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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압력 : 진지전의 전개
제 1 절 개 요
1. 전선상황 요약
유엔군의 하계공세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공산군의 5월공세를 격파하고 캔사스선-와이오임선으로 진격한후 휴전회담의 거론으로 인해 전선이 교착된 가운데 고지쟁탈전으로 이행되는 1951년 8월 말까지의 기간 동안에 실시된 공세작전이다.
'51.6월초, 동부전선의 제1군단은 선봉인 수도사단 기갑연대가 간성을 탈환한 후 이어 서쪽으로 진격하여 새로운 캔사스선을확보하였다. 또한 원통 선에서 공격을 재개한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6월 중순 제1군단과 연게하여 새로운 캔사스선을 확보한다음 해안분지(펀치볼)을 중심으로 방어거점을 형성한 적과 대치한 채 위력수색을 계속하였다.
한편 5월 말에 캔사스선을 점령한 중서부의 미 제9군단은 전진진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와이오밍선을 거쳐 어민선으로 진격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부의 미 제1군단 도한 5월 말에 캔사스선을 점령하고 6월 중순에 철의 삼각지 저변에 이르러 수색전을 실시하고 있었다.
이 무렵 미국의 불확전주의에 입각한 정전양략상의 제한으로 인해 전선이 캔사스선-와이오밍선애서 교착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쌍방은 거점공사등 진지 강화를 위한 축성공상에 중점을 두었다.
전선이 교착된 장기간에 별다른 격전 없이 진지공사가 일단락된 '51.7월 중순경 유엔군사령부는 전황의 장기간 침체로 인한 장병 사기를 진작시킴과 동시에 공산군의 방어능력을 시험하여 계속적인 충격으로 그들의 공세기도를 분쇄한다는 전략적인 목적 아래 주저항선 전방의 감제점을 탈취하기 위한 제한공격을 실시하도록 미 제8군에 지시하였다. 이은 군사적인 압력을 가함으로써 공산군측에 휴전회담의 조기타결을 강요한다는 정력적인 의도가 내포된 결정이었다.
그러나 이후 공산군측의 작위적인 불성실로 인해 휴전회담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전황도 답보상태가 거듭되었고, 서부전선이 임진강 남안에서 교착된 채 중동부 산악지대의 금성 일대에서는 유혈로 점철되는 고지쟁탈전이 본격화 되었다.
제 2 절 휴전협상 초기 쌍방의 군사전략
1. 공산군측의 공세역량 만회전략
개성 휴전회담은 '51. 7. 10일에 시작하였으나 공산군측의 지연전으로 7월 26일에야 의제의 합의를 보았고, 그후 속개된 군사분게선 협상에서도 38도선의 주장과 유엔군측의 접촉선 주장이 맞서다 8월 23일 공산군측의 일방적 불참으로 회의 전망은 불투명하였다.
이것은 처음부터 공산군측의 협상 목적이 조기 타결에 있던 것이 아니고 회담을 지연시켜 지난 춘계공세에서 입은 손실을 보충하고 공세역량을 축적하여 군사적 우위를 확보하는데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중공의 항미원조사에 명백하고 입증하고 있다.
"아군이 병력은 우세하나 화력이 열세하고 항공지원이 뒤따르지 못해 대규모 공세작전을 펼 수 없으므로 적극적인 방어전략으로 유리한 지형에서 지구전을 펴면서 적군의 전력과 아군의 전력비를 바꾸어 최종적으로 승리하거니 적군으로 하여금 어려움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한다"는 작전지도 전략을 채택하였다.
이러한 전략으로 그들은 소강기를 이용하여 방어선을 3중으로 편성하고 유엔군의 항공이나 포격에도 지탱할 수 있도록 유개화 및 엄체화 했다. 또한 야포, 고사포 등 장비와 화기를 전방에 추진하고 항공기가 2개월 후인 9월에 지원될 것을 고려 9월 공세를 목표로 준비를 강화하였다.
휴전협상은 그들에게는 전력복구와 지구전에 의한 승리획득의 한 방편일 뿐이었다.
2. 유엔군의 제한목표공격전략
가. 하계공세작전계획
(1) 대공세작전계획의 유보
휴전회담이 시작될 무렵 군사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캔사스-와이오밍선의 방어력을 강화하고 이곳에서 적의 공격에 대응할 준비를 갖추면서 휴전협상의 타결을 지원하고 아군의 방어선을 개선함은 물론 적의 공세 역량축적을 거부하기 위한 균형파괴에 중점을 두고 제한목표공격작전에 국한되었다.
유엔군은 7월 초에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9월 1일에 실시할 예정으로, 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을 섬멸하고 평양-원산 선까지 점령할 대공격작전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이를 "제압작전계획"이라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휴전회담의 기대치에 대한 희망으로 행동으로 옮기기 못했다.
(2) 제한목표공격전략의 기본개념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평양-원산으로 전면공격 작전계획의 승인을 받지 못함에 따라 자신에게 부여된 범위내애서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할 수 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적은 소강기를 이용하여 전력을 증강하여 수세에서 공세로의 징후가 보이는 반면 아군은 휴전협상이 성공하리라는 막연한 기대 속에 빠져들어 작전활동을 소극적으로 전개하고 적이 공격시 곧 패배로 이어질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따라 제8군사령관은 적에게는 혼란을 주는 반면 아군의 전선 첨단을 날카롭게 다지며 방어선의 취약부분을 개선하는데 목적을 두고 제한목표공격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개념하에 미 제1군단은 기전리부근 고지군에 대한 종심깊은 정찰과 철의 삼각지에 대한 종심깊은 전투정찰을 실시하도록 하고 제9군단은 현행작전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한편 미 제10군단은 대우산 공격을 계속할 것과 우인접 국군 제1군단과 협조하여 1031고지에서 뻗어내린 고지군을 확보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작전은 2일 뒤인 7월 31일에 취소되었다. 그 이유는 이때 시작된 장마가 30년 이래 가장 심한 폭우를 동반하고 기상이 불량하여 시계가 제한되고 통신이 곤란하였으며 이로인해 도로망이 침수되어 부대기동이 어렵게 되었다. 유엔군의 최대무기인 포병과 항공기의 전폭적인 지원이 불가하였다.
따라서 이 작전은 미 제2사단 제38연대가 대우산을 점령한 상황에서 중단되었으며 장마가 개인 8월 중순에 가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전명령으로 각 군단, 특히 미 제10군단은 방어선을 개선하기 위하여 아군 병참선과 신캔사스선 방어에 위협을 주는 지형지물을 탈취하는데 목적을 두고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추진하기로 한다
우선 군의 가장 취약한 방어선 중에서 미 제10군단 전선의 중앙,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을 점령하여 만곡부를 제거함과 동시에 우측의 국군 제1군단의 방어선을 남강까지 추진한다. 다음으로 미 제9군단 정면의 금성분지를 점령하여 철의 삼각지를 확고하게 통제할 수 있는 발판을 구축함은 물론 철원-김화간의 철로를 확보한다. 끝으로 미 제1군단의 방어선을 10km 정도 추진하여 연천-철원 철로를 확보하여 이를 철원-김화철로와 연결시켜 서울-김화 도로는 물론 이 철로를 군병참선으로 이용한다.
다시말해 벤플리트 사령관의 새 방침은, 첫째 적의 제한목표 공격은 와이오밍선에서 저지하고 둘째 전면공격은 와이오밍선에서 혹독한 응징을가한 후 캔사스선에서 방어하라는 것이었다. 또한 벤플리트 장군은 38도선이 남북간의 군사분계선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를 아래와 같은 이유로 설명을 하고, 와이오밍선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였다.
1) 적이 화천지역의 도로망에 접근하게 되면 아군진지의 측방포위를 허용하게 된다
2)전력의 근원이며 서울 시민의 식수원인 화천저수지의 통제권을 적에게 양도하게 된다
3)적이 서울에 너무 근접하여 수도에 대한 기습공격을 허용하게된다.
이밖에도 장군은 국군의 교육훈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여러 조치를 취하게 된다. 우선 총참모장 이종찬 소장과 250명의 초급장교를 미국 보병학교와 포병학교에 보내서 교육받도록 하고 제주도 훈련소를 방문하여 교육훈련 기간에 1주간의 야영훈련을 강조하였고, 7월 하순 제9군단에 야전훈련소를 설치한데 이어 각 군단에 1개소씩 4개의 야전훈련소를 설치하였다. 이 훈련소에는 전선의 국군 예비사단이 입소하여 9주 동안 개인훈련부터 대대훈련과정까지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받도록 하여 국군의 전력화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3) 포복작전
8월 중순에 접어들어 장마가 그치고 날씨가 개이자 제8군사령관은 7월 말에 중단한 제한공격작전을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8월 14일에 미 제10군단의 방어선 개선을 목적으로 포복작전을 실시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작전은 해안분지를 공격하기 위한 전단계로 해안분지 동측인 동시에 서화계곡 동측의 884-924-1031고지로 이어지는 "낚시바늘"형상의 종격실 능선을 탈취하여 서화계곡의 기동로를 확보하고 해안분지 동측 전선을 남강을 통제할 수 있는 지역까지 밀어올려 동측방에서 해안분지를 압박한다는 개념의 작전이었다. 이 작전은 미 제10군단과 우익 국군 제1군의 좌익 사단이 협조하여 8월 18일부터 개시되었다.
*1320 *591
소양강 *602 *884
*1358 *812 *854 *751
*924 국11-20연
수입천 *1290 *965
문둥리 *1031 국수도-26연
*851 *1056
가칠봉 *1026 국8-16연
사태리 1243 해안분지 국8-21연 J-능선
*931 단장의 능선
*백석산 *894 *752 *1059 *981 국8-10연 국수도1-3대대
1142
*1024 *1178 미2-38연
대우산
*940
*901 *983 *773
*883 국7-8연대 피의능선
*554
국7-3연대
국7-5연대 국5-36연
제8군사령관은 이 포복작전과 연계하여 해안분지 서측에서도 미 제2사단이 983고지(피의능선)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5-36연대가 983고지 전투에 투입되었다. 또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제10군단의 좌익인 국군 제7사단도 983고지 서측인 554-883고지 공격을 전개하게 되었다.
(4) 맹금발톱작전/아파치작전
군사령관은 8월 말 포복작전이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미 제10군단의 해안분지 서측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8월 27일 군전방사령부 작전회의에서 새로이 9월 5일 "맹금발톱작전"을 실시할 예정이라고 보고하였다. 이 작전의 주목적은 군의 동부전선을 최대 24km까지 밀어올려 만곡부를 제거함은 물론 이 지역에 투입된 적을 포위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1)상륙부대를 운용하여 원산 점령
2)기갑부대로 해안도로를 다라 원산 남쪽 적의 보급기지 공격
3)공세작전으로 제10군단 정면의 군방어선 만곡부 제거
이 개략 계획은 유엔군 사령관이 원산부근 상륙작전을 제외하고 승인함에 따라 지상작전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군사령관은 8월 29일에 "아파치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을 하달 하였다.
이 작전의 목표선은 철원 동측 4km 지점의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전투지경선으로부터, 동북쪽으로 금성북쪽 4km, 이포리 북쪽 2km 지점을 지나 동해안의 말무리로 연결되는 선이다.
미 제9군단, 제10군단, 국군 제1군단이 이 선으로 진격하되 동해안 국군 제3사단의 1개 연대전투단과 미 해병사단의 1개 연대를 주축으로 하는 특수임무부대가 동해안 도로를 신속히 기동하여 구봉리지역 목표를 점령하고 신속히 저지진지를 편성한다. 국군 수도사단은 특수임무부대를 후속하다 송현리에서 서진하여 동부 산악지대의 1092고지와 1098고지를 점령하여 적을 포위 섬멸한다.
국군 제11사단과 제3사단(-)은 남강 남쪽에서 견제공격을 한다. 미 제9군단은 D일에, 미 제10군단은D+2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목표선을 확보한다. 미 제1군단은 현 임무를 계속 수행한다.
이에 각 군단은 8월 29일부터 부대 배치 조정에 중점을 두고 작전하였다.
그런데 이 무렵 피의능선 전투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군사령관은 너무나 많은 희생이 예상되어 9월 5일 유엔군 사령부에 아파치작전을 취소한다고 통보하면서, 9월 중에도 어떤 목표선이 없이 계속 "밀어올리기 전술"로 동부전선을 정리하겠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건의하였다.
1)아파치 작전을 취소한다
2) 대신에 동부전선에서 제한목표공격을 실시할 수 있는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해 줄 것
3)이 작전은 동부전선에서 9월중 내내 실시한다
4)10월에는 개성-시변리 지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미 제1군단 지역에서 작전을 실시한다
5)11월에는 금화에서 고저로 연결하기 위하여 상륙작전을 포함한 작전을 확대한다
6)주일 2개 미군사단에서 각각 1개 연대전투단을 차출하여 30일 기간으로 한국전선에 훈련목적으로 투입하고 교대된 2개 연대는 그 동안 전선의 군단예비로 운용한다
제8군사령관은 9월 8일에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승인을 얻어 아파치작전의 취소와 동시에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최대손실을 강요하기 위한 제한목표공격과 위력수색, 현 전선에서 정찰활동을 강화하라는 명령을 하달 하였다.
(5) 소타격작전과 대타격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동부전선의 밀어 올리기작전을 9월 말까지 종결짓고 10월부터 서부 및 중부전선 부대로 제한공격작전을 펼쳐 연천-철원-김화 병참선을 확보할 목표로 해안분지, 단장의 능선에서 전투가 한참 진행중이던 9월 19일 2개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우선 적에게 노출이 되어 사용하지 못하는 철원-김화 철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제9군단을 주공으로 하는 와이오밍선보다 15km 추진함을 개념의 "소타격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다음은 이의 후속작전으로 중부전선의 병참선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하여 소타격작전으로 확보한 철로를 이용해 평강-금성-고저선을 확보한다는 "대타격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작전은 동해안 고저에 사단급 규모 이상의 상륙작전을 실시하고 이와 연계, 중부전선의 제9군단으로 동북방으로 진격하여 연결을 이루어 지대내의 적을 포위 . 섬멸한다는 복안으로 상륙부대는 국군 1개 사단과 미 해병대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미 제9군단이 북동쪽으로 금성-고저 도로에서 상륙부대와 연결을 시도할 시 군단에 가해질 예상되는 위험과 적이 이 작전을 억제하려고 서부전선에 공격을 가할 것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벤플리트 장군은 이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고 스스로 취소하고 말았다.
나. 추계공세작전
그러나 이 무렵 미 제10군단이 해안분지를 점령하는 등 동부전선의 방어선 개선 목표를 대체로 달성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9월의 제한목표공격 결과를 분석한 다음 9월 25일 하계공세를 종료함과 동시에 추계공세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추계작전 지침도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종심깊은 탐색작전으로 적의 전력증강을 억제하며 잘 훈련된 유엔군이 교착된 전장으로 인해 침체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한다는데 있다.
●특공작전(코멘도) / 폴라선 진격작전
군사령관의 작전지도 지침에 따라 아군의 추계공세도 제한목표공격에 국한 되었다. 그러나 추계작전은 비록 중동부전선에서 국군 제8사단, 미 제2사단, 등이 하계공세의 연장선에서 공격을 계속하였지만 중점이 서부전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방어선 개선에 두어졌다. 미 제1군단장은 철원-김화 지역 철로확보와 방어선 개선을 위해 타격작전이 취소된 이후 대안으로 "특공작전(코멘도작전)"을 계획하여 승인을 받았다.
이 코멘도 작전은 전선을 역곡천 남안에서 10km(소타격작전은 15km) 추진하여 방어선을 개선하고 연천-철원간 철로 및 병참선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으로 1951. 10. 3일에 실시되어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같은 시기에 미 제9군단장도 철원-김화간 철로를 안전하게 확보함은 물론 미 제1군단의 작전을 측면지원할 목적으로 적의 주요 작전기지인 금성을 통제하는데 목표를 두었으며 10월 10일에 작전을 개시하여 제1단계로 금성천(노메드라인)을 확보하고, 제2단계로 금성 남쪽 고지군(폴라라인)을 점령하여 10월 하순에 종료되었다.
그밖에 중동부의 미 제10군단은 하계작전의 연장선에서 추계작전 기간 중 미 제2사단이 '터치다운작전"으로 10월 13일 단장의 능선과 10월 25일 1220고지(김일성능선)를 탈취하였다.
이때 국군 제8사단이 어은산 남쪽지역의 1090고지를 점령하였고, 국군 제5사단이 가칠봉 북방의 121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서 군단은 통선골-문등리-해안분지선으로 전선을 밀어올려 방어선 개선 목표를 달성하였다.
또한 국군 제1군단도 수도사단이 월비산을 점령하고 전선을 남강까지 추진하였다.
제8군은 미 제1군단 및 제9군단이 추계작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철원-김화 철로에 대한 적 포병사격의 제거에는 미흡하다고 판단하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으로 중부전선의 방어선을 철원 서북 송현리에서 평강 북서 1km 지점을 경유, 금성 동남 4km 폴라선까지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둘루스선)으로 추진할 계획이었다. 제8군은 이 계획으로 제9군단이 금성을 점령하면 북동쪽으로 진격하여 동해안에서 북진하는 국군 제1군단과 통천에서 연결하고 지대내 북한군을 포위 섬멸한다는 "해시계작전"을 계획, 11월 1일 실시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5일 판문점에서 휴전회담이 재개되면서 취소되고 말았다.
3. 해안분지 만곡부 해소
휴전협상 초기부터 미 제10군단은 화천저수지에서 해안분지 남쪽을 따라 산머리곡산에 이르는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해안분지로 인하여 전선 중앙에 큰 만곡부가 형성되어 방어에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군단은 이를 제거하기 위해 7월 26일에 미 제2-38연대가 4일간의 공격으로 해안분지 서측에서 가장 높은 대우산(1178)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시작된 장마로 8월 중순까지 공격작전이 잠시 중단되었다.
우기가 끝난 8월 중순에 미 제10군단은 국군 제7사단이 화천저수지 북쪽에, 미 제2사단(프, 네대대 배속)이 해안분지 남쪽에, 국군 제8사단이 서화계곡을 방어하였고, 국군 제5사단, 미 제1해병사단(국 제1해병연대 배속)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반면 적은 군단 정면의 화천저수지 북쪽에는 북한군 제5군단이, 해안분지 북쪽에는 제2군단이, 그리고 남강 부근에는 제3군단이 방어하고 있었다.
'51. 8. 14일에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하계 제한공격작전"으로 해안분지 동측에서 포복작전을 실시함과 서측에서 983고지(후에 피의능선)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은 해안분지 서측 고지군과 동측(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능선"의 하단부인 1031고기를 공격하고, 제10군단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이 이 "J(낚시바늘)"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884고지와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적도 이미 2개월간의 교착기를 이용해 강력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어서 전쟁전쟁 사상 최초로 진지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가. 노전평전투
4KM전방
이포리 무산(1320) 두무산(1098) 사천리
남강
신탄리 *591
큰들 *884
삽재령 *854
*간무봉 *578 *924
*1052 *812 *쌍용
철미동 소라치
*589 *771
성내천 성내동 *965
*1031
*673
*785 *1010 고성제
*445 *562
*1026 *924 노전평 *1056
돈평
가전리 부허동
*대우산 *달산령 *991 국8사 = 국수도사 /제11사
*793 서화천 부연구
해안분지
미2사 = 국8사 부연동 신캔사스선
*646 *840 *774 *893
개고개 *981 *산머리곡산(1019)
신캔사스선
사지목이
*907 평촌 대곡리
서화리
신캔사스선
*1018 미2-23연 봉황촌
대암산(1304) 천도리
국군 제8사단은 7월 20일 국군 제5사단과 교대하여 서화부근 사지목이로부터 산머리곡산을 연하는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 노전평 부근의 445-1031고지선에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사단(17연) 및 제13사단(제19연)이 방어 중에 있었다.
