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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31 / 결국엔 웃게 하신다 (창26:23-25)
사자성어 중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마치 시샘이라도 하듯이 안 좋은 일들이 많이 따름’이라는 뜻인데, 이때 사용된 ‘마’라는 말은 ‘마귀 마’자를 써서 ‘일을 방해하는 나쁜 기운이나 장애물’을 뜻합니다.
그런데 호사다마와 반대 의미를 가지는 사자성어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게 ‘고진감래’와 ‘전화위복’입니다.
각각 ‘고생 끝에 즐거움이 온다.’와 ‘재앙이 바뀌어 오히려 복이 된다.’는 뜻인데, 뜻만 보면 비슷한 말 같지만, 둘 사이엔 미묘한 차이가 있기도 합니다. 고진감래가 능동적인 거라면 전화위복은 피동적이라는 겁니다. 즉 고진감래는 현재의 고난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 나지만, 전화위복은 화가 복이 되게 하는 것은 세상의 기운 곧 외부로부터 작용하는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겁니다.
이미 겪은 것도 있지만 세상엔 아직은 내가 겪지 않은 그러나 내게 닥칠 수도 있는 많은 ‘고’와 ‘마’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형편이 좋다고 해서 마냥 좋은 건 아니라는 겁니다. 호사다마라는 말이 그래서 있게 된 겁니다.
반대로 지금 형편이 나쁘다고 마냥 나쁘기만 하진 않을 거라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진감래를 말하며 전화위복을 기대하며 살아왔고 또 살아갑니다.
그런데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진감래는 좋은 날을 기대하며 참아내는 것이기에 누구라도 맘만 먹으면 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가 복이 되게 하는 건 어떨까요?
이건 사람이 맘먹는다고 해서 맘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세상 기운을 주관하는 누군가가 도움을 펼쳐줘야만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호사다마에서 좋은 일을 나쁘게 만드는 게 마귀 짓이라면 전화위복에서 화를 복으로 만드는 건 누굴까요?
그건 ‘신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신을 만들어 냈고 그 신에게 치성을 드려왔습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남아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과연 어떤 신을 나의 신으로 섬겨야 고진감래 끝에 전화위복으로 나아갈 수가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각자가 좋은 대로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늘 말씀드렸듯이 자기가 선택했으니 책임도 자기가 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확인해 봐야 합니다. 내가 선택한 신은 내게 전화위복이 있게 할 진짜 신인지? 혹 진짠 줄 알았는데 가짜는 아닌지?
상황이 이렇다 보니 성경에도 보면 사도행전 17:23절에서 바울이 아덴을 전도하는 중에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아덴 사람들은 전화위복을 위해 신을 섬겼는데 혹시라도 자기들이 빠뜨린 신이 있어 그 신들이 삐치고 심술부릴 것을 염려하여 ‘알지 못하는 신’이라는 이름 속에 자기들이 몰라서 빠뜨린 모든 신들을 두루뭉술하게 욱여넣고 섬기고 있더라는 겁니다.
이에 바울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그러고는 그들에게 창조주이시자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복음을 전합니다.
결국은 이겁니다. 형편이 힘들고 어려워 좋은 날 오기를 고대하며 현재를 참고 견딘다 할지라도 인생에 닥친 화를 바꾸어 복이 되게 하는 건 절대자의 능력에 속한 것인데, 그 절대자가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따라서 유일신 되시는 하나님의 전화위복을 믿어야만 ‘감래’ 즉 좋은 날이 오기까지 ‘고진’ 곧 고난의 때를 참을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로마서 8:25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여기서 우린 믿음에 관한 또 하나의 정의를 배우게 됩니다.
‘믿음은 기다림이다!’
로마서 8:25절을 다시 보시면 ‘바라면 기다릴지니라’고 했는데 그사이에 들어간 말이 하나 있습니다. ‘참음으로’입니다.
