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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산동성 민요 <모리화>, 노래가 끝나면 여러가지 다른 중국 민요를 들을 수 있습니다
[ 중공군의 3차 공세, 14 후퇴 ]
1950년 12월 중순, 38선 일대에서 유엔군과 대치하게 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열악한 보급과 계속된 작전으로 부대정비와 휴식이 절실한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는 38선 일대에서 2~3개월간 부대를 정비한 후 38선을 돌파해 서울을 점령하기로 했습니다.
* 14후퇴 당시 얼어붙은 한강을 건너는 피난민 행렬
그러나 모택동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는 “2~3개월간의 부대정비가 필요하다”는 팽덕회의 건의를 인정하면서도 자유진영 국가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중공군이 정지할 경우, 38선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정치적 문제를 우선시했습니다. 따라서 마오는 팽덕회에게 부대정비 기간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부여할 것이라며 즉각적인 공세로 서울을 점령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모의 지침에 따라 팽(彭)은 즉각 공세준비에 착수하면서 12월 31일을 공격개시일로 선정했습니다.
38선 남쪽으로 황급히 후퇴했던 유엔군 각급부대는 책임지역을 할당받아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지만 중공군의 공세에 대한 대비책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지휘관들 역시 “중공군이 공격해 올 경우 후퇴하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식으로 패배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이 난리통에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이 의정부에서 자동차 사고로 순직했으며, 12월 26일 그 후임으로 리지웨이 중장이 부임했습니다.
1950년의 마지막 날인 12월 31일은 일요일이었습니다. 유난히도 춥고 어둠이 일찍 찾아든 17시경, 서부전선에 배치된 중공군과 북한군은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압도적으로 우세한 병력을 투입해 일제히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때부터 20만 명에 가까운 대병력이 투입된 서부전선의 계곡과 능선은 중공군으로 뒤덮이게 됐습니다.
* 14후퇴, 열차 위의 피난민들
중공군들은 문산 우측의 제1사단과 동두천의 제6사단 등 한국군 부대를 집중 공격했습니다. 제1,6사단은 준비된 진지에서 용전분투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거세지는 중공군 인해전술(人海戰術)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해가 바뀐 1951년 1월 1일 오전, 새로 부임한 미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 중장이 전투현장을 확인했습니다. 그때 국군 제1,6사단 지역에는 커다란 돌파구가 만들어져 있었고, 중동부 전선의 국군 제3군단도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국군과 유엔군이 현 위치에서 더 이상 지체할 경우 주력이 중공군에게 포위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위기를 실감한 군사령관은 전 부대를 한강-양평-홍천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했으며, 이어서 1월 3일 오후에는 한강선에서 평택-안성을 연하는 선으로 철수하게 했습니다. 군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1월 4일 오전까지 한강 이북의 모든 부대들이 한강에 설치된 임시교량을 이용하여 질서 있게 철수했습니다.
그때 많은 민간인들도 피란길에 나섰습니다. 바로 그 유명한 1.4 후퇴였죠. 그리고 마지막 엄호부대가 철수하면서 임시교량을 폭파했습니다. 유엔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그 뒤를 따라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했으며, 15시경부터 서울시청 등 주요 건물에는 인공기(人共旗)가 펄럭이기 시작했습니다. 군사령관이 한강선 방어를 포기하고 조기에 철수를 명령한 것은 한강이 두꺼운 얼음으로 뒤덮여 있어 중공군의 도하를 막는데 도움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후일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시기에는 미국 정부에서조차 “중공군이 공세를 멈추지 않는다면 한반도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었으며, 제주도에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문제까지도 검토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공군의 3차공세가 감행되던 시기는 우리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달려 있었으며, 6·25전쟁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었던 셈이었습니다.
중공군의 공세는 무시무시했습니다. 그러나 리지웨이 미8군 사령관의 전술은 한층 두드러졌습니다. 리지웨이는 만아있는 전투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 서슴지 않고 서울을 포기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팽(彭)의 부대를 서울 이남으로 유인하기 위해서 중공군이 하루에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20~30km 씩만 철수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평택-영월선을 최전선으로 하고 대구까지 3개의 방어선을 구축했습니다.
리지웨이는 팽(彭)의 추격을 감지하면서 교묘하게 중공군의 포사격 거리를 피해나갔습니다.리지웨이와 팽(彭)의 전술싸움은 대단했습니다. 1951년 1월 4일 방호산(方虎山)부대를 앞세워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은 1월 7일 수원 이북 발안근처에서 추격을 중지했습니다.彭은 이미 자신이 지나치게 남쪽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습니다. 보급선이 너무 늘어져 있었습니다.
