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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섬기다
전통사회에서 통치의 근간은 ‘하늘’이었다. 특히 조선은 하늘이 왕에게 통치권을 부여한다는 ‘천명天命사상’에 기초한 나라로 건국 이후 하늘의 움직임을 살피는 다양한 제도를 마련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종 시대의 측우測雨 제도다. 세종은 측우 제도를 시행해 세금을 거두는 일에 불공정과 부정을 해결하고 백성을 위로했다.
조선 이전, 하늘을 살피다
옛사람들은 하늘의 변화에 따라 땅이 변하고 인간 세상 또한 달라진다고 믿어 기상 관측을 정례화하고 그 내용을 기록했다. 별자리, 달무리, 일식과 월식은 물론 범상치 않은 무수한 하늘의 상황을 세세하게 관측했다. 농업 기반의 전통사회에서는 특히나 강우 추이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한 해 농사의 풍작을 좌우하는 강우를 예측하기 위해 다양한 관측 활동이 전개됐다.
하늘의 뜻을 기록하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통치권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천명사상이 강화됐다. 천명사상은 민심이 곧 천심이니 하늘이 자연현상에 민심을 반영해 통치를 반성케 한다는 조선의 지배 이념이었다. 이 사상은 조선 시대를 관통해 무릇 조선의 임금이라면 인과 덕, 그리고 부모의 마음으로 백성을 보살피는 한편 자연현상을 관측해 하늘의 뜻을 살피고 경계해야 했다. 특히 한 해 농사를 좌우하는 ‘비’와 관련해서는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다. 조선 시대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으로 손꼽히는 측우기와 측우 제도는 천명사상이 반영된 결과물이다.
우택雨澤
‘비의 은혜’를 뜻하는 말로, 전통사회에서 비를 측정하는 방식 또는 비가 내리는 자연현상 그 자체를 가리킨다. 강우 측정 방식으로서 우택은 비 온 날 호미나 쟁기의 날이 땅에 들어가는 깊이를 재서 비가 온 정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우택 보고는 농사 현황을 보고하는 기간에 해당하는 춘분부터 첫서리가 내리는 날까지 이어졌다. 언제 비가 내렸는지, 얼마나 내렸는지, 이후 농사는 어땠는지 등을 상세히 알렸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 따르면, 우택과 더불어 농사가 되어가는 형편을 뜻하는 농형農形은 하지 이후부터 입추 전까지 관보인 <조보朝報>에 내도록 했고 첫서리도 알리게 했다. 그러나 땅의 성질이나 측정하는 사람에 따라 측정값이 달랐다. 진흙이 많은 땅은 아무리 비가 많이 와도 꼬챙이가 조금밖에 들어가지 않았고, 모래가 많은 땅은 비가 조금만 와도 꼬챙이가 깊숙이 들어갔다. 같은 밭이라도 김매기 여부에 따라 측정값이 달랐다. 세종 때에 도량형이 정비되고 측우 제도가 마련된 배경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혼란 속에서 측우기와 관측 자료 상당수가 사라지게 된다. 세종 때의 측우 제도가 흔들리게 된 이때 다시 우택이 등장했다. 측정 기준이 보다 명확해져 호미의 한 날은 ‘1서鋤’, 쟁기의 한 날은 ‘1리犂’로 정했다. 영조 때에 새로이 측우기가 제작됐지만 군·현 단위에서는 이후로도 강우량을 측정하는 데 우택을 적극 활용했다.
관측 제도를 정비하다
우리나라의 기상‧기후 관측은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 오늘날로 이어지는데, 그 기록이 풍부해지고 제도화된 것은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다. 측우기의 발명과 함께 다양한 관측기구와 관측 방법들이 고안되면서 관측 제도 또한 정비되기 시작했다. 전문적인 관측과 기록 업무는 중앙 관서인 관상감觀象監에서 담당했다. 관상감 관원은 측정과 기록은 물론 궁과 도성 안에 설치된 측우기를 관리하는 일까지 도맡았다.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제에서 도량형이 통일되고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측우기의 측량 방식도 체계화될 수 있었다. 이후 조선은 나라 곳곳에 측우기를 설치하고 전국 관측망을 구축해 강우량과 강우 유형을 파악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기간산업인 농업의 안정을 꾀할 수 있었다.