이때 ‘참는다’의 헬라어 원뜻은 ‘무거운 하중 아래에서도 짓눌리지 않고 끝까지 버텨냄’이라는 뜻으로, 주로 질병, 가난, 박해 등처럼 내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는 끈기를 뜻하는 말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끈기’
이게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 있어야 할 믿음입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소망을 잃지 않는 끈기를 가지고, 기다릴지니라.’
이렇게 하는 것이 바울은 고진감래하며 전화위복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이라는 겁니다.
바울에겐 이미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로마서 5:3절에서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으며, 인내 즉 현재의 환난을 참아내는 끈기로 ‘기다리는 것이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게도 바라는 건 있는데 이루어지는 게 없다면 우린 믿음의 세 요소 중 하나 즉 ‘바라는 것’과 ‘소망을 잃지 않는 끈기’ 그리고 ‘기다림’이라는 세 요소 중에서 내게서 빠졌거나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에게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그런 내용입니다. 바라는 것을 소망하며 참아내는 끈기의 믿음으로 끝내 전화위복의 삶을 살게 된 이삭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3절을 보면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때 거기서부터라고 할 때의 “거기”는 이삭이 현재 거주하고 있는 곳 즉 이방 땅 그랄 지역을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쩌다가 이방 땅에까지 오게 된 걸까요?
원래 이삭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 브엘세바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6:1절을 보면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삭이 기근을 피해 가고자 했던 곳이 애초에 그랄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26:2절과 3절을 보게 되면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 땅에 거류하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고”라 하셨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이삭은 브엘세바를 떠나면서 애초엔 애굽으로 가려고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랄에서 그가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셨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2절과 3절 말씀을 읽다 보면 이 부분이 우리가 평소 알아 온 사실과는 조금 다른 것을 보게 됩니다.
룻기에서도 보면 본문과 비슷한 상황이 나옵니다. 약속의 땅 베들레헴에 기근이 들자 나오미의 가정은 기근을 파해 이방 땅으로 옮겨와 피난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방 땅에서 그들에게 닥친 일이 무엇이라 했습니까?
졸지에 남편이 죽고 두 아들마저 죽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놓고 사람들은 ‘약속의 땅엔 축복! 이방 땅엔 재앙!’이라는 등식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그러면서 권면하기를 ‘당장엔 못 살겠어도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견디고 버텨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게 그간 우리가 듣고 믿어온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다릅니다.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에 거하며 농사를 지었는데도 재앙이나 화가 임하긴커녕 오히려 하나님이 100배의 축복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목축도 잘 되어 양과 소가 떼를 이루는 거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된 건가요? 도대체 왜 같은 상황에서 룻기의 결과와 본문의 결과가 이리도 차이가 나는 걸까요?
이유를 알기 위해 우린 창세기 26:2절 말씀을 다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
이때 하나님은 이삭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와 둘째,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입니다.
여기서 우린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말씀하신 ‘네게 지시하는 땅’이 어딘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통상 사람들은 현재 있는 그랄 땅 아니냐고들 오해하지만, 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은 애초에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의 땅 가나안을 말합니다. 따라서 의미만 놓고 보면 앞서 룻기에서처럼 우리가 믿어 온대로 기근이든 뭐가 됐든 약속의 땅을 벗어나지 말라는 말씀인 겁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땠나요?
애굽으로 가는 것을 멈추긴 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정쩡하게 눌러앉은 곳이 그랄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그랄은 어떤 곳일까요?
그랄은 가나안과 애굽의 경계를 이루는 지역으로, 여기서 브솔시내만 건너면 애굽 경계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나 거주 상으로 보면 경계 지경이다 보니 가나안 문화권에 속해있기도 했습니다.
아마 이삭도 그렇게 여겼을지 모릅니다. 그랄도 가나안 문화권이니 여기도 괜찮지 않겠느냐고.