중공군의 최대의 약점은 보급에 있었습니다. 彭은 1월 8일 급히 중공군 주력을 임진강(臨津江) 이북으로 이동 배치했습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평택-영월선에서 부대를 재정비한 리지웨이는 공군을 동원해서 서울-평양간의 도로와 철도를 완전히 파괴하면서 서서히 彭의 지상군을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울-평양간은 완전히 마의 사각지대(魔의 死角地帶)로 변해갔습니다. 리지웨이는 미8군의 전술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리지웨이는 진격을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적진지(敵陣地)를 철저히 파괴한 만큼만 진격을 했습니다. 하루에 4~7km 진격이 예사였습니다. 리지웨이는 마치 ‘입에 문 고기를 잘근잘근 씹듯이’ 적에게 달아날 수 있는 거리를 주지 않았습니다.彭은 엄청난 추위와 단절된 보급, 미군의 어마어마한 화력을 견디며 40일을 버텼습니다. 그러나 희생은 더욱 엄청나게 늘어났고 방어력은 한계에 직면하게 됐습니다.
최근 발굴된 노획문서를 보면 이 때 동사자(凍死者)가 크게 늘어났고 괴혈병, 피부병 심지어 엄청나게 많은 아사자(餓死者)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彭이 서울을 철수하기로 결심한 것은 지원군 부사령관 등화(鄧華)가 지휘한 지평리 전투(2.13~2.16)에서 패배하고 나서였습니다. 彭은 더 이상 “서울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2월 16일 毛에게 “北京에 들어가서 상의하고 싶다”는 극비 전문을 보냅니다.
중공군은 사실상 이 날부터 서울철수를 시작했습니다.2월 20일 彭은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 공식적으로 서울철수를 통고했습니다. 2월 21일 북경에서 彭은 毛에게 서울철수 이후를 협의하면서 더 이상 “싸워서 이길 능력이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침내 彭의 입에서「군사력이 열세함」으로 더 이상 싸울 수 없다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毛는 “속승(速勝)할 수 있으면 速勝하고, 그렇지 못하면 지승(遲勝)하면 되는 것이니, 너무 서두르지 말라”는 말로 彭을 위로하지만, 결국 毛도 내심으로는 미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 명장 리지웨이 등장 ]
사고로 순직한 워커를 대신하여 리지웨이가 제8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것은 1950년 12월 26일이었습니다. 중공군의 2차 공세에 밀려 유엔군이 38선 부근까지 쫓겨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리지웨이는 장교와 사병들 모두에게 감화를 주는 결단력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를 신중하게 얘기했습니다. 진정이 담긴 그의 말은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에게서 발산되는 힘은 대단했죠." 그를 따라 한국에 온 공수부대 요원 윈턴은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 가슴 한쪽에 수류탄, 한쪽에는 구급대를 메고 있습니다
"마치 슈퍼맨처럼 보였습니다. 그가 원하기만 하면, 주먹 한방으로 빌딩을 무너뜨릴 수도 있고 눈빛으로 벽을 뚫을 수도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정말 강력한 존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리지웨이는 미국 육군에서 가장 뛰어난 전투부대 지휘관 중 한 명이었습니다.
리지웨이는 일단 지독한 패배감에 젖어있는 병사들의 투혼을 다시 불러일으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자부심, 지휘관에 대한 신뢰, 임무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즉각 전방시찰에 나선 리지웨이는 경비행기나 헬기 또는 지프차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야전 지휘관들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자신감에 넘친 리지웨이를 보고 좋은 인상을 받았으나 일부는 그의 도발적인 옷차림이 웃긴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어깨에 둘러멘 낙하산 멜빵 오른쪽에는 수류탄 1발이, 그리고 왼쪽에는 작은 휴대용 구급상자가 테이프에 감겨 매달려 있었던 겁니다.
* 바삐 일선부대를 시찰하고 있는 리지웨이
병사들은 리지웨이의 이런 이채로운 행동에 자기주장이 강한 그를 좋아했습니다. 리지웨이는 단순히 허세를 부릴 목적으로 가슴에 수류탄을 단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선의 상황에 익숙한 그는 수류탄이 근거리에서 매우 훌륭한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리지웨이는 변변치 못한 야전 지휘관들을 보면 거리낌없이 야단쳤습니다. "왜 도로만을 이용하는가? 보병 선배들이 알면 무덤 속에서 뛰쳐나올 일이다!" "중공군은 가벼운 차림으로 야간에 이동하고, 미군보다 훨씬 더 지형을 잘 알고 있다. 편안한 것만 좋아하니까 도로에 집착하는 것이다. 미군도 산속에 들어갈 줄 알아야 한다. 적들을 찾아내서, 그들이 진지에서 꼼짝못하도록 만들어라! 싸워! 그들을 끝장내란 말이닷!"
