에 내려놓아요 하얗고 새초롬한 아가씨 얼굴로 돌아오는 달
동그란 밥상에 둘러앉아 여자와 아이가 다시 밥을 먹어요 리모콘을 눌러 채널을 돌려요 달은 개기월식 궤도를 완전히 벗어났어요 그녀 힐끔, 가게 문을 쳐다보아요
<심사평>
예심을 통하여 본심에 합류한 시들은 산문성이 농후하였다. 시는 다른 장르의 특징을 시적인 것으로 포용하여 그 장르적 영토를 변용시켜 온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 쓰기 방법은 시를 다른 장르, 산문에 복속시켜 버리게 되는 위험성 또한 내포하고 있다.
우리는 본심 작품들 중에서 세 사람의 작품을 최종적으로 선정하여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이운성의 ‘황금나무 밑을 간다’ 외 4편의 시는 대상을 집요하게 관찰하는 시각, 그에 따른 해석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인 표현보다는 대상을 설명적으로 묘사하거나 산문적 전개가 거슬렸다.
주영중의 ‘시조새’ 외 6편의 시는 응축된 이미지들의 전개로 하나의 국면을 조성하는 형상화 능력이 뛰어났다. 특히, 응모된 여타의 시들에서 읽을 수 없었던 낯설고 신선한 표상을 시적으로 구현해 내고 있다. 그러나 시적 언술이 전개되는 중에 이미지가 비약하거나 소홀히 처리되고만 시들이 지적되었다.
곽은영의 ‘양철인형’ 외 5편의 시들은 치밀한 표현, 선명한 이미지, 그 이미지들을 능숙하게 서사적 전개 속에 배치하는 형상화 능력들이 눈에 띄었다.
아울러 응모된 작품들 모두가 완성도가 높고, 수준이 골랐다. 우리는 응모된 모든 시들 중에서 ‘개기월식’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하였다.
‘개기월식’은 정육점 여자, 살코기, 월식 중인 달과 아이의 요의와 배설이 중첩되거나 흩어지면서 먹고, 먹히며, 배설하는 풍경 속에 숨은, 생의 비의 하나를 그려내고 있다. (최승호, 김혜순)
[200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 이윤설
비린 게 무지하게 먹고팠을 뿐이어요
슬펐거든요. 울면서 마른 나뭇잎 따 먹었죠, 전어튀김처럼 파삭 부서졌죠.
사실 나무를 통째 먹기엔 제 입 턱없이 조그마했지만요
앉은 자리에서 나무 한 그루 깨끗이 아작냈죠.
멀리 뻗은 연한 가지는 똑똑 어금니로 끊어 먹고
잎사귀에 몸 말고 잠든 매미 껍질도 이빨 새에 으깨어졌죠.
뿌리째 씹는 순서 앞에서
새알이 터졌나? 머리 위에서 새들이 빙빙 돌면서 짹짹거렸어요
한 입에 넣기에 좀 곤란했지만요
닭다리를 생각하면 돼요. 양손에 쥐고 좌-악 찢는 거죠.
뿌리라는 것들은 닭발같아서 뼈째 씹어야해요. 오도독 오도독 물렁뼈처럼
씹을 수록 맛이 나죠. 전 단지 살아있는 세계로 들어가고팠을 뿐이었어요.
나무 한 그루 다 먹을 줄, 미처 몰랐다구요.
당신은 떠났고 울면서 나무를 씹어 삼키었죠.
섬세한 잎맥만 남기고 갉작이는 애벌레처럼
바람을 햇빛을 흙의 습윤을 잘 발라 먹었어요. 나무의 살집은
아주 통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죠. 푸른 생선처럼 날 것의 비린 나무 냄새.
살아있는 활어의 저 노호하는 나무 비늘들.
두 손에 흠뻑 적신 나무즙으로 저는 여름내 우는 매미의 눈이 되었어요.
슬프면 비린 게 먹고 싶어져요,
아이 살처럼 몰캉한 나무 뜯어먹으러 저 숲으로 가요.
<심사평>
언어를 통하여 삶을 투시하는 힘, 절제된 표현, 무엇보다 참신한 패기를 기대하며 심사에 임했다. 박민규의 ‘낙산’, 신미나의 ‘부레옥잠’, 한인숙의 ‘마이산’,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 남궁선의 ‘폭설’, 김종훈의 ‘국소 마취’는 상당한 시적 성취를 이룩하고 있는 작품들이었다. 그 중 박민규와 이윤설의 작품을 최종 심사 대상으로 올렸다.
박민규의 ‘낙산’은 시어를 다루는 솜씨와 객관적 서술력이 돋보였지만 신인의 패기보다는 모법답안이 주는 안정성이 넘치는 작품이었다. 이윤설의 ‘나무 맛있게 먹는 풀코스법’은 활달한 상상력과 살아있는 시어를 부리는 능력이 탁월했다. 섬세한 묘사로 주제를 구체적으로 서술해 감으로써 한편의 시로서 스스로를 지탱시키는 힘을 느끼게 했다.
이 작품과 함께 보내온 다른 응모작들도 두루 수준을 이루고 있어 그동안의 습작의 흔적도 알 수 있었다. 부드럽고 미화된 언어보다 정확하고 정직한 언어가 감동으로 직결된다. 언어 사용자로서 최고의 축복을 누리는 한 시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분들께 기쁜 소식이 되기를 바라며, 오래오래 깊은 향기를 터뜨리는 시인으로 남기를 기원한다. (문정희·황지우)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아쿠아리우스 / 최호일
나는 물 한 그릇 속에서 태어났다
은하가 지나가는 길목에 정한수 떠있는 밤
물병자리의 가장 목마른 별 하나가
잠깐 망설이다 반짝 뛰어 들었다
물은 수시로 하늘과 내통한다는 사실을
편지를 쓸 줄 모르는 어머니는 알았던 것이다
달마다 피워 올리던 꽃을 앙 다물고
그이는 양수 속에서 나를 키웠다
그 기억 때문에 목마른 사랑이 자주 찾아 왔다
지금도 물 한 그릇을 보면 비우고 싶고
물병 같이 긴 목을 보면 매달리고 싶고
웅덩이가 있으면 달려가 고이고 싶다
어디 없을까 목마른 별 빛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멎을 때까지
아주 물병이 되어 누군가를 적셔주고 싶다
아니,트로이의 미소년 가니메데에게
눈물 섞인 술 한잔 얻어 마시고
취한 만큼 내 안의 고요를 엎지르고 싶다
한밤중의 갈증에 외로움을 더듬거려 냉장고 문을 열면,그리웠다는 듯
반짝 켜지는 물병자리 별 하나
※물병자리 별. 그리스 신화에는 제우스에게 납치 당해 신들에게 술을 따르는 트로이의 왕자 가니메데의 이야기가 있다.