측우기, 과학으로 접근하다
자연현상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측우기가 발명됐다. 측우기 자체의 모양과 크기는 물론 측우대의 높이와 설치 장소를 지정하는 데에도 빗방울이 낙하하는 성질, 빗물과 흙의 무게 차이, 빗방울에 미치는 바람의 영향 등의 다양한 과학적 지식과 관측 경험이 반영됐다. 특히 세종 때의 측우기는 도량형 제도에 의해 그 규모가 표준화됐다. <세종실록>에 그 내용이 기록돼 있어 300여 년 후 영조 때에도 측우 제도를 재건할 수 있었고 측우 기록이 지속될 수 있었다.
문종 세자 시절 측우기 발명
측우 제도를 마련하는 과정은 세종 23년(1441)과 24년에 작성된 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측우기 발명과 관련된 내용은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세종 23년(1441년) 8월 ‘측우기를 만들어 전국에서 이를 이용해 강우량을 보고하게 하자’는 기록이 나온다. 그 몇 달 전인 4월 29일 을미년 첫 번째 기사에는 측우기로 짐작되는 기구가 처음 등장한다. 내용인즉슨, 노란 비(黃雨)가 내려 왕실과 대신들이 걱정하자 훗날 문종으로 왕위에 오르는 세자 이향李珦이 당시 황우는 불길한 징조가 아니라 기와 고랑에 흩어진 송홧가루가 비를 따라 내려온 것임을 밝혀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그릇에 내린 비를 받아 강우량 측정 실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실리기도 했다. 이때 세자가 비의 양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한층 정확하게 강우량을 측정하고자 만들었다는 ‘비를 담는 그릇’이 측우기로 짐작된다.
측우기 크기와 구조
측우기 크기와 관련해서 세종 때에 2건의 기사가 확인된다. 하나는 세종 23년 ‘측우기 길이가 2척, 지름이 8촌’이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듬해인 세종 24년, 호조가 측우 제도의 재정비를 건의하면서 측우기 길이를 1척 5촌, 지름을 7촌으로 제시한 것이다. 헌종 3년(1837년)에 제작된 ‘공주충청감영측우기’ 역시 이 규격으로 만들어졌다. 이때 측우기는 3단으로 분리되는 구조로 정비됐다. 크기를 줄이고 3단 분리로 설계한 것은 모두 ‘무게’와 관련이 있다. 측우기에 빗물이 넘치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점 또한 3단 분리 설계에 영향을 미쳤다.
둥근 측우기
측우기는 원기둥 형태로 만들어졌다. 비는 바람의 영향으로 이리저리 기울어져 내리는데 이처럼 무질서하게 떨어지는 빗방울이 사각이나 삼각의 모서리에 맞으면 빗물이 측우기 밖으로 튀어 오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비를 받는 측우기의 입구가 둥근 것은 이러한 비의 낙하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모서리보다는 둥근 면에 부딪힐 때 저항이 적어 측량의 오차 범위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측우기 전국 배치
측우 제도가 확립된 세종 24년 이후 측우기는 전국 330여 곳에 설치됐다. 서운관書雲觀과 8도 감영監營에 금속으로 주조한 측우기가 설치됐고, 군과 현에는 도기나 기와로 만든 측우기가 마련됐다. 주척周尺 기준으로 강우량을 측정해 날씨 상태와 더불어 보고하도록 했다.