워싱턴에 있을 때, 참모차장이던 리지웨이는 트루먼이 뒷배를 봐주는 상황에서도 합참이 맥아더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것을 보고 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콜린스 참모총장에게 한마디 하기도 했습니다. "예하 장성들을 무자비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그들의 통솔력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그가 이제 한국에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기 시작한 겁니다.
리지웨이는 이렇게 병사들의 자신감을 북돋는 한편 무턱대고 진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부대들이 협조체제를 유지하면서 나란히 전진해 나갈 것을 구상합니다. 일단 서울을 내어주고 평택~삼척 선까지 후퇴하면서 중공군의 길게 늘어진 병참선을 노려 보면서 진격의 실마리를 찾기 시작, 총 공세를 감행하고 드디어 2월 11일 서울을 재수복하기에 이릅니다.
* 맥아더와 리지웨이(왼쪽부터 2번째)
리지웨이는 4월 11일, 갑자기 맥아더가 해임되고 그의 후임으로 대장으로 승진하면서 동경 유엔군 사령관으로 취임합니다. 리지웨이의 후임으로 미8군 사령관으로는 벤플리트 중장이 임명됩니다.
리지웨이 장군은 버지니아 주에서 출생했습니다. 1917년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제2차 대전 때에는 미 제82공수부대 사단장으로 있으면서 북아프리카에서 시칠리아 섬ㆍ이탈리아 본토ㆍ노르망디 등지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1949~50년 참모 차장을 역임하다가 1950년 워커 장군의 후임으로제8군 사령관이 되어 한국 전선에서 활약했습니다, 1951년 맥아더의 후임으로 연합군 최고 사령관ㆍ유엔 총사령관ㆍ미국 극동군 총사령관이 되었습니다.
1952년 대통령 출마를 위해 사임한 아이젠하워 원수의 후임으로 NATO군 최고 사령관이 되고, 1953~55년 육군 참모 총장ㆍ1955년 멜론 산업 연구소 소장 등을 지냈습니다.
[ 팽덕회와 모택동, 팽덕회의 비참한 말년 ]
* 대약진 운동
1958년 중국 주석 마오쩌둥이 선언한 새로운 경제 정책은 원대한 야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약진운동"이라고 명명된 이 정책은 대중의 혁명에 대한 열정을 동원하여 중국을 산업화한다는 하나의 새로운 혁명으로 발돋움했다. 농민들을 인민공사라는 공동 생활체로 조직하여 집단 노동을 부과하였다.
처음에는 중국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다는 신념으로 상당히 열정적으로 진행되었다.그러나 열정이 기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으로 끝났다. 사람들은 뒷마당에 설치한 용광로로 대량의 강철을 생산하겠다고 했으나, 실제로 이렇게 생산된 강철은 너무 질이 낮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시멘트, 화학 제품, 면(綿) 같은 물자의 생산 같은, 매우 실제적인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품질은 대체로 매우 조악했다.
자원, 특히 노동력이 농업으로부터 이탈된 데다 흉년까지 겹치면서 1960년에는 수천만 명이 아사하였다. 결국 마오는 대약진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마오쩌둥에게 상당한 타격이었으며, 결국 마오는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자 1966년 문화대혁명의 재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대약진 운동, 마을마다 용광로를 만들어 철을 생산한다고
난리를 치다가 수천만명이 아사합니다.
* 팽덕회와 여산 회의
대약진운동 시기 어느 누구라도 주의해서 살펴본다면 문제의 심각성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풍조로 볼 때 일반 백성들은 효과적으로 자신의 곤란한 처지를 알릴 방법이 없었으며 또한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
이 문제는 단지 중앙의 지도층 주변의 사람이나 고위관리만이 나서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다. 중국공산당도 서서히 대약진 운동의 심각한 결과를 의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 내에서 대약진운동을 다시 인식하고 평가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59년 중국공산당의 여산회의는 바로 이러한 배경 하에서 거행된 것이었다. 회의석상에서 명의상 모두들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상 모택동은 결코 다른 사람의 비평을 들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팽덕희는 여산회의 동안 개인편지의 형식으로 모택동에게 대약진운동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특히 그가 중국공산당과 모택동의 실책을 비판하였을 때 모택동은 자신의 과오를 들으면 기뻐해야 하는 아량을 잃고 또한 왜 여산회의를 개최하였는지를 망각하였다.