■ 당선 소감
“옆집 아줌마에게 말걸듯…그렇게 詩 써내려 갈 것”
십년 전쯤, 생업을 등지고 시에 빠져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무성 영화처럼 돌아간다. 세상은 온통 잿빛이었고 나는 살짝 맛이 가 있었다. 과도한 의욕이, 편견과 오만이, 그리고 화려한 궁핍이 내 유일한 의상이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바보이거나 천재였다.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먼저 지쳐있었다.
어림도 없을 줄 알았던 당선소식을 듣고는, 아이들은 상금의 용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고, 아내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고민하다가 방에 가서 운다. 나는 실없는 장난 전화를 받은 것처럼 담담했다. 가소롭다. 나도, 아내도, 아이들도…. 누군가 말했다. 시인은 돈을 멀리해야 하고, 살이 쪄서도 안 되며, 오로지 고독과 이슬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심한(?)말을 들은 적이 있다. 시인의 양식은 과연 고독과 이슬일까? 하지만 나는 어느덧 돈의 단맛을 아주 잘 알고 있을 정도로 영악해져 있다. 그러나 등이 따뜻해져 갈수록 마음은 여전히 춥거나 허기를 느낀다. 그리하여 시여!시인이여!절벽까지 나를 안내해 다오. 출구가 도대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작심을 하고 쓴 시는 모조리 밀려나고, 옆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쓴 시가 당선이 되어 적지 않게 놀랐다. 힘을 뺐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는 앞집 아줌마에게 얘기하듯 시를 써 봐야겠다. 아무튼, 내가 어쩌자고 이곳으로 다시 기어들어 왔는지 통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약주나 한잔 부어 드리러 산에 가야겠다. 격려해 준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홍일표 시인, 날시 동인,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님들, 지금은 눈에 덮여 있을 추동공원의 벤치에게 참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 최호일 약력 ▲1958년 충남 한산 출생 ▲잡지 프리랜서 ▲날시 동인
■ 심사평
“우물처럼 웅숭깊은 신화적 시선”
예심을 거쳐 온 적지 않은 작품들을 숙독하면서, 올해의 응모작들이 시적 다양성이나 인식의 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해 선자(選者)들은 안타까웠다. 말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으면서도 사로잡힌 시가 안 보이니!
뿌리 없는 상상력과 모호한 주제들, 시답지 않은 시시덕거림의 중언부언들, 리듬을 사상(捨象)시킨 산문의 줄글체 등이 어지럽게 부조되어 왔다. 스스로 감동하지 못하는 시상(詩想)을 펼쳐 독자에게 다가선들 그 반응은 불문가지이리라. 마치 알맹이가 빠져나가버린 말의 빈 포대자루를 한참이나 들고 서있었다는 느낌이다.
그 와중에서도 임수련씨와 최호일씨의 작품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다행이라 할까.
임수련씨의 작품에서 오래 묵힌 신뢰 같은 것을 맛본다.‘악어왕국’에서 보여주듯이 진술과 묘사를 교직시키는 적확한 비유가 삶에 스며드는 풍자와 제대로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발상의 동력을 내쳐 지탱해내는 인내를 잃었을 때,‘달리는 자전거의 실루엣’처럼 처음의 긴장이 어느새 허물어져버리는 시편으로 나타난다.
최호일씨의 경우, 응모 작품 전체에서 균질감이 살펴진다. 그만큼 습작의 강도가 굳셌음을 읽어내게 한다. 상상에 젖어든 시어의 활달한 운용도 그의 시편들을 오롯이 한 편씩의 완결된 서정으로 구축하는데 일조했으리라.
그 중에서도 ‘아쿠아리우스’는 태생의 별자리를 짚어 삶의 근원적인 갈증을 풀어내는 신화적 시선이 우물처럼 웅숭깊게 다가온다. 이 작품이 당선작으로 뽑힌 것은 직선도 곡선도 아닌 시의 얼개를 어느 정도 아우를 줄 아는 솜씨가 평가된 것이다. 당선을 축하하며, 더욱 정진하길 당부한다
정현종. 김명인
[2006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불가리아 여인 / 이윤설
매일 창 여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매일 창 여는 순간 일정하게 지나가는
이국의 여인.
자줏빛 붉은 함박꽃 모직코트를 여며 입은 그 몸은 뚱뚱하나
검게 불 타는 흑발,
영롱한 흑요석의 눈동자를
불가리아 여인, 이라 칭하기로 하자.
가본 적 없는데도 그 여인 볼 때마다
벽력처럼 외쳐지는
불가리아!
정염의 혀가 이글거리는
태양과 열정이
조합된
발음!
가혹하게 태질하는 칼바람을
움츠려 깊이 찔러넣은
함박 핀 꽃은
불길하게도 피붉어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불가리아 여인
하염없이 걷고 걸어도 내 창 앞 그 여인
어쩌다 여기에 와 있는 거죠,
겹쳐진 창문으로 지나가는 그 여인
부풀어 터질 듯 꽃핀 몸, 타오르는
흑요석 눈빛은 생각하겠지,
저 이방의 여인 코리아의 여인
창 속의 갇힌 듯 노랗게 뜬 얼굴 부르쥔 손
왜 내가 지나가는 이 시간마다 일정하게 창을 여는 걸까.
어떤 이끌림이
그녀와 나의 눈동자 속 흑점에 맞추어지고
우리 서로 의아해하며 바라본다
왜 하필 나를 선택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불가리아 여인
코리아 여인
우연히 다시 만난다면 스치듯 안녕, 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불길하게도 매일 일정하게.
<심사평>
삶과 사물을 꿰뚫어보는 빛나는 예지
비슷비슷한 내용, 비슷비슷한 이미지들의 시가 많은 것은 같은 세대가 같은 정서, 같은 생각에서 살고 있는 데 연유하는 바도 없지 않겠으나, 한편 시를 잘못 공부하고 있어 그런 것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억지로 만들어 잘 읽히지 않는 시도 많았지만, 삶과 사물을 꿰뚫어 보는 빛나는 시가 예년에 비해 더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이윤설의 시들이 단연 빛난다. 우선 세상을 보는 눈이 남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가령 ‘불가리아 여인’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창을 열고 같은 시간에 지나가는 이국 여인을 본다는 것이 시의 내용인데, 그를 불가리아 여인으로 상정한다든가 또 그의 위치에서 창 안의 나를 바라본다든가 하는 설정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시가 전체적으로 지극히 발랄하고 싱싱하다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또 ‘성난 여자’에서는 활기와 거침없는 서술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고 있다. 무엇보다도 시가 재미가 있고 속도감 있게 읽힌다는 점도 미덕이다.
