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익는 마을의 책 이야기
보령기독교 역사문화선교사업회 엮음 『1832년 칼 귀츨라프 조선 항해기』
칼 귀츨라프(1803~1851)
는 독일 출신 개신교 선교사로 네덜란드 선교사로 중국 선교 활동 중 1832년 7월 17일부터 8월 17일까지 영국 상선 Lord Amherst호를 타고 조선 서해안을 방문하였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1834년 런던에서 출간한 항해기(Voyages)에 담았는데, 그의 조선 방문 목적은 단순 탐험이 아니라 선교 가능성을 탐색하고, 성경 전파를 시도하고 조선 사회를 조사하는 것이였다. 실제로 그는 충청도 서해안에서 한문 성경을 배포하고, 의약품을 제공하고, 조선 관리와 주민과 접촉했다. 이 것은 조선 최초의 개신교 목사의 선교 활동으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물론 그의 일행이 내륙으로 들어가거나 공식 선교를 할 수는 없었다.
그의 행적을 지금의 행정 용어로 풀어 보면, 7월 21일 외연도에 도착하고, 22일 녹도에 정박하고, 23일 볼모도에 들어온다. 7월 24일부터 8월 12일 까지 고대도, 원산도 일대에서 주민과 관료들과 접촉하면서 나름 선교 활동을 한다. 8월 7일에는 안면도 천수만 지역을 탐험하며 간월도등 몇 몇 섬지역을 둘러본다. 8월 10일에는 충청수영성을 탐방하기도 했다.
보령 기독교 인사들은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 활동이라는 의미를 두고, 귀츨라프 목사의 항해지를 번역하여 출간하였으며 각 종 기념 행사와 세미나, 역사 탐방등을 기획하고 실행하였다고 한다.
1832년 조선
은 순조(재위: 1800~1834) 말기로,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의 부흥기를 지나 외척 세도정치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매관매직과 세금 착취 증가, 지방 관리들의 수탈이 심해졌다. 하여 백성 생활이 궁핍해지고, 국가 재정은 약화 되고 민심은 이반되어 가고 있었으니 이 시기는 민란의 시대이기도 했다. 홍경래의 난이 1811년, 임술농민봉기가 1862년에 있었다. 순조 초기에는 천주교 박해(1801년 신유년, 1815년 을해년, 1827년 정해년)가 연이어 졌고, 서양 외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었다. 어찌 됐든 귀플라프가 방문하던 1832년 조선은 겉은 조용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쇠퇴해가던 때였다고 볼 수 있다.
여행기
귀츨라프는 조선은 폐쇄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 머물고 있으며, 그 원인 중 하나가 중국이 조선의 내부분열을 조장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임진난 때 일본이 조선을 완전히 정복했으나 중국의 힘으로 쫓겨 났으며, 그 이후 조선은 중국의 완전 종주국이 되었다고 이해하고 있었다. 귀츨라프는 하멜표류기와 서양과 조선의 몇 번의 교류시도를 알고 있었다. 그는 고위 관료를 만나기를 원했고, 국왕께 드릴 청원서를 전달하기를 요구했다. 그는 사실과 정보가 오락가락하는 것에 실망했고, 간청하면 안 들어주는데, 요구하면 들어준다는 사실을 간파하기도 했다. 어떤 관리들은 일행이 빨리 떠나기를 원했고,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나중에 접촉한 고위관리들은 일행에 다가간 주민들을 혼내키고, 감시를 못 한 경비병에게 태형을 가했다. 귀츨라프는 이러한 행위가 관료들의 권위를 자신들에게 내보이기위한 것으로 인식했다. 결국 고위관료들에게 그들의 선물과 편지를 받는 것은 불법이고 결정은 오직 왕만이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들은 바로 떠나라는 통지를 받고, 식량 지원을 받은 후 조선 해안을 벗어나게 된다.
일행이 처음 만난 섬사람들은 ‘말총으로 만든 원뿔 모양의 모자와 단추 없는 상의와 모자’를 쓰고 있었고, 표정은 매우 엄숙했다고 한다. 한 노인에게 몇 권의 책과 사자 문양이 새겨진 단추를 주니 좋아했다고 한다. 이렇듯 관리의 감시가 없는 곳에서는 일행은 비교적 환대를 받은 것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마을에 들어오거나 그 어떤 정보를 묻는 것에 대해서는 주저(여기서 한양까지 300리라 말한 주민에게 자신이 이야기했다고 말하지 말라 부탁하기도 한다)하고 윗 선의 질책을 겁내하는 것 같았다고 한다.