영조 46년(1770년) 5월, 세종 때의 측우 제도를 참고해 다시 제작한 측우기는 먼저 창덕궁과 경희궁의 서운관 두 곳에 설치했다. 서운관의 위치는 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창덕궁 금호문 밖과 경희궁 개양문 밖에 있었다. 8도 감영(한성‧공주‧전주‧대구‧원주‧영흥‧평양‧해주)과 유수부留守府(강화‧개성)에도 설치했다. 정조 때에는 수원과 광주도 유수부를 두면서 전국 16곳에 측우기가 배치됐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
헌종 3년(1837년)에 제작된 측우기로 측우대는 소실됐다. 조선 시대 충청 지역의 감독관청이었던 공주감영(금영錦營)에 설치된 것으로, 1915년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에 의해 국외로 반출됐다가 1971년 환수돼 기상청에서 보관해 왔다.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이전의 강우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강수량을 정량적으로 측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측우기는 중앙에서 제작해 전국 감영에 보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현재까지는 이 측우기만이 전한다.
조선 시대 측우 제도를 증명하고 있는 이 측우기의 제작 시기와 크기 등은 중단 바깥 면에 새겨진 명문銘文에서 잘 드러난다. 또 측우기가 일련의 제작 지침에 따라 제작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측우기의 평균 높이는 31.2m, 지름은 145cm인데 이를 주척으로 환산했을 때 명문에 표기된 ‘높이 1자 5치, 직경 7치’와 근사한 값이다. 측우기가 주척을 기준으로 제작됐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측우기 각 동체가 약 5치의 크기로 제작돼 자를 대지 않고도 대략적인 강수량을 알 수 있는 척도로 기능했다는 뜻이다. 19세기에 제작됐지만 세종 때 이후 강우를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전통이 그대로 이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측우기는 전국적인 관측 체계를 구축한 것은 물론 지속적 관측을 통해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키는 데에도 기여했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물일 뿐만 아니라 국가의 관측 제도 정비, 과학의 발달, 도량형의 통일 등 중앙집권화된 국가 체제의 완비를 의미한다.
측우기와 측우대, 과학적 유산이 되다
공주충청감영측우기와 대구경상감영측우대가 2020년 각각 국보로 지정됐다. 제작 연도가 명기돼 있는 등 제작과 관련된 사항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이 국보로 지정되는 데 주효했다. 보물로 지정된 관상감 측우대 역시 영조 때 복원돼 전국적으로 측우 제도가 시행됐음을 증명한다. 조선 시대 측우기와 측우대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과학문화 유산임은 물론 세계 기상학사와 인류 문화사에서도 귀중한 유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른 하늘을 만나다
조선은 개항 이후 ‘천명’의 하늘과는 다른 하늘을 마주하게 된다. 서양에서는 하늘을 천문과 기상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하늘을 관측하는 방식과 관측하는 요소도 조선과는 달랐다. 온도‧습도‧기압‧풍향‧풍속 등을 측정하는 장비와 기록하는 방식 또한 새로웠다. 관측 범위 또한 하늘부터 땅, 바다, 세계 전역을 아울렀다. 조선은 서양의 하늘을 받아들이며 근대 기상 관측의 시대를 맞았다.
하늘을 다르게 보다
조선의 기상 관측 제도는 1876년 개항을 기점으로 변화하기 시작한다. 기상 정보는 개항장을 드나드는 선박의 안전과 직결되기 때문에 개항장 인근 해안의 온도‧풍향‧풍속‧기압 등의 기상 요소가 다른 지역에 앞서 규칙적으로 측정되고 기록되기 시작했다. 조선 사회는 기상 현상의 발생 원리를 설명하는 서양 기상학을 이해하는 한편 관측소에서 측정한 기상 요소를 지도상에 숫자나 기호로 표시한 일기도를 접하게 되면서 날씨 예보의 세계로 진입하게 된다.