(1) 제1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캔사스선을 방어중인 좌전방 제16연대(대전차 공격대대 배속)와 우전방 제10연대가 주저항선을 방어한 채 각연대 1개 대대와 대전차 공격대대를 사단 전초선인 가전리-부허동-고성재로 추진하여 적의 전방추진 진지인 노전평의 445-785-1010고지를 선점하기로 하고 8월 9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몇차례의 공방전을 통하여 14일 사단은 포복작전계획상의 낚시바늘 능선 하단고리부분을 확보하고 줄기에 해당하는 1031고지 공격에 들어갔다.
(2) 제2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은 445-1010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에 8월 16일에 군단으로부터 1031-965고지 공격명령을 받았다. 이때 제5-27연대도 배속 받았다.
1031고지는 일련의 종격실 능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이고 965고지는 1031고지에서 서로 뻗은 능선상의 고지로써 철미동 일대의 소양강 상류계곡을 직접 감제하는 고지였다. 이중 1031고지는 북한군 제13-19연대가, 965고지에는 제2-17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사단은 8월 18일 06:00시에 1031고지는 제10연대가, 965고지는 제21연대가 공격하여 8월 24일이 되어서 동 고지선을탈환하게 되었다. 기간중에 북한군 사살 938명, 포로 57명을 획득하였으나 사단도 전사 90명, 부상 536명 , 실종 17명이란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 제8사단은 1031고지를 "대통령고지", 965고지에는 "벤플리트고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3) 제3차 노전평 전투
제8사단이 965-1031고지 선에 전진기지를 구축하자 북한군은 제3군단 예하 제2,13사단 대신 제15사단을 투입하여 802-854고지 일대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제8사단장은 9월 8일에 군의 제한목표공격작전 지침에 따라 854고지를 목표로 부여받고 9월 10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854고지는 남강과 소양강의 분수령에 위치한 고지로 사단 방어선을 남강까지 추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탈취해야만 하는 고지였다.
당시 사단은 중앙에 배치된 제21연대를 주공으로 854고지를, 북쪽의 제10연대는 1개 대대로 854고지 북쪽 무명고지를 점령하여 퇴로를 차단하고, 제16연대는 2개 대대로 제21연대 방어진지를 인수하고 1개 대대는 제21연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한편 사단의 우측인 국군 제1군단이 1031고지의 북쪽 머리에 해당하는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제8사단은 항공지원과 동해안의 제77, 95 기동함대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854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9월 10일 공격을 개시한다.혈전을 거듭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뺏고 뺏기는 혈전을 거듭하였다. 결국 공격개시 9일만에 9월 18일 854고지를 완전 탈취하게 되었으며 이 3차전투에서 적 2157명 사살, 163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아군도 322명이 전사하고 1443명이 부상했으며 115명이 실종되었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854고지에 남아있는 지뢰군
854고지에 오르는 길은 좋았다. 비록 최전방이지만 산길은 평탄하고 길 옆으로 갈참나무 숲들이 잘 자라고 있다. 여기에 겨우살이들이 메달려 있어 신비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 곳이 6.25전쟁 '51.8월의 전쟁중에 가장 가장 치열한 전투지역이다. 이 곳을 잡아야 남강을 통제하여 인제-간성에 이르는 보급로를 보장한다.
[국군 제8사단의 전투 일기]
그러니 이곳 전투는 '51년도 9월10~18일까지 실시하여 탈취하고, 바로 미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하게 된다. 작전지역을 인계한 제8사단은 '51.9월 말에 제7사단과 교대하여 백석산 전투에 참여하여 백석산 점령과 이어서 1090고지(크리스머스 고지)로 진격('51.10.6~10.28)한후 다시 '51.11월 말에 제7사단에게 인계한다.
'51.11월 29일 미 제10군단으로부터 백야전사로 배속전환하여 호남지구공비소탕작전을 '51.12.02~'52.1.31일까지 실시하고 전주-퇴계원-부평리로 이동하여 부대정비 및 교육훈련을 실시한 후에 '52.3.18~24일 어간에 서화리로 이동,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다시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812-854고지선을 인수하게 된다. 사단은 '52.9.21~9.22일까지 방어하다 미조리선 방어임무를 미제45사단에게 인계한 후 사창리로 이동하여 미 제9군단에 배속된다. 여기서 2주간 부대정비 및 교육을 받고 '52.10.19일 부로 국군 제2군단으로 배속되어 '52.10.25일 수도사단과 교대하여 금성지역의 수도고지. 지형능선 전투에 투입되어 계속 이 지역에서 전투를 실시하고 휴전을 맞이 한다.
[854고지 혈투 시간표]
●'51. 9월 전투
제8사단은 854고지를 탈환하기 위하여 9월 10일, 항공지원과 동해안의 제77, 95 기동함대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혈전을 거듭했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쳐서 뺏고 뺏기는 혈전을 거듭하였다. 결국 공격개시 9일만에 9월 18일 854고지를 완전 탈취하게 되었으며 이 3차전투에서 적 2157명 사살, 163명을 포로로 획득하였다. 아군도 322명이 전사하고 1443명이 부상했으며 115명이 실종되었다.
●'51. 9. 18일이후 미 해병 제1사단 방어
● '52. 3.24일 미 제1해병사단으로부터 국군 제8사단이 작전지역 인수 후 '52. 9.22일 미 제45사단에게 인계
● '52. 12. 30일 미 제45사단으로부터 국군 제12사단이 작전지역 인수후 '53.1.12~2.27어간 적의 기습공격 격퇴
●'53. 6.1~6.9일에는 국군 제12사단 제51-3대대가 적 1개 대대의 공격을 격퇴하게 된다. 동시에 북한군은 구군 제12사단 제37연대와 제52연대가 방어 중인, 854고지 좌측의 쌍용고지 일대로 공격을 계속하여, 이 쌍용고지(812고지. 무명고지 ?)에서 1차로 6.1~6.8일까지, 2차로 '53.7.16~17일까지 집중 공격하여, 제12사단은 결국 812고지는 탈취에 실패하고 쌍용고지(무명고지) 피탈되었다가 다시 탈환하기를 9회에 걸쳐 진행하다 결국 피탈된다.
● 한편 51연대가 방어중이던 854고지는 적이 '53.7.18일 01: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휴전 당일 까지 무려 77회의 공격(7.25일 하루에만 17회)을 하였으나 아군의 화력과 추진매복조에 의해 격퇴된다.
[산속에 뒹굴고 있는 철모?]
이상의 전사기록을 보면 얼마나 이 854고지가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나는 이곳을 오르는 산길에서 미확인 지뢰지대이긴 해도 활엽수 나무군에 남아 있는 철모며 여러 유품을 목격하고 차에서 내려 어느 한 곳은 발걸음을 내딛다가 돌아서야 했다. 안내하는 책임부대 간부가 들어가면 안된다고 매달려서다.
전쟁 전에는 소나무로 침엽수를 이루던 산야는 모두 불타버리고 지금은 활엽수군이 넘쳐나고 있다. 그 속에 보이는 전투유품을 보며 얼마나 많은 영웅들이 남겨져 있을까를 생각하니 저절로 눈물이 난다.
GP들어서는 철문 입구에서서 진출입로 보수 공사간에 노출된 유해를 발굴하고 볼닥 솟아있는 854고지를 올라선다 그 위는 철조망으로 둘러싸서 누구도 발을 딛지 못하게 통제하고 있는데 바로 지뢰들이 여기저기 두 눈에 보인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휴전 직전에는 '53.7.25일 하루에만 17회의 적의 침투와 이를 격퇴하는 전투를 그려보면 저절로 내 몸이 아파 온다. 저 손을 내밀면 잡힐 것 같은 지뢰, 그걸 밟고 전사했을 용사님들을 기억하는 일은 이제 우리의 임무다.
(나)" 야 너 또 살았어!"(연대장이 병사에게 던진 기막힌 칭찬?)
어느 참전용사님이 나에게 던진 기막힌 증언이다. 본인이 제8사단 제21연대 출신이라는 용사님이 소대장도 없고 선임하사도 없는데 본인이 넘어지고 일어서며 적이 올라탄 고지를 향해 오르는데 아무도 없어서 죽지않고 살았다 한다.
"선배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제가 직접 그 854고지를 올라갔다 왔습니다"
"아 그러세요. 지금은 누가 그곳을 점령하고 있나요, 나는 '51년 9월에 그곳에서 전투 했고 중순이 지나 미 해병대에 넘겨주고 백석산 전투에 갔다가 '51년 말에 호남지구 백야사에 내려가 공비토벌작전도 하고 다시 '52. 3월에 들어갔어요. 그 때는 별로 전투가 없다가 9월 말에 전투를 하고 미군에게 또 넘겨주고 사창리로 들어가 금성지구에서 휴전때까지 있었어요."
"언제가 가장 치열했습니까?"
"당연히 '51.9월에 거의 2주간이나 몸으로 전투를 했어요. 우리 대대는 결국 다 죽어갔고 몇 명만 살아 남았어요. 우리가 최종적으로 고지를 점령하고 만세를 불렀는데 연대장이 전부일 대령이었는데 현장에 왔어요. 연대장님은 몇일 전에도 만났는데 그 당싱데 돌격대원들이 다 죽고 나만 살아가지고 살아남은 대대원들 앞에서 칭찬을 받았어요. 그런데 또 땀이 범벅이고 전투복이 황토빛으로 변한 내가 살아남은 몇 명에 끼여 있으니 손을 잡고 얼굴을 바라보다 "야, 너 또 살았어!"하시며 굳게 손을 잡아 흔들며 부등켜 안았어요"
[참전용님들의 증언 내용]
이석순(제16-2대대) : 주저항선 인근에 살구나무 2그루가 있었는데 그 집에 10여구의 시체가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854고지와 비류봉 사이 무명고지전투에 제5중대를 지우너하러 갔다가 교통호와 주변 일대에 시체가 많이 방치되어 있었다.
정해윤(제16-3대대) : '50.12.31일 군에 입대하여 전투를 했다. 854고지 전투에서 탈환작전간 적의 기습으로 중대의 많은 인원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당시 180여 명이 공격하여 6명만 생존할 정도로 피해가 컸다. 전투가 치열하여 전사자 유해는 노무자들이 일부 수습했으나 처리하지 못한 유해는 현지에 남겨 둘 수 밖에 없었다.
이봉열(제8-16연대) : 나는 '52.9.21~22일 전투에 854고지에 참여했다. 당시는 대공포판을 이용하여 9부능선에서 낮은 능선으로 수회 공격을 했다. 그러나 금성지구에 들어가 지형능선에서 노무자들이 시체를 운반하는 것을 목격했는데 운반하는 과정에 개울이나 계곡 등에 유기하는 것을 보았고, 20여 구를 땅에 끌고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수도고지는 전면에 유해가 많았는데 특히 벙커안에는 미처 피하지 못한 병력들이 전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원한(8사 의무대) : '51. 1.8일에 상주에서 훈련받고 제8사단 의무대 의무병 보직을 받아 환자들을 치료했다. '51.9월에 서화리 전방 854고지에서 3일 동안에 6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다.
이양원(제8-21연-수색중대. 노무자 부대) : 노무자부대 선임하사로 동료노무자와 노전평 일대 전투에 투입되어 국군과 노무자 등 40여 명이 전사하여 현지에 매장했다.
강병창(제8-21-2-7중대) : '51.4월ㅇ에 군에 입대하였다. 854고지는 수도사단이 전멸한 후 8사단이 교대 투입되어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였다. 우리 소대도 전투 후에 생존자가 20여 명 미만이었다.
심재혁(제8-21-3-10중대) : 인제 북방 854고지전투에서 당시 구덩이에 아군 전사자 100여 명 이상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장기표(제12-52연) : 제12사단에 15살에 입대하였다. 854고지 전투에 참여하였으며 장승리 일대의 골짜기에 다수의 전사자가 발생했고 많은 인원이 전사했다.
이우목(제12-52-1-3중대) : '53. 6-7월경으로 기억되며, 854고지 전투 당시 1차 후퇴시 소대원 42명 중에 생존인원이 9명밖에 안되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당시 군인 전사자도 많았지만 노무자들 희생도 많았다.
[80년초 현지 GP소대장 김00 증언]
854고지와 지금의 쌍용고지 사이를 수색정찰을 자주했다. 지금 854고지 좌측의 계곡을 거쳐 쌍용고지로 오르는데 그 당시에는 많은 전투유품이 널려 있고 유해도 다수 지표면에 나와 있었다. 쌍용고지 GP 공사간에도 유해가 나와 가매장한 곳이 있다. 지금 지피에서 남서쪽으로 능선 상에 교통호와 개인호, 철조망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다. 바로 적 지피와 그들의 지향 무기가 눈에도 들어 온다.(우리는 이 지피에서 직접 몇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다) 1031고지군은 반 유개화 공사로 흔적이 사라지고 있다.
[관련된 전사 기록]
제8사단은 '51. 2월의 중공군 공세에 횡성에서 대 제앙을 맞고, 제천을 거쳐 대구로 이동하여 재편성한 후에 '51. 4월 초에 금산.부안지구 공비소탕작전에 투입된 이후 '51.5.19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원통리로 이동하여 ,개고개 전투를 벌인 국군 제5사단과 교대하여 '51.7.20일부터 이곳 노전평지구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445-1010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중에 8월 16일에 군단으로부터 1031-965고지 공격명령을 받았다. 이때 제5-27연대도 배속 받았다.
1031고지는 일련의 종격실 능선에서 가장 높은 고지군이고 965고지는 1031고지에서 서로 뻗은 능선상의 고지로써 철미동 일대의 소양강 상류계곡을 직접 감제하는 고지였다. 이중 1031고지는 북한군 제13-19연대가, 965고지에는 제2-17연대가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51. 8. 14일에 미 제8군사령부는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에 "하계 제한공격작전"으로 해안분지 동측에서 포복작전을 실시함과 서측에서 983고지(후에 피의능선)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8사단이 해안분지 서측 고지군과 동측(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능선"의 하단부인 1031고기를 공격하고, 제10군단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의 수도사단이 "J(낚시바늘)"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884고지와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사단은 8월 18일 06:00시에 1031고지는 제10연대가, 965고지는 제21연대가 공격하여 8월 24일이 되어서 동 고지선을탈환하게 되었다. 기간중에 북한군 사살 938명, 포로 57명을 획득하였으나 사단도 전사 90명, 부상 536명 , 실종 17명이란큰 피해를 입었다. 이후에 제8사단은 1031고지를 "대통령고지", 965고지에는 "벤플리트고지"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붙였다.
[참전용사 증언]
이중우(제8-16-2대대) : 산머리곡산에서 전투를 실시하고, 전방으로 이동하여 965고지 전투를 했다. 탄약보급을 위해 이동 중 방치된 시체를 판쵸우의로 덮어 주었으며 전사자가 일부 발생하였다. 다음에 854고지 전투를 하였는데 많은 전사자가 발생하였고 방치된 것으로 안다.
[전사 기록]
국군 제8사단은 '51.8월 16일 제10연대가 그동안 쟁탈전을 벌였던 1031고지를, 제21연대가 965고지를 공격한다. 결국 8월 20일에 1031고지를 백병전으로 점령하고, 965고지는 8월 19일에는 제21-3대대가 21일까지, 8월 22일에는 제16-2대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8월 24일 백병전으로 점령한다. 국군 제8사단은 '51.8.9~14일까지 1차로 965고지 바로 서쪽 785고지 일대를 공격하여 탈취한 후 이곳 1031-965고지를 공격하였으며 전 기간을 통하여 적 사살 2,000여 명이고 아군은 전사 218명에 부상자가 1,021명 발생했다.
나는 이곳 1031고지와 965고지를 두 발로 걸어서 탐사했다. 1031고지 정상부근으로는 산악도로가 개설되어 접근에는 문제가 없다. 개인호가 몇 개가 문제가 아니라 산 능선에는 모두 개인호 또는 반 유개호다. 이 1031고지와 965고지는 서화계곡 동쪽을 통제하는 낚시바늘(J능선)의 바늘에 해당하는 곳이다. 줄기와 머리는 884고지와 924고지다.
우리는 이곳을 발굴하면서 과연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있었는데 유해를 남겼을까 하는 의문점을 가지고 발굴작전을 시작했다. 5년여에 걸친 발굴작전간 주로 소고지별 반유개호 300여 개를 발굴하여 3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러면 과연 이 유해는 북한군인지 아군인지 여러 의문점이 생긴다.
[다수의 인식표 및 반합.숟가락발견, ,13년도 3개. '14년도 2개]
발견된 인식표 또는 반합 등에 남겨진 것을 가지고 군적을 확인결과 발견된 모두가 국군 제8사단 (10/16연대)였다. 참전용사의 증언에서도 당시에 주로 육박전이 벌어지고 여기에 포탄이 작열하여 전사자 신원확인이 어려워 많은 인원이 반유개호에 묻혔다는 것이다. (고, 한상대. 정철호. 이종수. 김기진. 강영만 용사님)
[이것은 우연의 일치일지는 몰라도 정말 제8-16연대는 그런 정황이 명백하게 보인다]
다음에 상세히 기록되겠지만 화천 내성동리 태백기지에서 우리는 엄청난 신원확인 유해를 발굴한다. 이곳은 '53년도 휴전직전에 금성지구전투에서 물러난 제8사단의 전투지역이다. 그런데 현재의 태백기지 인접 고지군의 8~9부 능선에 원형으로 반유개호가 구축되어 있고 여기서 많은 수의 유해를 발굴하게 되는데 이중에 인식표 등을 '11년도에 5명(제21연대 4명, 제16연대 1명), '13년도에 4명(제16연대 3, 사단 1), '17년도에 1명 (제16연)이 발굴되고 유가족이 식별된다.(고, 송덕이. 최정준. 빈원식.이광수.유광연.손현수 용사님 등)
반격을 해야 하고, 방어를 행야 하고 여러 전투상황에 어떻게 하는 것이 옳바른 유해처리인지는 정답이 없다.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유해 처리는 주로 노무자들이 하게 되는데 그 통제는 해당 부대 간부급이다.
[지금 민통선 북방의 주요 고지군에 대한 부문별한 훼손을 억제하라]
그런데 이 1031고지군이 전투도로 개설과 OP등 관련 시설을 구축하면서 그 흔적이 모두 지워지고 있다. 이곳 서화축선의 공격진로에 잇는 유해는 개인호보다도 고지주변의 반유개호에 유해가 다수 남아 있는데 그 곳이 대부분 지금의 OP나 기타 군사시설물 설치장소다.
중동부전선의 화천 북방 내성동리 일대의 태백기지도 이와같은 현상이다.
