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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들려주는 결혼 이야기
마가복음 10:1~12
1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유대 지경과 요단 강 건너편으로 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다시 전례대로 가르치시더니
2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4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5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6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7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8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9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10 집에서 제자들이 다시 이 일을 물으니
11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12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저는 1986년도에 경기도 광주의 농촌 마을에 소재하고 있는 교회에 부임하였습니다. 그 당시 중부고속도로를 건설 중이었고, 광주와 곤지암을 연결하는 구간을 맡은 건설사 현장이 교회 주변에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에 근무 중이었던 현장 소장과 반장이 교회에 주일마다 참석하였습니다.
그중에 김 반장이란 분이 계셨는데 그분의 아내는 아담한 키에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녔지만, 무척 귀엽고 예쁘게 생긴 분이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김 반장은 키가 크고 큰 덩치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마치 코끼리를 보는 듯한 외모를 지녔었지요.
어느 날 그 가정을 심방할 일이 생겨 방문하였더니 툇마루에 앉아 있는 김 반장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어쩔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유인즉 그날은 휴무일이라 이발하러 읍내로 간다고 하여서 아내가 돈을 주었더니 거스름돈을 가져오지 않고 술집에 들러 막걸리를 마시고 온 것입니다. 이에 아내가 닦달하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조그마한 체구의 여자가 태산처럼 거대한 덩치의 사내를 닦아세우니 김 반장은 뭐라 대꾸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희극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우스웠습니다. 마치 조그만 조련사의 채찍에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하는 코끼리를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커다란 덩치로 소리를 지르기라도 하면 아내의 잔소리를 잠재울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하고 두 손을 모으며 연신 잘못했다고 비는 김 반장이 애처롭기만 했습니다.
오래전 기억입니다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서 사랑을 배웠습니다. 사랑하는 대상 앞에서 자기의 힘을 쓰지 않고 낮은 자리에 기꺼이 내려앉을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결혼과 이혼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젊은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짝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이혼을 하는 증가율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게 됩니다. 생활환경은 무척 편리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점차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어떻게 사랑하는지조차 모르기에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는 경우가 있음을 종종 보았습니다.
결혼은 사랑을 바탕으로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배려해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의미를 살펴보고 이혼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행복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이 세우신 결혼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영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늘과 땅의 모든 피조물을 지으시고 창조의 완성과 더불어 안식일에 사람을 초청하셨습니다.
사람을 창조할 때 남자를 먼저 지으셨습니다. 그런 후에 창 2: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제르 케네그도’인데, ‘도움’이라는 뜻의 ‘에제르’와 ‘그와 마주 보고 서 있는 것 같다’는 뜻의 ‘케네그도’가 합친 합성어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전자는 ‘돕는’으로, 후자는 ‘배필’로 번역하였습니다.
부부는 인격적으로 동등한 위치에 서 있는 관계입니다.
‘케네그도’가 그런 점을 잘 드러내 주고 있습니다.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피조물이란 뜻입니다. ‘도움’을 의미하는 ‘에제르’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하면서 상대방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기능적 분담 관계에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남자와 여자가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므로 열매를 맺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였습니다. 먼저는 남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이를 아내에게 흐르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엡 5: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하였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은 그스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긴밀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엡 5:31,32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결혼이란 단순히 좋아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더 높은 뜻과 거룩한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말 2:15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고 하였습니다. ‘영이 충만하였으나’는 문자적으로 ‘영이 남을지라도’란 뜻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무한한 창조적 능력을 암시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남자인 아담의 짝으로 많은 여자를 지으실 수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고 오직 한 여자인 하와만을 지으신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하여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경건한 자손이란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믿음의 자손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결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흐르게 하므로 하나님을 알고 믿음을 갖도록 하는 것이 결혼제도의 목적임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혼에 대하여 어떤 시각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이혼이 급증하면서 가족제도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2022년 이혼 건수는 9만 3,000건으로 이는 1000명당 57건쯤 되는 것으로 전인구의 6% 정도가 이혼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로마를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욱 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별다르지 않고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혼을 허락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신 24:1절에서 모세가 다음과 같은 율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여기서 보듯, 율법은 이혼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혼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남편에게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성에게는 매우 부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라고 했는데, 이혼의 사유가 될만한 '수치스러운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석이 율법 학자들의 끊임없는 논쟁거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 학자들은 크게 두 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샴마이(Shammai)라는 율법학자가 이끄는 보수파(conservatives)는 ‘수치스러운 일’을 오직 간음으로만 해석했습니다. 반면, 힐렐(Hillel)이라는 자유파(liberals)는 남편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를 두고 남편들은 자기가 편리한 대로 이유를 대며 아내를 버리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2절에 ‘시험하여’ 물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에서는 ‘페이라존테스 πειράζοντες’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3절)고 질문하십니다. 이에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명기 24장 1절의 말씀을 근거로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이혼을 허락한 배경에 대하여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라고 하시면서 막 10:7-9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혼이 다반사가 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아주 불편하기 그지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기독교는 이 말씀을 그 어떤 경우에도 이혼은 불가하다고 판단하고, 이혼한 사람들을 정죄해 왔습니다.