그리하여 여산회의는 당초의 목표를 바꿔 팽덕회 등 반당 인사들을 비판하는 집회로 바뀌었다.
* 중국 강소성의 명산, 여산
* 아래 글은 김명호 저 <중국인 이야기 2>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중국인 이야기>는 3권까지 나왔는데
아주 재미있습니다. 강추합니다!!
< 팽덕회와 모택동, 팽덕회의 비참한 최후 >
50년이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1959년 여름 여산회의에서 쫓겨난 팽덕회를 애석해하는 중국인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내용도 거의 비슷비슷합니다.
“신중국 수립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공을 세웠다. 부당한 대우를 받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났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통증이 심했다. 의사가 진통제를 권하면 모택동의 약은 먹지 않겠다며 호통을 쳤다. 관우와 장비를 합쳐놓은 사람이었다.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비통함을 금할 수 없다.”
맞는 말입니다. 모택동이 등장하면 또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흐루쇼프는 스탈린을 난도질했다. 소련은 스탈린이 없어도 레닌이 있다. 신중국은 모택동 아니면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다. 팽덕회는 이런 모택동에게 대들었다가 비극을 자초했다.”
이것도 맞는 말입니다. 모택동은 싸움을 즐겼습니다. 도전을 좋아했고, 누가 도전을 해오면 혼쾌히 받아들였습니다. 피하기는 커녕 얼굴에 생기마저 돌았습니다. 투쟁철학이 곧 인생철학이었습니다.
“나는 먼저 싸움을 건 적이 없다. 단, 나를 먼저 해치려는 자는 상대가 누구건 그냥 내버려두지 않겠다.”
전략도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상대가 찧고 까불게 내버려두고 잠복해 있던 적까지 모습을 드러내면 느지막하게 나서서 일거에 제압하는 ‘후발제인(後發制人)’ 한 가지만 구사했습니다. 별것 아닌 것 같았지만 다들 나가 떨어졌습니다.
중공 공산당 초기의 왕명, 대장정 때의 장국도, 신중국 시절의 유소기, 지금 얘기하는 팽덕회, 문혁시절 기고만장하여 설치던 임표 등이 대표적으로 모에게 당한 인간들입니다. 주은래와 등소평은 한번 혼쭐이 난 이후 무척 조심스럽게 처신하면서 끝까지 살아 남은 케이스입니다.
* 모택동과 흐루쇼프, 맨 왼쪽이 팽덕회, 바로 옆이 등소평
여산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59년 7월 14일, 팽덕회가 놓고 간 편지를 본 모택동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라며 별 내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회의 기간 동안 팽덕회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게 내버려뒀습니다.
“실책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누구를 원망하거나 책임을 추궁해서는 안된다. 모택동 동지를 포함해 책임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인민공사 운동을 너무 일찍 시작했다. 밥은 돈을 내고 먹어야 한다. 하루 세 끼를 공공식당에서 무료로 먹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항가리 공산당을 봐라, 매년 매달 한 사람에게 고기를 40킬로그램씩이나 나눠줬지만 폭동이 일어났다.”
이 정도는 용납이 가능했습니다. 다음이 문제였습니다.
“중국인들에게 모 주석의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다. 전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높다. 단, 남용해서는 안된다. 지난 일년을 돌이켜 보자. 주석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다 보니 적지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잘못된 것은 반대해야 한다. 주석의 심리를 살피느라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개인숭배는 위험하다.”
나가도 너무 나갔습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毛는 내색은 안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팽을 우경 기회주의자의 반당행위로 규정했습니다.
방 안에서 칩거하던 모택동은 사흘이 지나서야 당 최고멤버들인 유소기, 주은래, 주덕을 불렀습니다. 팽덕회의 서신을 보여주며 의견을 물었습니다. 세 명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은 “팽덕회답다”며 웃어넘겼습니다.
* 한국전쟁 당시 팽덕회
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토론에 부치자. 이 기회에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들 하라고 해라. 편지의 성격이 궁금하다.” 세 사람은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무슨 싸움이건 먼저 화내는 사람이 지게 마련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리입니다. 성질 급한 팽덕회는 모택동의 돌발행동에 분노했습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주석에게 참고하라며 개인적으로 보낸 편지다. 토론에 부치자고 요구한 적도 없다. 내 의견이라는 표제까지 달아서 모두에게 토론하라고 하는 것은 부당하다.”
* 한국전쟁 정전협정에 조인하는 팽덕회
팽덕회의 편지가 조별 토론의 중심 의제로 등장했습니다. 팽덕회의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예상보다 많았습니다. 동북조는 한 명도 빠짐없이 팽덕회를 지지했습니다. 밖에 얼씬도 안하며 회의 내용을 보고받던 모택동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져 갔습니다.