( 라) 낚시바늘의 줄기와 머리, 924, 884고지군의 유해를 발굴하라
'51. 8월에 미 제10군단은 해안분지 서측 고지군과 동측(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능선"의 하단부인 1031고기를 공격하고, 제10군단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국군 제1군단이 이 "J(낚시바늘)"능선의 중간에 위치한 884고지와 924고지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국군 제1군단은 924고지를 수도사단이, 884고지를 제11사단이 탈취하도록 하였다. 924고지는 바로 이승만 고지인 1031(1056고지 직전방) 동북에 위치한 고지군으로 북한군 제13사단이 점령하고 완전 유개호 공사를 완료한 상태였다. 수도사단 제26연대는 '51.8.18~23일까지 측면 공격으로 고성군 수동 상원리 소라지 계곡을 횡단하여 혈투속에서 점려하게 되며 서측방 765굊와 바로 북쪽 1000고지를 점령한 가운데 제1기갑연대와 교대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적 사살 645명이고, 아군 피해는 전사 47명. 부상 418명이라 한다. 이 고지는 지금의 남방 한계선 약 1KM 지점의 975고지로서 전투시설물이 구축되었다. 이 고지는 동측방의 경사도가 심하여 접근이 곤란한 곳인데 과연 그 당시의 측방공격시 어떻게 접근했으며 그 많은 부상자나 전사자를 제대로 처리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드는 장소다.
884고지는 924고지의 북방에 위치한 고지다. 이 고지는 아 11사단의 주저항선과 적의 보급로인 고성-사천리-원통에 이르는 도로를 통제하는 감제고지다. 당시 제11사단 전방의 적은 북한군 45사단의 일부였다. 적은 884고지와 그 북족 591고지를 고수하기 위해 엄체호와 화력거점을 마련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제11사단은 8월18~27일까지 제9연대와 제20연대를 교대로 투입하여 반항평 지역의 소라지 계곡을 횡단하여 4차례에 걸친 점령과 피탈을 반복하며 8월 27일 최종적으로 점령한다. 이후에 북한군 제45사단이 8.28~29일 역슺ㅂ을 실시하고, 9월 초순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의 역습을 물리치고 휴전까지 이르게 된다. 이 전투에서 적사살 1252명, 적 포로 31명을 획득하고, 아군은 전사 125명 부상 500명. 실종 44명의 피해가 발생한다.
이상의 세부전사에서 보았듯이 이 곳 924-884고지 전투는 소라지 게곡에서 측면공격으로, 당시 참전용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서서 진격할 수 없어서 수류탄을 들고 기어서 전진하였다 한다. 그러니 옆에 전우가 전사해도 누가 보호할 여건이 아니였다. 많ㅇ느 피해가 발생한 것도 사실이다.
[피해현황 기록 분석]
그러나 관련 기록에 보면 1031-965, 884~924, 854-812 전투에 관한 기록은 너무 미흡하다.는 제5.8.11.수도사단의 기록이 '51년 이곳 소라지 계곡에서의 현황 기록이 너무 미흡하다. 아니 '51년도 기록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나마 있는 854-812고지는 1차 전투인 '52.9.21~22일에 제8사단이 전사 60명이 기록이 나와 있고, 2차인 '53.6.1~17일까지의 전투에서 제12사단이 전사 323명. 실종 38명. 미수집 유해 119명이 기록된다.
제대로된 유해발굴을 위해서는 이런 기록물부터 재대로 검증이 되도록 밝혀졍야 하고 실제 전투지역에 대한 안전성 검토와 대책을 강구하여 하루빠리 찾지못한 유해를 발굴해야 한다.
[참전용사 증언]
● 김창언(제111-9연) : '50. 9. 1일 입대하여 경남 산청지역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다. 제5사단과 교대 구룡포 LST에 승선하여 주문진에 상륙한한 다음 고성 간성자역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884고지 전투에서 희생자가 많이 발생했다.
● 고경률(제11-20연) : '49년 6. 1일 군에 입대하여 제11사단에서 전투를 많이 했다. 건봉산 전방 884고지 탈환작전 중 여명을 기해 공격대기 중인 포탄 낙하로 1개 소대 중 5~6명만 남고 대다수가 전사하였다. 또한 884고지를 공격하던 중 적의 사격 등 완강한 저항으로 많은 전우들이 전사했다. 고지 점령 후 진지구축 간 7-8부 능섲ㄴ에 미처 수습하지 못한 유해들이 주변에 나뒹굴고 있었는데 이를 모두 처리하지 못해 주변에 방치되어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 김형복(제11-9-1대) : '51. 8월 중순경 고성 884고지 부근 소작봉 일대에서 방어지역 경게진지에서 1개 소대가 정찰을났다가 3-4명이 전사하여 소작봉을 바라보고 남강강안 500-100M 후방에 매장하였다고 보고 받았다.
● 이경구(제11-9-3대) : '51. 여름경 인제지구 전투시 향로봉 일대 884ㄱ지 전투에서 전사자가 많아서 소속대도 못 찾을 정도로 피해가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유봉(제11-9-수색중대) : 884고지에서 약 한달간 적과 야간전투를 치열하게 하였으며 당시 중대장이 3명이 교체되었고, 중대원도 180여 명 중 30여 명만 남을 정도로 많은 인원이 전사하고 부상을 당하여 교체되었다. 당시 유해를 수습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884고지 주변과 좌측고지 일대에 아군의 전사자 유해가 많이 난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강응인(제11-9-수색중-1소대) : '51.8월 중순경 인제 북방 884고지 전투에서 아군 전사자들이 많았으나, 미처 수습할 여력이 없었다.
●김행구(제11-9-1-2중대) : '50.9.1일 군번을 받았다. '51. 8월 인제 884고지 전투 당시에 당시 고향친구 고, 이봉추가 전사했으나 수습하지 못했다. 당시 2중대 화기소대 전원이 전멸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으며 당시 중대가 피해가 커서 재편성하였다.
나. 피의 능선전투
문등리 사태리
*666 *752
건솔리 비아리
*855 *862
수입천 *731 *983 *940 *773 비득고개
872
고방산리
*760
장평리 *805
*787 월운리 캔사스선
국5-36
캔사스선 미2-9연 = 미2-38연
미 제10군단의 중앙사단으로서 해안분지 남쪽의 캔사스선을 방어중인 미 제2사단은 8월 14일 국군 제8사단이 1031고기 공격작전을 하고 있을 때, 해안분지 서측의 983(피의능선, 수리봉)고지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수령하였다.
당시 미 제2사단은 제9연대를 두밀령 일대, 제38연대를 비아리에, 제23연대를 해안분지 남쪽의 고지에 배치하여 장평리로부터 평촌까지의신캔사스선을 방어중에 있었고 제38연대는 1개 대대로 대우산에 정찰기지를 운용하고 있었다.
수리봉, 983고지는 731-983-940-773고지로 이어진 8km 횡격실 능선으로 경사가 급하여 방자에게는 유리하고 공자에게는 불리한 지형이었다. 더구나 이 고지는 사단의 후방까지 감제관측이 가능하여 사단으로서는 필히 확보해야 할 고지였다.
반면에 적도 전술적 중요성을 감안하야 북한군 제5군단 제12-1연대와, 제27-14연대를 배치하여 2개 사단으로 고지를 방어중이었다. 또한 아군의 포격에 견딜 수 있는 수 백개의 엄체호를 구축하고 반사면에도 유개 교통호로 연결된 축성을 하고 5,000여 개의 상자형 지뢰를 매설해 놓고 난공불락의 요새화 진지라 호언 장담하고 있었다.
(1)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의 전투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5-36연대는 8월 18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983-940-773고지로 2개 대대로 병진 공격을 실시하였다. 항공지원 및 동해안에서 함포지원도 이루어졌다.
무려 4km의 공격 정면에 200문의 포가 집중지원을 하여 산의 외형이 변할 정도였다. 그러나 엄체호를 강력하게 구축하고 지뢰지대를 접근로 요소요소에 설치한 관계로 아군의 진격을 계속 돈좌되기를 반복하였다.
20일에 773고지를 점령하고 940고지를 21일 야간공격으로 점령하게 되는데 당시 공격 선봉인 제2대대 6중대는 살아남은 인원이 20명에 불과 했다.
한편 983고지를 공격하는 제3대대는 22일 111:30분에 고지를 점령하고 진지강화를 하였으며 적의 역습을 격퇴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적의 역습에 26일 02:00시에 북한군 제6-13연대에 고지가 포위되고 육박전으로 저항하였으나 계속되는 파상공격에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제36연대는 우측의 773고지와 940고지를 확보한 채 방어로 돌아서고 이에 미 제2사단장은 미 제9연대장에게 국5-36연대를 지원하도록 명령하여 제2대대가 940고지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적의 계속되는 역습에 773, 940고지마저 피탈되고 피의 능선을 점령한지 5일만에 모두 상실하였다. 당시 미 제2사단의 참전자 증언은 27일 야간에 국5-36연대가 밀릴 때 북한군과 국군이 혼재되어 피아를 구분할 수 없이 혼란과 전장공포증에 빠져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고 증언하였다.
(2) 미 제2사단의 전투
미 제2사단장은 상실한 피의 능선을 탈환하기 위해 27일 국군 제5사단장에게 제36연대를교체해 달라고 하여 제35연대를 배속받아 8월 28일 09:00시에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국5-35연대는 773고지를 공격하여 탈환하였으나 야간 역습에다시 피탈당하고 다시 주간 공격으로 탈환하였다. 그러나 미 제9연대는 940고지를 탈한하지 못하였다.
그러다 8월 28일 군단장의 작전확대방침에 따라 국군 제5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전선에 투입되면서 9월초 전선 상황에 큰 변화가 생겼다.
피의 능선 서측의 국군 제7사단이 9월 2일 901고지와 554고지를 탈취하고, 동측에서는 해안분지 남쪽에 투입된 제5사단이 9월 3일 가칠봉 동북쪽 서희령을 점령하고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을 인수한 후 그 서북쪽 1211고지를 공격하였다.
이무렵 미 제2사단은 제9연대 동측에서 대우산을 확보하고 있던 제38연대가 가칠봉을 점령한 후 국군 제5사단에 인계한 다음 피의 능선 후방, 진고개의 666고지와 752고지를 장악함으로써 비아리-사태리 계곡으로부터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또한 제9연대 서측에서 제23연대가 투입되어 9월 5일 두타연 남쪽의 855고지를 점령함으로써 문등리 방면에서 피의 능선 방향으로 증원로를 완전히 차단하였다.
좌우측방에서 우군의 전선을 피의 능선 후방까지 밀어올리는 상황에서 제9연대의 공격도 계속되어 9월 3일 상실한 773고지를 탈환하고 9월 4일에는 940고지를 , 그리고 9월 5일에는 수리봉 983고지를 재탈환 확보하였다
그러나 아군이 940고지와 983고지를 올랐을때는 이미 적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다. 좌우 측방이 노출되면서 포위에 대비하여 철수한 것이다.
이와같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36연대는 '51. 8. 18일부터 9월 5일까지 18일간의 혈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전사326명(국36:132명), 전상 2,302명(국36:816명), 실종 414명(국36:122명)이었으며 적의 손실은 15,000여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현장에 올라선 당시 제36연대장 황엽대령의 현장 증언
나는 당시 제5사단 제36연대장을 한 황엽 장군을 찾아 현장에서 증언을 요청하였다. 장군님은 걷는 것이 약간 문제였지만 기꺼이 우리의 요청에 응하여 주셨다. 이미 오시기 전에 우리는 수리봉일대를 탐사하여 실태를 확인했고, 인접 제21사단 지역의 백석산과 제12사단 지역의 가칠봉. 김일성고지 등을 탐사하였다.
수리봉 헬기장 인근에 도착하여 나는 장군님을 부축하여 능선을 걸었다. 감회에 젖은 장군님은 아무 말씀이 없이 약 1KM정도를 걸었다. 그리고 우리는 안전을 고려하여 한 곳에 멈춰섰다. 의자를 준비하여 앉으시도록 하여 드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산이 온통 포탄 탄흔이고 우린 그 속에 엎드렸다]
유엔군의 항공폭격과 동해안에서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고지를 탈환하고 나면 어느새 북한군의 역습을 받아 고지를 빼앗겼다. 북한군이 어디에 숨었다 나오는지 귀신이라 했다. 병사들이 몇 명이 전사했는지 사실 기록이 쉽지않다. 누가 현장에서 통제할 수도 없다. 정말 살아남았으니 또 다음 전쟁에 투입하는거고 죽었으면 누가 죽었는지 그 당시에 소대장들도 잘 몰랐다. 소대장들 중에 살아난 인원이 몇 안된다.
[숨져간 전우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때는 그런 말도 못했다.~!]
그저 지금 생각하면 무모한 전쟁이고 무모한 공격이다. 내가 오르지 않으면 적이 우리를 공격하니 어쩔 수 없이 수류탄 들고 맨몸으로 기어서 적의 특화점을 공격하는 특공대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렇게 점령하고 나면 바로 역습이 들어와 또 내려서야 했다. 숨져간 전우들에게 미안하고 고맙다. 그때는 그런 말도 못했다.
[여보 고성 351고지전투 가봤어?]
'52년도에 한참 더울 때인 7월에 들어가 우리가 11월초에 나왔어요. 그런데 얼마나 전투가 치열한지 정말 우리도 두더지식으로 땅굴을 파서 고지를 탈환하고 지켰어요. 그 당시는 휴전이 되니마니 하다보니 군기가 조금 느슨했어. 한번씩 외출이나 외박을 내보내면 몇 명이 안들어와요. 그래도 내버려 두면 몇일 있다가 들어와. 어디 갈 때가 없고 배고픈 시절이라 그래. 더 웃기는 일은 지금처럼 토요일이 되면 철조망 밖으로 아가시들이 쭈욱 줄을 서서 기다려요. 손에 뭔가 하나씩 들고 있는데 그것이 해삼 멍게 이런 특산물이야. 그걸 들고 왜 서 있느냐면~~? 여기에 대한 내용은 다음 351고지 전투에서 언급하겠다.
(나) 풀포기에 그대로 앉아 계시던 용사님 유해
수리봉이 좌우로 연결된 능선의 길이가 대략 3km는 된다. 그런데 주봉이라할 983고지 일대에 처음 올라가 탐사를 하는데 미확인 지뢰짇대라고 해당 부대에서 뻥(?)을 치면서 접근을 못하게 한다. 사실 미확인 지뢰가 있느지 없는지는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무섭운 무기다. 나는 용사님의 빽을 믿고 능선 언저리로 다가 섰다.
야생풀들과 잡목들이 어우려져 있다. 저 멀리에는 단장의 능선이다. 한 발을 옮기는데 무려 10분(?)을 걸리어 가는데 풀 포기안에 뭔가 흰색으로 빛나는 물체들이 여러 풀포기에서 식별된다. 나는 다시 돌아서서 그 것이 처음 발견 되었던 곳부터 정밀 확인을 하기로 했다. 해당 부대의 지뢰탐지기가 나보다 앞서 탐지해 간다.
[경운기 폐타이어로 만든 보호 신발]
탐지병들이 특별한 보호대책이 강구되었다. 경운기 폐타이어로 전투화에 겹신을 만들어 신는 것이다. 여러 시험평가 결과 효과가 있다고 한다. 이걸 신고 홈코트 작업(지뢰제거 작업)을 실시하는 것이다. 이 인원들이 전진하고 나면 우리는 그 뒤를 따라서 정밀 탐색을 하는 것이다. 아뿔싸, 그런데 그 하얀 빛의 정체는 사람의 뼈였다. 앉아서 전사한 모습 그대로 이고 세월 속에 풀들이 그 양분을 먹고 자라 엄청난 풀포기가 된 것이다.
(다) 700여구의 유해발굴, 그 조국은 어디일까~!
우리는 이 수리봉 일대에서 7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대부분 포탄에 작열하여 제대로된 유해가 없다. 물론 어느 교통호에는 완전하게 남아 있는 유해도 있었다. 몇 년에 걸쳐서 발굴되는 유해는 그 신분을 밝힐 증거가 없었다. 하지만 몇 분은 유가족의 DNA감식으로 신원이 확인된 분도 있다. 그러나 모두가 공산군이라 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다 아군일 수도 없다. 이럴 경우에 어떻게 국적을 판단해야 할지 정말 어렵다.
[이건 하느님밖에 모르는 감별이다.]
전투유품도 결정적 판별자료가 되지 못한다. 북한군이나 중공군의 태반이 유엔군의 무기로 무장하였다. 발굴되는 유품이 주로 M1탄이나 탄피. 탄창 등이고 파편류들은 수류탄의 경우 식별이 어렵다. 폭탄의 경우는 함께 피해를 보기에 그곳에 공산군 파편이 있으니 아군이 전사하고, 아군 파편이 있으면 적군이고 그런 논리는 맞지 않다. 뼈대는 같은 동양인이니 같다. 무얼로 구별할 것인가. 우리의 유해 수습정도를 보면 이곳에서 피해가 전사기록에,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36연대는 '51. 8. 18일부터 9월 5일까지 18일간의 혈전에서 아군의 피해는 전사326명(국36:132명), 전상 2,302명(국36:816명), 실종 414명(국36:122명)이었으며 적의 손실은 15,000여 명이 될 것으로 추산되었다. 하지만 적의 보급창고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던 제5사단의 기록에는 미수집 유해 등의 기록은 없다. 그러니 어려운 문제다. 넓게 생각하면 북한군도 우리 형제라는 사실 뿐이다.
여기서 하나 더 분석해 본다면 전사한 숫자의 신뢰성이다. 약 3주의 전투에 제36연ㄷ대 전사자가 122명이라니 미군 숫자보다도 적다. 또한 제35연대 피해는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주도권을 갔고 진행되는 전투인데도 이런 실정이었다.
(라) 계곡에 묻힌 유해발굴 노력(수해로 토사가 쌓여 10여m나 깊이 묻혀버렸다)
이렇게 이곳에서 유해 발굴에 대한 방송이 있자 과거 이곳에서 노무자로 유해처리에 참여했던 분이 연락이 왔다. 본인이 제36연대 노무자였으며 유해를 선 정상에서 끌고 내려와서 6부 능선 쯤에 대대 구호소가 있는데 그 곳에 왔는데 적이 침입하여 그 대로 놓고 가버린 유해가 소대인원보다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분을 모셔서 현장 확이늘 나갔다.
"선배님 그당시에 이 산은 나무가 았었나요?"
"아유 무슨 나무에요, 풀포기도 없었어요. 한여름인데 우리 노무자들이나 전투를 한 군인들 모습이 모두 흙머지가 한 1CM는 얼굴이나 옷에 묻어 있어서 꼭 귀신이 맞아요."
[그런데 전사한 분을 어떻게 이 산 밑으로 모시고 왔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정말 비참하고 죄종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통제하는 분이 있고 우리는 총도 없고 군복도 못입었어요. 한참 우당탕 싸우고 나면 조금 쉬어요. 저놈들도 도망치고 우리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니 서로 물러나는 거지요. 몇은 고지에 남아 있어요. 그러면 통제하는 간부가 우리를 데리고 산 고지 밑으로 가서 들고 올라고 하지요. 그러니 우리가 올라가서 솔직하게 누가 적군이고 아군인지 구별이 쉽지않잖아요, 그래서 2명 1개조로 한구씩 단가에 들고 내려오다 산비탈에서는 끌게 되는데 참 그러다 굴러내려가지도 하고... ."
우리는 용사님이 말하는 몇군데를 선정하여 기초굴토를 해보았다. 그런데 그동안 50여 년의 세월 속에 무너져 내린 토사가 10M 이상이었다. 계곡으로 장비를 투입할 수도 어렵고 해서 발굴을 할 수 없었다.