재미있고 잘 읽힌다는 점에서는 황현진의 시도 뒤지지 않는다. ‘당신과의 드라이브’나 ‘당신에게 키스를’ 같은 시는 시라면 으레 심각하고 어렵다는 개념을 바꿔 놓는다. 한데 어딘가 한구석 덜 익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 흠이다.
김종분의 시들은 조금 구투라는 느낌을 준다. ‘나는 불량 농민이다’는 메시지도 분명하고 잘 읽히지만, ‘나는 구술 면접을 잘 볼 자신이 없다’ 같은 시는 지루하다. 그러나 이런 내용을 이만큼 형상화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 문학에서 전반적으로 사회적 상상력이 퇴색되어가고 있는 현실에 있어 그의 시들은 매우 값진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마지막까지 남은 세 사람의 작품 중에서 이윤설의 ‘불가리아 여인’을 당선작으로 뽑는 데 선자들은 쉽게 합의했다. (유종호, 신경림)
[2006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 최명란
늦은 밤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가 손님 전화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은
꼭 솟대에 앉은 새 같다
날아가고 싶은데 날지 못하고 담배를 피우며 서성대다가 휴대폰이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재빨리 사라진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또 언제 날아와 앉았는지 솟대 위에 앉아 물끄러미 나를 쳐다본다
그의 날개는 많이 꺾여 있다
솟대의 긴 장대를 꽉 움켜쥐고 있던 두 다리도 이미 힘을 잃었다
새벽 3시에 손님을 데려다주고 택시비가 아까워 하염없이 걷다 보면 영동대교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참은 적도 있다고 담배에 불을 붙인다
어제는 밤늦게까지 문을 닫지 않은 정육점 앞을 지나다가 마치 자기가
붉은 형광등 불빛에 알몸이 드러난 고깃덩어리 같았다고
새벽거리를 헤매며 쓰레기봉투를 찢는 밤고양이 같았다고
남의 운전대를 잡고 물 위를 달리는 소금쟁이 같았다고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아니야, 넌 우리 마을에 있던 솟대의 새야
나는 속으로 소리쳤다
솟대 끝에 앉은 우리 마을의 나무새는 언제나 노을이 지면
마을을 한 바퀴 휘돌고 장대 끝에 앉아 물소리를 내고 바람소리를 내었다
친구여, 이제는 한강을 유유히 가로지르는 물오리의 길을
물과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물새의 길을 함께 가자
깊은 밤
대리운전을 부탁하는 휴대폰이 급하게 울리면
푸드덕 날개를 펼치고 솟대를 떠나 밤의 거리로 사라지는
야간 대리운전사 내 친구
오늘밤에도 서울의 솟대 끝에 앉아 붉은 달을 바라본다
잎을 다 떨군 나뭇가지에 매달려 달빛은 반짝인다
<심사평>
시적 형상화 탁월…상상력 빼어나
당선작 ‘내 친구 야간 대리운전사’ 외 네 편을 응모한 최명란씨의 작품들은 그 어느 시를 당선작으로 내놓아도 좋을 만큼 빼어난 것들이다. 탁월한 시적 형상화 능력과 적확한 언어 구사, 기발하면서도 활달한 상상력, 절제된 담백한 어조는 이 신인의 만만치 않은 문학적 내공을 짐작케 한다. 작품들은 주로 고된 삶을 다루고 있다. 노숙자, 보도블록 까는 청년, 꼬막 캐는 여자, 야간 대리운전사 같은 버거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최명란씨의 시들은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면서 어떤 안쓰러운 사실들의 풍경 앞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대상과의 거리를 요구하는 그 풍경은 소외된 인생들의 어두운 풍경이기도 하지만, 심미적 안목과 감수성으로 걸러진 언어들에 의해 언어예술로 승화된 풍경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당선작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승규씨의 ‘대추나무 이력서’ 외 2편도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규씨의 시들은 맛깔스러운 언어들로 빚어낸 정감있는 이미지, 연기론적인 상상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적 긴장을 늦추는 산문적인 요소들이 흠이었다.
고원효씨의 작품 중에서는 ‘미더덕의 맛’과 ‘코가 만들어지기까지’ 두 편이 관심을 끌었다. 말의 우연성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는 시적 전개 방식은 재미있고 독특하다. 그러나 그것이 시적 울림을 이끌어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그리고 응모자 모두에게 정진과 향상이 있기를 기대해 본다.
(황동규·최승호 )
[200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서울목공소 / 양해기
굵은 팔뚝이 대패를 간다 지난해 나무아래에 파묻은 딸아이의 울음소리를 내며 나무의 굳은 껍질이 떨어져나간다 잔뜩 날이 선 대패는 켜켜이 붙은 나무의 나이테를 차례로 안아낸다 얇은 나무판자에 땅-땅 못총을 쏘아대는 사내의 얼굴이 마치 성장을 멈춘 어린 통나무 같다 사내의 가슴팍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땀은 가장자리에 틀을 만들며 헐렁한 런닝에 격자무늬 창살을 짜 넣는다 사내의 창을 열면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 다닌다 갈래머리 딸아이가 달려와 매달린다 다시 사내의 모습이 사라진다 사내 앞에 놓인 통나무 안엔 사내와 팔뚝 그리고 그의 딸아이가 뛰어다니는 통로가 있다 팔뚝은 나무를 열어 하루 종일 창문을 내고 사내의 딸아이가 창 밖을 내다보고 있다
<심사평>
고단한 삶을 건져낸 신선한 힘
시인으로서 언어를 행사한다는 것은 단순히 무언가를 ‘이야기하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실천 자체이어야 마땅하다. 시의 외형을 지닌 모호한 설명과 감상들, 일부 투고작들의 필연성을 수긍하기 어려운 산문화 경향에 대해 우려를 갖는 것은, 그것이 언어의 시적 사용이 지니는 근원적 의의와 위엄에 대한 자각의 결핍을 반영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예심을 통과한 9명의 후보들 중 ‘매듭론’ ‘고치의 시간’ ‘에버랜드 화원에서’ ‘깃을 날리며’의 4명을 우리는 대체로 시적 사유가 다소 도식적이거나 언어 운용의 긴장감이 떨어진다고 판단하여 제외하였다. 남은 5명의 후보 중 이현수는 ‘뿌리의 방’ 같은 섬세한 안정감이 인상적이었으나 좀더 새로울 필요가 있었다. 정구영은 ‘인드라의 그물’ 등 일부 작품의 재기가 신선했으나 그것이 과연 재기를 넘어 진정한 시적 모험이라 할 만한 것인가에는 의문이 남았다. 이재훈은 생기 있고 도식성으로부터 자유로웠으며 특히 ‘공중전화 부스들~’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비유와 표현이 부분적으로 지적되었다.