국내보다 소련 측에서 먼저 반응이 먼저 왔습니다. 후일 중공 선전부장을 지낸 등력군이 생생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모스크바 주재 중국대사가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실린 중국의 대약진운동 관련 기사를 보내왔다. 팽덕회의 의견과 대동소이했다.”
북경을 지키고 있던 부총리 천이의 전화보고도 심상치 않았습니다. “방금 북경 주재 소련대사를 만났습니다. 농담조로 정변을 일으킬 생각이 있느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웃어넘기기에는 워낙 민감한 내용이라 보고 드립니다.”
그렇지 않아도 흐루시초프와의 관계로 소련과의 분쟁이 시작될 때였습니다. 모택동이 난리를 치면서 시작한 <대약진 운동>이 실패로 이어지자 흐루시초프는 “모택동이 방귀 한번 시원하게 뀌려다 똥을 쌌다”고 놀려대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얼마 전에 소련을 다녀온 팽덕회에게 모택동은 의심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지요. 1959년 여름, 여산회의 도중 팽덕회가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는 별것도 아니었습니다. 상대가 팽덕회이다보니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모택동은 농민들에게 군복을 입혀 정권을 탈취한 혁명가였습니다. 권력기반이 군대이다 보니 군을 가장 중요시했습니다. 인민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팽덕회는 중공 정권의 창출에 공이 큰 개국원수였습니다. 그리고 아뭇소리 않고 한국전쟁을 맡아 그런대로 성공하고 돌아왔습니다. 군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 여산의 팽덕회 숙소
“팽덕회가 산으로 들어갈 결심만 하면 순식간에 따라 올라갈 사람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노동자가 아니라면 농민이라도 좋다. 홍군 복장을 입힐 사람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말도 평소 자주 했습니다. 모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윗사람을 자극하는 사람들이 많은 법. “팽덕회의 편지는 단순한 건의가 아니다. 목적이 있다”며 속닥거리자 모택동을 더욱 불편하게 했습니다.
팽덕회가 보낸 편지를 참석자들에게 배포한 모택동은 3일간 침묵했습니다. 팽덕회의 의중을 살피기 위해 안휘성 서기 증희성을 팽덕회에게 파견했습니다. 장정 시절, 중공의 비밀문건과 정보를 담당한 적이 있는, 모가 가장 신임하는 부하였습니다.
팽덕회를 찾아간 증희성은 차 한잔 마시러 왔다“며 세 가지를 물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대화가 남아 있습니다.
“주석에게 편지는 보낸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하다.”
팽덕회의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이유는 무슨 놈의 이유, 평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갔다가 만나지 못했다. 너도 알다시피 이럴 때 편지를 이용하는 게 우리의 오랜 관습 아니냐.”
“소련 방문 기간 중 흐루시초프의 영향을 받은 적이 있나?”
“흐루시초프와는 대약진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다.”
“임표가 부주석이 된 것에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있다.”
“그런 생각해본 적 없다.”
증희성의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팽덕회의 단독소행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팽덕회를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7월 23일 전체회의를 소집했습니다.
* 사이좋았던 시절의 유소기와 팽덕회 부부(중남해에서)
두사람 모두 문화혁명 당시 모택동에게 가장 핍박을 받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단상에 오른 모택동은 “그간 참석자들이 많은 발언을 했다. 이제 내가 할 차례다”면서 좌중을 한 차례 둘러봤습니다. “그간 착오를 저지른 동지들이 많았다. 경험 부족이 가장 큰 이유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건 잃은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배운 게 많았다.”
모택동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자아비판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은 사람이다. 지난 2년간 뭐든지 빨리 이루기 위해 큰소리만 쳤다. 공자가 허수아비를 처음 만든 사람은 후손이 없을 거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맞는 말이다. 나는 멸종했다. 아들 한 놈은 전쟁터에서 죽고, 한 녀석은 미치광이가 됐다. 동생들도 모두 맞아 죽었다. 마르크스도 적지 않은 죄를 지었다. 죽는 날까지 혁명의 그날이 올 거라고 했지만 서구에 혁명다운 혁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참석자들은 안절부절못했습니다. 모택동의 발언은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모든 신문이 우리의 잘못을 열거하느라 정신이 없다. 일 년 내내 보도해도 불가능할 정도다. 앞으론 내 이름을 직접 거론해라. 꼭 떠나야 한다면, 나는 떠나겠다. 다시 농촌으로 들어가 농민들을 이끌고 정부를 뒤집어 엎어버리겠다. 해방군이 따라오지 않아도 좋다. 새로운 해방군을 만들겠다.”