국립중앙관상대
해방 이후 국립중앙관상대는 장비를 구비하는 데 외국의 지원을 받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의 기상 업무를 답습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국립중앙관상대 본대가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화재 피해를 입게 되면서 1953년 11월 인천에서 서울로 이전하게 된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식량자급 증산정책으로 농업 기상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국립중앙관상대는 전국의 농촌지도소 인근에 관측소를 설치했다. 곧이어 관측소는 물론 기상 관서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백엽상 등의 기상 장비를 갖추고 <농업기상순보>를 발행하면서 예찰 회의를 진행하는 등 국립중앙관상대는 다양한 기상 정보를 제공해 농업을 지원했다. 국립중앙관상대는 기상업무부와 연구조사부가 신설되는 등 조직이 분화됐고, 1974년 천문 관측과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국립천문대가 분리되면서 기상업무 전담 기관으로 재정비됐다. 당시에는 지정 전화번호 73-0060으로 전화하면 중상관상대에서 미리 녹음한 일기예보가 나왔다. 매일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이용할 수 있었다.
백엽상
기상 관측용 설비가 설치된 백색의 나무상자를 가리킨다. 바람이 잘 통하면서도 직사광선이나 눈과 비가 들이치지 못하도록 사방의 벽을 겹비늘 창살 형태로 제작했다. 나무판자 조각을 창살에 60° 기울기로 안쪽과 바깥쪽 이중으로 붙여 조립했는데, 이때 약 100개의 조각으로 조립한다고 해서 ‘백엽상百葉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흰색 페인트를 칠하는 것은 햇볕의 흡수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측정할 때도 직사광선이나 열‧눈‧비 등의 외부 영향을 최대한 차단한 환경에서 온도와 습도를 측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부에는 건습구 유리제 온도계와 하루 중 최고 온도와 최저 온도를 기록하는 최고·최저 유리제 온도계, 그리고 온도와 습도의 변화를 자동으로 기록하는 바이메탈 자기온도계와 모발 자기습도계가 설치된다. 온도계는 지면 위 1.2~1.5m 높이에 설치한다.
자동 기상관측 장비 AWS
AWS(Automatic Weather System)는 관측 장소의 풍향‧풍속‧기온‧습도‧강수량 등을 자동으로 관측해 통신으로 전송하거나 저장 매체에 저장하는 장비다. 종관 기상관측 장비(ASOS‧Automated Synoptic Observing System)와 방재 기상관측 장비(AWS‧Automatic Weather System)로 구분해 운영한다. 우리나라에는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연이어 개최되면서 자동 기상관측 장비가 도입됐다. 당시 경기장의 기상 상황을 파악하고자 15대의 자동 기상관측 장비를 마련했다. 이후 자동 기상관측 장비는 집중호우나 대설과 같은 기상 현상 감시를 목적으로 전국에 확대, 설치됐다. 현재 전국에 600여 대의 자동 기상관측 장비가 설치돼 촘촘한 관측망을 구축하고 있다.
기록에서 통계로
전통 시대의 측우 활동이 관측된 정보를 ‘기록’하는 일에 중점을 뒀다면, 근대의 기상 활동은 관측 정보를 활용하는 ‘예보’에 중요한 목적을 뒀다. 매일 정해진 시각에 온도‧습도‧기압 등 기상 요소들을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하고, 이렇게 얻은 결과는 품질관리를 거쳐 지역별, 요소별, 일별, 월별로 통계를 냈다. 과거에는 사람이 직접 관측하고 기록을 정리했지만, 현재는 관측과 기록이 자동화돼 있다. 막대한 양의 정보들은 통계와 분석 작업을 거쳐 예보의 토대가 된다. 오랫동안 축적된 기후 통계는 한반도의 기후변화를 예측할 수 있게 해주며, 폭우나 가뭄과 같은 자연재해 예방과 지구온난화 연구에도 활용된다.
기상 업무의 전산화
전산 전담조직 설치, 기상 통계용 컴퓨터 도입에 따라 기상 업무 체계가 전산화됐다. 전산 기록의 정밀화는 기상 요소를 측정하는 도구의 발달에 따른 것이다. 온도는 영하 32.6도(-32.6도)라는 숫자 대신 새로운 관측기록 입력 방식에 따라 674(=1000-326)로 표기한다. 기압 역시 1028.6mb는 0286의 네 자리로 기록된다. 이와 같은 형식의 일기상 통계표로 1970~1980년대 기상청 기록 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상의 요소인 기온‧습도‧기압 등을 측정하는 온도계‧우량계‧풍향계 등의 기기 발달로 기록은 점차 통계화‧수치화됐다. 이와 함께 1988년 서울올림픽 기상 지원을 위한 자동 기상관측 장비 시험운영을 기점으로 기상 관측 자동화가 시작됐다.