마지막으로 신미나와 양해기 두 후보를 놓고 심사위원들의 의견은 크게 엇갈렸다. 신미나의 시편들은 감각과 수련이 높은 수준에서 결합된 가작들이며, 삶을 누추함에서 건져내는 독특한 생기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입김’ ‘흙잠’을 제외하면 가벼운 감각에 주로 의지하고 있으며, 크게 새롭다고 보기 어렵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양해기의 시편들에 대해서 역시 고단한 생활 현장에서 건져올린 살아있는 글감과 시적 몽상이 잘 통합된 작품들이며, 근년의 젊은 시 일각이
드러내는 해체와 일탈 지향에 비해 신선하고 힘이 있다는 긍정적 평가에 대해, 제출된 매편의 시적 발상과 전개가 대동소이하고, 제재의 선택이 상대적으로 신선해 보일 뿐 1970, 80년대 민중시 운동이 이룬 성과에 비할 때 시적 사유가 새롭다고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의견이 제기되었다. 재독과 삼독, 격론과 휴회가 긴 시간 이어진 끝에, 결국 신인작가상이 ‘이 한편’을 독자 앞에 내놓는 제도라는 점과 신인다운 패기에 가산점을 주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으며, 이어 양해기의 ‘서울 목공소’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할 수 있었다. 당선작은 마음의 안과 밖이, 밈과 당김이 잘 균형 잡힌 수작이다. 울분을 벼려 사랑을 이루어야 하는-사랑의 포즈가 아니라-짐을 당선자는 지고 있는 듯하다. 건투를 빈다. 신미나를 비롯한 아홉 분 또한 우리는 잊지 않고 기다릴 것이다. (김종해, 김사인)
[2006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조각보를 짓다 / 이은규
그믐, 공명 쟁쟁한 방에 외할머니 앉아 있네요 오롯한 자태가 새색시처럼 아슴아슴 하네요 쉿, 그녀는 요즘하늘에 뜬 저것이 해이다냐 달이다냐, 세상이 가물가물 한다네요 오늘따라 총기까지 어린 눈빛, 오방색 반짇고리 옆에 끼고 앉아 환히 열린 그녀, 그 웃음자락에서 꽃술 향이 피어나기는 어찌 아니 피어날까요 시방 그녀는 한 땀 한 땀 시침질하며 生의 조각보를 짓고 있네요 허공 속에 자투리로 남아있을 어제의 어제들 살살 달래며, 그 옆에서 달뜬 호명을 기다렸을, 아직 色스러움이 서려있는 오늘의 오늘들을 공들여 덧대네요 때마침 그믐에 걸린 구름이 얼씨구 몸을 푸는데, 세상에서 제일 바쁜 마고할멈 절씨구 밤 마실 나왔나 봐요 인기척도 없이 들어와선 그녀 옆에 척하니, 그 큰 궁둥이를 들이대더라고요 그러더니 공든 조각보가 어찌 곱지 않으랴, 조각보에 공이 깃들면 집안에 복인들 왜 안 실리랴, 이러구러 밉지 않은 훈수를 두네요 마치 깨진 기와조각으로 옹송옹송 살림 차리던 소꿉친구 모양새로 앉아서는 말이지요 마고할멈의 넓은 오지랖이야 천지가 다 아는 일, 그 말씀 받아 모신 그녀는 손끝을 더욱 맵차게 다독이네요 한때 치자빛으로 터지던 환희들이 어울렁, 석류잇속 같이 아린 화상의 점점들이 더울렁, 쪽빛 머금은 서늘한 기원들까지 어울렁더울렁 바삐 감침질 되네요 生의 감칠맛을 더하던, 갖은 양념 같은 농지거리들도 착착 감기며 공글리기 되더니, 이내 그 色들色들 어우러져 빛의 시나위 휘몰아치네요 드디어, 우주를 찢고 한 장의 조각보가 첫 숨을 탔네요 금방이라도 선율 고운 장단이 들썩이며 펄럭일 것 같네요 저만치 아직 조각보에 실리지 않은 시간들은 羽化登仙이라 적힌 만장을 펄럭이며 서있네요 어느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마고 할멈, 다 빠져버린 이빨 설겅설겅한 잇바디 내보이며 방짜유기빛으로 쨍하게 웃고요 외할머니야 그 조각보를 가슴에 안고 어린애처럼 좋아라, 술렁술렁 일렁일렁 거리네요 마침 장지문 밖에서 그믐달이 막 玄牝之門으로 드는 때 말이지요
<심사평>
토속의 기운 신선하게 느껴져
김명인
선자(選者)에게 넘겨진 시편들은 예심을 거쳐 온 작품이라서, 어느 정도의 시적 성취가 고루 엿보였다. 그러나 습작기의 신인들에게서 흔히 살펴지는 판에 박힌 수사나 장식적 언술에서는 모두들 비켜서지 못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검토의 대상이 되었던 작품들은 이하정의 '합천 가는 길', 이인주의 '모자를 쓴 사철나무', 이은규의 '조각보를 짓다' 등 세 편이었다.
오정환
이하정의 시에서는 한 세대 전의 자옥했던 체험이 조밀하게 읽혀진다. 그러나 낡은 화폭을 대하는 듯한 느낌은 화자가 선택한 회상의 어조가 고루한 문맥 위에 얹혀있는 탓이 아닐까.
그런 점에서 이인주의 응모작들이 보여주는 신선한 문체는 평가받을 만하였다. 시화의 선택이나 상상력의 밀도 또한 감각적이었다. 그러나 시의 힘을 한데 모으려는 집중력에서는 신뢰가 떨어진다. 집중력은 작품을 관통해가려는 시적 긴장감의 바탕이자 일관성의 핵심인 것이다.
이은규의 시편에서도 여러 결점들이 눈에 띄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선작으로 뽑힌 '조각보를 짓다' 역시 수다스러운 언사에 필적할 만한 감동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더구나 '현빈지문(玄牝之門)'처럼 공연한 현학이 이 시에 무슨 보탬이 되었는지는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노자(老子)에 기댄 이 구절은 '만물을 낳게 하는 근원의 길'을 가리키지만, 그런 어사가 아니더라도 모성(母性)의 주술적 분위기를 감각적으로 살려낼 수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겹겹의 말에 감싸인 '마고(麻姑) 할미'와 같이 토속에의 생식적 기운이 이 시의 신화적 토대가 되어 작품의 일체감을 어느 정도 건사해내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들은 함께 공감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거듭 정진하길 당부한다.
