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 바람을 품었다. 한없이 청량하고 아삭하고 상긋하게 가슴을 순화시키는 맛, 물 기운, 숲 기운, 단 기운이 어우러져 속 시원함을 체감하게 하는 맛, 수박을 빼고 기억에 담긴 여름을 언설할 수 없다.
짙푸른 줄무늬 껍질의 수박을 떠올리면 붉은 속살이 얼싸안은 달콤 시원한 맛에 이어 어느 날의 영상도 따라 나온다. 인생 풋내기의 엉뚱 발랄했던 비상구 찾기 한 장면이랄까.
출구가 보이지 않는 날들이었다. 빠듯한 직장 생활과 휴일이면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뵈러 가느라 콩 튀듯 팥 튀듯 하는 일상이 이어졌다. 하루는 점심시간에 벌어진 수박파티에서 빨갛게 익은 수박 조각을 들고 있던 동료가 눈짓으로 불렀다. 얼결에 나도 먹던 수박 한 조각을 든 채 그녀를 따라나섰다. 문을 열고 향한 곳은 한 번도 올라가 본 적 없는 사무실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니 상가들이 즐비한 거리엔 여름 한낮 햇볕이 짱짱할 뿐 사람들은 드문드문 오갔다. 후덥지근한 공기만 떠돌고 있는 풍경이 마치 오래된 활동보호 사진을 보는 듯 적막했다. 출구를 못 찾고 쳇바퀴만 도는 갑갑한 내 하루하루가 그곳에 ‘줌 업’되고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쥐고 있던 수박껍질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멀리 내던져 보잔다. 잠깐의 말설임이 있었던가(?). 이십 대의 멀쩡한 아가씨들은 도시의 번듯한 4층 건물 옥상에서 그 황당한 일을 저질렀다. 그대로 몸을 숨기고 앉아 한참을 웃었다. 가슴이 답답할 적엔 옥상으로 올라와 숨을 모아 소리를 지른다는 그녀식의 스트레스 해소법도 처음 들었다. 우리는 허공을 향해 손나팔을 하고 몇 마디의 핏대 올린 소리를 힘껏 쏘아 올렸다. ‘시원하다’는 그녀의 기분과는 달리 내 감정은 좀 애매했으나, 수박을 매개로 둘만의 비밀 하나가 그렇게 간직되었다.
삶에서 불편한 것들을 다 내동댕이칠 순 없는 일. 실은 그날 무엇을 어디까지 내던졌는지도 아리송 하지만 그 후론 다시 옥상에 올라간 기억이 없다. 불편을 떠나보내지 못할 바엔 받아들여야 된다며 스스로 세뇌하고 갈등하고 아파하고 인정해 왔다. 삶이 나아가는 길엔 절망을 비껴갈 방향도 여러모로 생각해야 하는 사실을 체득한 지금엔, 지나간 희비도 희석되면 낭만이 되는가. 훤칠한 키에 피부가 유난히 희던 그녀와 상큼했지만 제 나름 세상 고민 다 짊어졌던 청춘의 내가 생각난다.
수박은 그 옛날의 시간들과 가족과 이웃을 떠올리게 한다. 커다란 수박을 반으로 자르면 속살에 총총히 박힌 흑점의 씨앗인 양 오순도순 살던 어린 날도 꽂혀 온다. 냉방 장치라곤 들어 보지도 못한 시절, 찬물에 담근 수박 한 통이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눌 수 있는 피서가 되어 주었다. 이웃과도 그랬다. 수박은 그때마다 속 시원한 기운으로 한여름 폭염을 주춤 물러서게 했다. 그 처방마저 없는 긴 ‘여름 나기’를 어찌 상상할 수 있었으리, 내가 아는 한, 가장 크고 단물이 많으며 대가족의 단란함과 정을 더해 주던 과일이 수박이었다.
맛은 추억과 더불어 시대의 자취가 농축된 기억일 수도 있다. 식구가 단출해지고 ‘혼밥’ 문화에 친숙해지는 요즘은 맛의 경험과 감동도 축수시켜 놓았다. 마트에 가면 수박도 한 통에서 반통, 더 잘게 조각내어 포장된 것으로도 나온다. 편리하고 경제적이라 한들 아무려면 생생한 통수박을 갓 쪼개어 먹는 맛에 비하려고,
수박은 여름이라야 제철이고 제맛이다. 기진할 더위에 숲 향 그윽하고 단물 그득한 수박 속살을 와삭 베물어 으깨는 과즙 맛을 무슨 수로 마다하랴. 자연이 잘 응축되어 붉고 달고 연하게 아삭거리는 맛은 순도 높은 청량함으로 다른 인위적인 맛과 소리를 흡수해 버린다. 대지가 뽑아 올린 감미로움이 입안의 미각 돌기들을 깨우며 위장에 도달하는 찰나, 불편한 세상사와 쓸모없는 걱정도 단숨에 날려 버리는 충만함을 안겨 준다. 감동적인 음식 맛을 두고 ‘뇌가 먹는다’고 예찬함은, 그래서일 테다.
과일 속이든 사람 속기든 인고의 시간을 담으면서 자연스레 깊어지는 법. 맹렬한 햇볕을 견디고 어둠과 비바람을 감당하는 길이 성숙을 담보하고 있다는 걸 수박이라고 모르지 않는다. 수박은 어지간히 단물을 품고도 함부로 제 속을 열지 않는다. 톡톡, 울림소리로 숙도를 확인한 다음에 듬직한 칼이 진초록 껍질을 숨죽여 찔러 들어갈 적에 쩍, 선홍색 흥건한 작은 우주를 드러낸다. 녹과 흥, 한 번의 칼질로 이토록 선명하게도 세계를 전환하는 사물은 오직 수박뿐이라고, 김훈 소설가는 찬탄했다. 겉으론 냉정하면서 열정적인 사람처럼 냉열을 함께 지닌 것이 수박 속이라는 것을, 수박 맛에 빠진 내가 나중에 알았다.
삶이란 하루하루 쌓아 온 내공으로 익어 가는 일이겠다. 열매 또한 제철 고유의 제맛이 있기 마련이건만, 언제부터인지 계절을 건너뛴 과일들이 사시장철 등장하면서 모양과 색과 맛도 달라졌다. 육종 학과 재배 기술의 발달로 당도까지 표시되어 있으니, 잘 익은 수박을 고르느라 긴장감을 안고 수박 속 반응을 노크해 보던 소박한 절차도 사라져 간다. 한데 수박 맛을 회상해 보는 나의 맛 후기는 암만해도 ‘수박은 여름 땡볕에서 자란 밭 수박이 참맛이었노라’이다.
겨울은 벗어났고 여름은 먼 이즈음 시절이 또 혼란스럽다. 봄인가 하면 겨울이다가 여름으로 오락가락 어지럽다. 그뿐인가. 저 도시의 질서와 무질서, 광증의 집념과 허위와 소란이 혼합된 판에서 속성을 출하된 맛들에 사람도 중독되어 간다. 하여 덜컥 우울해진 속을 시원하게 풀어 줄 제철 수박 맛을 그려 본다.
대형 마트에 급 출현한 통수박 들도 무언가 고프고 그리운지 생각에 잠겨 있다.
첫댓글 수박 여름 과일의 여왕이지요. 염 작가님 그간 편안하셨나요? 좋은 글들 잘 읽었습니다. 이 심술궂은 여름을 이기시고 건강 지키시어 가을바람 살랑이거든 좋은 글 많이 쓰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