[월운저수지 뒤편 길가에 나타난 용사님]
어느날 여름철에 큰비가 내렸다. 산은 나무가 주로 활엽수로 채워져서 산사태가 자주난다. 그리고 산악도로에도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넘쳐나 길이 함몰된다. 그리고 비가 멈추고 들어난 사태현장에 용사님이 나타났다. 그것도 부분유해도 아니다. 거의 완벽한 완전유해(머리와 몸통이 있는 상태)로 발굴되는데 휴대하고 있던 유품이 모두 아군 것이다.
(마) 참전용사 증언
● 김극식(제5-35-2-1중) : '51.8월 경에 피의능선 전투에 투입되어 적과 치열한 교전을 하면서 많은 병력이 피해를 입었으며, 당시 우리 중대는 약 15명만이 살아남았고 나머지는 전사한 것으로 생각한다.
● 송태근(제5-36연) : 제36연대 의무병으로 있었다. 많은 전투 중에 양구 983고지 일대에서 전개된 고지쟁탈전에서 인명피해가 많았다. 당시 전사자들은 노무자들이 후방으로 옮기는데 매장여부는 잘 모른다. 후송이 불가능한 전사자는 현지에 방치하기도 하여 이 고지 일대에 아직 많은 전사자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신동일(제5-36-1-4중) : 피의 능선전투에서 아군 전사자가 많이 발생했다. 그 당시에 중화기 중대 소속으로 소총 중대보다 뒤에서 전방 소대에 화력지원 임무를 수행중이었는데 전방에서 아군 전사자들이 많이 목격되었다. 처음에는 피의 능선인지도 몰랐으나 나중에 알았다.
다. 해안분지전투
*간무봉
*980
*1052 *812 황기
*749
*680 *673 미제1해병 = 국8사
헤이스선 *660
서희령 *930 *1055 *924 *702 *561
*1026
월산령
*793
국제1해병 = 미제7해병연대
운전동
만대리
돌산령
캔사스선
1951년 8월 말 미 제2사단이 피의 능선에서 목표를 점령하지 못하고 고전이 계속되자 제10군단장은 그 원인이 적의 전력을 집중하도록 허용한 것으로 보고 그들의 활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군단 전역으로 작전을 확대, 압력을 가하기로 결심한다.
이에 따라 군단 정면 약 10km북쪽 박달고개-가칠봉-서희동-성내동에 이르는 해안분지 북쪽 고지군에 연한 작전통제선(헤이스선)을 설정하고 국군 제5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까지 전방으로 투입하여 8월 31일에 각 사단별로 목표를 부여하여 공격하도록 하였다. 이에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이 해안분지를 공격하고, 이 사단의 서에서는 국군 제5사단이, 동에서는 국군 제8사단이 병행공격하였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준비명령을 받고 28일 홍천에서 평촌으로 이동하여 미 제2사단과 국군 제8사단의 방어지역 일부를 인수받아 만대리로부터 평촌에 이르는 선에서 공격을 개시하게 된다. 이때 국군 제1해병연대는 해안분지 남쪽능선에 배치되었다.
(1) 제1단계 작전
당시 미 제1해병사단이 부여받은 공격목표는 해안분지 북쪽 일련의 횡격실 능선상의 1026, 924고지와 해안분지 북동쪽의 702, 660고지군이었다. 이중 1026-924고지군은 국군 제1해병연대가 북동쪽 702-660고지군은 미 제7해병연대가 부여 받았다. 이 무렵 공산군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1사단이 해안분지 북쪽 방어선에 투입되었다.
사단으로부터 1026고지와 924고지를 공격 목표로 부여받은 국군 제1해병연대장 김대식 대령은 8월 31일 06:00시에 공격을 하되 제3대대가 공격을 선도하여 924고지를 탈환하면 제1대대는 후속하다 1026고지를 공격하도록 기동계획을 수립하였다. 반면 우전방의 미 제7해병연대는 2개 대대 병진으로 공격하도록 하였다.
1951. 8. 31일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적의 강력한 저항과 매설된 지뢰지대로 전진이 둔화되면서 국군 제1해병 연대장이 지뢰폭발로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고 김동하 중령이 대행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미 제7해병연대는 공격개시 3일만인 9월 2일 사단 목표인 702-660고지선을 점령하게 되고 국군 제1해병연대는 9월 1일 924고지를 탈환하였으나 적의 역습에 다시 피탈 당하였다.
국군 해병의 목표탈취가 늦어지자 미 제1해병사단장은 미 제5해병연대로 국군 해병연대의 캔사스선 방어임무를 인수토록 하고 국군 해병 제2대대도 공격작전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9월 2일 마침내 국군 해병연대(-) 제3대대와 제1대대가 924고지를 탈환하고 1026고지 공격에 들어갈 때 미 제1해병사단장은 924고지를 미 제7해병연대에서 방어토록 전투지경선을 조정했다.
9월 3일, 계속적인 공격으로 제2대대가 1026고지를 탈환하게 되고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700m 북쪽의 1055고지까지 탈취함으로써 목표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를 낸 해병은 1026고지를 모택동고지, 924고지를 김일성 고지라 명명하여 불렀다.
(2) 제2단계 작전
이 전투 후 해안분지 주진지로 편성했던 북한군 제1사단은 간무봉으로 후퇴하여 이 봉우리에서 동측으로 뻗어내린 1052-812-749고지에 새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이때 미 제1해병사단은 9월의 제한공격 지침에 따라 북쪽 간무봉에서 사단 정면으로 뻗은 749고지를 점령할 목적으로 약 1주일 정비 후 9월 11일부터 공격을 재개하여 9월 20일에 탈취하였다. 이로서 군단으로부터 부여 받은 임무는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1951. 9. 13일 미 제1해병사단 제161헬리곱터 수송 대대가 최초로 "윈드 밀"이란 공수작전으로 보급품을 전장에 수송하고 74명의 부상자를 후송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924, 1026고지는 흔적조차 없다?
지금 이곳은 제12사단의 을지전망대 부근이다. 바로 GOP 철책이 드리워져 간다. 그러니 이곳에 전투흔적이 나아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다. 실제 많은 시간을 탐사해 왔지만 어떻게 보면 완벽하게 흔적이 지워져 있다. 앞에서 에비역 해병 장군이 "전우를 우리는 남기지 않는 다"는 다소 뻥같은 이야기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지금도 철책을 따라 개설ㄷ되어 있는 순찰로 보수공사간에 각종 전투 유품이 다수 발굴 되고, 경사지에 드러나 보이는 교통호나 개인호 위치에 전투유품이 있지만 접근을 못한다. 미확인 지뢰지대이기 때문이다. 해병대의 주요 전투 전사자 현황도 전쟁 후반기의 서부전선 사천강 전투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정말 없을까?
(나) 참전용사 증언
●백재익(제1-3-11중) : 도솔산 전투에서 시야가 좋지않은 상태에서 고지쟁탈을 위해 전투를 했다. 당시 북한군도 많이 사살되었지만 아군도 전사자가 중대에서 약 20명이 있었으며 부상자도 다수 발생했다. 도솔산 정상부근에 전사한 적군과 국군 전사자가 방치되어 있는 것도 목격했다.
●이영환(제1-3-10중) : 도솔산 전투간 지뢰에 의해 아군이 전멸 당했을 정도로 피해가 컸다. 특히 도솔산 전투에서는 대대원 1/3이상이 손실이 있었다. 부상자도 많았다. 정상 부근에서 방칟된 피아 전사자를 많이 목격했다.
●이일우(제1-3대대) : 김일성고지에서 전투했다. 주로 야간 전투를 했고 적군에게 포위를 당했지만 불굴의 해병정신으로 탈출한 적도 있다. 대부분 전사자는 수습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전투가 워낙 치열하여 김일성고지 부근에 미 수습된 윻해가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김용규(해병 1연) : '51년도 무더운 여름에 김일성 고지와 모택동 고지에서 전투를 했다. 이때 적이 설치한 목각지뢰에 아군의 피해가 컸다. 대부분의 전사자는 수습이 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전투가 워낙 치열하여 김일성 고지 부근에 미수습된 유해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길행(미군 제1해병사단 노무대원) : '51. 7월에 노무사단에 들어가 미 제1해병사단 예하연대 노무대원으로 가칠봉부근 전투에 참가하였다. 당시 식당을 만들려고 주변 땅을 굴토하는 과정에 장교로 추정되는 시신이 나와 양지바른 곳에 재매장했다. 전방고지를 올라가는 길목에 철조망에 피아를 알 수 없는 시체가 있었고 썩은 냄새가 많이 났다.
●이상원(제1-3대) : 6.25전쟁 중 제일 치열한 전투는 양구 북방 김일성고지 전투다. 고지 점련ㅇ간 120명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나 고지 철수간 12명만 헬기타고 철수하였고 나머지는 전사한 것으로 안다.
라. 가칠봉지구전투
*1211 서희령
헤이스선 *1026
*가칠봉
현리
*1059 덕장포
*1148 도솔산 국5-27연 캔사스선
국군 제5사단은 군단예비로 있다가 8월 28일 군단장의 새로운 작전방침에 따라 미 해병1사단과 더불어 전방으로 투입되어 해안분지 남단의 좌익 캔사스선에 투입되었다.
사단장 민기식 준장은 제35연대를 좌, 제27연대를 우로 미 제2사단 제23연대가 점령하고 있던 도솔산-만대리선의 해안분지 남쪽을 인수하고 피의 능선을 치른 제36연대는 창리에 예비로 두어 재편성을 서둘렸다. 사단장은 8월 29일 06:00시에 제27연대를 투입하여 공격에 나섰다.
(1) 가칠봉-서희령으로 진출
제27연대는 미 제2사단 제38연대와 협조하면서 9월 3일 가칠봉 동북쪽 능선과 서희령을 점령하였다. 사단은 다음날 9월4일 미 제2사단과의 전투지경선 조정으로 서측으로 정면이 2km 확대되면서 미 제38연대로부터 가칠봉(1243)을 인수함과 아울러 그 서북 1.3km 지점의 1211고지 공격 임무를 부여받았다.
당시 이곳은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27사단 제32연개가 전개하고 있었는데 미 제38연대와 국군 제27연대의 진격에 큰 타격을 입고 물러나고 제7연대가 1211고지에 투입되어 새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사단의 공격목표 1211고지는 대우산-가칠봉-매봉(1290)을 잇는 능선상의 한 봉우리로서 가칠봉에서 큰 계곡 건너 서북방에 우뚝 솟은 감제고지다.
(2) 제27연대의 공격(9.5~9.16) : 1211고지 1차 점령
제5사단은 당시에 가칠봉-서희령을 점령하고 있던 제27연대에 1211고지 명령을 내렸다. 연대는 9월 5일 08: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어서 예비인 제35연대를 추진하여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둔화된 좌측으로 투입시켜 12111고지 서남방 A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였다.
매봉
C
*1211 서희령 국5사 = 미1해병
A B
*1243 가칠봉
미2사 = 국5사
사단은 부대배치 조정과 공격준비를 마치고 9월 9일 05:00를 기해 공격을 재개하여 1211고지를 점령했다. 그러나 적의 역습에 고지를 내주고 다시 철수해야 했다.
이날 적은 방어중인 제27-7연대가 패주하자 제13-23연대가 임무교대하여 국군 제5사단을 밀어붙였다. 따라서 제5사단은 가칠봉 부근 진지를 강화하여 새로운 공격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 북한군은 다시 제2사단 17연대가 투입되어 1052-1211고지에 방어력을 보강하고 있었다.
이에 사단장은 적의 방어력이 보강되기 전에 공격하기로 하고 다시 제27연대로 하여금 1211고지를 탈취하라 명령하였다. 9월 16일 04:00시에 공격을 개시한 연대는 그러나 1211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B, C 고지도 확보하지 못하고 다시 가칠봉-서희령선으로 복귀하였다.
(3) 제35연대의 공격(9.17~9.19)
사단은 난공불락의 1211고지를 공격하기 위해 공격연대를 제35연대로 바꾸어 9월 17일 12:00시에 공격을 다시 했다. 그러나 항공폭격에도 변함이 없는 적의 엄체호에서의 저하에 공격은 계속 돈좌되었다. 사단의 화포와 57.75mm 무반동총으로도 적의 거점이 파괴되지 않고 1211고지 진전에 도달했어도 적의 내뿜는 사격에 또 돌격이 저지되고 말기를 반복하였다.
(4) 제35. 제36연대의 공격(9.20~9.22)
이렇게 되자 사단은 2개 연대를 투입하여 남북 양 방향에서 공격하기로 하고 제36연대는 1211고지를 우회하여 서북방향의 C고지를 점형 후에 목표고지를, 제35연대는 남쪽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군의 오폭세례를 입어가며 백병전으로 돌격을 감행했지만 계속하여 돈좌되자 사단장은 공격을 중지하고 헤이스선의 방어에 주력하며 전력을 보강하였다.
(5) 제35연대의 공격(9.28)
사단이 부대를 재편성하여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대인 9월 26일 미 제2사단이 단장의 능선 전투에서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어 미 제10군단장은 적의 측방 위협을 제가하기 위해 국군 제5사단장에게 조속히 1211고지를 점령해 줄것을 요청하였다.
제5사단장은 약 5일간의 정비를 끝낸 제35연대로 9. 28일 6개 편대의 전폭기와 사단 및 군단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10: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여전히 목표직전에서 돈좌되기를 반복하였다.
(6) 사단 총공격(10.1~10.2) : 1211고지 2차 점령
사단은 제35. 36연대를 전면에서 공격하도록 하는 양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다시하여 10월 1일 드디어 1211고지를 점령하였다. 목표 서북방의 C고지까지 한때 점령하였으나 적의, 자욱한 안개 속에서 역습에 10. 2일 07:00시 다시 피탈되고 재탈환 노력도 허사로 끝났다.
이러한 때에 10월 3일, 사단의 좌인접 부대인 미 제38연대의 책임지역을 인수하면서 작전지역이 확대되자 공격을 일단 중단하였다.
(7) 제27연대의 공격(10.8~10.9) : 1211고지 3차 점령
그런데 이 무렵 적은 국군 복장을 하고 정찰대를 대우산까지 침투시켜 아군 병사를 납치해가는 등 정찰 활동을 강화하자 제27연대로 다시 목표를 공격하도록 하였다.
사단은 제35연대와 제36연대에서 각 1개 대대를 목표 좌우측에서 협동공격 하도록 하고 공격을 재개하여 1211고지를 한 때 제27-3대대가 점령하였으나 인접 부대들의 진출이 더디어 적중에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여 결국 포위망을 뚫고 철수하고 말았다
이처럼 제5사단은 1951.9.5일부터 10월 9일까지 1211고지를 세번에 걸쳐 탈취하였으나 적의 역습에 이를 상실하고 결국 10월 14일, 단장의 능선 전투가 종결될 무렵 그 동측의 841고지를 점령하면서 가칠봉능선 부근 전투를 종결하였다.
결국 국군 제5사단은 박달고개-가칠봉-서희령 전선을 지켜 해안분지 확보에 크게 기여하고 10월 20일, 40일간이나 교전과 혈전을 벌인 이 전선을 제3사단에게 인계하고 양양으로 이동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사단이 교체 투입되었지만 제5사단이 확보한 841-가칠봉-서희령선이 지금의 최전방 전선이 되었다.
(8)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가칠봉 고지군에 뒹구는 유해(돌틈에 그대로 남아 있음)
어느날 제3군으로부터 가칠봉에서 홈코트작업이 진행되는데 참여하여 탐사를 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당연히 엄청난 전투지역이기에 이곳으로 달려갔다.
가칠보은 미 제2사단이 먼저 점령을 하여 우리 제5사단이 물려받은 곳이다, 여기서 중요한 곳은 가칠봉에서 서북방 바로 눈앞에 있는 1211고지다. 이 고지에서 가칠봉 접근은 100M달리기와 같다. 바로 지척에 있는 고지며 별다른 장애믈도 없다.
[가칠봉 전투사]
이 가칠봉(1243) 전투는 미 제2사단이 점령한 후 국군 제5사단이 '51.9.4일 인수하여 1211고지 전투에 들어간다. 제5사단은 여기서 약 40일간에 걸쳐 1243 가칠봉은 사수하고, 1211고지는 3번에 걸친 쟁탈전에서 결국 '51.110.9일 물러나 이 전선을 국군 제3사단에게 인계하게 된다. 다시 제3사단은 '51.10.27~10.31일까지 가칠봉 전방 1052고지 및 1211고지 공격을 하고 미군에게 진지를 인계하게 된다.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받지 않겠다]
당시에 국군 제3사단이 진지를 인수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곳곳에 시체가 그대로 널려 있어 냄새가 진동하여 발을 디딜 수 없엇다. 따라서 시체를 처리해 주지 않으면 인계할 수 없다고 버티게 되어 결국 부대 정비 및 교육훈련차 양양으로 내려가야 하는 제5사단은 부대별로 일부 병력을 남기어 인수 인계겸 골짜기 등에 남아 있는 유해를 가매장등의 방법으로 처리하여야 했다. 제5사단은 부대 정비후 '52년 초에 고성 351고지 전투지역으로 들어간다.
가칠봉에 올라서니 바로 북쪽 9부 능선에 GOP철조망이 있고 고지 정상에는 전망대가 있다. 고지 전면은 대부분 폭격으로 부서진 바위군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돌 틈에 남아 있는 유해 그리고 돼지 뼈들!]
우리 탐사반은 완전무장(방탄조끼)을 하고 철책안으로 들어갔다. 현재 하고 있는 방어책임부대의 일은 자라난 나무나 풀을 제거하는 사계청소다. 바로 눈앞에 있는 적 1211고지 GP에서 뻔히 바라 보이는 곳이다. 그러니 혹시나 적의 게릴라가 침투해 들어와 잠복하게 되면 큰 문제가 된다. 그래서 벌목작업을 하는 것이다. '
그런데 들어가서 보니 무서진 돌이 구릉을 이루고 있는데 그 속에 보니 동물뼈가 상당 수 있다. 또 한 곳은 미 제 기름난로 등 수 많은 군용품이 쌓여 있다. 아마도 동계에 쓰던 물품이거나 아니면 적의 기습을 받아 정상에 있던 관측소나 지휘소가 폭파되었을 수도 있다.
부서진 돌 틈을 게속하여 조사하던 중에 드디어 사람뼈를 찾아냈다. 이 고지는 동해안의 함포 사격도 격렬하게 진행 되었던 곳이다. 바로 앞의 1211고지를 탈취하기 위한 항공 및 함포 사격이 멈청나게 진행되었다.
하지만 발굴작전은 불가했다. DMZ안이라 유엔 정전위원회와 협조가 되어야 하고 북한측과도 상호 이해가 되어야 한다. 위험을 안고 병력을 안으로 투입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보이는 돌 위치에 표식을 하고 물러너와야 했다. 그 유해가 비록 아군의 유해든 아니면 적군의 유해든 안타까운 일이었다. 우리는 초코파이와 술 한 잔을 올려 영혼을 위로하는 약식제례를 지내고 현장을 빠져 나왔다.