김명인·오정환
[2006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봉제동 삽화 / 김성철
천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소나기의 망치질 소리가 시작되면
둥 번개가 치자 공장엔 정전이 찾아왔다
늙은 배선이 어김없이 누전 빙자한 어둠을 불렀다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재단사 김씨는 하늘위로 쌓아올려진
회색원단 눈길로 만지며 납품기일 손꼽는다
창틀 등지고 불어오는 바람
미싱 선반 위로 펼쳐진 꽃길타고 달려간다
손 맞잡은 여공들 바람의 허리춤을 잡고
꽃길 위로 걸어 들어간다
피지 못한 꽃들이며 줄기 오르지 못한 실밥들이
보푸라기 흔들며 반긴다
페달 밟는 미싱공 꽃들에게 먼저 수인사 건네자
웃자란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때 묻은 손목, 손목들
산수유열매처럼 붉게 흔들린다
재봉중인 꽃술이 실밥을 흔들었으나
접근금지를 알리는 도안선이 유난히 날을 세운다
작업반장의 기침소리와 함께 기지개 다시 피는 형광등
주파수 맞추는 고물전축, 후후 바람 불어 목청 가다듬고
여공들은 와 하며
공장안으로 퉁긴다
봉제동 수출공장
시동 거는 미싱들 서역 향한 길을 재촉한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봉제동 여공들은 실크로드를 걷고 있다
[심사평] "민중의 삶 진전된 감각으로 표현"
예심을 거쳐서 본심에 넘겨진 작품들은 대체로 상당기간 수련과 일정한 수준의 솜씨를 보여줬다. 아직도 시인 지망의 열정을 가진 높은 수준의 후보자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미래를 위해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응모작들은 최근 시단의 흐름이 반영된 탓인지 전반적으로 크고 무거운 주제보다는 작고 가벼운 일상사를 소재로 한 미시적인 삶의 세계를 천착하는 작품들이 많았다. 짧고 기지가 번득이는 시, 밝고 건강한 시, 서구적 감성의 시 등이 눈에 띄었다.
마지막까지 당선작으로 검토의 대상이 된 것은 '페르세포네의 동굴'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 '봉제동 삽화' 등의 작품들이었다.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신선한 신생의 감각이 두드러졌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깔끔하고 완결된 서정적 구조가 돋보였다. '봉제동 삽화'는 봉제공장 여공들의 건강한 삶의 풍경을 소재로 한 시로서 약간 익숙하긴 하지만 새로운 감각을 보여주었다.
세 편의 작품은 각각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어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검토한결과, '페르세포네의 동굴'은 현실에 대한 밀착감이 조금 부족했으며, '소설(小雪) 일주일 후, 첫 눈'은 전체구도의 시적 완결성에 비해 마지막 결말 처리에 있어서 내적 에너지가 약했다. 결과적으로 '봉제동 삽화'를 이의없이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는데, 그것은 이 시가 기존의 민중시와 달리 새롭게 진전된 감각을 긍정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기존의 민중시가 지닌 부정이나 분노의 감정을 벗어나서 "여공들의 환한 치아가 깜빡깜빡 불 밝히고" "웃자란 실꽃들 서둘러 뿌리 걷으며/ 손에 핀 봉제선 위로 올라탄다" "실크로드 사막의 모래처럼 날리는 보푸라기" 등의 사실적인 표현들은 노동현장에서의 삶을 객관적인 시각에서 새롭게 표현해 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같이 응모한 '거미집'이나 '만물상' 등의 작품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다는 점 또한 선자들의 결정에 참조사항이 됐다. 당선자가 새로운 민중시의 지평을 걸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쾡한 눈알을 바람이 핥고 지나가자 파르르 눈가의 잔주름이 흔들린다 헤쳐가야 할 길을 또렷이 바라볼수록 굳은살처럼 딱딱한 몸은 야위어간다 그 해 누군가 억센 손으로 그의 내장을 파내고 그 속에 단단한 뼈대를 세웠다 그의 몸 바깥에서 느닷없이 아카시아꽃이 펑펑 지고, 군화자국이 지나간 자리마다 비늘 같이 꽃잎이 소복하게 쌓였다 바람 불어 허공이 저 혼자 우는 밤, 그는 도시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뻣뻣해졌다
스물다섯 해, 맷집 하나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사는 북어가 있다 상한 지느러미 곧추세워 풍향계처럼 헤엄치려 하는데 아무도 그에게 길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우리 큰오빠……
떠나야 한다, 떠나야 한다 입술을 달싹이는데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날아다니는 꽁치>
접시 위에 잘 구워진 채 퍼덕거린다 물때가 채 가시지 않은 맑은 눈을 또랑또랑 뜨고 꽁치는 지금 잠시 숨을 고르는 중이다 꽁치가 다시 날아가지 못하도록 젓가락들이 날렵하게 접시 주변을 들락거린다 그러다 보니 꽁치의 살과 살 사이 흰 머리카락 같은 가시들이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다 참 성가시게 달라붙어 있다 용케도 힘을 나란히 모으면서 촘촘히 박음질한 무명 천 조각처럼 가시는 끄떡없다 이 가시는 바다에서 꽁치의 몸을 찌르던 바늘이었다 바다를 벗어나고 싶은 꽁치가 나는 누구인가, 하고 물을 때마다 가시는 단단해졌다 가시 때문에 아파서 푸른 물결을 뚫어야 했다 가시에 찔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 보니 꽁치는 길쭉해졌다 그러다가 꽁치의 몸에 청회색 바다가 대가리부터 꼬리까지 길게 들어와 박히게 되었다 젓가락들이 바다를 뜯어먹게 놔두고
지금 꽁치는 다시 날아가려고 기우뚱 몸을 한번 뒤집고 있다
반대쪽 살이 통통하다
<심사평 >
섬세한 관찰력이 돋보인 수작
예심을 거친 17 사람의 시가 우리에게 넘겨졌다. 한 사람이 대략 3-5 편씩, 더러는 10여 편이나 20 편 가까이 응모한 이도 있었다. 한 사람이 열 편도 넘게 응모하는 것은 응모하는 이에게 아무래도 손해가 될 것 같았다. 그 중에 좋지 않은 게 섞여서 그 사람의 다른 시들도 도맷금으로 넘어갈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 단위가 아니라 넘겨받은 시 한 편 한 편을 독립시켜 읽어보고자 했다. 오늘이 동짓날,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이라고는 해도, 오후 2시부터 심사를 시작했으니 시간은 우리에게 녹녹한 편이었다.
예선을 거친 작품들이어선지 시들은 그러나 모두 녹녹치 않았다. 선 밖으로 일단 밀어놓는 작품들이 쌓일 때마다, 하얀 실에 검정물이 드는 것을 보고 한없이 울었더라는 墨子 생각이 나곤 했다. 노란 색 파란 색 빨간 색 그 어느 색깔로도 다시는 물들일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검정색이 아니기를 빌면서 우리는 자꾸만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냈다. 한 편만 뽑아야 한다는 건 얼마나 야속한 선택인가.
