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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7일(대림절 첫 번째 주일/ 추수감사주일)
디모데전서 1:12~17
감사를 생각하다.
하늘사랑교회 주일예배 설교문
오늘은 대림절 첫 번째 주일이자, 추수감사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시편 90편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모세의 고백처럼, 우리가 보내는 수고와 슬픔의 날들은 신속히 지나가고 맙니다. 그래서 120세를 살았던 모세마저도 인생의 빠름을 표현하면서 “우리가 날아간다.”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해, 한 해를 새롭게 맞이하고 보내면서 그나마 가지고 있던 젊음마저도 보내고, 이마에 주름살이 늘어만 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인생의 속절없음을 한탄하며 감사를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든지 불평하기보다는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생각하건대, 이 감사는 오직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그런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환경을 바라볼 때 감사보다는 불평하기가 더욱 쉽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녀원에 잔소리가 심한 늙은 수녀가 있었습니다. 그곳의 젊은 수녀는 늙은 수녀에게서 잔소리를 듣는 날이면 어김없이 방문을 쾅 닫고는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습니다.
그런데 방 밖에 있던 앵무새가 이 젊은 수녀의 말을 듣고는 그 말을 배워서 방문이 꽝 닫히기만 하면 젊은 수녀의 말을 따라했습니다. 난처해진 젊은 수녀가 다음부터는 문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지만, 혹 실수로 문이 꽝 닫히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 앵무새는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를 반복했습니다.
고민 끝에 이 젊은 수녀는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자초지정을 들은 젊은 신부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습니다. “거 참 고민되시겠어요. 제 사제관에서 기르는 앵무새가 한 마리 있는데 그 앵무새를 함께 길러보세요. 혹시 짝이 생기면 그 말을 잊을지 혹시 압니까?” 그래서 젊은 수녀는 한 새장에 앵무새 두 마리를 함께 키우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젊은 수녀가 실수로 문을 꽝하고 닫자, 이 얄미운 앵무새가 어김없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저 늙은 수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러자 신부가 준 앵무새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아닙니까? “주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수도원에 있던 수녀도 감사하기가 어려운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디모데전서는 나이 많은 바울 사도가 자신의 영적인 아들이었던 젊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글입니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12절-13절 상)”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사도 바울은 젊은 시절에 유명한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말살할 수만 있다면 살인도 주저하지 않을 정도로 잔인했고, 자신이 믿고 있던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었던 맹신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러한 바울을 찾아오셨고, 그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를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충성되이 여겨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귀한 직분까지 그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큰 은혜를 생각할 때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젊은 시절 주님을 핍박했던 것은 주님을 전혀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는 사도 바울에게 더욱 넘치도록 임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 것입니다(롬 5:6).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 일생을 통해 주의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이것이 결코 그의 자랑이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15절에서, 바울은 겸손하게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겸손한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더욱 겸손히 머리를 숙이는 자의 마음에는 깊은 감사가 놓여 있습니다.
요즘 어떤 이들은 열심히 교회 봉사하면서 은근히 자신의 열심을 자랑하고,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자들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많이 수고하고 애썼는지를 구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칭찬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면 오히려 불평하고 원망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하고 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사명을 감당할 능력을 주셨기에 내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충성되이 여기셨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우리들이 주님 앞에서는 충성스럽지 못한 자들이지만, 주님이 충성스럽다고 여겨주셔서 귀한 직분까지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겸손한 마음은 감사생활로 나타납니다. 인간은 겸손한 만큼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개를 숙이면 숙일수록 하나님은 반대로 우리의 머리를 높여 주십니다.
창세가 32장 9절과 10절에 보면, 야곱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실하심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사오나 내가 내 지팡이만 가지고 이 요단을 건넜더니 지금은 두 떼나 이루었나이다.”
여기서 야곱은 주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을 조금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에게 은총을 베푸셨습니다.
야곱이 고향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하나만을 가지고 요단을 건넜지만, 지금은 두 떼의 짐승들을 거느린 갑부가 되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야곱이 결핍한 가운데 베푸시는 하나님의 풍족하신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우리도 야곱처럼 겸손히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베푸신 놀라운 은총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세는 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애굽의 노예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던 젊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교만한 사람은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이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겸손한 사람은 하나님이 나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겸손의 고백 위에 감사한 마음이 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실 은혜들을 바라봅시다. 그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에서 감사가 떠나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삶을 더욱 넘치도록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만이 감사의 마음을 갖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욥기 1장에서, 욥은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욥 1:21~22).”