군복무를 한 제대군인(박춘배외 여러 명)들 제보에 철책을 연하여 철책 안쪽이나 철책을 따라 유해나 유품이 발견되어 여러곳에 가매장하였다는 제보가 많았다. 실제 철책 사계청소를 하는 과정에 너무 많은 유품(트럭으로 2~3대분)이 쏟아지고 알 수 없는 뼈들이 들틈에 있어 DMZ안에 들어가 탐사를 했다. 말뼈부터 돼지 등 동물뼈도 있고 사람뼈도 있지만 워낙 부폐하고 포탄에 작열하여 눈물만 흘렸다.
"하루 빨리 남과 북이 같은 민족이란 국민정서로 비무장 지대에 남아 있는 유해발굴작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나) 고지군이 전사자 무덤이다
사실 지금 가칠봉 위에 관측소가 있다. 이 시설물을 구축 당시에 얼마나 많은 유해와 유품들이 훼손되엇는지 모른다. 지금도 가칠봉 오르는 산악도로 개설된 범면에 개인호나 교통호의 흔적이 그대로 있고 유품도 그대로 잇다. 특히ㅏ가칠봉에서 울지전망대 방향으로 나오다 보면 도로범면이 매우 급경사로 되어 있는데 그 위에 철조망이 있다
[올라가 보면 현재도 전쟁 중이다]
여름철 비가 내리거나, 봄철에 땅이 얼었다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곳에 온갖 전투 유품과 유해가 발견되고 있다. 위험을 무릎쓰고 올라가 보니 철조망이 그물망 처럼 보이고 개인호나 교통호가 살아 있고 눈에 전투화나 철모가 보인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린 바로 알고 있다. 전쟁 당시에 고지다 보니 온갖 장애물을 동원하여 적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육박전이 벌어지고 비행기에서 동해안 함포가 작렬하였으니 피아간에 유해처리는 불가하다. 옆에 있는 개이호나 교통호에 밀어넣는 것이 가장 상책인 것이다. 이 일대가 지뢰밭이니 누가 들어갈 수도 없다.
당시에 전투했던 그대로 70년 세월이 앉아서 가고 있는 이곳은 지금도 전쟁 중이다. 하루빨리 남북 문제가 해결되어 용사님을 발굴하여야 한다.
(다) 참전용사 증언
● 신치상 이등중사(제5-35연) : 얼마나 죽었는지 모른다, 밤에 들어가 아침에 나와 보면 30여 명만 남았다. 본인은 제8사단 소속으로 오대산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했으며 제5사단으로 전속되어 가칠봉부근 전투에 참가 했다.
"얼마나 많은 인원이 전사했고 전사자나 부상자 후송은 제대로 되었는지요?"
"우리 중대는 30명만 살아남았다. 나도 거지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 비행기가 때리고 포병이 때리고 뽀얀 안개속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놈들은 벙커속에 들어앉아 우릴 보고 갈려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돌격을 하라 해서 올라섰는데 아무도 없더라. 그리고 또 우군의 폭격으로도 많이 죽었다. 죽은 사람을 누가 들고 나오겠는가. 계곡마다 시체가 쌓여서 발로 디디면 물컹물컹 미끄러졌다"
● 윤용선(제5사 통신병) : 가칠봉 전투때는 소대당 5~6명, 중대당 20~30명 정도만 생존해 하루살이라 했다. 통신병이라 야전선을 깔기 위해 전장에 돌아다녀야 했다.
● 장지현 (제3-22-3-10중대) : 훈련소에서 20일정도 교육받고 속초로 이동하여 제3사단에 갔다. 한달정도 교육을 받고 존투에 투입되었는데 당시 선임하사가 "우리는 김일성 고지(1211고지(스탈린고지)군의 한 무명고지)를 공격한다"라고 했다. '51년 겨울로 가는 길목인데 고지 정상 100m 전방까지 진출하여 보니 산병호에 아군 시체가 10여구 이상있는데 또다시 우리가 철수하는 과정에 보니 우리를 엄호하던 소대원 산병호에도 많은 유해가 있었는데 누가 처리하지 못했다.
●이재구(제3-23-2대대) : 가칠봉과 스탈린 고지사이에 있는 감자고지 일대에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했고 현장에 수습되지 못하였다. 우리는 '51. 10월 경에 국군 제5사단과 교체했고 나는 탄약반장으로 노무자 10명을 인솔하여 감자고지로 탄약과 식량을 운반하였다.
당시 감자고지에 제2대대가 올라가 있었는데 적이 이 가칠봉과 감자고지 사이에 직사포를 조준하고 우리가 가면 쏘아대는데 맞으면 가루가 되고 말았다. 하루에 3번정도 보급품을 날라야 하는데 정말 생지옥 이었고 참호도 없이 오직 바위에 의존하고 전우의 시체를 쌓아 놓고 있었는데 이 고지에서 대대장도 전사하고 5.6.7중대별로 약 20명식 살았고 제8중대만 중화기 중대로 한 50명 살았다. 당시 유해는 능선부근에 일부 매장되고 이부는 그대로 방치되었다.
● 김선준(제3-11-1-2-1소대장) : 북한군 포격으로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 뒷산 중턱 약수터 부근 일대의 분침호내에 소대원 30~40여 명이 전원 전사하였으나 긴박하여 처리를 못하고 흙만 살짝 덮고 후퇴하였다. '51. 11월경 내금강을 철수하여 건봉사 뒷편으로 이동하였다. 북한군과 교전이 있던 다음날 나는 무전병을 데리고 전방정찰을 나갔는데 포탄이 분침호에 떨어져 다 전사했다.
이 증언은 가칠봉 동쪽 건봉산에 관련된 내용으로 제3사단이 가칠봉 전투 참가전 상황으로 판단됨, 우린 약수터 주위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바로 건봉사 뒷편에서 건봉령으로 오르는 계곡을 따라 오르던지, 아니면 건봉령에 오르는 산악도로를 이용하여 중간쯤 올라가 서쪽으로 들어서면 이 증언지역이 있는 대략의 장소가 있다. 이곳에서 발굴작전을 실시했지만 발굴하지 못했다.
[머리에 귀달린 큰 뱀이 지키고 있는 곳]
또 한 곳으로는 건봉령에서 오소령을 거쳐 서북방향으로 철책으로 내려서면 오소동이 나온다. 오소령에서 발원한 소개곡이 흘러 남강에 합류하는 지점인데 바로 이곳에 이와같은 사연을 안고 있는 곳이 있다. '68년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에 진행된 철책선 따라 벌목작업에 참여했던 업자가 무너지 토치카에 무수한 사람의 뼈가 그대로 있다는 것과 어느날 작업간에 귀달린 큰 뱀을 실제 목격했다는 제보를 해 왔다.
물론 모시고 현장 확인에 들어갔지만 그동안 사람을 보지못한 꿩이 힐끔힐끔 바라보며 여픙로 걸어가고, 살이 찐 살모사가 돌위에서 몸을 말리면서 피하지 않고 우리에게 인사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미확인 지뢰지대고 수풀이 어느정도 우거져 있어 우리가 들어가 확인하기에는 위험이 따라 돌아서 나와야 했다. 더구나 그 이후에 몇번의 큰 수해로 지형이 많이 변했다는 인접 소초 부사관의 말도 있었다.
마. 백석산(1142)전투
(1) 백석산전투 전초전(국군 제7사단, 8.18~9.18)
*1130
*1025 현리
*1054 *1050 사당골
*850 유덕골 천미리 *1088
*1065 *730 *630 건솔리
*백석산1142 *930
*891 *1024 미2사-9연
감우리 *751 서역골 장제대
북한강 *743 *696 *894 국7-3연
*922 *790 궁동 *582
*883
*831 *901
*554
국6 = 국7
국군 제7사단은 1951. 8. 18일, 미 제10군단이 포복작전을 전개할 때 미 제2사단이 군단의 주공으로 해안분지 서측 능선확보의 일환으로 피의 능선 공격작전을 펴자 주공을 지원하기 위해 그 좌측 554고지를 공격하였다.
당시 대치하고 있는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과 제12사단의 일부로써 제32사단은 백석산에 전술지휘소를 설치하고 883-901-554고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전초부대를 추진하여 정찰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7사단장 김용배 준장은 554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중앙의 적 주저항선을 점령해야 한다고 판단하에 8월 18일부터 작전을 개시하여 20일까지 883고지 및 양갈래고지, 901고지를 점령했으나 883-901고지는 다시 피탈되었다.
그런데 사단은 이 무렵 우인접 미 제2사단에 배속된 국5-36연대가 983(수리봉:피의능선)고지를 탈취했다 다시 피탈되는 등 쟁탈전을 벌임에 따라 서측방 위협을 제거하기 위하여 883-901고지 전투를 접어두고 먼저 군단에서 부여한 목표 554고지 남쪽 2km 536고지를 8월 26일에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8월 말 군단의 피의 능선 공격이 부진하자 이곳으로 집중되는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 미 제2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사단은 사단 동측방의 901-554고지를 공격하여 9월 2일 점령하였다.
9월에 접어들어 901-554고지를 점령하자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군단의 밀어올리기 작전개념에 따라 다시 883고지를 탈취하기 위하여 9월 7일부터 3개연대를 투입하여 9월 18일에 제3연대가 883고지를 점령하였다.
이와 같이 국군 제7사단은 8월 18일부터 9월 18일까지 1개월의 격전을 치르며 892-883-901선의 적 주저항선을 점령하면서 병력이 70%수준으로 떨어졌다.
(2) 백석산전투 제1차전(국군 제7사단)
미 제10군단장은 국군 제7사단의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보고, 9월 20일에 국군 제8사단과 교대하도록 조치하였다. 제8사단은 노전평 부근의 방어선을 미 제1해병사단에 인계하고 9월 23일까지 인수준비를 완료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에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고 있는 미 제2사단이 1주일이 경과하여도 탈취를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미 제2사단은 백석산 동남쪽 2km지점의 1024고지를 공격하여 적의 전투력을 분산시켜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단장은 백석산을 점령하지 않고는 적의 분산 효과가 미흠할 것으로 판단하여 교대 명령이 주어진 국군 제7사단에게 백석산 공격명령을 하달하였다.
이때 제7사단은 풀무터-궁골까지, 격전으로 점령한 892-743-883-901고지를 연하여 10km 정면에 좌로부터 제5. 8. 3연대순으로 3개 연대를 모두 전방에 배치하였다.
대치중인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과 일부 제12사단은 883고지와 901고지에서 물러났지만 백석산을 정점으로 결사 고수할 태세였다.
백석산은 화천저수지는 물론 단장의 능선까지 감제관측이 가능하고 적은 탈취당하면 북쪽의 어은산(1277) 남쪽까지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격명령을 받은 이성가 사단장은 제8연대를 주공으로 883-백석산으로, 제3연대는 901고지에서 우측 능선을 타고 공격하되, 접근로상의 1024고지를 공격중인 미 제2-9연대가 이 고지를 점령할 때까지는 제8연대의 공격을 지원토록 하였다.
사단은 9월 24일 공격을 개시하여 제8연대가 목표 직후방 800m지점의 894고지를 점령했다. 제3연대는 동측에서 9월 25일 미 제2-9연대의 1024고지 공격에 호응하여 고지를 탈취할 무렵 연대는 서측의 무명고지를 점령하였다. 9월 26일에는 양개 연대로 주봉 공격작전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군단에서 28일에 제8사단과 현 임무를 교대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남은 기간에 백석산을 탈환하려 공격을 개시하여, 우측 제3연대가 주봉의 남동쪽 500m 1060고지를 점령하고 정상으로 치달았으나 저적의 포격에 1060고지로 물러났다.
제8연대는 894고지에서 공격하여 주봉의 두 봉우리중 좌측 봉우리를 탈취하였다. 다음 우측 봉우리를 공격하던 중에 제3연대를 지원하던 미 전차소대의 직격탄이 공격대열에 작열하여 순식간에 많은 피해를 입고 적의 역습에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27일 주봉 탈취를 위한 재공격을 준비 하던 중에 적의 역습으로 철수하였으며, 우측의 제3연대도 미군이 1024고지를 적의 역습에 피탈당하여 연대 예비대를 투입하여 재탈환한 후 미군에게 인계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제7사단은 9월 28일 12:00시에 제8사단에게 인계하고 육본예비로 전환하여 야전훈련소에 입소하였다.
(3) 백석산전투 제2차전(국군 제8사단)
제8사단장 최영희 준장은 노전평 부근의 작전지역을 좌인접 미 제1해병사단에게 인계하고 1951. 9.28일 제7사단으로부터 백석산 공격을 인계받았다. 사단은 제21.16.10연대를 북한강 물어구로부터 문등리계곡의 궁골까지 배치하되 제10연대로 백석산을 공격할 복안이었다.
한편 공교롭게도 이날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32사단이 전투피로로 물러나고 제12사단이 새로이 투입되었다. 국군 제8-10연대는 9월 30일 배속된 대전차공격대대를 배속받아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제7사단의 경우처럼 비행기 폭격과 포병화력의 우세속에서도 주봉의 탈환은 탈환과 피탈을 반복하다 2일간의 백병전에서 결국 승리하여 완전 탈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적은 최소한 5~10km 후방으로 밀려나 1220고지와 어은산(1277)으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으며 우측의 단장의 능선과 문등리 계곡을 감제할 수 있어 주공 사단의 작전에 크게 기여 하였다
국군 제8사단은 바로 군단으로부터 1050-1220-어은산에 이르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서측의 제9군단과 전선 균형을 이루며, 동측방의 미 제2사단의 단장의 능선 전투를 측방에서 지원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사단은 3단계로 구분하여 1단계 : 1050고지(백석산 북서쪽 3km)선, 제2단계 : 1090(서) 고지선, 제3단계 : 1090고지(북) (백석산 북서족 7km)선을 확보하기로 계획하여 10월 6일 제1단계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2일까지 1050-고지-726고지(양의대) 선으로 진출했다.
그런데 이때 적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10월 10일부로 패퇴하던 북한군 제5군단이 후방으로 철수하고 중공군 제20병단 예하 제68군이 출현한 곳이다. 이들은 1951년 5월 21일 압록강을 넘어 원산방어에 임하다가 북한군이 패주하자 어은산-문등리로 투입되어 아군의 전진을 기도하였다. 제204사단의 제612 및 제611연대가 국군의 제8사단 정면 백석산 북쪽으로, 제610연대가 미 제2사단 정면 문등리 계곡으로 투입되어 아군과 조우하였다.
결과적으로 적의 교대간 혼란한 틈에 제8사단은 10월 13일 2단계 작전을 개시하여 10월 15일에 748-도피막-1090(서) 선으로 진출하였고 미 제2사단이 탈출한 1220고지를 10월 18일에 인수받아 이곳을 발판으로 최종목표인 1090고지(북) 공격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결국 사단은 10월 28일까지 1090고지(남.북)를 차례로 탈취하고 북한강 동안의 319-938-1090고지(북)선을 확보 하였다. 이러써 제8사단은 백석산 탈취 후 10월6일부터 28일까지 23일간 방어선을 북한강상의 황병동-통선골-바우골(암동)-1090고지(북), 그리고 동으로 안골(내동)로 이어지는 일련의 큰 계곡 남쪽의 횡격실 능선으로 추진하여 군단의 방호력 개선의 목표를 달성하고 작전을 종료하였다.
(4)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가) 이과장, 여기가 내가 뢰종이를 묻은 곳이야!(원주 어느 교회 장로이신 김낙연 제7사단 참전용사님의 현장 증언)
백석산 유해발굴을 위해 당시 전투를 실제로 한 용사님을 모시고 백석산을 올라 서측 능선으로 내려서면서 탐사를 했다. '01년도에 원주지역 교회의 장로이신 용사님은 신사화 구두를 싣고 그대로 산악지형 탐사에 나섰다. 나는 낙엽에 미끄러워 제대로 걷지를 못하는데 용사님은 정말 잘도 걸었다. 그런다 어느 장소를 지나는데 새파란 뱀이 나타났다. 살모사인데 이슬을 먹고 자라서인지 너무 색까리 곱다. 순간 용사님이 큰 돌을 찾는다. 없으니까 나뭇가지를 하나 꺽었다.
[ "용사님, 안돼.죽이지 마세요. 차렷 호국영령님께 경례!"]
나는 죽이면 안된다고 소리질렀다. 용사님이 놀라서 멈칫한다. '선배님 내가 탐사활동하다보니 뱀이 나오는 곳ㅇ에는 분명 유해가 있었습니다. 무슨 연관인지는 모르지만 죽이면 안됩니다. 대신 기도하십시오. 좋은 곳에 태어나고 여기에 있거들랑 우리가 발굴할테니 땅속에서 나오시라 기도하시는 것이 정답입니다. 나의 요란한 말에 용사님도 기도를 시작한다. 그런데 용사님의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그 뱀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여기가 뢰종이를 묻은 곳이야!]
얼마를 내려섰는데 용사님이 이곳 저곳을 살피시더니 분명 당시 분대원인 뢰종이를 묻은 장소라 한다. 그리고 우린 그 장소에서 실제로 인식표에 "김뢰종"이 새겨진 유해를 발굴했고 그 단서로 유가족을 추적하여 DNA 감식결과 일치하였다. 당시는 전후 50년인데 기막힌 결과다. 본인이 묻은 전우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낸 것이 혹시나 정말 그 산 정상에서 만난 그 뱀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런지... .
[산속에 공산군 박격포탄이 한 트럭 분이 있다]
백석산 전투는 국군 제7사단, 그리고 8사단이 무려 2주이상 이상 전투를 한 곳이다. 전차가 동원되고 비행기며 포병 화력이 집중된 곳이다. 탐사간 산속을 들여다 보니 적이 가져가지 못한 박격포탄이 얼마나 많은지 한 트럭분은 충분히 된다. 더욱이 선점중대 오르는 길을 따라 가다 좌측으로 들어가 백석산 능선을 오르는 입구에 가면 당시에 전투근무지원 시설이 있었는지 유개호로 구축된 호가 군데 군데 교통호로 연결되고 전투 유품이 호 안에 가득하다.
[전사 기록에 피해 현황이 없다]
이곳도 가칠봉 처럼 전면 발굴을 하면 엄청난 유해가 발굴될 곳이다. 실제 '00년도부터 발굴된 유해가 500명이 넘어간다. 발굴되는 모습도 대부분 부분 유해로 발굴된다. 그 이유는 포탄이 작렬한 결과이다. 그런데 주요 피해현황에 이곳 백석산전투에 현황이 제7사단이나 8사단이 없다. 고의적으로 누락한 곳인지 잘못 종합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작전의 주도권을 갔고 있었는데도 그런 기록이 부재하다는 것은 납득이 어렵다. 이런 기본적인 교육이 지금부터라도 되어야 한다.
(나) 백석산 주봉은 완전 초토화 되었지만 그 포연 속에 너무 많은 유해가 조각조각 되어 묻혀 있었다.
능선일대가 미확인 지뢰지대로 홈코트 작업 후에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다. 보이는 호가 별로 없어서 처음에는 별로 발굴유해가 없는 것으로 알았다. 하지만 남북으로 뻗어내리고 동쪽에서 주봉으로 오르는 공격루트에 분명 아군의 탱크오사격으로 전사자가 발생도 하고 유해가 있을 것으로 판단 되는데 유해가 없다. 다만 정상에서 바로 남쪽 고지군에는 인위적인 지형변화가 적었다. 철조망으로 보호되고 있었는데 이 곳에서 다수의 국군 유해를 발굴했다. 당시 이곳에 위생병으로 유해를 가매장한 참전용사님이 현장에 와서 증언한 곳이다
"선배님, 어디서 있었습니까?"
