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가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도서관 소파에 앉은 이후 삼십여 분 동안 글 한 편을 속기처럼 쓰던 중이다. 나의 갑질에 화가 나 "Me Too"를 외치고 있는가. 아니면 지쳐 기절했는지도 모르겠다. 몸이 불같이 뜨겁다. 미안한 중에도 볼때기를 톡톡 두드려 깨워보지만 별 반응이 없다. 좀 쉬게 한 후에 다시 깨워야겠다. 전에도 두어 번 그랬지만, 별문제 없이 다시 일어났었다. 잠시 꾀를 부린 것뿐이었다. 어느덧 삼 년 넘게 나에게 혹사당하더니 약골이 되었나 보다. 하긴 사람 나이로 보면 이미 환갑 진갑 다 지났다니, 그럴 만도 하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벌써 땅속에 묻어버렸을 것이다.
여하튼 우선은 살리고 볼 일이다. 한참 쓴 메모장의 글을 살려야만 한다. 오타와 띄어쓰기도 무시한 채 쉬지 않고 썼기 때문에 중간 저장도 못했다. 컴퓨터 사용 중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어 애써 쓴 것을 모두 잃고 허탈해하던 때도 많았다. 쓰기에 지나치게 몰두한 탓이리라. 이것을 잃으면 원고지 열두어 매 분량은 잃으리라. 겨우 줄거리만 아름아름하다.
오 분여가 지나 몸이 식으니, 이제 됐나 싶어 이리저리 깨워 보지만, 여전히 눈도 뜨지 않는다. 이젠 아예 가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sleep mode로 들어가니 당연하지만, 괜히 불안하다. 잘못하면 삼십여 분동안 썼던 글을 홀딱 잃을지도 모른다. 아깝고 억울하다. 다시 쓰는 것은 새로 쓰는 것처럼 무척 어렵다. 얼핏 고 장영희 교수가 미국에서 수 만 쪽에 달하는 박사학위 논문을 도둑질당하고 절망의 나락에서 괴로워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감히 그런 큰일과 비교하는 게 우습지만, 세상 일의 경중은 절대치 못지않게 상대치가 더 중요할 때가 많다. 부자들의 하루이틀 용돈에 불과한 빚을 갚지 못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다. 부자들이 기분내기 위해 잠깐 쓰는 돈을 벌기 위해 몇 달 이상을 고생하는 젊은이도 많다.
녀석이 단순히 꾀를 부린 것이 아닌가 보다. Me Too운동에 동참한 것도 아닌가 보다. 하면, 이젠 두드려서라도 깨워야 한다. 그러나 별 방법을 동원해도 깨어날 기미가 없다. 이를 어쩌나. 완전히 죽었나 보다. 결국 서둘러 서비스센터에 데리고 가니,
"메인보드가 망가졌습니다. 일테면 머리가 깨진 것입니다. 수리는 무료로 해드리지만, 폰 속의 데이터는 전화번호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살릴 수 없습니다."
라고 무정한 말을 원고 읽듯 쉽게도 내뱉는다. 나 말고도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이 제법 있는가 보다. 쉽게 진단하고 수리방법을 간단히 제시하니 하는 말이다. 결국 우려가 현실이 되었나보다. 순간 메모장에 기록한 수많은 자료가 떠오른다. 오늘 쓴 글은 물론이고, 한 삼 년 동안 모은 자료가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얘기다. 각종 금융과 생활정보는 물론, 상식이지만 자꾸 잊는 것, 독서 중에 읽은 기억할 만한 문구, 문학 내지는 인문학 지식 등 여러 분야의 것이다. 문자메시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저장해 둔 것도 많다. 가장 중요한 것은 메모지와 문자메시지 그리고 전화번호인데, 이것들은 여기에만 있다. 그 밖에도 인터넷 기사나 대중교통 정보를 스크랩한 것도 여기에만 있다. 그나마 전화번호는 살릴 수도 있다니 불행 중 다행이다.
