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러운 동경
4장 2, 통각작용(統覺作用)과 자연 법칙의 문제
왕은 물었다.
『존자여, 다섯 가지 영역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깁니까. 아니면 한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깁니까.』
『대왕이여, 한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니고, 각기 다른 여러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깁니다.』
『비유를 들어 주십시오.』
『대왕이여, 한 뙤기 밭에 다섯 가지 씨앗을 뿌린다면 여러 가지 씨앗에서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대왕이여, 마찬가지로 다섯 가지 영역은 각기 다른 여러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깁니다. 한 가지 행위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존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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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가지 영역 - 眼·耳·鼻·舌·身 등, 다섯가지 감각기관의 대상에 대한 대응 관계
(<밀린다팡하>
- (‘서재영의 불교 기초 교리 강좌’에서)
주님, 온 마음을 기울여서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들 앞에서, 내가 주님께 찬양을 드리렵니다.
내가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면서 경배하고, 주님의 인자하심과 주님의 진실하심을 생각하면서 주님의 이름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과 말씀을 온갖 것보다 더 높이셨습니다.
내가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은 모든 왕들이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의 영광이 참으로 크시므로, 주님께서 하신 일을 그들이 노래합니다.
주님께서는 높은 분이시지만, 낮은 자를 굽어보시며, 멀리서도 오만한 자를 다 알아보십니다.
내가 고난의 길 한복판을 걷는다고 하여도, 주님께서 나에게 새 힘 주시고, 손을 내미셔서, 내 원수들의 분노를 가라앉혀 주시며, 주님의 오른손으로 나를 구원하여 주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그들에게 갚아주시니, 주님, 주님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이 모든 것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시편> 138편)
오늘 <밀린다팡하>에서 "한 뙤기 밭에 다섯 가지 씨앗을 뿌린다면 여러 가지 씨앗에서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열매가 맺어지겠습니까."를 보자.
우리의 인식 능력은 식물 사유에서 왔다.
오늘 시편에서 “내가 부르짖었을 때에, 주님께서는 나에게 응답해 주셨고, 나에게 힘을 한껏 북돋우어 주셨습니다.]를 보자.
주변에 사람이 없을 때 기도는 유효하다. 그런데 위 글을 보면서 든 생각은 이렇다. 기도는 결국 내가 내게 하는 것 같다. 내가 내게 힘을 준다는 것 같다. 그 무엇이 무엇을 주어도 움직이는 실체는 나란 몸 아닌가. 언젠가 없어질 몸이지만 살아가는 동안 힘을 주는 건 결국 나인 것 같다. 그 힘을 빌리는 것 같다. 그것은 소수가 아니라 바로 이 우주를 주재한다는 그 어떤 힘이다. 당연히 힘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도 자주 빌려야겠다.
<꽃의 제국>에 나오는 글이다.
[번식의 기본 목적은 씨앗을 만들어 퍼뜨리는 것이므로 꽃이 피는 것은 번식 과정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속씨식물의 경우 씨앗이 열매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열매를 만들고 분산시키는 것이 번식과정의 핵심이 될 수 있다. 이런 경우 열매에 대한 자연선택이 꽃피는 시기를 결정할 수 있다. 열매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과육이 있거나 고영양의 씨앗을 가진 열매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런 열매를 맺는 나무가 가을에 꽃이 핀다면 열매에 충분한 영양을 공급할 정도의 광합성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고영양의 열매를 만드는 식물은 대개 봄과 여름에 꽃이 핀다. 열매가 언제, 어떻게 퍼지는가도 개회시기와 관련된다. 여름에 이동하는 철새가 열매를 먹고 씨앗을 퍼뜨린다면 철새가 이동할 때 열매가 성숙해야 하기 때문에 꽃은 상당히 일찍, 즉 이른봄에 피어야 한다. 가을 철새가 열매를 먹는다면 이 식물은 이보다 조금 늦게, 여름에 접어들어 꽃을 피워도 될 것이다.]
10만년의 삶을 살고 있는 인간 종이 수억년의 식물 종을 이해하기가 참 어렵구나.
꽃 피는 시기를 결정하는 게 곤충의 출현이 아니라 열매를 만드는 시기라는 것 같은데, 참 어렵다.
<길고 긴 나무의 삶>에 나오는 글이다.
[이 울창하고 키 큰 나무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긴 하다. 호리호리한 어린 사이프러스 묘목은 빠르게 몸집을 불리며 어떤 풍경이든 장악한다. 말없이 풍경을 잠식하면서 우리의 자의식을 위협하는 듯하다. 사이프러스는 우리가 꾸는 가장 불안한 꿈의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해할 수 없게, 조금은 불길하게. 식탁에 초대받지 못한 손님으로, 목가적 이상향에 드리운 어둠으로, 정원의 아늑한 공기를 뚫고 들리는 음산한 음으로, 강한 향을 풍기는 영원한 수행원으로 그들은 늘 그 자리에 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하지 못한 두려움, 어렴풋이 알지만 감히 인정하게 못하는 것들의 형상을 한 채 서 있다. 우리의 그 모든 불안 속에서도 이 키 크고 흔들림 없는 침엽수들은 말없이 서 있다. 우리의 끔찍한 불안을 투사하면서도 대체로 무심하게.]