"우리는 고지 정상이 보이는 곳에 후사면에서 구호소를 설치하고 노무자들이 들고 오는 전사자를 확인하고 내려보냈어요. 화장터가 능선 밑(지금의 대대본부 앞 부분)에 있었어요"
"선배님 당시에 부상당한 군인은 어떻게 치료하셨습니까?"
"그때는 별 약이 없어요. 몰핀 주사가 전부다 보면 됩니다. 주사 한방 놓고 좀 기다리다 내려보낼 부상병은 노무자들이 연대 구호소로 보내집니다. 그렇지만 부상자가 워낙 많았는데 그 중에는 사실 말하기 좀 곤란한데 꾀병환자들이 많았고 본인이 자해 등을 해서 사실 문제가 많았어요. 어떤 경우는 높은 간부가 정신상태가 이상해져서 행동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요"
[살아 있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혹시 이곳 구호소 주변에 묻혀진 전사자는 없을까요?"
"있을 겁니다. 정말 죄송한 이야기인데 제대로 부상자나 전사자를 처리하지 못하고 주변에 포탄이 떨어진 큰 구덩이나 교통호 등이 있으면 그 곳에 잠시 가매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가 9월 경인데 날씨가 워낙 덥기도하고 때로는 적이 기습하여 혼비백산되어 그대로 방치하다 보니 그대로 묻혀있을거라 봅니다. 지금 생각하면 전우들에게 죄송하고 또 죄송합니다. 살아 있는 우리가 죄인입니다"
우리는 1000고지가 넘는 이곳 일대에서 150여구가 발굴하게 된다. 또한 우측 능선의 1026고지군은 한때 미 제2사단의 책임지역인데 실제 미군 2명이 발굴되었다.
[정상 고지군에 진지 공사간 수없이 많은 뼈들이 있어 그대로 삽질하여 버렸다]
어느날 양구읍에서 저녁 식사 중에 예비역 출신을 한 명 만나게 되었다. 본인이 제169포병대대 근무한 상사라 한다. 본인이 60년 대에 백석산 중턱에 있는 포병부대에서 근무하며 고지에 올라 진지 공사를 하면서 많은 유해를 보았다는 것이다.
" 선배님, 저도 포병입니다. 포병이 어떻게 산 굊 정상에 진지공사를 하셧습니까?"
"지금 선점 중대를 지나 고지 정상으로 올라 갈 수 있습니다. 105밀리 포병이라 그 곳에 차량으로 올라가도록 길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에 포상이나 차량호를 만드는 공사를 주기적으로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직접 공사를 하면서 노출된 유해를 보셨는지요?"
"참 지금같으면 그렇게 하지 않했을건데 솔직히 작업하는데 뼈가 보이면 삽질하여 버렸습니다. 어떤 병사는 그걸 삽으로 건드리다 보니 부서지는데 그대로 흙과같이 포상이나 차량호 밖으로 파내버립니다."
"그럼 지금 고지 정상 어느 장소에도 유해가 있다고 봐야겟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데나 파보면 나올 수 있습니다"
[정말 내가 고지정상에서 흙표면에 나와 있는 부분유해를 발견했고, 전 구역을 발굴하여 500여 구 이상을 발굴했다]
정말 기가 막혔다. 1000미터가 넘는 고지 정상에 몇년간 계속하여 발굴하는데 흙속에 그저 묻혀있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이런 장소가 저 남쪽 영천땅 진격산부터 다부동 328고지 일대에서 이런 유해는 많이도 발굴했다. 하지만 산 고지 정상 부분이 전부 이렇게 훼손되어 버린 유해를 발굴하는 것은 보기드물다. 고성의 상봉이나 저항령의 유해는 모두 돌틈에 기여서 부분 유해로 발굴된다. 그 이유는 폭격으로 그 곳에 오른 모두가 육신이 파열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곳 백석산 정상 지역일대는 얼마나 더 발굴해야 끝이 날지... .
(다) "내가 미군 군번줄 20개를 발굴하여 사기꾼에게 넘겼다" : 어느 지역주민의 제보(송현리의 변천수.김창순 황영범등 다수)
나는 어느날에 양갈래봉에 관련된 증언을 하시던 제7사단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방산을 찾았다. 방산지역은 백석산 일대 발굴위한 탐사를 위해 아마도 지난 20여년 동안 한 2개월 이상은 머물렀을 것이다.
양갈래봉은 그 말대로 조금은 해학적 의미가 깃들여 있다. 아무리 전쟁통이지만 젊은이들이 목숨을 걸고 움직이지만 육체적 본능은 언제나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니 전쟁을 하지 안고서 전쟁을 말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용사님의 증언을 몇번이나 받아 왔다. 그런 어느날도 방산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한 어르신이 우리를 계속 지켜보고 게신다. 그래서 내가 대충 식사를 끝나는 싯점에 옆으로 다가서서 물어 보았다.
"어르신 무슨 하실 말씀 있으세요. 저희는 구군 전사자 유해발굴단인데 오늘 당시 이곳에서 전투한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와서 증언을 들었습니다. 저기 앉아 계시는 분이 당시 참전용사님입니다"
"그러세요, 나는 이곳이 고향인데 전쟁 때도 이곳에 있었는데 12살이었습니다. 어디서 전쟁 했는지는 그래서 나도 좀 알고 있어요."
"그러세요. 그러시면 저기 자리로 옮겨서 커피 한잔 하시면서 말씀을 한번 나눠보시겠어요?"
[내가 미군 군번줄 20개를 발굴하여 사기꾼에게 넘겼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미군 군번줄 20개를 발굴하여 사기꾼에게 넘겼습니다. 전쟁 끝나고 얼마 돼서 그러니까 휴전이 돼고 군대갔다 왔으니까 60년 초쯤 됩니다"
"그러세요, 그러시면 그 군번줄을 어떻게 했습니까, 혹시 그 장소를 알고 계시는지요?"
"그럼요, 군대갔다 왔는데 그리고 여기가 내 고향인데 밥먹듯이 그 장소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탄피며 때로는 소총이나 따발총도 발굴해서 파출소에 갔다 주었는데요"
우리는 자리를 자연스럽게 합석하여 대화를 이어갔다. 어떻게 보면 나보다도 이곳 군인보다도 지형을 더 잘알고 있다. 가장 핵심적인 제보는 지금의 궁골대대 대대 위로 올라서면 백석산에 이르는 지맥인데 솔고개라는 지역명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소고지가 나오는데 바로 그 일대였다. 솔고개-1016-백석산으로 올라선다.
참전용사님과 고향사람간에 대화가 이어졌다
'참전용사 : 혹시 양갈래 고지를 아시는지. 우리가 그 곳에서 녹아버렷거든요. 그런데 밖에서 이렇게보니 숲이 우거져서 잘 모르겠어요. 여기는 아니고 좀더 면소재지쪽에서 오천터널 쪽으로 가자 보면 옛날에 전쟁 끝나고 여기 평화의 댐에 한번 오면서 지나친 적이 있어요"
"고향주민 : 맞습니다. 지금은 양갈래라는 지명은 없고요. 당시에 군인들이 쓰던 지명 이름이고 지금은 현리위인 것 같습니다. 오천터널에서 올라서면 쉽게 접근이 가능한데 우리는 주로 백석산일대에서 유품을 캐서 내려왔고, 현리 뒷산은 잘가지 않았습니다. 그 때도 지역끼리 서로 침범하지않으려는 것이 있었어요."
내가 얼른 지도를 펴서 놓고 지역을 확인했다. 금악리 오천 터널, 현리 바로 그 위에 917고지가 있고 전투시에도 그 능선을 따라 883고지-백석산으로 올랐다고 설명해 드렸다. 우리가 이곳을 이미 탐사를 진행했고 발굴계획이 검토되고 있는 싯점이었다.
"참전용사 : 조금전에 들으니 미군인식표를 많이 발굴했다고 들었는데 우리쪽에는 미군은 없었어요."
"네, 선배님 미군은 그 당시에 서측에는 없었고 지금 우리가 요기 송현리.현리지역인데 여기서 동측으로 두타연방향 못미쳐 건솔리지역으로 해서 철책에 오르게 됩니다. 이 진출입로를 전투 지경선으로 우측은 미 제2사단이고 우측이 국군 제7사단이 있다 제8사단이 들어오게 됩니다. 이 과정에 미군이 전투지경선을 조정하여 일시적으로 우측까지 책임을 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 백석산 밑부분까지 올라 오기도 합니다."
[그 미군 인식표를 동네 형이 서울에 나가 있었는데 어느날 그 형을 추석날 동네에서 만났는데 그걸 가져가 사라졌다]
기막힌 제보였다. 아니 인식표를 달라고 하면서 서울에 가서 그 당시 미군에게 연결하여 포상금을 준다고 하더니 웬걸 가지고 가더니 그 후로 한번도 시골에 오지 않았단다. 들리는 소문으로 본인이 미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사기성 관련내용을 종종 듣기는 했는데 게중에 가장 특이한 제보였다.
[당시에 교통호에서 수 많은 유해가 있었고, 미군이 그 후로 와서 많이 발굴해 갔다]
"그럼 인식표 발굴할 때 나오는 유해는 어떻게 했습니까?"
"고향주민 : 당시는 그런 뭐 분위기가 아니라서 그냥 그 주변에 다시 가매장되거나 버려지고 말았다고 봐야 합니다. 인식표가 나온 곳은 바로 대대 뒷산이지만 철책가는 길 우측산에도 우린 미군이 왔다 갔다해서 올라가 많은 싵탄과 탄피 등을 발굴해 왔어요"
"맞습니다. 미 제2사단 제9연대가 있었습니다"
"혹시 미군이 와서 발굴은 안했습니까?"
"고향주민 : 나는 이곳에 50대까지 살다가 서울에 딸집에 가서 살고 있는데 한참은 그동안에도 밖에 나가 있어서 정확히는 잘 모르지만 수시로 미군이 와서 동네사람들을 데리고 발굴지역들을 들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발굴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서 현장이 보이는 장소를 차량으로 이동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아저씨는 떠나고 나는 참전용사님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왔다.
[신원확인 미군 유해 2구, 국군 유해 10여구 ('15년 기준) 발굴]
백석산 일대에서 우리는 정말 500여 구의 유해뿐만 아니라 신원확인 유해도 많이 발굴했다(일상 김뢰종, 하사 김철웅, 일병 최병구, 이중 이천우. 송을수 등)
미군은 한국에 들어와 유해발굴을 전쟁 중에도 실시했고, 전후에도 지금까지 실시하고 있다. 그들은 "전우가 집으로 들어 올 때까지 찾아간다"고 한다 실제 하와이에 있는 발굴본부의 구호가 그렇다.
[미군의 유해발굴 현장도 바뀌고 있다]
하지만 약간 고약한 점이 있다. 우리를 악의 구렁에서 구원해 준 것은 맞다. 그런데 태평양지역 북방 자유의 보루인 대한민국이 이만큰 성장하고 그 안보축을 담당하는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 과거에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세계에서 공식적인 국가가 통제하는 유해발굴단을 갖추고 있는 미국을 제외한 유일한 국가다.
그런데 과거에는 어떻게 미군이 발굴작업을 했느냐하면, 발굴을 하다 국군이나 북한군 또는 북한군이 나오면 돌 그 일대에 가매장 해버리고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보호조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2,000년부터 우리와 협조된 유해발굴을 하면서 이제야 과거 자료도 알려주고 필요시 합동발굴도 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날아든 법정 출석 협조 요청서가 왔다 ㅎ ㅎ ㅎ]
이천년 후반에 법원서 출두협조 요청서가 왔다. 무엇인가 알아보니 바로 백석산 탐사간 송현링에서 만났던 고향 주민 아저씨가 나를 지명한 것이란다. 그 아저씨가 서울의 딸 집에 살고 있다고 했는데 그 아파트에 살면서 아랫층 아주머니와 눈이 맞아버린 것이다. 그 아주머니는 의사 부인이었다. 남편이 그걸 인지하여 이혼 소송이 벌어지고 있고, 거기에 보면 이 아저씨가 양구에 가던 날에 이 아주머니와 외부로 바람피러 갔다며 고발내용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아저씨는 나와 함께 유해발굴 탐사 협조하러 갔다고 증언하고 불륜하러 가지 안했다고 하니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나를 지명한 것이다.
나는 웃기는 일이지만 법원과 협조하여 의견서를 내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는 전후 사정은 모른다. 분명한 것은 유해발굴 위해 함께 그 일대를 잠시 돌아다닌 것은 맞다.
(라) DMZ 안에서 발굴된 " 7사단 마크와 수푼에 새겨진 이태윤, 그리고 달려온 대구의 동생들"
백석산을 넘어가는 철책선 고지의 높이가 1220지다. 여기서 북으로 계속오르면 이 지역에서 가장 저명한 지형지물인 1277고지 어은산이다. 이곳은 휴전 말기에 우리가 적에게 넘겨준 곳이다. 바루 앞 DMZ에 걸쳐서 북으로는 북1090고지 남으로는 남 1090 크리스머스 고지가 남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서 남 1090굊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우측능선에서 사람뼈로 보이는 것이 길에 덜어졌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DMZ안이라 절차를 거쳐 조사를 가보니 사람뼈가 분명했다. 전혀 갉힌 흔적도 없이 깨끗하다. 그러나 주변이 모두 미확인지뢰지대라 들어갈 수도 없다. 그래서 법면을 자세히 보니 저 위 낙엽군락속에 뭔가 보이는데 뼈다 .
안전조치를 하고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군용스푼에 이름이 영문으로 새겨져 있다. 가슴 호주머니에 꽂혀 있다. 아마도 공격하여 올라가는 전우이든 후퇴하는 전우이든 전우가 바로 처리를 못하니 그 징표를 곶아준 모양이다. 어깨 부분에는 선명한 부대 마크가 철재로 있었는데 지금의 7사단 마크다. 실제 제8사단이 진격간에 교체하여 빠지는 제7사단 일부 부대가 지원을 나와 있다 한다.
부대에ㅐ 연락하여 전사자 명부를 확인하여 그 유족을 찾으니 대궁에 동생들이 살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발굴하여 뼈의 시료를 채취하여 신원확인 절차를 거쳐서 유족에게 통보하는 것이 옳은 순서였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유족이 현장을 보고싶다하여 전방으로 모셔와서 철책앞에서 간단한 약식제례를 들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인 DNA 검사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 집안의 내력을 물어 볼 수도 없다. 전쟁통에 여러변수가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 주소다.
나는 이 유해발굴을 통제하면서 그 주변을 확인하고 싶었다. 들어가지말라고 하였지만 두 눈을 크게 뜨고 한 발을 옮겨보았다. 그리고 또 한발을 옮긴 것이 우와 10M는 들어가 버렸다. 그렇다고 야전부대에 알려 구조작전을 요청할 수도 없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최단거리를 택하여 벗어나는 이동을 개시한다.
[ "과장님 움직이지 마세요, 지뢰밭에 들어간 나는 죽다 살았다"]
식은 담이 흐르고 한ㄴ 발을 내딛는데 한 1년은 시간이 가는 느낌이다. 손으로 탐치법을 적용하여 살피고 발을 내딛고 주변에는 탄통부터 철모. 반합. 탄창 등이 널려 낙엽속에서 세월을 안고 있다. 그러니 그 속에 얼마나 많은 유해가 있을 지 안타까움이 또한 뇌리를 스친다. 진주출신 운전병 김병장이 놀라서 지켜본다. 김병장 혹시라도 문제가 생기면 "과장은 한구의 유해라도 빨리 발굴하기 위해 들어갔다"라고 대변해 주라며 당부를 했다. 드디어 약 2시간의 사투속에서 길이 보이는 낭떠러지에 이르러 매달려 있는 로프를 이용하여 밖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호국 용사님 감사합니다"
(마) 참전용사 / 지역 주민 증언과 제보
●석금호 용사(제8-16-1대대) : 9월 말 양갈래 고지에서 전투했다. 적들은 아예 땅에다 발을 묶고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얼마나 죽었는지 당시 교통호에 시체가 가득했다.
● 진병규(지역주민) : 백석산에 약초나 나물뜯으러 몰래 들 어갔다. 큰 바위 밑에 M1소총을 가지고 죽어간 유해를 보았고 고인이 된 동네 친구는 해골 30여 개를 끈으로 매달아 자기 앞에 묶어놓고 아침마다 씻겼다.
● 나는 노무자로 양갈래고지에 갔다(제보) : 칡순으로 턱에다 걸어 끌고 내려오기도 하고 단가에 들고 오기도 하고 그러다 적의 기습이나 포탄 작열에 내버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나는 분명 참전했는데 그 당시에 기록이 없다. 인후보증을 해 줄 사람도 없다. 현장에서 내가 증명할테니 이과장이 증인이 되어 달라" 우리와 같이 1박 2일 동행(앞에서 이미 언급함)
바. 단장의 능선전투
*961
문등리 *871
*1211
*605 *851 *656 사태리 가칠봉 1243
*850 *1052
*756 *841
*931 *784
*868
*702
건솔리 *894
*666
새건배 *752 비아리 미2사 국5사
*867 이목정 *대우산 1178
*554 피의 능선 비득고개
미9연 미23연
국7사 미2사 도솔산
(1) 제1차전('51.9.13~9.26)
미 제2사단은 피의 능선 전투에서 국군 제5-36연대에 뒤이어 사단의 총역량으로 9월 5일 피의 능선을 탈취하였다. 이 전투 후 사단은 9월 8일자 군의 "제한공세 : 밀어올리기 작전" 방참에 따라 피의 능선 북쪽 894-931-851고지로 구성된 종격실의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게 되었다.
단장의 능선고지 중에 894고지와 주봉인 931고지와 문등리 계곡에는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사단이 배치 되어 있었고, 북쪽의 851고지와 사태리 계곡은 제2군단 예하 제13사단이 방어 중에 있었다.
북한군은 이미 피의 능선전투가 진행 하는 동안 이곳에 엄체호를 구축하고 피의 능선과 같은 난공불락의 요새화 진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10월 10일에 중공군 제68군이 북한군 제5군단과 교대하며 제204사단과 제202사단의 1개 연대가 이 전선에 투입 되었다.
군단은 이 능선의 확보로 문등리. 사태리 계곡의 작전로를 장악하고 전선의 만곡부 제거라는 당초의 군단작전 목표를 달성함은 물론 적을 어은산(1277)-매봉(1290)-간무봉(1358)선가지 구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미 제2사단은 9월 11일 제9연대(배속:프랑스대대)로 하여금 피의 능선을 방어토록 하고 제23연대로 9월 23일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80여문의 포가 동원된 공격준비사격에 이어 06:00부터 작전이 개시되었다.
공격을 개시한 제23-3대대는 선두 중대인 L중대가 목표 850고지까지 진출하였으나 야간에 적의 재역습으로 중대원 전원이 전사하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사단장은 공격을 동쪽과 남쪽 2개 방향에서 진행토록 하여 제9연대를 남쪽에서 공격하도록 하였다. 제9연대가 남쪽에서 891고지를 점령한 가운데 적의 역습을 물리치고 있을 대에 우측의 프랑스 대대는 841-1052고지 공격에 나섰으나 피해만 속출하고 점령하지 못했다.