(*기후를 나타내는 표준값으로 사용되는 30년간의 누년 평균값을 ‘평년’이라 한다. WMO의 권고에 의해 30년간의 평균값이 사용된다. 기후평균값은 기온‧강우량 등 현재 기상에 대한 비교와 기후변화 예측에 활용하기 위해 산출된다.)
예보관 내일을 예측하다
기상 업무 가운데 예보 분야는 우리 일상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현재 일기예보는 전 지구적으로 수집한 기상위성, 기상 레이더 영상 등의 관측 자료와 수치예보 모델, 실시간 관측 정보 등 모든 자료를 종합해 생산한다. 예보는 광범위한 기상 자료들을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예보관들이 합동 토론 과정을 거쳐 취합된 정보를 반영해 최종 도출하게 된다. 이렇게 생산된 예보는 초단기 예보(6시간), 단기 예보(3일), 중기 예보(10일), 장기 예보(3개월), 기후 전망(1년) 등으로 정리돼 다양한 매체를 통해 시시각각 발표된다.
하늘을 가까이 하다
기상 관측망의 확충, 기상 업무 전산화, 자동화 프로그램 개발, 슈퍼컴퓨터 도입, 수치예보 기술 개발 등 기상 관측 기술이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일기예보 또한 더욱 신속‧정확하게 제공되고 있다. 이처럼 기상 관측 기술이 발전하고 기상예보 시스템이 확립되면서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하늘의 변화를 손쉽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전 지구의 기상 정보를 생산하다
자동 기상관측 장비, 기상 레이더, 기상위성 등 다양한 기상 관측망에서 수집된 관측 자료는 수치예보 모델과 슈퍼컴퓨터를 통해 전 지구 기상정보로 환산된다. 대기의 운동과 변화를 설명하는 역학 및 물리 방정식을 슈퍼컴퓨터로 계산해 대기 상태를 예측하는 일련의 과정을 ‘수치예보’라고 한다.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해 슈퍼컴퓨터 안에서 가동되는 컴퓨터 프로그램을 ‘수치예보 모델’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2020년 개발된 한국형 수치예보 모델(KIM‧Korean Integrated Model)을 활용해 한반도에 최적화된 예측 자료를 생산하고 있다.
슈퍼컴퓨터
현재 지상 및 고층 관측 장비, 항공기‧기상위성이나 기상 레이더 등의 첨단 장비를 통해 기상 관측이 이뤄지고, 전 세계적인 기상 관측 네트워크를 통해 방대한 양의 관측 자료가 수집되고 있다. 이 수많은 자료를 이용해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 더 빠르고 정확하게 미래의 날씨를 계산하기 위해서는 고해상도 수치예보 모델 계산이 가능한 고성능 슈퍼컴퓨터가 필요하다. 1970년대 기상예보에 슈퍼컴퓨터가 처음 도입된 이래로 오늘날 슈퍼컴퓨터는 수치예보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됐다.
우리나라는 2000년 슈퍼컴퓨터 1호기를 도입한 이후 2020년 현재 4호기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수치예보 기술 개발은 1980년대 초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졌다. 초창기에는 동아시아 지역을 예측하는 제한 지역 모델을 사용하다가, 1997년부터는 지구 전체를 예측하는 전 지구 예보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최근까지 외국의 수치예보 모델을 도입해 활용해 왔으나 2011년부터 우리나라의 기상 특성을 반영한 독자 수치예보 모델 개발이 시작됐다. 그 결과 2020년 4월부터 한국형 수치예보 모델이 현업에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