사람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이후 판단하는 습성이 생겼습니다. 율법이란 잣대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떤 면에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이혼을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면 해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만약에 아무리 어렵고 힘든 상대라 하더라도 참고 견디면 이혼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옳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그르다고 한다면 이것은 사탄의 올무에 걸릴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켰으니 의롭다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파탄 내어 이혼하였다고 죄책감에 빠지는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용서하신 예수님을 내 삶에 모셔 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하심을 내 삶에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마라의 쓴 물에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나뭇가지를 꺾어 던졌더니 단물이 된 것처럼 이혼한 가정이나 그렇지 않은 가정에도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는 행복하고 복된 가정을 이루는 원리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자들이 이혼에 대하여 다시 물었을 때 예수님은 막 10:11,12에서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어 행복을 찾아 다른 여자를 취하여 결혼을 한다고 하더라도 간음이라는 죄 아래에 갇히게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와 총각들은 자기의 짝을 구함에 철저하게 하나님의 뜻을 살펴서 나의 체질과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걸맞은 배우자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한 사람은 최상의 배우자를 주셨음에 감사하고 만족하며 살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 5:18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샘이란 아내를 비유하여 표현하였습니다. 남편에게 아내는 샘과 같이 목마름을 채워 줄 수 있는 기쁨의 근원이 될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거슬리는 말과 행동은 삼가야 할 것입니다.
엡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도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었습니다. 그처럼 남편들은 아내에게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김 반장과 같이 비록 아내 보다 자기가 힘이 더 많이 가졌지만, 아내의 마음을 상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을 버리고 아내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처럼 우월한 힘을 사랑하는 데 써야 한다는 말입니다. 남편의 이런 모습으로 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은 존경하는 아내를 통하여 남편은 더욱 아내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벧전 4: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였다면 상대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내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더라도 절대로 말을 하지 않고 좋은 점 만을 말하고 격려하는 것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이루는 비결입니다.
제가 알고 지낸 박 집사님은 그리 고운 얼굴을 지닌 분이 아닙니다. 얼굴에 천연두 자국도 있어 이를 가리기 위하여 진한 화장을 하였지만 영 어설퍼 보였습니다. 그분의 입술은 두툼하였고 그 위에 빨간 립스틱을 진하게 칠한 모습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비쳤습니다. 그런데도 박 집사님의 남편은 자기 아내의 외모에 대하여 놀리지 않았습니다.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라고 칭찬을 하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렇게 사랑을 받은 박 집사는 남편이 위암으로 수술하였을 때 아내는 온 정성을 다하여 뒷바라지하였고, 후에는 위장에 좋다는 여러 음식을 만들어 남편을 섬겼습니다. 행복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린 후에 거두는 것입니다. 그 씨가 사랑입니다. 사랑의 씨를 뿌리고 경건한 자손을 얻고 가정에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 교회요, 하나님 나라요,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히 사랑하는 데 마음을 쏟고 믿음에 굳건히 세워 성경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결혼이야기를 이루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