주봉이 931고지로 확인된 가운데 16일부터 제23연대는 전 대대를 투입하여 북쪽의 850고지, 남쪽에서, 동쪽에서 931고지를 공격하였으나 적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때 그 동쪽의 사태리 계곡으로 진출중인 프랑스대대가 사태리로 진출하여 여기서 전차포로 북쪽 850고지와 동쪽 931고지를 지원하게 되어 21일 제3대대가 중간 목표인 북쪽의 850고지를 점령하게 되었다.
다음날인 9월 22일 제23연대는 다시 제1대대가 프랑스 대대와 같이 남쪽에서, 제2대대는 북쪽에서 931고지를 공격하고 제3대대는 850고지에서 그 북쪽 851고지에서 적의 증원을 차단하였다. 그러나 목표탈환에는 실패하였다.
9월 23일, 제9연대가 단장의 능선에 대한 서측방으로부터의 증원을 차단하기 위해 문등리계곡 서측의 1024고지를 공격하는 가운데 931고지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고 있었다. 결국 제1대대가 기회를 포착하여 고지를 점령하느데 성공했다.
그러나 북한군 제12-3연대의 재역습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이렇게 하여 전방 대대들의 전투력 소모가 크게 되자 연대장은 프랑스 대대를 931고지 공격에 투입하여 9월 23일 공격을 다시 개시하였으나 여전히 목전에서 돈좓되어 철수하게 되었다.
제23연대장은 사단장에게 931고지로 유입되는 적의 증원을 차단시켜 달라고 건의하게 된다. 그동안 2주간의 전투에서 사단의 손실은1,670여 명이고, 그중에 제23연대의 사상자가 950명이나 되었다.
(2) 제2차전(10.5~10.13)
사단장은 지금까지의 작전을 대실패로 규정하고 10월 5일 3개 연대로 공격을 개시하여 제23연대(프랑스 대대 배속)는 931고지를, 제38연대(네덜란드 대대 배속)는 931고지 공격의 양공으로서 문등리 계곡 좌우측 적을 척결하고 공병대대의 도초개척작전을 엄호하게 하였다. 제9연대는 서측방의 867-1005고지를 점령토록 하고 하였다.
제2전투공병대대는 10월 5일까지 고방산리-이목정 간의 작전로를 개척한 다음 , 이목정-건솔리 간 수입천 도로변의 장애물을 제거하고 제72전차대대가 공병이 개척한 도로를 따라 문등리로 돌진하여 적의 화력거점을 파괴하여 공격부대를 지원하도록 하였다.
이 공격작전에 성패여부는 도로 개통에 있었다. 제72전차대대 60대의 기동여부가 주요핵심사항으로 대두된 가운데 10월 5일 21:30분에 300문의 포가 불을 뿜는 공격준비사격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미 제1해병사단의 비행단도 문등리계곡에 야간 항공폭격을 실시하였다.
제23연대는 제2대대가(예비로 3대대) 894고지에서 931고지로, 프랑스 대대는 북에서 남으로 931고지를, 제1대대는 북쪽의 851고지를 공격하였다. 화염방사기와 수류탄으로 적의 벙커를 제압하고 10월 6일 새벽 드디어 고지를 점령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사단의 중앙 제38연대는 새건배-문등리 간의 계곡을 통제하는 고지군을 점령하면서 공병의 도로개척작전을 엄호하여 9일까지 도로개척이 완료되었다.
10월 10일부터는 마지막 북쪽의 851고지 공격을 전차대대의 참여하에 제38연대 보병 L중대와 사단 공병소대, 제23연대 전차중대와 프랑스 대대의 특수임무부대가 사태리로 진입하여 851고지를 양측방에서 차단하고 공격을 하였다.
당시 이고지는 중공군 제68군 제204사단이 문등리-단장의 능선상의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사단과 교대하여 투입되고 있었다. 제72전차 대대는 불의에 조우된 중공군을 제압하여 큰 손실을 입힘은 물론 851고지 서측으로 이어지는 보급로 및 보충선을 차단하였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엄체호에서 죽어가면서도 제1대대와 프랑스 대대의 공격에 저항하였지만 결국 프랑스 대대가 10월 13일 동이 틀 무렵 851고지를 점령하였다.
한편 제38연대도 서측방에서 네덜란드 대대의 지원을 받으며 974고지를 전령하고 10월 15일 백석산과 어은산 중간 지점의 1220고지까지 점령하여 약 1개월의 전투에서 전선을 1220-문등리-가칠봉까지 추진하였다.
단장의 능선전투는 피의 능선전투와 같이 유엔군이 하계 및 추계공세 기간중의 전투 중 가장 격렬하게 치러진 전투로서 미 제2사단은 이 전투기간(9.13~10.13)에 3,700명의 손실을 입었고 적은 북한군 제6.12.13사단과 중공군 제204사단이 무려 21,000명의 피해를 본 것으로 추산되었다.
이 단장의 능선 전투를 끝으로 미 제10군단은 전선을 931고지(북한강 동쪽)-1090-851(문등리)-가칠봉-802-884(소양강 계곡 동쪽)선에서 정리함으로서 전선의 만곡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
이 단장의 능선은 능선 자체 모두가 DMZ선에 걸려 있어 실질적인 발굴작전은 수행하지 못했다. 다만 차후 발굴을 위한 현장 탐사는 2회에 걸쳐 실시하였다.
이곳 일대는 너무 치열한 전투가 미군과 공산군간에 벌어져 항공폭격과 포병화력이 집중으로 이루어져 산악 능선 주변에 분화구같은 대형 참호같은 호들이 수없이 산재하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야 유해처리가 되었다 치더라도 북한군과 중공군이 몇천명이 죽어간 곳이라 웬만한 곳을 아무데나 기초굴토해 보면 전투유품이 산더미처럼 발굴되는 모습에 놀랐다.
지금 GOP철책으로부터 남쪽으로 종결실 능선이 발달하였고 차량이 그 위까지 접근이 가능하다. 능선자체가 남북으로 경계선을 걸치고 있다.
3. 남강으로의 진출
국군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은 군이 하계공세로 8월 중순에 "포복작전"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수도사단을 서, 제11사단을 중앙, 제3사단을 동으로 하여 산머리곡산으로부터 향로봉 산맥을 따라 거진가지의 신캔사스선을 방어중이었으며, 전선이 동부가 서부보다 10km 더 올라가 있는 상황이었다.
군단은 군사령부로부터 미 제10군단과 함께 포복작전에 참여, 서화계곡 동측 "낚시바늘(J)"의 줄기와 머리에 해당하는 924(향로봉 서북 7km)고지와 884고지(924고지 북 3km)를 탈취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이때 군단의 좌측에 있는 국군 제8사단이 1031고지를 공격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이 무렵 군단과 대치중인 북한군은 제3군단(1,15,45사)으로 향로봉 산맥 북쪽 884-월비산선에 주저항선을 형성하고 강력한 배수의 진을 치고 있었다.
군단은 8월 16일에 수도사단으로 924-751고지를 점령하고, 제11사단은 884-591고지를 점령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은 이미 지난 7월27일에 실시하도록 계획 되었다가 장마로 인하여 실행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실시하게 된 것이다.
가. 884고지전투
*503 남강
하탄리 사천리 *600
내허평
*591
반항평 *609
*602 *700
*884
*751 새골 *612
상원리
수도사 = 11사
제11사단은 군단의 중앙사단으로서, 향로봉(1293) 북쪽 1079고지로부터 건봉령까지 태백산맥의 준령 중 향로봉 산맥을 가로 타고 방어중이었다.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45사단으로 884고지 일대에는 제2연대가 배치되어 약 2개월에 걸쳐 지뢰 매설과 철조망 설치, 그리고 유개호 등 진지를 거점화 하였다.
이 884고지는 남강 남쪽에 위치하여 사단의 주저항선을 감제관측하고 그들의 주보급로인 고성-사천리-원통에 이르는 453도로를 통제할 수 있는 감제고지였다.
제11사단장 오덕준 준장은 군단의 명을 받고 제9연대로 공격하도록 결심하였다. 제9연대장은 제1대대로 884고지를, 연대 특공대로 591고지를 점령하도록 하여 8월 18일 사단 포병 및 동해안으로부터 유엔군의 함포지원을 받으며 남강지류를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다.
8월 18일 12:00시경 884고지를 탈환하고, 좌측의 수도사단도 924고지를 탈환하였으나 이날 오후부터 폭우가 몰아쳐 악조건하에서 적의 역습으로 고지 후사면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591고지를 공격한 연대 특공대도3차례나 공격했으나 목표를 점령하지 못했다.
제1대대는 다음날 8월19일 미명을 기해 재공격을 감행하여 육박전을 전개하여 2차 점령을 하였고 적의 재역습을 차단하기 위해 서쪽으러 1km 떨어진 602고지를 공격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한채 오히려 우중에 다시 적의 역습을 받아 9시간에 걸친 혈전을 했으나 탄약이 바닥나고 대대장과 제2.3중대장이 부상당하면서 전투병력이 1/3이 손상을 입어 결국 20:20경 고지를 다시 피탈당하고 말았다.
다음날 22일, 연대장은 제2대대를 증원하여 24일 다시 공격을 재개하여 다시 탈환(3차점령)하였으나 25일 04:00시경 적의 재역습으로 18명이 전사하고 88명이 부상하는 대 격전속에서 다시 고지에서 밀려났다.
이와같이 제9연대가 3차례나 목표를 탈취하고 물러남에 따라 제20연대를 투입하기로 하여 제20연대는 8월 27일 06:00시에 공격을 개시하였다. 선봉에 선 제3대대는 222명 전사에 64명의 손실을 입으며 백병전으로 진지를 공격하여 884고지를 점령하였다.(4차 점령) 이대 예비인 제2대대도 602고지와 591고지를 점령하여 884고지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적은 계속하여 9월 초까지 역습을 시도했으나 연대는 격퇴하였고, 수도사단도 924-751고지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사단은 남강 남쪽의 884-591-600-작은 까치봉으로 연결되는 방어선을 확보하여 군단의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2,3차 역습시 한번에 100여 명의 손실을 입었고 마지막 목펴탈취시는 200명의 큰손실을 입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적 제45사단도 포로 31명에 사살1,252명으로 추산되는 큰손실을 입었다.
(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결과(노전평 전투에서 기 언급)
● 참전용사 김형길 증언(제11-20-2대대) : 제주도에서 훈련받고 제11사단으로 배치받아 884고지와 휴전임박해서는 철원 북방 602고지 전투에 참여했다가 좌측팔 관통상으로 후송되었다. 602고지 전투시에는 중공군에 포위되어 수류탄으로 맞섰지만 대부분 전사하여 시신처리는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884고지 백병전은 사실 동해안의 함포지원이 없었으면 단 1m도 진격하지 못한다. 워낙 산이 가파라서 포복하기도 힘들었다. 모두 기어서 돌격선에 도달했고 적도 쏟아지는 포화에 정신못차리고 뒤로 물러났지만 짧은 돌격을 몇번 반복한기억이 난다. 얼마나 죽었느지는 모른다. 전우가 죽어도 처리할 방도가없다.
● 참전용사 한철수 증언(제11사 군수행정병) : 884고지 전투에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당시 화장처리업무를 담당했다. 제대로 화장이 되었는지 아니면 신원확인은 이루어졌느지 사실 곤란하다. 얼마나 비가 오고 또 폭염이 내리쬐는데 화장업무도 힘들다. 엄청 피해가 난 것은 사실이다.
● 참전용사 김창언 증언(제11-9연대) : 나는 제주도에서 교육받고 제11사단에 배속되어 지리산에서 공비토벌작전을 하다가 구룡포에서 LST에 승선하여 주문진에 상륙하여 고성-간성지역 전투에 참여하였다. 884고지에서는 너무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른다. 워낙 지세가 험하여 기어서 전투했다. 다 죽었다.
●고경율 참전용사(제11-20연대) : 나는 '49. 1월에 들어왔다. 제11사단 소속으로 884고지를 공격하는데 여명에 아군 포탄이 낙하하여 소대원 주에 5~6명만 살고 다 죽었다.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동료전우들이 많이 상했고 진지강호ㅓㅏ 중에 7~8부 능선에도 수습되지 못한 유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 오윤봉 참전용사(제131-9-수색중대) : 884고지 전투에서 약 1달간에 중대장이 3명이 교체되었고 중대원도 180명중 30여 명만 살아남았다. 당시는 유해수습은 생각도 못하는 상태였다.
● 바람의 언덕, 884고지 전사면(철책에 있다.878고지다)
이곳에 가면 저멀리 북한의 금강산댐이 어렴풋이 보인다. 산의 경사가 60도는 되어 보이는데 지금은 활엽수가 듬성하게 나있다. 산속이 훤하게 다 들여다 보이는데 군데군데 철모흔적도 있다. 비행기 폭격에 포격 사격으로 탄흔이 수없이 있는데 능선상으로 진출입이 가능한 지역만 제한적 발굴 작업이 이루어졌다.
철책 보강공사등 수시로 유해는 목격되었다는 제보는 많다. 철책에 연하여 있고 남북으로 종격실 능선이며 당시에 동에서 서로 측방공격을 감행하였다.
나. 월비산전투('51.10.12)
고성
*122 적벽산
*201
*146
고봉리
*95
*350 *148
*187 포운리
사랑리 *459 월비산 *351
정월리 *208
*339
남강
*240 대강리
*203
독산리 기갑연대
26연대
국군 제1군단은 8월 18일부터 8월 27일까지 924고지와 884고지를 점령한 다음 9월 8일 군의 전선 조정에 의거 군단 서측의 방어선이 2km 축소됨에 따라 향로봉-건봉산-까치봉-송현리(동해안)를 방어하게 됨에 따라 사단을 재배치하였다.
군단 좌익의 전선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한 수도사단을 동해안으로 이동시켜 제11사단과 수도사단으로 주저항선을 편성하고 제3사단을 예비로 전환시켰다. 이때 수도사단은 9.13~15일 사이에 제3사단 지역을인수하고 제3사단은 양양으로 이동하여 야전훈련소에 입소하였다.
이 무렵 북한군도 제2군단이 해안분지 일대에서 대타격을 받자 국군 제1군단과 대치중이던 제3군단으로 교대하고, 동해안에는 서부전선에서 재편성한 제6군단을 투입하여 제19사단을 남강 동안에, 제9사단을 고성으로부터 통천까지, 제18사단을 예비로 보유한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중 동해안에 수도사단과 대치하게된 북한군 제19사단은 까치봉 서북능선-월비산-351고지 부근에 주력을 배치하여 강력한 거점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제9사단은 적벽산-146고지-고봉리선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1군단장은 10월에 접어들어 군이 전개하고 있는 제한된 종심의 전선 "밀어올리기"작전의 일환으로 월비산을 확보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획득함은 물론 동해안의 적을 남강 북쪽으로 구축하기 위해 수도사단으로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1) 수도사단의 월비산 . 고성 탈환(1차 전투 및 탈환)
당시 동해안으로 이동한 수도사단은 제1연대와 기갑연대를 전방으로, 제26연대를 예비로 하여 554-고항봉-36-강정을 연하는 선을 방어하였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은 월비산의 적과 대치한 기갑연대로 공격하기로 하고 10월 3일에 월비산 공격의 사전 포석으로 351고지(월비산 동쪽 2km)-148(고성 동남쪽 3.5km)선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기갑연대는 10월 10일에 사단포병과 군단을 지원하는 미 제196포병대대 1개 포대의 지원과 동해안 함포지원을 받으며 351-148고지 선을 탈취하였다.
기갑연대는 기세를 몰아 10월 12일 06:00시에 월비산 공격을 개시하여, 주공인 제2대대는 350고지를 점령하고 주봉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여 350고지로 철수하고. 조공인 제1대대도 261고지를 점령하고 월비산을 동측에서 공격했ㅎ으나 역시 실패하여 261고지로 철수하였다.
연대는 다시 10월 13일에 재공격을 개시하였으나 백병전 속에서도 물러나지 않은 적의 저항으로 다시 물러났다. 이날의 전투에서 포로 14명 사살 355명의 전과를 기록한 반면 아군도 전사 18명, 부상 77명의 손실을 입었다.
연대장은 기필코 월비산을 탈환하기 위해 예비인 제3대대를 투입하여10월 15일 연대 총공격을 감행하였다. 다행히도 날씨가 청명하여 함포와 항공폭격을 지원받으며 3개 방향에서 목표로 진격하여 한때 오폭으로 주춤하였으나 결국 월비산을 탈환하여 사단장이 직접 월비산에 직접 올라와 훈장을 수여하고 격려하였다.
이후 기갑연대는16~17일의 적의 역습을 격퇴하고, 17일에 고봉리~146고지선, 다시 19일에는 201~적벽산까지 확보하여 적을 모두 구축하였다.
(2) 제11사단의 월비산 피탈(제2차 월비산 전투)
추계공세작전으로 월비산을 탈취하고 남강까지 진출한 수도사단은 11월 16~17일에 방어지역을 좌인접 제11사단에 인계하고 후방지역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새로 창설된 백야전사령부에 배속되어 호남지방으로 이동하였다.
제11사단장은현 주저항선 방어임무를 수행주인 제13. 20연대는 그대로 두고, 예비인 제9연대로 수도사단의 주저항선을 인수하도록 하는 한편, 대전차 공격대대(2개 중대 결)에 사단 수색중대를 배속시켜 월비산과 남강 이남의 전추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다. 결과적으로 1개 사단지역을 1개 연대가 맡고, 1개 연대지역을 1개 대대가 맡는 상태였다.이에 군은 11월 16일부로 군예비로 야전훈련소에서 교육중인 제5-36연대를 제11사단에 배속 조치하였다.
한편 북한군도 제6군단 예하 제19사단이 물러나고 제9사단이 새로이 전방에 투입되어 18일 부터 월비산 공격을 시작하였다. 이 전투(제2차 월비산전투)에서 제11사단은 월비산과 구선봉까지 제9연대 정면의 모든 전초를 상실하였으며 한때 351고지까지 피탈되었다가 역습으로 351고지는 회복하였으나 월비산은 회복하지 못했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 참전용사 강석호( 수도사 제26-3-10중대) : '51. 9. 15일에 소대장으로 월비산전투에 참가하였다. 우리 중대장도 전사하고 중대원이 30%정도만 생존햇다. 연대 장교의 2/3가 전사할 정도로 아군 피해가 컸다.
●참전용사 정배봉(제5-36연대-11중대-화기소대) : 본인은 '50. 12. 3일 입대하여 대구훈련소(동인국민학교)에서 14일간 교육받고 제5사단에 배치되었다. 우리는 제11사단 제9연대와 진지교대 했는데 351고지와 261고지 사이의 무명고지에 주둔했는데 최전방이다. 제11사단이 우리와 교대하기전에 월비산과 261고지가지 빼앗겼다.
진지교대후 수색정찰을 나갔는데 아래 계곡에 70~100여 명으로 추산되는 국군 유해가 쓰러져 있고 부패 직전에 악취가 심했는데 유해의 호주머니를 조사해 보니 전부 제11사단 제9연대 대원이었고 군번이 030으로 시작했다. 우리는 유해를 그대로 놔누고 왔고 그 후로도 유해처리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제11사단 참전용사님들은 월비산 전투에대해 언급이 없었다. 왜일까?