「얼룩동사리」,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 「날아다니는 꽁치」,「북어」등 마지막 4 편이 그렇게 우리의 선 안에 남았다. 선 밖으로 작품을 밀어낼 때마다 우리는 작품의 흠결들을 주로 화제로 삼곤 했는데 이제부터는 작품의 좋은 데를 서로 들춰보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 곳으로 한 곳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얼룩동사리」는 정확한 관찰과 참담한 부성애를 집요하게 부각시키는 전개 솜씨가 돋보였지만, 마지막 부분의 자살한 사람과 얼룩동사리와의 대비가 시적 긴장을 결정적으로 상쇄시킴으로써 시 전체가 사람이 미물만도 못한 거 아니냐 하는 일반론에 함몰되고 만 것 같다.
「어머니에게 ‘잊혀진다’는 말은」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우리는 가장 길게 의견을 나누었다. ‘잊혀지는 것’과 ‘잘 삭아서 숙성되는 것’을 일원적으로 파악하는 시적 착상이 무엇보다 돋보이는 작품이었지만 땜질 흔적이 드러나 보이는 구조상의 문제점과 숙성이 덜 된 시어들이 끝내 우리들의 맘에 걸렸다.
「날아다니는 꽁치」와 「북어」는 둘 다 기명숙씨의 작품이었다. 데생이 정확한 화가가 좋은 그림을 오래 그릴 수 있다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할 만큼 두 작품 다 섬세한 관찰력이 우선 돋보였다. 「날아가는 꽁치」의 시적 긴장이 유지되는 상상 또한 그런 섬세함 때문에 더 신선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북어」는 북어라는 媒材를 통하여 시대의 그늘과 그 아픔이 우리들의 삶 속에 어떻게 얼룩져 있는가를 가시화하고 있어서 특히 눈길을 끈다.
선 밖에 빚더미처럼 쌓인 작품들이 내내 맘에 걸렸지만 우리는 이견 없이 이 두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고 신문사를 나섰다.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은 날 뽑았지만, 가장 좋은 작품이 가장 긴 밤과 큰 축복을 함께 누렸으면 좋겠다. 팥죽도 못 얻어먹은 동짓날 짧은 해가 무슨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녹다 만 눈길 위에 머뭇머뭇 기울고 있었다. (이운룡. 정 양)
[2006년 대구매일 신춘문예 시 당선작]
우주물고기 / 강경보
- 미래과학그림展에서 -
미래의 어느 때에는
우리 살아갈 집이 달 옆에 있을 것이다
먼 지구의 일터로부터 귀가하는 일이
오늘 출퇴근하는 일 만큼이나 고되고 느린 것이 아니라
그냥 눈 한 번 쓱 감았다 뜨면
어느 사이 나는 우주정원의 앞마당에서 깨금발을 딛고
고층 빌딩 높이의 테라스를 지나 침실로 들어갈 것이다
은하수가 냇물처럼 반짝이며 별 사이를 흐르고
어린 시절 앞강에서 물장구치며 놀던 기억으로
가끔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되고도 싶을 것이다 누군가
명왕성 뒤에 숨어서 우주적 망원렌즈로
얼음처럼 투명한 내 몸을 투사하기도 할 것이다
내 꿈은 비록 지금보다 육분지 오의 무게를 덜어낸
달에서 노니는 것이지만 그것은 촘촘하게 엮인
지구의 기억을 한 편 매달고 사는 일이 될 것이다
별과 별 사이에 빛의 길이 나고
택시는 허공을 날며 손님들을 태우고
어느 영화에서였지, 흰 천 조각으로 여인의 가슴과 음모를
붕대처럼 감으면 그대로 일상의 옷이 되는
그때는 사랑의 말도 한 번의 눈빛이면 되고
이별도 백만 광년 먼 별장에서 보내는
순간의 텔레파시면 족할 것이다 그러나 그 때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아,
내 어항 속의 금붕어 한 마리가 어떻게
하늘을 날아 저 얼음별로 헤엄쳐 가는지
어느 날인가는 앞강에 낚시대를 드리우고 앉아
오래 당신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것처럼
마음에서만 사는 아득한 것들은 또 어떻게
저 별의 시간을 건너가게 되는지
[심사평]
예년보다 우수한 작품이 많아 반가웠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44명의 작품 중 검토해서 남은 작품이 강은새의 ‘우주물고기’, 장진명의 ‘흑두루미 주점’, 조혜정의 ‘말을 굽다’, 장인자의 ‘발’, 박태순의 ‘쓸쓸한 퇴화’, 석지명의 ‘일인용 매트리스’, 이순화의 ‘풀꾹새’, 박소원의 ‘흰 종소리가 울린다’, 류진아의 ‘사내의 나라, 유토피아’, 임재정의 ‘기차는 미루나무 이파리를 자나네’, 백상웅의 ‘무림 책방’, 박지성의 ‘실연의 꽃이 피었습니다’, 김영숙의 ‘비평가 식당’, 황인숙의 ‘호랑나비 겨울’, 정미경의 ‘개를 위한 랩소디’, 강은미의 ‘아름다운 추락’, 이근창의 ‘구덩이’, 안정혜의 ‘외줄에 묶인 사나이’, 박혜점의 ‘선창포구’, 전향국의 ‘대설주의보’ 등이었다.
여기서 다시 논의해서 남은 작품이 ‘우주물고기’, ‘흑두루미 주점’, ‘말을 굽다’, ‘일인용 매트리스’, ‘발’, ‘호랑나비 겨울’이었다. ‘발’은 짜임새도 있고 무게가 있는 작품이었으나 같이 투고한 작품 ‘엇각’이 작년 수준에서 별로 진전이 없어 보여 제외시켰고 ‘호랑나비 겨울’도 같이 투고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이 뒷받침되지 못해 제외시켰다.
‘말을 굽다’는 능란한 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으나 ‘말’로 비롯되는 이미지 전개가 화덕으로 집약되는 상징성이 약해 보여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였고, ‘일인용 매트리스’는 현실성 있는 진한 이미지가 시선을 끌었으나 좀더 폭 넓은 상상력으로 구체화시켰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주물고기’와 ‘흑두루미 주점’은 어느쪽 모두 버릴수 없는 작품이었다. 특히 장진명씨가 함께 투고한 작품 ‘육교’도 ‘흑두루미 주점’과 함께 수준을 이룬 작품이었으나 나머지 작품들이 고르지 못해 어쩔수 없이 투고한 다섯편의 작품이 모두 수준급인 ‘우주물고기’를 당선작으로 했다
‘우주물고기’는 우주적 소재를 시적 환타지로 이끌어가는 수사법이 새로운 맛을 준다는 의미에서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이 작품 자체만으로는 밀도가 여린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그의 ‘우포늪 통신’이나 ‘너도밤나무, 그대’같은 탄탄한 작품이 뒷받침 해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하는데 의견이 없었다.
