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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7장 9-26절.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다. 요약 설교
9절. 여러 날이 걸려 금식하는 절기가 이미 지났으므로 항해하기가 위태한지라. 바울이 그들을 권하여
1. 금식하는 절기란 유대인의 달력으로 7월 10일(대속죄일, 현재의 9월 25일경)에 지키는 금식 절기를 가리킵니다(레 16:29).
이때는 우리나라 추분에 해당하는데, 이때부터 춘분(3월 중순)까지는 북서풍이 불어서 지중해에 진공 현상으로 인한 ‘푄현상’(높새바람)이 생겨서 지중해의 물이 공중으로 뛰어오르기 때문에 항해하기가 위태롭습니다.
지금이야 기관선이기 때문에 상관이 없지만, 당시에는 바람에 돛을 맞추어 가는 범선이었므로 항해하기가 대단히 어려웠습니다.
10절.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항해가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타격과 많은 손해를 끼치리라 하되
1. 바울은 그레데 섬의 미항에서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와 모든 여행객들에게 말하기를 <이번 항해가 매우 위험해서 하물을 잃게 되고, 배도 파선하고, 여행객들의 생명에도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이때 바울은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I perceive).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5절에서 말한 대로 이미 세 번의 파선 경험이 있는 경험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늘 기도하는 사람이라서 영적인 직감과 신앙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이처럼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은 인간의 경험도 중요하지만, 성령님께서 가르쳐주신 계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11절. 백부장이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더라.
1. 선장은 선원들의 지휘자였고, 선주는 배의 소유주였고, 백부장은 군사력을 가지고 선장과 선주와 모든 항해자들을 지휘하는 항해의 결정권자였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바울이 이번 항해가 위태하다고 권면했으나, 바울의 말 다는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이처럼 경험이 많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 보다 더 믿는 백부장의 태도는 영적인 세계를 모르는 백부장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때 선장은 항해 경험에 의지해서, 선주는 이해 타산에 의해서, 바울은 신앙에 입각해서 각각 의견을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지식과 재물이 중시되고, 신앙이 무시되면 큰 역경을 당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인생 항로에서 지식과 재물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앞서 있지는 않는가 반성해보아야 하겠습니다.
12절.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1. 그 항구가 겨울을 지내기에 불편하므로 거기서 떠나 아무쪼록 뵈닉스에 가서 겨울을 지내자 하는 자가 더 많으니
미항은 자연적으로는 아름다운 항구였지만, 작은 항구였고, 숙박시설이 빈약했습니다.
반면에 그레데 섬 서쪽 끝에 있는 뵈닉스(불사조의 뜻) 항구는 더 큰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호가 정박하기가 좋았고, 또 숙박시설이 많아서 겨울을 지내기가 좋았습니다.
특히 선장이나 선주나 많은 여행자들은 불신자들이었기 때문에, 유흥업소가 없는 미항보다는 유흥업소가 많은 뵈닉스에서 겨울을 나자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2. 뵈닉스는 그레데 항구라. 한쪽은 서남을, 한쪽은 서북을 향하였더라
뵈닉스는 한쪽은 서남을 향해 있어서 북서풍을 막아주고, 한쪽은 서북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배를 안전하게 정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외적인 조건만 생각하고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인생 항로에서 지식이나 재산이나 다수의 의견보다도 영적인 권위자의 말을 따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잠1:7, 9:10, 시 111:10).
13절. 남풍이 순하게 불매 그들이 뜻을 이룬 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끼고 항해하더니
1.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는 바울의 경고를 무시하고, 미항에서 뵈닉스 항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미항을 출발하자마자 지금까지 불던 북서풍이 그치고 남풍이 순하게 불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은 미항을 출발하기를 잘했다고 기뻐하고, 경험이 없는 바울의 말을 무시한 것이 잘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대비하여 배를 고정시킬 수 있는 닻을 아예 필요 없다고 감아 올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런 남풍은 태풍 전야의 일시적인 고요함이었습니다.
14절. 얼마 안 되어 섬 가운데로부터 유라굴로라는 광풍이 크게 일어나니
1. 그레데 섬에는 해발 2,100미터의 이다(Ida) 산이 있어서 남풍이 갑자기 급한 북풍으로 바뀌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Ramsay).
이처럼 이다 산에서 대해(지중해)로 내리치는 광풍이 알렉산드리아 배를 지중해로 몰아붙여서, 아프리카 방면의 암초(스르디스)에 부딪히게 하여 파선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때 불어 닥친 광풍은 ‘유라굴로’라는 유명한 광풍이었습니다.
요즘에도 가끔 무서운 태풍이 불면 그 태풍의 이름이 거론되곤 하는데, 그레데 섬에서 불어닥친 이 유라굴로 광풍도 유명한 광풍이었습니다.
이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배는 거의 대부분 파선하고 모든 항해자가 죽었습니다.