산문이 하나의 멋진 시로 읽힌다. 나무를 사유해서 그런 것 같다.
위의 글 가운데 “말없이 풍경을 잠식하면서 우리의 자의식을 위협하는 듯하다.”를 보자.
나무에 관심이 없었던 때와 달리 나무에 관심을 두고 사니까 내 자의식에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게 나무가 내게 가하는 아니 내가 나무에게서 튕겨 내가 내게 가하는 위협일 것이다. 굳어진 관념들이 깨지는 균열의 과정일 것이다. 나름 괜찮으니까 계속 해나가는 것이겠지.
<나무처럼 생각하기>에 나오는 글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인간은 동물들을 관찰하면서 질병의 치료법을 찾아낸다는 가설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미국의 인류학자인 마이클 허프만에 따르면, 아프리카 반투족은 침팬지가 국화과 식물인 베르노니아 아미그달리나를 약으로 먹는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후 이를 구충제로 섭취하게 됐다고 한다. 프랑스 국립자연사박물관의 사브리나 크리프는 우간다 침팬지가 멀구슬나뭇과 식물인 트리칠리아 루베센스 잎과 적토를 섞어 먹으며 자가 치료를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생물에게서 세상을 배운 사례들이 점점 쌓이고 있다.]
그래서 ‘나는 풍요로워졌고 지구는 달라졌다.’
<생물 세계의 이해>에 나오는 글을 보자.
[그러나 먹이가 먼저였던 것도 아니며 생물이 먼저였던 것도 아니고 먹이와 생물은 원래 처음부터 갈라 놓을 수 없는 존재이며 그만큼 생물에 있어서 먹이가 생물을 가까이한 존재였던 것은 먹이라는 것이 실은 생물체의 연장이며 생물을 키우는 원천이었던 까닭이다. 따라서 유연이라는 것을 말한다면 먹이와 생물 사이에서는 적어도 생물학적, 분류학적 유연은 문제가 되지 않아도 먹이와 생물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신체적 유연이고 자신의 신체 연장이기 때문에 먹이를 인정한다는 것은 즉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먹이라고 해서 그것을 생물은 언제든지 먹이로서 인정하고 있을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또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다분히 하등동물 등에서는 배가 고파서 먹이가 필요할 때에는 그것이 먹이로 인정된다 해도 필요가 없을 경우 먹이도 아무 것도 아니며 그런 경우에는 또한 별도로 필요한 것이 인정되어 구해지게 될 것이다.]
먹이가 반려가 되어가는 시대 변화, 또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먹이도 나의 생명체이고 반려도 나의 생명체이다. 모든 것은 하나의 생명체이다. 매번 말하지만 이렇게 말은 해도 그 느낌은 요원하다. 수행만이 그 방법일 텐데, 그것도 못하고 있으니, 이도 저도 아니다.
헤세의 <싯다르타>를 보자.
[싯다르타는 숲속에 있는 큰 강가에 이르렀는데, 예전에 그가 아직 젊었던 시절 고타마가 사는 도시로부터 빠져 나올 때 어떤 뱃사공이 바로 이 강을 건네다준 적이 있었다. 이 강가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머뭇머뭇하면서 강 기슭에 서 있었다. 자기는 피곤과 허기에 지쳐 쇠약한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계속 길을 가야 하며, 도대체 어디로, 어떤 목적으로 가야 한단 말인가? 아니다, 더는 더 이상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이 모든 황량한 꿈을 자신에게서 툭툭 털어내 버리겠다는, 이 김빠진 술을 토해 버리겠다는, 이 비참하고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삶을 끝장내 버리고야 말겠다는,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고통스러운 동경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위 글에서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고통스러운 동경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를 보자.
‘고통스러운 동경’이라? 삶의 본모습이 모두 들어있는 표현이다. 참 대단하다.
오늘도 게송으로 마무리하자.
‘고통스러운 동경’이라는 묘사를 읽었다.
무엇이 그러할까
이루지 못할 사랑
얻지 못할 부(富)
알지 못할 이 세상의 모든 지식
시작도 끝도 모르는 우주의 비밀
가지지 못할 명예
전혀 느끼고 싶지 않지만 밀려드는 수치심 제거 문제
우리 삶은
고통스러운 동경이 전부인 것 같다
모든 걸 비우고 내리고
그래서 깨우친다는 것
모든 걸 하느님에게 맡겨
온전하고 영원한 삶을 살겠다는 것
이 모든 게
고통스러운 동경일 것이다
헤세여,
삶의 본질을 확철대오하게 해준
표현
감사드린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