귀츨라프는 조선의 자연과 풍물에 대해서도 기록했다. 바닷가 바위섬들의 동굴을 보고 감탄해 마지 않았으며, 물개를 잡아 그 기름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 초가집으로 이루어진 마을을 ‘더러움과 빈곤속에서 살아가는 음산한 거처들’이라고 표현했다. 주민들은 몇 달 동안 씻지 않고, 온 몸에 벌레들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러나 주민들은 일행을 환대했고, 주로 소금에 절인 말린 생선과 신맛 나는 술을 대접했다고 한다. 그가 편지와 선물을 공식적으로 전달하자 관료들은 생마늘과 술, 두 마리의 돼지와 약간의 생강과 쌀을 배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고위관료는 그들에게 ‘케이크, 국수, 꿀, 돼지고기, 수박, 샐러드, 식초, 밥’등을 대접하기도 했다. 일행은 감자를 가지고 와 밭에 심는 법을 알려 주려 했고, 주민들은 처음에는 반대했으나 이를 경청했다고 한다. 물론 이를 통제하지 못한 경비병은 질책을 받았고.
귀츨라프는 하층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이를 즐기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한다. 또한 자신들의 지금 믿는 신념에 고집스럽지 않아 다른 신념의 도입에 질투하지 않는 것 같다고 표현한다. 관료들이 주민들이 그들의 서책을 받지 못하도록 금할수록 그들의 앎에 대한 욕망은 더 커질 것이라고 보기도 했다. 조선은 공자의 교리가 인기 있는 신앙이지만, 주민들에게는 우상 숭배의 흔적이나 종교적 의식 행위는 없는 것으로 봐서, 삶과 죽음에서 위안을 줄 수 있는 유익한 교리들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선교와 무역이 다른 곳 보다 덜 위험하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보았다.
조선 기독교
역사에 공식적으로 개신교 선교사가 입국한 것은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로 알려져 있다. 개신교는 천주교와 달리 외국 선교사가 직접 입국하고, 병원, 학교, 성경 번역 중심으로 전파하고, 조선 사회의 근대화와 발맞추어 확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귀츨라프의 여행기는 개신교 조선 선교의 초기 정보 기반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조선은 매우 폐쇄적이지만 하층민들도 쉽게 글을 읽을 수 있고, 지적 호기심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비옥한 황무지를 개간하지 않거나, 야생 포도나무나 복숭아나무를 보면서 이를 개량 재배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했다. 주민들의 주거와 식량의 빈곤을 보며 외래 문물을 받아 들이면 조선 백성들이 지금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문으로 성경 전파가 가능하며, 장기적으로 타 지역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선교가 가능하다고 언급했다. 그의 이후에 들어온 개신교 선교사들의 행적을 보면 귀츨라프의 예측이 대체적으로 타당했음을 알 수 있겠다.
책익는 마을 원 진호
안세환목사님의 글:
귀츨라프는 인도네시아로 파송을 받은 프러시아 태생의 루터교 목사입니다. 네덜란드 선교회에서 파송하였는데, 선교방식으로 이견을 보이다가 탈퇴하고, 영국 런던선교회의 도움을 받아 활동하게 됩니다. 태국 최초의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청나라에 관심을 두고 청나라 언어를 배우고, 홍콩에서 제 2차 선교 여행을 계획하는데 1832년 2월 부터 9월까지 하게 됩니다. 그 중에서 7월 17일 몽금포, 21일 외연도에 오게 되어 녹도, 볼모도, 고대도, 원산도를 비롯해서 천수만과 간월도, 창리를 거쳐서 1박한 후에 오천성을 올랐습니다. 8월 11일 보령을 떠나 8월 17일 제주도 근해에서 선교 기지가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린 후에 조선을 완전히 떠났습니다.
외연도에는 귀츨라프가 오기 전 1816년 9월 3일 바질 홀 일행이 다녀가 마량진에 들러 성경을 주고 떠났습니다. 바질 홀이 쓴 항해기를 귀츨라프가 보고, 조선 여행하였습니다. 바질 홀의 루트를 따라서 외연도에서 정박을 하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이 섬은 바질 홀이 후톤 섬이라 명명했는데, 후톤은 지질학자였으며, 그를 기리기 위해 명명했습니다.
귀츨라프는 언어학의 천재였으며 12개 언어가 가능했습니다. 강조되어야 할 것은 주기도문 번역입니다. '양이'라는 사람과 번역했는데, 이렇게 같이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입니다. 아마도 7월 27일경에 번역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홍콩으로 돌아가서는 chiness Repository(지나총보)에 한글이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발표합니다.
첫댓글 '역사를 보다'라는 유튜브에서 개신교가 천주교보다 탄압없이 조선 사회에 잘 스며들 수 있는 이유로, 당시 대한제국이 일본의 침략으로 견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개신교의 도입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성경이 한글로 쉽게 번역되어 읽힐 수 있었으며, 또한 나라를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나라로 만들기 위해서 기독교 신앙이 필요했었다는 개신교 내부의 논리가 있다고 이야기 하는 것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