단지 이 유라굴로 광풍에서 알렉산드리아 배와 항해자들이 살아남은 것은 바울 덕분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와 함께 인생 항로를 항해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15절. 배가 밀려 바람을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 대로 두고 쫓겨가다가
1. 당시 최대의 배 알렉산드리아 호는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의 기술로써도 자기들의 뜻대로 운행할 수 없어서 유라굴로 광풍에 밀려가는 대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와같이 우리들의 인생 항로에서도 질병이나 경제적 타격이나 가정 파괴나 직장 실업이나 국가적인 전쟁 등의 광풍을 만나면, 백부장 같은 권력가의 명령도 소용없고, 선장과 같은 전문가의 기술도 소용없고, 선주와 같은 재력가의 재물도 소용없이 그저 하나님의 섭리에 운명을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인생은 이런 역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 71절에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고 했습니다.
16절. 가우다라는 작은 섬 아래로 지나 간신히 거루를 잡아
1. 가우다 섬은 그레데 서쪽 35킬로에 있는 작은 섬입니다.
그런데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불행 중 다행으로 가우다 섬 아래서 잠시 광풍을 피해서 거루를 잡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이 ‘거루’란 본선이 파선될 경우를 대비해서 작은 배로 목숨을 건지려고 본선 곁에 달고 다니는 작은 구명선(lifeboat)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푹풍이 심하므로 이 거루가 본선과 부딪혀서 본선이 파괴될 수 있기 때문에, 거루를 본선으로 잡아 올렸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거루를 본선에 잡아 올리는 것은 간신히 이루어졌습니다.
17절. 끌어 올리고 줄을 가지고 선체를 둘러 감고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하여 연장을 내리고 그냥 쫓겨가더니
1. 폭풍 속에서도 거루를 끌어올리고 선체를 줄로 감는 것은 역경 속에서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스르디스>란 모래로 이루어진 암초(sandbars)를 가리키는데, 지중해에는 두 개의 스르디스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스르디스’는 아프리카 북쪽 지중해에 있는 ‘큰 스르디스’를 가리킵니다.
이 스르디스에 걸리면, 요즘 같은 통신시설이나 기계가 발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배가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모든 사람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선원들은 배가 스르디스에 걸릴까 두려워서 스스로 배의 연장들을 바다에 버리고,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이처럼 연장을 버렸다는 것은 기술자들의 인간적인 <기술>을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18절.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 버리고
1. 우리가 풍랑으로 심히 애썼다는 것은 바울 일행도 풍랑을 극복해보려고 힘을 다해서 수고했음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튿날 사공들이 짐을 바다에 풀어버렸다는 것은 이 배가 곡물 수송선이기 때문에, 곡물을 모두 바다에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목숨을 위해서 <재물>을 다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부자 청년에게 천국에 들어가려면 낙타가 짐을 다 버리고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19:27).
19절. 사흘째 되는 날에 배의 기구를 그들의 손으로 내버리니라.
1.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기구조차 다 내버렸습니다.
17절에서 말하는 연장은 기계를 고치는 철연장을 버렸는데, 20절에서 기구란 가정으로 말하자면 식사 도구나 청소 도구나 책상 같은 가구들까지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오직 목숨만을 건지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살기 위해서는 직장도 버리고, 명예도 버리고, 돈도 버리고, 집도 버리고, 오직 목숨을 건지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 26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고 하셨습니다.
20절.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
1. 3일 동안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연장도 버리고, 곡식도 버리고, 가재도구도 버리고, 다 버렸는데, 그 후로도 여러 날 동안 해도 달도 보이지 않고 큰 풍랑만 있어서,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구원의 희망이 다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항해에 있어서 해와 별은 방향을 알고 항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표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해와 별이 보이지 않으니 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도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서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삶의 지침을 포기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닥에 처했을 때가 오히려 하나님의 지침을 자유롭게 따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애통한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마 5: 3-4).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습니다( 벧전 5:5, 약 4:6, 잠 3:34).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고 아버지께로 돌아올 때 큰아들보다 더 사랑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오셨고,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신다고 했습니다( 마 9:12-13).
21절.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1.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였으매
여러 날 먹지 못했다는 말은 처음 3일 동안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배를 가볍게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일주일간은 아무것도 못 먹고 해와 별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그냥 풍랑에 쫓겨 다녔습니다.
그리고 27절 말씀처럼 열나흘째 되는 날 밤에 바울이 육지가 가까와 온다고 하면서 음식을 먹으라고 해서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 절에서 여러 날이란 일주일간 여러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물론 바울도 이때 금식하면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구원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2. 바울이 가운데 서서 말하되 여러분이여 내 말을 듣고 그레데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이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라면 좋을 뻔하였느니라
바울은 선장과 선주와 백부장에 대해서 자기 말을 불신하여 이런 풍랑을 만났고 큰 손실을 만났다고 부드럽게 책망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의 말이 인간의 경험에 의한 추측이 아니라, 하나님께 계시받아서 말한 예언이었음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24절에서 하나님의 사자가 간밤에 구원의 말씀을 주셨음을 다시 선포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은 인간의 경험과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권위적으로 전도하고 목회할 수 있습니다.