● 지역탐사는 제한됨 : 북한지역
[351고지 일대를 전면 발굴하라]
351고지 바로 앞까지 DMZ지역을 들어가 탐사를 해 봤다. 고지 밑은 구릉지역으로 당시의 집터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함께 고성 전망대에 오른 참전용사님이 351고지에서 우리 철책으로 이르는 능선에는 아군이 탈출하다가 다 죽어갔고, 수습도 못했다 한다. 더욱이 마지막으로 351고지를 피탈시에는 고지에 완전한 유개호를 구축하여 방어중에 휴전의 기다림이 방심을 만들어 적의 기습에 호안에서 탈출하지못하고 절명했다 한다. 적의 화염방사기에 안에서 다 연기에 질식하고 불에 타 죽어서 유개호 가 무너지고 그대로 매장되어 버렸다 한다.
● 철책을 연하여 남강을 끼고 탐사 (앞에서 언급됨, 노전평 전투 부분)
● 건봉령의 비밀(건봉사 주지 스님과 여인)
4.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가 바라본 한국전쟁
가. '51. 하.추계 공세 막다(P329~)
[25일만에 모든 도로를 개통했다]
유엔군이 진행하려다 기상악화로 몇 번씩 연기된 하게제한작전의 영향은 당시 중공군의 입장에서도 많은 피해가 일어낫다고 홍학지는 기록하고 있다.
'51. 7월 20일, 이날 부터 엄청난 장맛비가 며칠간 계속됐다. 강의 수위가 보통 3-4M씩 11M까지 불어나는 강도 있엇다. 모두들 40년래의 최대의 홍수라고 아우성이었다.
중공군의 수많은 창고와 야전병원이 물에 잠겼고, 고사포진지도 있는 그대로 유실됐다. 북조선에 있는 2백 5개의 교량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삼등의 고사포댇 병사들은 홍수가 갑자기 밀어닥치자 제때 피신하지 못해 전봇대에 올라갔다. 그러나 물이 물어 전봇대로 피하는 것도 잠시여서 1백 67명이 익사했다. 그토록 고생하며 후방에서 실어온 물자. 가까스로 공습을 피해 보존해 온 트럭들이 사정없이 홍수에 떠내려갔다.
[미군, 국군의 여름 가을철 공세]
"8월 18일, 미군. 국군 33개 사단이 엄청난 홍수피해와 공습에 의한 질식전의 위기를 맞은 틈을 타 복한강 동쪽부터 동해안에 이르는 80KM의 전선에 공새를 시도했다. 바로 그들의 "여름공세"의 시작이다.
8월 22일, 그들은 중조대표단 숙소에 포탄을 퍼부었다. 당연히 회담은 중단되었다. 동부전선의 조선인민군은 양식과 탄약이 달리는 어려운 사정임에도 참호를 구축해 방어전을 펴는 등 최선을 다했다.
9월 1일, 그들은 대대, 연대 뱡력을 동원해 조선 인민군이 지키고 잇는 항령, 두밀리 북쪽의 773고지(상대는 피의 능선이라함), 대우산 북쪽의 가칠봉, 1211고지와 가잔리 북쪽의 진지로 밀려 들었다. 9월 8일에 이르러 상대는 엄청난 피해를 입고 우리의 부분 전초진지를 점령하는데 그쳤다. 9월 9일 국군 8사단은 매일 1개연대를 동원해 전투기와 명렬한 야포지원을 하면서 황기와 송어우얼에 이르는 4KM의 아군진지를 계속 공격했다. 이 지역은 인민군 제3군단의 1개 연대가 방어를 계속했다. 낮에는 내주고 밤에는 도로 찾는 격전 끝에 4일 동안 꿈적도 하지 않았다.
14일 상대는 또다시 공격중점을 도미현에서 노전평까지의 4KM 구간에 매일 4,5개 대대를 교대로 공격시켰다. 인민군 제3군단은 4일간 이 격전에 전혀 땅을 내주지 않았다.
9월 18일까지 상대는 두밀리 북쪽의 851고지에서 1211고지까지의 계속하여 공격해 10월 중순까지 밀어붙인 것을 제외하고는 다른 곳에 서는 공격을 멈추었다. 상대는 851고지를 공격하면서 사상자는 엄청나면서 장악하지 못하자 "단장의 능선"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쯤 이르러 상대가 동부전선에서 일의킨 여름철 공세는 드디어 우리의 조선 인민군이 분쇄한 것이다."
"미국합동참모분부의장 브래들리는 "이번 공세는 시기. 지점. 상태 드을 모조리 잘못 선택한 패전이었다고"고 말했다"
"상대는 여름철 공세가 아군에게 저지당하자 단념하지 않고 이번에는 서부전선에서 "가을철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이번에는 공격중점을 바꾸어 지원군 방어진지를 집중공격했다.
10월 3일 상대는 영연방사단과 2개 미군사단을 집중시켜 서부전선의 아군 제64.제47군 정면 방어 고지를 공격해 왔다. 아군 제64군 방어 정면을 공격한 상대는 영연방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 5연대 일부로 공격중점을 고왕산. 마량산이었다. 상대는 매일 1.2개 연대 병력으로 아군을 맹렬히 공격해 4일 오후 고왕산과 서족의 227고지를 지키던 부대 주력이 철수했다. 10월 5일 상대는 공격 중점을 마량산과 서남쪽 217고지에 두고 매일 1개 연대 이상의 병력과 전투기. 야포의 맹렬한 지원을 받으며 교대 공격으로 마량산을 지키던 아군은 다섯 번이나 빼앗기기를 되풀이 했다. 217고지를 지키던 아군 1개 중대는 갱도모양으로 된 엄페부, 즉 2개의 고양이귀모양의 땅굴끼리 서로 통한 말발굽모양의 방공호에 몸을 숨겨 하루에 20여 차례의 상대 공격을 물리쳤다. 아군은 적은 희생으로 상대를 대량으로 살상해 처음으로 당굴의 우월성을 실감했다. 격전은 8일 끝났다. 상대의 인명피해가 심해 공격을 멈추었기 때문이다.
천덕산과 418고지를 지키던 제47군 141사단 1개대대는 매일 상대 2개 연대의 맹공에 맞서 10여 차레 공격을 물리쳤다. 진지가 포탄에 의해 초토화로 변했으며 부연대장 1명만이 남아 10여 명의 부상병을 이끌고 끝까지 진지를 지켰다.
이번에 상대가 일으킨 "가을철 전역"은 1개월 가까이 진행됐다. 아군은 각 방향마다 밀려드는 상대를 물리쳤는데 동서 양 전선 모두 상대 7만 9천여 명을 살상했다. 피아 간의 인명피해는 3대 1 비율이었다.
상대는 여름, 가을철공세를 게속하여 시도했지만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커다란 인명피해를 입었다. 미국 측은 회담석상에서 얻지 못한 것을 전쟁터에서도 얻기 힘들다는 것을 깊이 개닫고 도로 회담테이블로 돌아와야 했다."
나. 한국전쟁 기간에 소련이 중공에 지원한 군사 전력(P310~
한국전쟁기간 소련은 중국ㅇ에 64개 육군사단, 22개 공군사단의 장비를 제공했다. 대부분의 장비는 유상(할인가격포함0으로 제공한 것이다. 전쟁기간 스탈린의 특별허가로 소련은 여러 차레 무상으로 무기장비의 이부를 제공하기도 했다.
1950년 소련 공군은 미그15전투기를 갖추었지만 중국측이 이 전투기를 사들일려하자 소련측은미그9전투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중국 측에서 미그9의 성능이 미국의 F-84전투기보다 떨어진다고 지적하자 소련대표는 화를 벌컥 내며 "사회주의 소련이 생산힌 무기의 우월성에대해 감히 회의를 품느냐"고 언성을 높혔다. 결국 이 문제는 스탈린에게까지 보고 돼 스탈린이 자국 협상대표에게 화를 내며 무사응로 미그15기전투기 372대를 제공토록 했다.
1951년 중국이 소련으로부터 37개 보병사단의 장비를 구매한 뒤 조선인민군의 장비가 부족함을 고려하여 이 중에 2개 사단 장비를 조선인민군에 제공했다.
다시 스탈린이 이 소식을 듣고 중국에 20개 사단의 장비를 무상ㅇ,로 제공햇다. 1952년 겨울 중공ㅇ이 유엔군의 상륙저지 준비에 바쁠 대에 소련측은 적극적인 태도로 바뀌어 무상으로 일부 장비를 제공했다. 그러나 교섭대미다 소련측의 태도가 바뀌어 중궁측은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 중공의 재정이어려워 소련측은 일부 현금아닌 차관 형식을 취했는데 이자율이 연리 1%였다. 이런 것은 평화시에는 특혜를 준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중공이 엄청난 희생을 칠며서 무상으로 인력. 재력을 털어 넣는 마당에 일일이 돈을 챙기려는 소련측의 태도는 납득하기어려웠다는 것이 중공측 주장이다.
다. 부족한 식량을 어떻게 ?
'51. 8월-9월의 홍수와 미군의 맹렬한 공중 폭격이 게속되어 동부전선의 제20병단은 엄청난 식량난에 허덕인 모양이다. 헤엄에 능한 병사를 골라 머리에 양식을 이고 청천강을 건너게 하기도 하고, 밤에 가교를 임시로 가설해 물자를 옮기게 한 뒤 낮에는 임시가교를 없애 미군전투기의 눈을 속이기도 햇다. 또 강을 건너는데 쓰이는 나룻배를 있는 대로 긁어모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음식을 말려 부피가 최대한 줄어들도록 했다.
당시 식량사정이 극도로 어려워 후방부대도 양식이 거의 떨어질 지경이었다. 조선 현지 관청과 협의하에 조선의 시골에서 식량을 빌리기도 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51.9.18일 평양으로 홍락지가 들어가 김일성을 만나 대책을 협의 했다.
이로인해 11월부터 북한정부는 황해도의 재령 신주 전주 신원리 온정리에서 식량 4만 톤을 공급햇고, 평안 강서군에서 식량 4천톤, 함경도 함흥. 영흥에서 식량 1만 톤을 떼어냈다.
[조선에 상점을 개설하시오?]
여기서 중요한 내용 하나는 김일성이 조선에 상점을 개설하라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상점을 개설해 중국 물건을 팔아 어느 정도 조선화폐를 흡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면 지원군이 조선에서 식량과 부식을 살 수 있고 조선화폐의 유통을 도와주는 것이기도 하고 하다"는 제안 이었다.
이 제안은 받아들여져서 지원군은 평양.사리원.양덕. 성천.구장.안주. 정주. 희천. 덕천 이천에 판매점을 세워 조선 인민들에게 생활필수품을팔아 필요한 경비 일부를 충당했다는 것이다.
다. 중공군의 공군 참전(P370-
[미군전투기들의 융단폭격]
'51.7월, 그들은 조선북부에서 엄청난 홍수가 발생한 기회를 틈타 우리에게 엶가을공새를 발동하는 동시에 우리ㅏ 후방에 대규모의 "공중봉쇄전역' 즉 "질식작전"을 시작했다.
"공중봉쇄"는 1944년 3월 연합국 공군이 이탈리아 국경 내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철로를 주요목표로 일으킨 한차레의 공중전역을 미군이 본뜬 것이다. 그 전역은 최초의 공군합동공세로 일컬러지고 있다가 후에 "질식전"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조선반도의 지형, 교통선의 구성 및 미군공중봉소ㅓㅐ계획이 모두 이탈리아에서 진행했던 "질식전"과 아수 비슷했다. 질식전의 구체적인ㄴ 갖전은 조선반도를 가로지르는 허리부분에서 차단할 수 있는 곳을 정해 공군과 해군항공대의 대부분을 동원, 오랜기간 융단폭격을 감행한다는 것이다. 지원군 후방교통선을 절단하고 아군 전후방의 연계를 가로막아 아군작전 역량을 질식시키는 작전이다. 그래서 질식전을 "저격전" "교살전'이라 불렀다.
미군조종사들은 대부분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비행시간이 1천시간을 넘는 베테랑들이었다.그들은 비행술이 뛰어나 초저공비행을 능사로 삼으며 낮에는 산골자기의 목표물을 찾아내고 밤에는 실날같은 둥불마저 발견해서는 폭격을 일삼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당시 우리 대공무기는 변변찮아 한낮이면 미군전투기들의 위세가 극에 달했다. 차 한 대 의심스러운 물건 하나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후방으로부터의 운소은 반에만 이루어졌다. 우리의 트럭운전병은 대부분 해방전쟁에 참전한 노련한 병시들이지만 이러한 전투는 처음 당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야간에 헤드라이트를 그고 운전하는 경험이 모자랐다.
'541. 5월에 전쟁에 접어들자 전투기는 약 1천6백80대에 이르렀다.미군전투기들은 낮에는 대피해 있는 차량과 쌓아둔 물자에 폭격을 감행하여 주요교량, 노선에 시한폭탄과 건드리면 터지는 일명 "나비폭탄"을 떨어뜨려 차량통행을 막았다. '51. 4월에 삼등의 창고에서 80여 량 하물열차의 물자가 폭격을 당해 엄청난 군복의 손실을 입었다. 그 결과 우리의 1개 군 병력이 제5차 전역에서 군복을 입지 못하고 전투를 벌이는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1개 소송연대의 트럭이 대피한다는 게 한군데만 몰려 미군 전투기들이 한 번 공습에 70여 대가 불탄 적이 있었다. 바로 대피. 은폐. 위장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탓이다.
미군전투기들이 공습이 심해지면서 우리는 궁리끝에 철도터널이 가장좋은 은신처라 생각되어 부상병. 민간인. 운반부대원들을 대피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오산이었다.
우리의 상상 밖으로 미군전투기 조종사들은 훨신 노련하고 비행 조종술이 뛰어 났다. 그들은 터널 안으로 날아들면서 로켓포를 정확하게 터널 안으로 발사하고는 잽사게 기수를 위로 올려 날아가곤 했다.
어절수없이 우리는 두꺼운 방벽을 터널 입구에 세우는 등의 방법으로 상대의 로켓포 공격에 맞섰다. 나중에는 허허실실 작전을 도입해 가짜 목표물을 내세워 상대의 전투기들이헛된 공격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빈창고에 가마니와 나뭇잎을 덮거나 뿌려놓으면 전투기조종사들은 물자저장창고라 여기고 정신없이 폭탄과 기관총세례를 퍼붓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허허실실 작전은 시간이 감에 따라 효과가 줄어들었다. 전투기 폭격과 성과에도 불구하고 군수품이 끊이지 않자 상대 진영에서는 의심을 하기시작했다. 그결과 상대의 많은 공작원들이 우리 후방에 침투해 공습의 효과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공작원들은 "효과가 생각보다 형편없음. 대부분 공산군이 일부러 설치한 거짓목표물을 파괴한 것임" 이라고 탐지결과를 보고했다.
이후미군전투기들은 아군진영에 날아들어도 당초 무조건 폭격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목표물의 진위를 가리기에 안감힘이었다.
[중공군 공군의 참전]
중국인민지원군 공군은 유엔군의 "질식전' 제1단계에서 평양 이북의 수송을 엄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51. 9. 25일 항미원조전장에서 우리공군 제4사단이 처음으로 미군전투기 1백여 대의 대편대와 공중전을 전개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은 27년 탄생부터 20여 년간의 국내전쟁과 항일전쟁 동안 줄곧 보병 단일 병과로 전투를 해왔다. 한국전 이후 각 군 병과의 전면 창설에 따라 비로소 단일 병과작전에서 제병과 연합작전으로 전환을 이룬 것이다.
1937년 항일전쟁이 일어나면서 중국공산단은 일찍이 특과병부대를 세울 계획과 함께 신강일대에서 소련원조의 장비를 이용해 자체 조종사. 기갑병과 통신인재를 양성하려 했다. 40년대는 신강 당국의 반공정책과 소련원조의 단절로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5년 일본항복 후 중공해방군은 신속히 동북으로 진군하도록 했다. 그중 하나가 중용한 목표가 일본이 남긴 무기장비를 이용해 강력한 특과병과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그중 하나의 중요한 목표가 일본이 남긴 무기장비를이용해 강력한 특과병부대를 창설하는 것이었다. 국민당과 해방전쟁 시기 인민해방군은 포병. 공병과 항공병. 기갑병 등 기술병과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구의 경제적 여건이 낙후한데다가 외국원조가 모자라 이러한 기술병과의 규모에는 한계가 있었다. 한국전쟁 시작 후 전쟁의 급한 수요와 소련이 대량으로 기술장비를 제공한 2가지 이유로 중공은 "일면 공격, 일면 건설"이라는 방침에따라 전장을 연습장으로 삼아 기술병과의 실전연습을 감행했다.
항일전쟁시기에 중국공산당은 신강에서 자체 조종사를 양성한 적이 있다. 일본 투항 후 공산당은 신속히 살감을 신속히 동북에 보내 일본군의 항공설비를 접수했다. 1946녅 1월 동북지방 통화에 항공학교를 세워ㅏㅅ다. 이후로 공군창설 작업이 시작됐다. 해방전쟁시기 인민해방군 항공병은 훈련단계로 실전에 참전하지 못했다.
1949년 여름 공산당은 앞으로 있을 도해작전과 국토방공의 수요를 고려해 공군을 정식으로 창설하기로 결정하고 소련에게 비행기를 시들이기 시작했다. 8월 중앙군사위는 제4야전군 제14병단 사령부를 기초로 공군사령부를 창설하도록 명령했다. 같은달 북평에 제1작전 비행중대가 미국제P51형 전투기 10대를 갖추고 창설했다. 49년 11월 인민해방군 공군사령부가 정식으로 창설됐다. 당시 전군에는 전쟁 중 수백 대의 진투기를 노획했지만 정비 여건 등으로 겨우 60여 대를 가동시키는데 그쳤다. 동시에 전군에 10여 명의 조종사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공군은 남경에서 제12항공공병부대 제4혼성여단으로 창설했다. 주로 소련제 미그9. 미그11전투기였다.
1950년 10월 지원군이 조선에 들어온 뒤 중공 공군은 3개 여단(11월에 사단으로 바뀜)을 보유했으며 연말가지 서둘로 5개 사단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8개 항공사단에는 각 2개 비행단밖에 없엇고 사단마다 비행기 십여 대가 고작이엇다. 제4사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훈련을 시작한 단게였다.
소련측은 전쟁초기 망설이다가 1951년 1월부터 그래 공군사단(사단마다 전투기 보유 1백 기가 채 되지 않음)을 보내와 제한적이나마 청천강 북쪽의 1백여 KM 수송선 엄호에 나섰다. 소련은 미국과 전쟁에 들어가는 것을 우려해 드러내놓고 참전하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중국 동북에 주둔했던 소련공군조종사들은 모두 지원군군복을 입엉야햇고 일체의 소련말 사용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언제까지나 공중방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할 수 없다고 생각한 중앙군사위원회와 모택동은 1950년 말 공군을 참전시켜야한다고 결심하게 된다.
1950년 말부터 '51년 4월까지 공군은 9개 항공사단을 만들고 미그15기 전투기를 보유했다. 이와 동시에 소련공군기술자와 중국 측 비행교관들이 조종사들에게 비상훈련을 시켰다.
1951년 1월 21일, 공군 제4사단이 압록강 부근 상공에서 처음으로 미공군과 교전했다. 대대장 이한이 F-84 전투기 1대에 치명상을 입혔다. 공군사상 최초로 미군전투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올렸다. 1951년 9월에서 52년 6월 말까지 중국 공군은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정식 참전단계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