권기호(시인.경북대 명예교수) 정호승(시인)
[200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바뀐 신발 / 천종숙
잠시 벗어둔 신발을 신는 순간부터
남의 집에 들어온 것처럼 낯설고 어색했다
분명 내 신발이었는데
걸을 때마다 길이 덜커덕거렸다
닳아있는 신발 뒤축에서
타인의 길이 읽혔다
똑같은 길을 놓고 누가
내 길을 신고 가버린 것이다
늘 직선으로 오가던 길에서
궤도를 이탈해 보지 않은 내 신발과
휘어진 비탈길이거나 빗물 고인 질펀한 길도
거침없이 걸었을 타인의 신발은
기울기부터 달랐다
삶의 질곡에 따라
길의 가파름과 평탄함이
신발의 각도를 달리 했던 것이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 같은
타인의 신발을 신고 걷는 길,
나는 간신히 곡선을 직선으로 바꾸었다
[심사평]
시들이 조금씩 어둡다. 시대가 어둡다고 시가 어두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고,고통 속에서 희망을 읽어내는 변화의 징후를 시에서 엿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작품을 읽어 내렸다. 여섯 사람이 쓴 여섯 작품이 마지막까지 뽑는 이들의 손에 남았다. '기억에서 봄을 검색하다','몸빼','유마경변상도','없다,해돋이 광장에는','결혼기념일',그리고 '바뀐 신발'이 그것이다. 모두 남다른 수련 흔적과 작품 세공력을 숨기지 않은 작품이다. 게다가 주변의 구체적 일상에 충실하고자 한 점 또한 공통의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천종숙의 '바뀐 신발'을 당선작으로 미는 데에 뽑는 이들은 쉽게 동의했다. 신발은 흔한 글감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흔하지 않는 예각적 체험으로 되돌려 내는 눈매는 오랜 적공의 결과다. 첫 싯줄에서 마지막 싯줄까지 다소 둔탁하지만 거침없는 사색이 제 맵시를 잘 갖추었다. 함께 보낸 작품들의 수준이 가장 고른 점도 장점이었다.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시가 먼저 변해야 한다. 이제껏 이고 다닌 나이와 경력은 지금부터 잊어야 하리라. 신인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모험의 세계로 즐겨 나아가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시인 황동규·박태일·최영철
[2006년 동양일보 신인문학상 ] 시부문 당선작
집 / 박순서
언 강을 떠나는 새는
내 눈 속으로 들어와 집을 짓는다
나는 차마 관 뚜껑을 닫지 못한다
하루살이처럼 세상 휘저으며 여태껏 살아
나는 누구의 보금자리가 되었는가
언 강에도 새들의 집이 있고
꽃이 진 마른 대궁에도
봄볕의 집은 남아있다
내 눈 속의 새들아
이제 돌아갈 길일랑 잊어버려,
마지막 웅덩이에 고인 빗물처럼
흐르다 흐르다 내 몸에 칭칭 감기어
안온한 보금자리에 머무름 같이
너 이제 날개를 묻으라
능선을 넘으면 내 무덤이 있다
낯선 바람에 끌려가다
부리로도 울지 못한 네 눈물이 있다
저기, 보아라
저승 가는 길목에 굶주린 까마귀가
까르륵 까르륵
빈 솥에 밥을 푸고 있지 않느냐
[심사평]
1차 예선을 거쳐 심사위원에게 넘겨진 작품은 49명의 285편이었다. 3일 동안 꼬박 밤을 지새면서 읽었다. 어느 해 보다도 정성들인 시편들의 높은 수준에 즐거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다섯 편이었다. ‘은행나무에 걸린 곡예사’(부산 박미경)는 소재가 이색적이고 신선했지만 어딘지 설득력이 조금 부족한 것 같았다. 시어 선택이 너무 경직된 탓이 아니었을까. ‘아궁이’(충북 박태순)는 너무 물기 없는 시적 분위기가 당초의 의도를 다 살리지 못한 것 같았고, ‘호박 속의 모기’(경북 권영하)는 주제 설정도 좋았고 잘 읽혔지만 구성이 약간 산만스러웠다. 집중력이 조금 부족했다. ‘풍장’(광주 정철웅)도 좋았지만 ‘수만리에서’가 더 잘 읽히고 애정이 갔다. 하지만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남은 작품이었다. 기승전결중에서 결이 약했던 것은 아닐까. 마지막 ‘집’(서울 박순서)은 그 끈적끈적한 시어들이 끝까지 놓지 않게 했다. 전체적인 시의 구도도 짜임새가 있었다. 그릇, 형식에 알맞는 내용이 잘 맞아 들어간 것 같다. ‘수만리에서’와 두 작품을 놓고 겨루다가 좀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 설득력이 앞서는 ‘집’을 당선작으로 민다. 다른 작품과 달리 절제된 시어로 인하여 이미지가 투명해서 전달력이 뛰어나다. 금년도 응모작품들은 모두 상당기간의 수련을 거친 분들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아직도 표현을 위하여 너무 많은 시어들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그것은 주제가 잘 익고 절실해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너무 일찍 손댄 것일 수도 있다.
너무 욕심을 많이 부리다 보니 말이 앞서고 많아졌다. 어느 한곳에 카메라의 초점을 잘 맞춰야만 하는데 이런저런 사물들을 사용하다보니 길어지고 이미지 또한 흐려지고 말았다. 설득력이 떨어지고 나 홀로의 시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독자들에게 다가가는 감동 또한 약해졌다. 시는 장시를 제외하고는 가급적 짧아야만 이미지의 투명성이 돋보이고 리듬이 되 살아난다. 그래야만 호소력도 강해진다. 주제에 따른 언어의 경제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최소한의 언어로 최대한의 이야기를 담는 것이 시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초부터 카메라의 위치를 잘 선택해야만 한다. 너무 많은 욕심을 부려서 많은 사물을 담으려고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집을 건축하는데 쓸데없이 많은 재료들을 낭비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오늘의 시는 눈보라치는 겨울밤의 연탄불처럼 따뜻했으면 좋겠다. 당선된 분께 박수를,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는 위로를 보낸다. 공부하시다 보면 좋은 소식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박희선<시인>
[2006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발 날리는 마당 / 김운영
눈발 날리는 마당을
보고 있으면요
마른 저녁도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마는데요
발목 잃어버린 눈발은요
땅에 닿지도 못하구요
약한 한숨처럼 담벼락 위
아버지의 여윈 어깨 위
에도 말이지요 관절
절룩거리면서 아버지 뒤란으로
가시더니요 불쏘시개 송구나무
가마솥 물 끓이는데요
등겨같은 닭털이 공중에
몇 날아다녔나요?