이날 모는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발언을 3시간 동안 했습니다.팽덕회의 이름은 거론조차하지 않았습니다.
모택동의 발언이 끝나자 산회했습니다. 팽덕회는 맨 뒷줄에 있었습니다. 모가 부르자 못 들었는지 문 쪽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모가 달려갔지만 떠난 후였습니다. 회의장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모가 내려가자 공안부장 나서경과 상해 서기 가경시 등이 수행했습니다.
* 한국전쟁 때의 팽덕회
저만치 앞서가던 팽덕회가 갑자기 몸을 돌려 회의장 쪽으로 올라 왔습니다. 물건을 놓고 온 것 같았습니다. 모와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모가 팽의 한쪽 팔을 잡고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시뻘개진 얼굴에 눈까지 부릅뜬 팽덕회는 “말하고 싶지 않다”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모택동이 몸을 돌려 팽덕회를 다시 잡았습니다. “우선 앉기라도 하자. 좋은 말이건 나쁜 말이건 이야기 좀 하자.”
팽덕회는 막무가내였습니다. 할 말이 없다며 모의 팔을 뿌리치고 갈 길을 갔습니다. 수행원들 앞에서 권위가 무너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봐서는 안 될 정경을 목격한 수행원들의 반응도 제각각이었습니다.
나서경은 숲을 향해 바지춤을 내리고, 가경시는 고개를 숙인 채 연신 콜록콜록 기침만 해댔습니다. 주은래는 어디로 없어졌는지 흔적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모택동은 주은래를 숙소로 불렀습니다. 8월 2일부터 2주간 여산에서 중공 중앙 전체회의를 열라고 지시합니다.
1959년 7월 23일, 모택동은 3시간 동안 팽덕회의 우경화를 비판했습니다. 그날 밤 여산의 산책로는 평소보다 북적거렸지만 침울했습니다. 팽덕회와 마주치면 다들 피해갔습니다. 원수 섭영진만은 예외였습니다. 황혼 무렵 오솔길에서 만난 팽덕회가 “오늘 모 주석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너는 당과 인민에게 이익이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주석은 원칙을 강조했다. 옳고 그른 것은 세월이 지나야 밝혀진다”며 옛 전우를 위로했습니다.
* 모택동과 주은래, 항상 2인자를 고수한 주은래는 문화혁명 당시 알게 모르게
많은 혁명동지들을 구했습니다. 죽은 다음에 시신을 태워 그 재를 중국 산하
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습니다. 친자식은 없었고 양아들(리펑)만 있었습니다.
고결한 인격자였습니다
총리 주은래는 폭풍이 닥쳐올 것을 예감했습니다. 팽덕회를 조용히 불렀습니다. 밥맛이 없다며 저녁도 거른 팽덕회는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습니다. 주은래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주석은 너를 대약진운동 실패의 제물로 삼으려 한다. 나도 한때 그런 위기에 빠진 적이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 장정 시절부터 주은래를 대수롭지 않게 보던 팽덕회는 듣는 둥 마는 둥 표정이 없었습니다.
주은래는 목이 탔습니다. “제발 내 말 좀 들어라, 너는 군인이다. 경제와는 상관이 없다. 우리 모두에게 화살을 돌려라. 주석은 정확한 방향을 제시했지만 우리가 집행을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국가가 재앙이 닥쳤다고 우리를 비판해라.”
주은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팽덕회는 벌떡 일어나 그냥 자리를 떴습니다.
* 홍위병들에게 혹독하게 당하는 팽덕회
24일 오후부터 회의가 속개됐습니다. 소조마다 전날 있었던 모택동의 발언에 대한 입장 표명이 줄을 이었습니다. 모택동이 좌경화를 포기 할 줄 알고 팽덕회에 줄을 섰던 사람들일수록 팽덕회의 비판에 열을 올렸습니다. 팽덕회의 의견에 동의는 하지 않았지만 “놀고 먹는 회의가 아니라, 열띤 토론의 계기를 만든 것 하나만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내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평소와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국가 주석 유소기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습니다. 평소 잘하던 하품도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하게 될 “팽덕회의 원래 이름이 득화(得華)다. 어릴 때부터 중국을 먹을 야심이 없었다면 이런 이름을 가졌을 리가 없다”는 말 같지 않은 비판을 준비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한때 착오를 범해 혼난 적이 있는 주은래와 진운은 몸을 사리느라 말조심하는 모습이 역력했습니다. 총서기 등소평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표현력이 부족하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중국 홍군의 아버지 주덕은 뭐가 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 같았습니다.
