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풍령의 ‘추풍’은 가을바람이 아니다
_백두대간의 추풍령
_서울 용산의 찬바람재
추풍령, ‘서늘함’ ‘떠남’을 떠올리는 ‘추풍’
_백두대간의 추풍령
_서울 용산의 찬바람재
“온갖 비리로 그들 모가지가 추풍낙엽(秋風落葉)처럼 다 날아갔잖나?”
“허, 이젠, 그들도 추풍삭막(秋風索莫)이구만.”
"그러길래 작은 민초의 소리랄지도 진작부터 추풍과이(秋風過耳)하지 말았어야지."
"에이그, 이젠 가졌던 것도 다 추풍선(秋風扇)꼴이지 뭐."
정치 얘기에 웬 추풍(秋風) 타령? 그 본뜻이 뭐길래 썩은 정치판의 한 단면을 '추풍'으로 빗대나?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이라는 뜻으로, 세력 따위가 갑자기 기울거나 시듦을 이르는 말인 '추풍낙엽(秋風落葉)'이란 말이 나왔고, 가을바람이 삭막하다는 뜻으로, 옛날 누렸던 권세가 간 곳 없이 초라해진 모습을 이르는 말인 추풍삭막(秋風索莫)'이란 말이 나왔다. 가을철의 부채라는 뜻의 ‘추풍선(秋風扇)’은 제철이 지나서 아무 쓸모 없이 된 물건을 비유하는 말로, 가을바람이 귀를 스쳐 간다는 뜻의 '추풍과이(秋風過耳)'는 어떤 말이고 말을 귀담아 듣지 않을 때 이를 써 왔다.
떠남(지남, 흘러감)의 아쉬움이 배어 있다
‘추풍’은 이름 그대로 ‘가을바람’이다.
춘풍(春風), 즉 ‘봄바람’이란 말이 ‘훈훈함’, ‘찾아옴’의 느낌을 준다면 이 말의 상대되는 추풍(秋風)은 이와는 반대로 ‘서늘함’, ‘사라짐’의 느낌을 안겨 준다.
추풍.
그래서, 땅이름 중에 ‘추풍’이 들어가면 ‘서늘함’이나 ‘떠남’을 떠올린다. ‘추풍령’을 넘으며 불러 봄직한,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으로 시작되는 추풍령 고개' 가사에도 떠남(지남, 흘러감)의 아쉬움이 배어 있다.
추풍령은 경북 김천시 봉산면(鳳山面)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1991년 이전에는 황금면)의 경계가 되는, 해발고도 221m의 고개. 백두대간의 한 허리를 넘는 준령이다. 낙동강의 지류 감천(甘川)과 금강의 지류 송천(松川)의 첫 줄기가 고개의 양 비탈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예로부터 영남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음은 천안, 목천, 청주, 보은, 청산, 황간, 김천으로 이어지는 옛길이 이 고개를 지나고, 근처에 추풍역이 있었음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 지금도 경부선철도와 경부고속도로 및 4번국도가 통과하며, 그 땅속으로는 경부고속철도가 통과해 한반도의 중심에서 교통의 중요한 몫을 한다.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한 이곳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장지현(張智賢)이 왜군과 분전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여기에 장지현 장군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순절비가 있다.
장지현 장군은 신립 장군의 부장이 된 후 이듬해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의 일으켜 추풍령에서 왜적과 싸워 왜적을 김천 방면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금산 방면에서 왜적이 협공을 받아 전사했다.
순절비는 고종 1년에 송환기가 비문을 지어 세웠으나, 일제 때 매몰되었다가 지금의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추풍령은 그렇게 높은 고개는 아니지만, 전에는 험준하고 높은 고개였음을 고개 이름의 '령(嶺)'이 잘 말해 주고 있다. ‘령’자가 붙은 고개 이름은 주로 백두대간에 걸쳐 있는데, 대부분 길고 높은 고개이다. 대관령, 진부령, 미시령, 조령, 죽령 등이 모두 백두대간이 고개들이다.
추풍령의 '추'는 '갓(가)', '풍'은 '파름'
‘추풍령’이란 이름이 나온 과정을 써 놓은 글을 별로 볼 수가 없다. 더러는 ‘바람’과 관련해 그 이름 유래를 설명한 것이 보이기는 해도 그 내용에 선뜻 고개를 선뜻 끄덕이지 못하게 된다. 근처에 있었던 추풍역(秋風驛, 秋豊驛)의 이름을 따라 고개 이름이 붙었다고도 하지만, 이 역시 고개 이름이 먼저인지 역이름이 먼저인지 알 길이 없다.
나름대로 이 고개의 이름을 어원적으로 더듬어 볼 수밖에 없는데, 어쩌면 지나친 비약이 될 수도 있기에 글을 쓰기에 무척 조심스럽다.
