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다. 새로 산 ‘신삥’ 자전거(기아가 27단)를 타고 광명 철산동 안양천에서부터 여의도 둔치(고수부지)까지 페달을 밟은 벗의 "기분이 째진다"는 전화를 받은 게. 화들짝 ‘꽃잔치’가 며칠 세상을 수놓더니, 어느새 초여름 날씨, 서울이 28-29도를 웃돈다. 봄꽃이야 으레 순차적으로 피어야 맞거늘, 하루 아침에 동시다발로 피어버리니, 아무래도 느낌이 심상찮다. 지구온난화로 겨울 다음에 여름, 여름 다음에 겨울, 이런 식으로 사계절도 없어지는 것일까. 그래도 자전거를 타며 맞는 바람은 살랑살랑, 상큼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벗의 전화에 나의 기분까지 ‘째진’ 토요일 오후. 벗의 사연을 듣는다. 중학교 입학 전에 통학용 ‘어른 자전거’(키가 작아 안장에 앉지 못하고 옆으로 다리를 집어넣어 페달을 돌렸다)를 사려고 악착같이 병아리를 키워 목돈을 마련했다던가.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아홉 살의 나이에 숨진 아들의 악몽이 떠올라 ‘나중에 사준다’며 자전거 살 돈을 맡아놓았다던가. 이제 여든 셋이 된 어머니는 얼마 전 막내아들 부부에게 자전거를 사라며 아파트 담보 대출금 중에서 50만원을 떼어 보내주었다고 한다. 얼마나 감격했을 것인가. 잊고 있었던 어머니의 ‘약속’이 거의 40년만에 이뤄진 것이다. 친구는 ‘엄마가 그 때 그 약속을 기억하실까’ 설마설마했다고 한다. 그 어머니는 곱게 늙으셨을 뿐 아니라 알록달록,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 아름다운 글로 적는 수필가가 되셨다.
어느 글에서 아들과 했던 ‘자전거 약속’이 소재였다던가. 그 말을 들은 나는 “부모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다”고 말했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잊어버린 희로애락, 사소한 추억 하나까지 부모는 다 기억하고 있다고, 그것이 부모라고. 너는 네 자식들 일을 잊은 게 있냐고. 나이 쉰이 넘어 졸지에 장만한 신삥 자전거를 타고 한강변을 달리는 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 것인가. 엄마의 무한한 사랑에 감격한 것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아내와 나란히(50만원은 외이프 자전거도 장만하는데 충분했다) ‘사이클 데이트’를 하다보면 ‘서울 찬가’ ‘한강 찬가’도 흥얼거려질 법 하지 않은가. 며느리는 덩달아 신이 났다. 이제 자전거로 출근도 할 것이다. 누구에게라도 어머니의 자전거 선물을 자랑할 것이다. 자, 봐라. 팔십 넘은 엄마한테 ‘비까번쩍한’ 자전거 선물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나는 이 자전거 타고 주말마다 한강변을 누빌 것이다. 아내가 옆에 있으면 금상첨화, 아내가 없으면 친구들을 부를 것이다. 여보야, 우보야, 우천아, 다음 토요일엔 미사리까지 달려볼까. 벗이여! 우리들이 어른이 됐다고 우쭐거리지 말세나. 어머니, 아버지라는 존재가 바로 그런 것이거늘. 신산하게 산 한평생, 어쩌면 누구라도 잊어버리기 십상인 ‘그 약속’을 가슴에 평생 묻고 살다 이제 자전거를 사주는 늙은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읽어야 하네. 엄마 앞에서 없는 재롱이라도 피울 일 아닌가. 어느 글에서 읽었네. ‘사씨남정기’ ‘구운몽’을 지은 김만중이 환갑이 되었어도 어머니를 즐겁게 하려고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었다던가. 세상에 다시 없는 하나뿐인 자네의 소중한 어머니가 아닌가. 그 어머니, 간장게장을 담가 택배로 보내주었다던가. 참 나도 부모복이 엄청나지만, 자네 복도 보통이 아닐세. 날마다 아침 아파트 계단에 세워둔 자전거를 한번씩 쓰다듬고 출근하면 어떤가. 어머니의 자식사랑에 가슴이 뜨근뜨근, 더워질 것이 아니겠는가. 그게 바로 자네가 갖고 있는 가장 큰 재산이 아닐까 싶네.
우리 이번 주말에 자전거 같이 타고 함께 달리며 봄바람을 마음껏 느껴보세. 잘 지내게. 우천 합장 -------------------------------------------------------------------- [은행잎 편지]에 대하여 ; 은행잎은 동양인에게 참으로 소중한 의미가 담긴 식물의 이파리이다. 2천 500여년 전 불세출不世出의 성인聖人 공자孔子는 은행銀杏나무 밑에서 제자 3000명을 길러냈다. 그 은행나무 흔적이 지금도 있다. ‘행단’杏檀이 바로 그것. 중국을 대표하는 베이징대, 한국을 마땅히 대표해야 할 성균관대(해방직후 근대화과정에서 만들어진지 20년밖에 안된 경성제국대가 국립대학교로 된 것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이다. 거기에서도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것이다), 일본을 대표하는 명문 도쿄대의 학교 상징(교표)에 모두 은행잎이 들어있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인재양성의 요람은 한 그루 은행나무 밑이었던 것이다. 은행은 흔히 ‘살아 있는 화석’이라고 불리며 손자목孫子木이라고도 한다. 늦가을, 서울 명륜동 명륜당 마당 600년이 다 돼가는 노거수老巨樹가 펼치는 ‘노랑 손수건’의 장관을 본 적이 있는가. 마당에 낙엽져 수북히 쌓인 ‘노랑 비단’을 차마 어찌 밟을 수 있었으리오. 600년 전부터 전국에서 선발된 국가장학생(200여명)이 되어 유학을 배우고 관리가 되던 산실, 성균관이 엄연히 살아 있는 데도, 국가적으로 ‘화석’을 만들어버리는 이상한 나라에 우리는 살고 있다. 조선 태조 7년, 1398년, 우리는 대학(大學)의 3요소인 강의실과 기숙사, 도서관을 갖추었다. 세계 어느 역사가 제법 된 명문대학과 겨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유서깊은 대학이 바로 성균관이었다. 율곡 선생이 이 은행나무에 기대 손으로 머리를 짚고 부국강병의 방책인 ‘십만 양병설’을 주창했을 것이며, 2인1실 좁은 기숙사(양현재) 방에서 조광조 선생은 개혁정치를 꿈꾸었을 것이다. 퇴계 선생은 어떤가. 총장(대사성)이 되어 국가의 이념을 확고히 하고자 고군분투하지 않았던가. 가깝게는 1905년 신채호 선생이 성균관 유생이 되어 동국역사를 공부했을 터, 유서깊은 문묘(명륜당&대성전)일원은 무엇하고도 바꿀 수 없는 국가 최대의 자산인 것을. 1주일에 한 번꼴로 세상에, 벗들에게 내놓을 글의 제목이 ‘은행잎 편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여운餘韻과 향훈香薰이 있어야 세상은 멋이 있지 않겠는가. 내용인즉슨,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한때 ‘서간문의 황제’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은 글을 내놓으려 노력할 것을 다짐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