22절.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1.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권한다’(παραινῶ)는 단어나 ‘안심하라’(εὐθυμεῖν)는 단어는 의사가 환자를 위로하고 안심시키는 말로서 의학용어입니다.
이런 용어를 보아서 사도행전은 의사인 누가가 기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은 본 절의 말씀처럼 항상 위로와 소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위협하고 자기 말을 따르지 않으면 저주받는다는 비목회적 언사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세는 목회자의 기본 소양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잘못된 태도입니다.
2. 너희 중 아무도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바울의 두 번째 예언입니다.
첫 번째는 미항에서 겨울을 지내라는 권면이었고, 두 번째는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도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만 손상을 입는다는 예언의 말씀이었습니다.
첫 번째 예언은 백부장과 선장과 선주가 듣지 않았지만, 두 번째 예언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부장 등은 바울의 첫 번째 예언을 불순종함으로써 죽을 위험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배보다 배에 탄 사람들이 소중하듯이, 집보다 가족이 소중하고, 예배당보다 교인들이 더 소중합니다.
23절.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1.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께 속해 있었고,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요, 하나님의 보호와 돌보심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통치자는 참된 보호자가 되지 못하고, 부모조차도 능력이 부족하여 참된 보호자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누구에겐가 혹은 무엇인가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그 의지의 대상이 친구도 될 수 있고, 권력자가 될 수도 있고, 돈이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체력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하면 돈의 노예가 되는 수전노가 될 수 있고, 권력자의 노예가 될 수 있고, 마약과 노름과 술과 향락의 노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혈육으로 권력을 삼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17:5)
그런데 바울은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극단적인 위험 속에서도 보호해주시고, 예언의 말씀으로 위로와 소망을 주셨습니다.
2.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극단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환상을 보여주셔서 위로와 희망을 주셨습니다.
본 절의 환상은 바울이 극단적인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본 네 번째 환상입니다.
첫 번째 환상은 사도행전 16장에서 어디로 가서 전도해야 할지 막연하고 길이 막혔을 때, 마게도냐 사람이 부르는 환상을 보여주셔서 전도의 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두 번째 환상은 사도행전 18장에 고린도에서 전도하는데,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위협했을 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말고 전도하면 바울을 해칠 사람이 없다고 위로와 소망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세 번째 환상은 사도행전 23장에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니까 바울이 두려워서 ‘나는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그 밤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바울이 로마에까지 가서 전도해야 한다고 위로와 소망을 주신 것이었습니다.
네 번째 환상은 본 절에서 바울이 유라굴로 광풍 속에서 10여 일간 살 소망을 잃고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환상 중에 나타나서 죽지 않고, 배만 손상을 입을 것이라고 위로와 소망을 주신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신비주의자가 늘 환상을 보았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삶을 지배하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이 주신 환상은 늘 격려와 위로와 소망을 주시는 것인데, 신비주의자들은 환상으로 위협하고 돈을 내라고 하고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24절.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1.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크시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시지만, 당신의 자녀에게는 위로와 소망과 용기를 주시는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도들을 두렵게 하거나 협박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성도들에게 늘 위로와 소망과 용서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주님은 바울에게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이미 약속하신 내용을 다시 확인시켜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으시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지금까지 배의 지휘권은 백부장이 가지고 있었고, 선장과 선주가 상당한 지도력을 행사해왔기 때문에, 바울이 아무리 말을 해도 바울의 말을 무시했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 광풍을 통해서 배의 주도권이 바울에게로 넘어왔습니다.
이제 알렉산드리아 배의 주인은 선장도 선주도 아니고 백부장도 아니고, 하나님의 종 바울이 주인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 바울은 배에 함께 탄 276명의 생명을 맡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276명이면 우리나라에서 중형급 교회에 해당합니다.
이처럼 바울 한 사람 덕분에 276명이 생명의 보호를 받게 되었습니다.
25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1. 바울은 풍랑으로 인해서 초죽음이 되어 있는 사람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사람들을 안심시키는 근거는 환경이나 기술이나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데 있고, 사람을 믿거나 지식이나 경험이나 환경이나 돈이나 의학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서 온다고 했습니다(롬 10:17).
26절. 그런즉 우리가 반드시 한 섬에 걸리리라 하더라.
1. 바울의 예언이 하나님의 확실한 말씀임을 증거 하는 증표로 배가 한 섬에 걸릴 것이란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표증이 그대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의 경우에 이튿날 바울의 예언대로 섬에 도착하게 되니까, 배에 탄 사람들이 바울의 말대로 바울의 축복 기도 후에 떡을 바울에게서 받아먹었습니다(35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권력과 지식과 돈과 주먹보다 하나님을 믿고, 성령님의 감동과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주변의 가족과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 날마다 성령님의 인도와 축복을 받으시는 가정과 자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