전국에는 '풍현'이나 '풍치'처럼 '풍(風)자가 들어간 땅이름들이 많은데, 이들의 토박이 이름을 보니 거의 모두가 '바람재'였다.
‘바람재’라는 이름을 지닌 곳이 많다. 전남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 곡성군 죽곡면 삼태리, 보성군 미력면 초당리, 순천시 삼거동, 순천시 상사면 도월리, 순천시 쌍암면 신성리, 화순군 청풍면 이만리, 충북 충주시 수안보면 수회리 등.
풍현(風峴), 풍산(風山) 등의 이름이 경남 산청군 산청읍 내리, 경북 경주시 외동면 제내리, 충남 천안시 입장면 도림리 등에 있는데, 이들 역시 '바람재', '바람이재', '바람산' 등의 원이름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지명에서 '풍(風)'을 '바람'으로 푸는 것은 당연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많은 '풍' 지명의 고개나 산들이 과연 오로지 '바람'과 연관해서 붙여진 것일까? 의문이 가기에 '바람'의 본말(옛말)로 찾아들어가 이 지명들과 얽힌 관계를 풀어 보기로 했다.
지금은 우리가 '바람'이라고 하지만, 이의 옛말은 '브름'이다. '브름'은 '바람'으로 읽을 수 있으나, '보름' 또는 '부름'에 가까운 발음으로 읽을 수도 있다.
ㆍ블휘 기픈 남ᄀᆞᆫ ᄇᆞᄅᆞ매 아니 뮐쌔 <용비어천가> 2장
ㆍ매온 ᄇᆞᄅᆞ미 하도다 (多烈風) <두시언해> 18-12
제주도에선 '바람'을 '보름'이라고 한다
가을 보름이 건드렁하난
촐도 비엄직하구나
비소금 가탄 내 호미들아
몰착몰착 비어 나간다
보름아 보름아 불 테면
하늬보름으로 불어 오라.
- 제주도 북동부 산간지역 민요 '촐 비는 소리'
‘홍애기 소리’라고도 하는 이 민요에서 '촐'은 '꼴'을 말하고, '하늬보름'은 '하늬바람'을 말한다.
우리의 옛말이 많이 살아 있는 제주도에선 이처럼 '바람'을 '보름'이라고 한다. 이는 호남 방언에서 주로 나타난다, 아주 옛날엔 제주도나 호남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서도 '바람'을 '보름'이라고 많이 했으며, 특히 ‘아’ 모음이 ‘오’ 모음으로 많이 가 있는 호남지방에서 더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파리’가 ‘포리’, ‘팥죽’을 ‘퐅죽’, ‘팔’을 ‘포리’라고 하는 식이다.
바람은 부는 방향이나 그 세기에 따라서도 이름이 달리 붙는다. 샛바람, 하늬바람, 마파람, 높새바람, 눈꽃바람 등…… 바람과 관련된 이름은 정말 많다.
| 바람의 이름 | 바람의 방향 |
바 람 의
방 향 에
따 라 서 | 새파람(샛바람). 앞바람 | 동풍이다. 새가 동쪽을 가리키므로. |
샛바름(새파름) | 샛바름(새파름) 농가에서는 동부새. |
하늬바람. 갈바람 | 서풍. |
늦바람 | 서풍. 전라도나 충청도. |
북새 | 서풍. 강원도, 경북, 함경도. |
가수알바람 | 서풍. 주로 뱃사람들이 부름. |
윗바람(연날리기에서 사용) | 서풍. 연을 위쪽으로 떠올리게 한다 해서. |
마파람. 앞바람 | 남풍. ‘마’가 남쪽을 가리킴. |
새마바람. 된마바람 | 동남풍. 새=동. 마=남. |
갈마바람 | 서남풍. 갈=서. 마=남. |
된바람. 뒷바람 | 북풍. 된=북. 뒤=북. |
높새바람. 된새바람 | 동북풍, 높=북. 새=동. |
높하늬바람 | 서북풍. 높=북. 힝;=서. |
북새바람 | 북한. 북한에서 사용. |
세바람 | 서남풍. 북한에서 사용. |
※ 바람의 이름은 지방에 따라 그 부르는 이름이 조금 다를 수 있음. |
| 바람의 이름 | 바람의 세기 |
바 람 의
세 기 에
따 라 서 | 가는바람, 솔바람 | 약하게 솔솔 부는 바람. |
실바람 | 아주 약하게 부는 바람. |
날파람 |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는 바람. |
눈꽃바람 | 눈꽃을 날리며 잔잔히 부는 바람. |
명지바람 | 보드랍고 화창한 바람. |
강쇠바람 | 첫가을에 동쪽에서 불어오는 센 바람. |
매운바람 | 살을 엘 듯한 겨울의 센 바람. |
모진바람 | 방향이 일정하지 않으면서 거세고 세찬 바람. |
큰바람 |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걷기 힘들 정도의 바람. |
큰센바람 | 굵은 나뭇가지도 부러지고 건물에 피해 주는 바람. |
왕바람 | 건물에 큰 피해를 주는 바람. |
노대바람 | 간간이 나무뿌리가 송두리째 뽑히는 정도의 바람. |
고추바람 | 맵고 독하게 부는 바람. |
싹쓸바람 | 육지의 모든 것을 싹 쓸 정도의 바람. |
채찍바람 | 채찍질을 하듯 간간이 세차게 후려치며 부는 바람. |
황소바람 | 좁은 틈으로 세게 불어오는 바람. |
※ 바람의 이름은 지방에 따라 그 부르는 이름이 조금 다를 수 있음. |
'바람'이란 말은 우리말의 '불다'라는 말과 관계가 있다. '울다'에서 '울음'이란 말이, '웃다'에서 '웃음'이란 말이 나온 것처럼 '불다(吹)'에서는 '불음'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이 '불음(부름)'이 변한 말이 '볼음(보름)'인데, 서울이나 경기도 일대에선 이 말이 그 특유의 말 습관에 따라 '바람'으로 자리잡게 됐고 표준말이 되었다.