손 쓸 겨를도 없이 사라졌으니 하소연할 데도 없다. 한참을 기다려 고쳐진 전화기를 내려다보니, 외양은 건장하나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속이 텅 비었으니, 스마트는 고사하고 더미라고 해야 할 듯하다. 내 머리도 덩달아 멍청해진 것 같다. 전화번호가 있을 뿐 염려했던 대로 메모장 등 데이터는 말끔히 사라지고 말았다. 지우개로 지운 후 종이에 남은 흔적이라도 있을까 허겁지겁 뒤져 보지만, 어림도 없다. 한참을 가르치고 길들여야 다시 스마트해질 것이다. 정비사의 말인 즉, 그래도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느냐는 말이다. 무책임한 말이긴 해도 일리는 있다. 새로 산다고 해도 상황은 똑같다. 돈만 들뿐이다.
그렇지만 은근히 부아가 끓는다. 최첨단 기술이라고 맨날 떠벌리고 선전할 땐 언제고, 이런 어처구니없는 손해를 끼치느냐고 삿대질을 해대고 싶다. 공장이 정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고 전기회사에 보상을 요구하듯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당차지 못한 나는 따지지도 못하고 풀이 죽어 전화기를 들고 나왔다. 중간저장도 안 하고 전화기를 혹사시킨 죄가 커서….
나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못하기 때문에 뭔가 생각이 나면 메모장에 기록하기를 좋아한다. 참 좋다. 옛날처럼 수첩을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용량도 무척이나 커 그런 수첩 열 권은 저장할 수 있으리라. 마냥 써도 투덜대는 법도 없다. 한가한 시간이 되면 꺼내어 수필의 소재로 활용하기도 한다. 메모장뿐만 아니라 전화기에 저장한 여러 자료는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어느 분의 말씀대로 이제 전화기는 단순히 전화의 기능만을 필요로 하는 시대를 넘어 하이브릿드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과연 이 조그만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손 안의 컴퓨터이며, 책이고, 텔레비전이고, 음악 재생기이고, 고성능 카메라는 물론, 만능 게임기다. 영화 촬영에 원격 진료까지도 한다니 그 끝이 어딘지 모르겠다. 세상 사람들은 모든 기계를 이 스마트폰에 연결시키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기술개발에 총력을 경주 하나보다. 덩달아 세상 사람들도 이것에 대한 의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그러나 은근히 염려스러운 것은 세상일이란 한쪽으로 과하게 치우치면, 하나에 모든 것을 담고 의지하면 그만큼 부작용도 생길 수 있음이 아닌가. 그 옛날 제조공장에서의 보조 에너지에 불과했던 전기가 없으면 모든 산업활동은 정지된다. 사회는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질 것이다. 예전엔 문서작성이나 통계관리 등 업무보조 수단이었지만, 이젠 컴퓨터 없는 사무환경은 생각할 수도 없다. 특히 금융권은 더욱 그렇다. 컴퓨터가 기능을 잃으면 모든 금융거래는 정지되고 만다. 오늘날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길을 운전할 수 없다. 스마트폰으로의 과도한 집중이 염려되는 이유다. 이번에 전화번호도 잃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내가 외우는 전화번호는 아내와 딸 아들 것이 전부다.
이제 일상생활 속에서 스마트폰은 만능이며 사용자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사용장소도 따로 없다.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곁에 있다. 전철이나 버스나 승객 모두는 스마트폰과의 대화에 빠져든다. 그 속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란다. 나 같은 손해를 당할 가능성이 점차 짙어지고 있다. 어쩌면 이미 당한 사람도 많을지 모른다. 관련 기계장치의 심각한 손상 내지는 오작동으로 허탈해할지도 모른다. 과도한 믿음과 치우침은 때론 큰 부작용도 따른다. 과유불급. 나만의 과한 생각일까. 첨단문명은 만드는 자의 기술개발도 중요하지만, 잘 사용해야만 정말 스마트하지 않을까.
첫댓글
우리의 기억력은 한계가 있기때문에
사람들은 스마트폰을 의지하게 되지요.
누구나 한두번쯤 경험했을 법한 일인데
선생님은 첫경험이시군요?
과유불급,
선생님만의 과한 생각은 아닐 겝니다.
스마트하게 잘 살고 계시지요?
시간 내시어 우리 행사에 참여도 하시면 어떨까요?
말씀 고맙습니다.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