7월 31일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과 팽덕회 사이에 설전이 벌어졌습니다. 모택동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지난 31년간 우리는 합작과 모순을 반복했다. 너는 30퍼센트만 나를 지지했다." 팽덕회도 물러서지 않앗습니다.
"에이 지에미 씹할! 연안에서 당신은 40일 동안이나 지랄했잖아. 내가 소란을 벌인 지 이제 겨우 18일밖에 안됐는데, 지에미 씹할! 나한테 그만두라고 명하다니, 엿장수 맘대로는 안 될 거요." 그들은 옛 시절로 거슬로 올라가 홍군 시절에 썼던 농부들의 막말로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팽이 언급한 연안에서의 40일이란 그가 오래 전에 모와 벌였던 떠들썩한 언쟁과 관계된 것입니다.
모택동의 얼굴이 일그러졌습니다. "네가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고 기분이 나쁜가 본데, 그간 아무리 중요한 일이 있어도 너는 네 멋대로 처리했지 내게 편지를 보내거나 의논한 적이 없다. 이번 편지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군중을 취합하고, 대오를 정비하려는 게 아니고 뭐냐."
다음날 회의는 7시간 가량 계속됐습니다. 주덕이 먼저 발언에 나섰습니다. 주덕은 평소에 말수가 적었지만 한번 입을 열면 눈치 없이 주책을 떨 때가 많았습니다. 모택동이 슬그머니 일어나서 구두끈이나 똑바로 매라고 면박을 줬습니다. 주덕이 구두를 향해 허리를 숙인 틈을 타 임표가 발언을 시작했습니다.
모택동을 구원하기 위해 병상에서 달려온 사람다웠습니다. 거두절미, 팽덕회를 야심가, 음모가, 군자의 탈을 쓴 소인배로 몰아붙였습니다. 품위는 없었지만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모택동의 비판이 다시 이어지자 팽덕회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날 밤 모택동은 허망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경호원 중 한 사람의 구술에 따르면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반쯤 감은 채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고 합니다.
"지구상에 인간들처럼 상황에 따라 변화가 빠른 동물도 없다. 천 년 후에 태어난 사람들이 지금의 우리를 뭐라고 할까! 어처구니없는 것들끼리 모여서 한바탕 희극을 벌이다 갔다며 조롱할 게 분명하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도 예외일 수 없다."
8월 15일 밤, 여산회의 폐막을 하루 앞두고 모택동은 당 중앙위원들에게 쪽지를 보냈습니다. "비판은 엄하게 하되 처리는 관대하게 해라. 착오를 저질렀지만 팽덕회와 장문천, 황극성, 주소주는 혁명성과 반동성, 양면성이 있다. 그러나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있다."
다음날 마지막 회의에서 반당집단인 '군사구락부'를 만들고(어거지로 누명을 씌움) 외국과 내통한 팽덕회를 반당집단의 우두머리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북경으로 돌아온 팽덕회는 군과 관련된 모든 직무를 정지당했습니다.
1959년 8월 18일, 중앙군사위원회는 확대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전군의 지휘관 1,061명이 북경에 운집했습니다. 국방장관 팽덕회와 총참모총장 황극성이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이 자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유소기가 거품을 물고 팽덕회를 비난합니다.
"군사구락부" "외국과 내통" "여산에서 난을 모의했다"며 팽덕회를 가혹하게 몰아세웠습니다. 잠자코 듣던 팽덕회는 들고 있던 연필을 바닥에 내팽개쳐 버렸습니다. 유소기 자신도 몇 년 후 벌어지는 문화혁명 때 모택동에게 잔인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인간사 내일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주은래는 신중했습니다. "팽덕회 동지는 생각이 깊지 못했다. 우리가 일을 잘못하는 바람에 팽덕회 동지가 잘못을 저질렀다."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픽 웃으며 "주은래는 원래 그런 그런 놈"이라며 냉소를 지었습니다.
진운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리를 지켰지만 입도 뻥긋 안 했습니다. 임표가 모택동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일러 바쳤습니다. "진운은 꼿꼿이 앉아 있기만 했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눈치였습니다."
모택동은 의외의 반응이었습니다. "그건 두려워하는 눈빛이 아니다. 아주 먼 곳을 바라보는 눈이다. 진운은 우파로 일관한 인간이다."
9월 9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30여 년간 베풀어 준 인내에 감사한다. 북경을 떠나겠다. 인민공사에 가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는 공부하고 싶다." 팽덕회 후임으로 임표가 국방장관에 임명됩니다.