그런데, 이 '바람(보름)'이 다른 음절이 앞에 오면 '파람(포름)'이 되기도 한다. '남풍(南風)이 '마파람(마포름)', '동풍(東風)'이 '새파람(새포름)' 식으로. '휘파람'의 '파람'도 '바람'이다.
‘추(秋)’는 ‘가을’의 옛말 ‘가슬’로 보고 이의 뿌리말 ’갓‘을 붙이면 ’추풍‘은 ’갓파름‘이 된다. 결국 '가을바람'을 뜻하는 '추풍(秋風)'은 '갓파람'이다. '가파름'은 '가파르다(비탈이 급하다)'의 명사형이므로 '가파름재'는 한자로 '추풍현(秋風峴)' 또는 '추풍령(秋風嶺)'으로 옮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갓('가을'의 본뿌리말)=추(秋) ※ 가슬(가ᇫ을)=가을
파름(파람.바람)=풍(風)
재(고개)=현(峴), 령(嶺)
갓(秋)+파름(風)+재(嶺)=가파름재(추풍령.秋風嶺)
바람이 차게 부는 고개, 찬바람재
바람과 관련된 이름 중에는 ‘바람골’이라는 땅이름도 전국에 많다. 대개가 센 바람이 분다고 해서 붙은 이름들이다.
같은 바람이라도 평지에서 부는 바람과 산지에서 부는 바람은 그 느낌이 다를 것이다. 특히 겨울바람이라면 산지 바람이 무척 차가울 것이고 그렇게 부는 바람의 고개라면 바람이 찬 고개라고 말할 것이다.
바람과 관련해서 이름 붙은 곳이 한둘이 아니다. 모두가 바람이 많이 부는 곳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들인데 바람골, 바람고개, 바람재 등이 그것이다.
서울 용산구에는 ‘찬바람재’라는 고개가 있다.
옛 지도에 보면 남도로 가는 길 어름에 작은 고개가 하나 보이는데, 바로 ‘찬바람재’이다. 이 고개는 지금의 녹사평 근처의 고개로, 남산과 그 남쪽 둔지산과 이어지는 지맥의 안부(鞍部)이다.
이 찬바람재는 한자로는 한풍현(寒風峴)이라고 하는데, 바람이 차게 부는 고개라 해서 붙은 땅이름이다. 지금의 구용산(원효로 일대)에서 한강 남동쪽으로 가려면 꼭 넘어야 하는 고개이다. 통행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근처 둔지산 아래 둔지미 마을이나 한강로쪽의 새풀이(새푸리) 마을 등 용산 사람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었던 고개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 이 근처가 군사 기지가 되고 일반인들의 통행이 많지 않게 되자, 우리 기억에서 멀어져 갔다.
이 고개 근처에 생긴 ‘녹사평역’을 ‘찬바람재역’으로 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옛 땅이름이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기 해서는 새로 들어서는 시설물 이름에도 옛 이름을 살려 붙이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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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말>
휘파람, 날파람, 새파람(동충), 마파람(남풍), 불음(ᄇᆞᄅᆞᆷ, 제주 방언), 불다-불으다(부르다), 직통바람(북한 용어), 열바람(북한 용어)
<친척 땅이름>
마파지. 제주시 애월읍 어도리 (마파람골)
보름골. 경기 가평군 하면마일리 (바람골)
보름내.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바람내)
부름들[불암평]. 경남 고성군고성읍 서외리 (바람들)
바람골(풍곡). 경북 고령군 우곡면 월오동
바람실(풍곡, 풍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바람말. 강원 영월군 영월읍 연하리
바람고개(풍령). 경기 화성시 반월동
바람재(풍치). 전남 강진군 군동면 장산리
바람부리(풍취동). 강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