오래오래 눈발이 아버지
빈 어깨에 배꽃처럼 쌓이면요
오래오래 가마솥 연기
마음의 暴政(장작불) 몸 밖으로
서서히 증발되고 있으면요
아버지 사발에 담아
안방에 어머니에게요
아버지 붉은 동맥 모세혈관 풀어
어머니에게 비는
견고한 용서
닭백숙의 용서를 말이지요
살과 뼈 허물어지는 解産처럼
맑은 국물 눈물 말이지요
어머니가 밤새 소리없이
우시는 날에는요 다음날
말없는 닭백숙 한 그릇
눈발 날리는 마당에서 말이지요.
[심사평]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서해안과 호남지방에는 보름 가깝게 계속 눈이 내려 교통이 두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비닐하우스와 축사가 무너져 내렸고, 출하를 앞둔 양식장에서는 얼어 죽은 물고기들이 참혹하게 떠오르기도 했다. 거기에, 황우석 교수 사건마저 가세해 2005년 12월은 나라 전체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새해 첫 날 자신의 작품이 신문 한 면을 가득 채울 것을 바라고 문학의 외길을 정진해온 문학도들의 열정은 해가 갈수록 더욱 뜨겁고 웅숭깊어지는 것 같다. 그것은 불교신문 신춘문예 응모자가 작년에 비해 1.5배 정도 증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는다. 좀더 자세히 살피면, 시와 시조부문에 270명, 단편소설 부문 55명, 동화 부문 88명, 그리고 평론부문 7명이 응모했다.
물론 이러한 숫자는 중앙일간지의 신춘문예 응모자에 비해 현저히 적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신춘문예의 연륜이 중앙일간지의 그것에 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낮은 불교신문의 특성을 고려할 때, 불교신문 신춘문예에 대한 일반 독자의 관심이 점차 증폭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응모자 수가 늘어난 것에 비례해 작품의 수준도 예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이 각 부문 심사위원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그것은 우리 문학의 저변이 그만큼 넓고 깊어졌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어서 무척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여진다. 응모작들이 다루는 제재나 주제 또한 인간의 존재론적 본질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세계의 현상에 대한 추적, 혹은 내적 자아를 찾아가는 철저한 구도적 자세 등 우리 문학의 일반적 특징과 유관한 것들이 많이 보였다.
심사위원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불교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성을 지나치게 의식하여 제재와 주제를 불교 정신에 무리하게 적용하려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었다. 불교 정신을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스며들어야지 의식적으로 도드라지게 하려면 오히려 문학성이 훼손될 위험이 많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시와 단편소설, 동화 부문 당선자가 모두 여성이라는 사실이 말해주는 것처럼 응모자 가운데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 우리 문학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기도 하다. 한 심사위원은 우스개 소리로, “이런 추세가 한 십 년 계속되면 ‘오랜만에 남성 작가가 탄생했다’는 기사가 나올 것”이라고 하여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시조 부문에서도 좋은 작품이 보였으나 시와 시조 가운데 한 작품만을 선정해야 했기 때문에 아쉽게 당선작에서 제외되기도 했고, 동화 부문에서는 최근 입적하신 큰 스님의 일화를 연상시키는 제재와 낙산사 대들보로 만들어진 악기를 제재로 한 작품이 눈에 띄었다. 단편소설은 불교적 제재나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았는데, 작위성이 강하고 구성이 다소 산만한 것이 흠이었다. 평론 부문은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당선자를 내지 못하였으나, 수준은 상당히 진보한 것이었다는 평이었다.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것은 개인에게 커다란 영광이다. 하지만 거기에 만족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가차없이 잊혀지고 도태당하는 것이 문단의 현실이기도 하다. 당선자 세 분께 축하의 인사와 함께, 앞으로 더욱 정진하셔서 우리 문학을 빛내는 큰 작가와 시인이 되기를 간곡히 희망한다. 장영우(문학평론가.동국대교수)
[200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아버지 소처럼 말씀하시네 / 정동철
눈송이 몇점 손님처럼 찾아간 날
더 이상 견딜 것도 더 탕진할 것도 없는 나는 집으로 내려갔다
굴뚝에서 쇠죽 끓이는 연기가 흰 팔뚝을 들어
눈 덮인 지붕을 버텨 올리는 참이었다
늙은 암소 등을 빗질하며 나직나직 하시는 말씀이 외양간 밖으로 새어나오는데
눈을 머리에 인 단풍잎들이 고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고향집은 아는 것이다
구수한 쇠죽 냄새가 등을 토닥거려주자
처마 밑으로 녹다만 눈덩이 하나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염치 하나 툭 떨어져도
할 말이 없는 거다
푸우-푸 뜨끈한 여물을 먹으며
늙은 암소가 입김을 불어가며 메주콩을 씹더라도
이 세상 모든 구멍이란 구멍마다 후끈거리는 몸으로 가득하더라도,
소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거다
그래, 겸연쩍게 얼굴을 들고 외양간 문을 엿보는데
부엌에서 저녁 짓다가 어머니 힐끗 보고 하시는 말씀
아서라,
느 아부지가 지금 소허구 말씀을 허신다
이 한 마디가
짚을 썰어 가마솥에 넣고 잘 마른 콩깍지와 쌀겨를 뿌리고
찬물 두어 동이 붓고는 풍구를 돌려가며 쇠죽을 쑤고 계시던 아버지를
외양 밖으로 불러내시는 것이었다
눈송이 몇 점 또 손님처럼 오시는 것이었다.
[2006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
전주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 정동철
우리철물점과 행복부동산 사이
그가 끼어 있다
손톱만한 햇살이 간신히 창에 비쳤다
사라질 때쯤이면 늘, 나는 그의 집을 지나친다
움켜쥔 칼끝으로 그가 새기고 싶은 것과
도려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가 칼끝으로 파낸 햇볕의 부스러기들은
결코 이름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는 이름 사이에 낀 것들을 도려내며 늙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 법은 거의 없었다
조금씩 이빨이 자라는 설치류 꽉 다문 입 속,
엉거주춤 끼어 남의 이름을 도드라지게 새기다가
반복되는 자기 생까지 파내버릴 듯하였다
날마다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하나씩 빼내
손가락 끝에 아프게 지문을 새기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도장을 하나 파러 갔다가 어느 날
나는 그의 뒤통수에 난 창문 하나를 보았다
(그것은 잠깐, 둥근 보름달이었다가 그믐이 되기도 했다)
나뭇결 사이에 촘촘하게 어둠을 밀어 넣는 동안
달빛이 인주를 찍어 뒤통수에 도장을 박아 넣은 것이었다
첫댓글 역시! 다들 대단한 실력이네요. 감탄만 합니다. 이윤설의 시가 특히 눈에 띄는데 두곳에서 당선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