과연 이렇게 고백하는 욥이 누구입니까?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이 있었습니다. 또한 양이 칠천 마리고, 낙타가 삼천 마리이고, 소와 암나귀가 각각 오백 마리였습니다. 욥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이 모든 것들을 하루아침에 잃게 되었습니다. 자식 모두를 잃었고, 재물을 잃었으며, 급기야 자신의 건강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나은 비참한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욥은 자신이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으니 다시 알몸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요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라고 말했습니다. 욥은 고난을 당했으나 하나님께 범죄하거나 원망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물론 욥이 자신이 당하고 있는 모든 고난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이해할 수 없는 중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한다 할지라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에 우리는 진정한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다음과 같은 찬송을 올렸던 것입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우리가 결핍 가운데서도 감사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전남 여수에 가면 애양원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사랑의 원자탄으로도 유명한 분입니다. 이 분이 일평생 한센 병 환자들을 치료하며 목회하시던 중, 1948편에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죄 없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을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밧줄로 묶고 매로 때렸습니다. 그들은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고 공산주의를 따르면 살려주겠다고 두 아들을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아들 동신 군과 둘째 아들 동인 군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아니하고 그들에게 총살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이 두 형제는 죽으면서도 두 팔을 벌려 “주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제 영혼을 받아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접한 손 양원 목사님은 장례식장에서 다음과 같은 답사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내 어찌 긴 말의 답사를 드리리오, 내가 아들들의 순교를 접하고 느낀 몇 가지의 은혜로운 감사의 조건을 이야기함으로써 답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첫째,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둘째,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들을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셋째, 3남 3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넷째,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이리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다섯째,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 하다가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여섯째,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도 좋은 천국에 갔으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일곱째,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여덟째, 내 두 아들의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홉째,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 합니다.
이 일들은 옛날 내 아버지, 어머니가 새벽마다 부르짖던 수십 년간의 눈물로 된 결정이요, 나의 사랑하는 나환자 형제자매들이 23년간 나와 내 가족을 위해 기도해 준 그 성의의 열매로 믿어 의심치 않으며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손양원 목사님의 답사를 듣고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그분의 신앙과 감사가 참으로 위대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절대로 고백할 수 없는 감사의 제목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감사를 잃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것에 비교해 조금 나으면 감사하고, 조금만 덜하면 불평하는 감사의 결핍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감사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 나오는 감사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대적 감사가 아니라 절대적 감사요, 조건적 감사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에서 감사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가 아마 미국일 겁니다. 미국인들은 사소한 것에도 “Thank you, Thank you!”를 외칩니다. 심지어 상대방의 요구에 무엇인가를 거절할 때에도 그들은 “싫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No Thank you!”라고 표현합니다. 감사가 우리 삶의 기준이요,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감사를 표현하는 “Thank you”라는 단어의 어원을 따라 올라가보니까 “생각하다”라는 뜻의 “Think”라는 단어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이겠습니까? 감사는 생각에서부터 나온다는 게 아니겠습니까? 과연 어떤 생각에서부터 나올까요? 하나님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감사가 나옵니다.
전도서 12장 1절과 2절에 보면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고, 생각할 때 감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싶습니다. 감사를 생활화하십시오. 여러분이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세요. 감사는 감정이기 이전에 의지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감사는 훈련이 필요한 겁니다.
여러분의 하루 24시간 중에 감사의 언어와 불평의 언어 중에 어떤 종류의 언어가 더 많이 나옵니까? 감사하는 생활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고, 의지를 드려 훈련해야 하는 영역입니다. 좋은 입술의 열매를 많이 맺고, 불평보다는 감사, 부정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삶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의 훈련이 필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 때문입니다. 우리가 적은 누룩을 조심해야 할 이유는 적은 누룩이 큰 빵을 부풀리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감사의 빵을 굽게 만듭니다. 그러나 불평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그가 속한 공동체에 불평의 빵을 굽게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 사람 속의 마음에 품은 것이 그의 입술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제 저는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번 추수감사절에 여러분은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렵니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사입니까, 아니면 마음과는 거리가 먼 감사입니까?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머리를 숙일 때 진정한 감사는 가능합니다.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의지할 때 진정한 감사는 가능합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의 삶에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