국방장관에서 쫓겨난 팽덕회는 한국전쟁에서 돌아온 후 7년 간 살았던 중남해를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황혼 무렵만 되면 영복당 주변을 산책하며 감회에 젖었습니다. 하루는 양상곤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며 내게 해라. 그대로 모 주석에게 전하겠다." 평소 친한 사이였지만 팽덕회는 차만 마실 뿐 대꾸도 하지 않았습니다. 내 발로 온 게 아니라 주석이 보내서 왔다고 하자 입을 열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당행위나 자살을 하지 않겠다. 농촌이 그립다. 농부가 되어 자력기식하며 살고 싶다."
이젠 필요 없다며 원수 복장도 반납했습니다. 9월 30일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팽덕회는 중남해를 떠났습니다. 배웅객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택동은 "스산한 가을 바람이 대장군을 배웅했다"며 심란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함께해 온 동지들을 모두 알고 있던 주덕은 나중에 이 사건들을 곰곰이 되돌아보면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전에 한솥밥을 먹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팽덕회는 북경 서북쪽, 북경 대학과 가까운 곳에 있는 해갑촌(解鉀村)이라는 마을에 있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오(吳)씨 가문의 정원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은 팽의 신세와 어울리는 장소였습니다.
해갑촌은 '갑옷을 벗어 걸라'라는 의미였습니다. 마을 이름은 야만족 정벌에 나선 한 장수가 이곳에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고 갑옷을 벗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팽이 이사 왔을 때 오씨 정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습니다. 안뜰에 집이 두 채 있었습니다. 팽과 아내, 그리고 비서 두 명이 한 채에 살았고 팽의 운전사와 경호원들이 다른 한 채에 살았습니다. 가택 연금 상태는 아니었으나 정치와 정부, 그리고 군과의 접촉은 완전히 차단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내가 그와 이혼한 것은 어쩌면 '선을 그으라'는 정치적 압력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팽은 복숭아를 재배하고 정원을 어정어정 거니는 일로 소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마을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항상 적극적인 삶을 살아 왔기 때문에 한가로운 시골 생활에 당혹감을 느끼고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이런 생활은 1965년 9월 23일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 날 모택동이 팽을 중남해로 불러들여 사천성으로 가서 제3선 건설(처음에는 미국과의 전쟁을 대비한다고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소련의 침공에 대비한 방벽 구축)의 부책임자 직을 맡아 달라고 제안했습니다. 모와 얘기를 나눈 팽은 그 임무를 맡고 중경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3선 계획을 실행에 옮겨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는 문화혁명이 시작된 직후 1966년에 체포되어 홍위병의 손에 잔혹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내장이 다 짓이겨지고 허리가 부러지도록 구타를 당했습니다. 그는 무려 130번의 심문을 받은 후 1974년 11월 29일 마침내 세상을 떠났습니다.
끝까지 항복하지 않은 그는 "너희들이 나를 죽일 수는 있다.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너희들이 설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너희들이 날 심문하면 심문할수록 난 입을 더 굳게 다물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 팽덕회의 묘지, 나중에 복권이 되어 이렇게 웅장한 묘지로 단장되었습니다.
특히 현재의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인 시중쉰은 여산회의 당시 팽덕회의 심복
이었습니다. 시중쉰은 문화혁명 당시 8년간 옥살이를 했습니다. 최근에 팽덕회
를 주인공으로 하여 영화를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시진핑의 입김이
아닌가 합니다.
팽은 대장정의 영웅다운 삶을 살았으며, 대장정의 영웅답게 죽었습니다.
* 대장정
대장정이란 1만 5,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 공산군(홍군(紅軍))의 역사적 대행군(1934~1935)으로, 이 결과 공산당의 혁명 근거지가 중국 동남부에서 서북부로 옮겨졌으며 모택동이 확고부동한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홍군은 추격해 오는 장개석의 국민당 군과 계속 싸우면서 18개의 산맥을 넘고 24개의 강을 건너 서북 지방의 섬서성에 도달하였다. 중국의 많은 청년들은 장정이라는 영웅적인 투쟁에 자극을 받아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에 걸쳐 공산당에 가담하였다.
처음 강서성에서 출발 할때 86,000명이었는데 1년 후에 섬서성에 도착했을 때에는 7,000명만 살아 남았고 이중 3,000명만 출발 때의 멤버들이었다. 이들이 최종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공산당 지부가 있었는데 그 곳 지도자가 바로 현재 중국 시진핑 주석의 아버지 시중쉰이었다. 시중쉰은 여산회의 당시 팽덕회의 심복이었고 이 때문에 문화혁명 때 핍박을 받았으나 등소평이 복권시키고 중용했다. 그 아들이 시진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