그러나 가나안 땅과 가나안 문화권은 엄연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삭에게 가나안 땅에 머물라 했지 가나안 문화권에 거하란 게 아니시니까요. 따라서 이삭이 하나님이 하신 두 말씀 중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멈춘 것은 순종이었지만, 확실하게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블레셋이 지배하는 가나안 문화권의 그랄에 머문 건 불순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과를 뭐라 해야 할까요?
둘 중 하나에 순종했으니 순종했다 해야 할까요? 아니면 둘 중 하나에 불순종했으니 불순종한 거라고 해야 할까요?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반쪽짜리 순종은 순종이 아니다.’입니다.
그러나 또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단 하나의 순종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으신다.’입니다.
정리하자면 이삭의 순종은 반쪽짜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반쪽짜리 순종도 순종으로 보아주십니다. 다만 문제는 남은 반쪽짜리 불순종의 처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삭에게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약속의 땅으로 옮겨오도록 역사하실 계획을 세우신 겁니다.
이렇게 이삭의 반쪽짜리 불순종을 순종으로 채우시기 위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이 일들이 이삭에게는 우물 파기와 막힘 사건을 통해 이루어졌던 겁니다.
살기 위해 우물을 파면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막아 버리고. 그래서 자리를 옮겨 우물을 파면 블레셋이 와서 또 막아 버리고. 그렇게 계속 옮겨가며 우물을 파는 중에 오늘 본문 23절이 시작됩니다.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
그런데 23절 말씀을 살펴보기 전에 우리가 먼저 다뤄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앞에 있는 22절 말씀입니다. “이삭이 거기서 옮겨 다른 우물을 팠더니 그들이 다투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르호봇이라 하여 이르되 이제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 하였더라.”
르호봇은 넓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생각해 보세요. 우물이 있고 넓은 곳인데 더 이상 블레셋과의 다툼도 없고 우물이 막히는 일도 없게 된 곳에 이삭이 오게 된 겁니다. 이삭으로서는 그야말로 고진감래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을 맞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이어지는 23절에선 “이삭이 거기서부터 브엘세바로 올라갔더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이삭이 그간 고생 고생하며 자리 잡은 그 살만한 땅을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르호봇을 기점으로 이삭은 깨달은 겁니다. 르호봇 이전의 삶은 그야말로 호사다마였습니다. 우물을 얻었다 싶으면 다음 날엔 우물이 메꿔져 버렸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중에 르호봇에 와서야 이삭은 깨달았던 겁니다. 뭐를요?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사실 르호봇에 오기 전까지 이삭으로서는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세 가지 큰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26장 전체를 보게 되면 7절로 11절에서 아내 리브가를 누이라고 속였다가 그랄 왕에게 빼앗길 뻔했던 일. 12절로 13절에서 기근의 영향 아래서도 농사를 지었는데도 백배의 결실을 하게 된 일. 그리고 14절로 22절까지에서 우물의 팠을 때 쉽게 물을 얻었던 것과 그 우물을 블레셋 사람들이 시기하여 여러 번 막아 버리고 괴롭혔던 일들.
이처럼 결코 혼자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여겼던 일들이 전화위복이 되는 경험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이삭은 느끼고 깨닫게 된 것이고 드디어 르호봇에 와서는 그 느낌과 깨달음이 믿음이 된 것입니다.
‘이전 일들은 나의 반쪽짜리 불순종을 순종으로 채우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였구나!’
이걸 깨닫는 순간 이삭은 인간적으로는 살만한 땅이다 싶은 르호봇을 떠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 즉 브엘세바로 옮겨간 것입니다. 그리고 완성된 겁니다. 이삭의 온전한 순종이.
이런 하나님의 역사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은 당장엔 내게 고난이라 여겨지는 일들을 통해서도 나를 전화위복의 장소로 인도해 가고 계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어지는 24절로 25절을 보세요.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
이 대목에서 이전 그랄 땅에서와 현재 브엘세바에서의 이삭이 뭐가 달라졌는지를 살펴보세요. 뭐가 달라졌습니까?
이전 그랄 땅에서는 옮겨간 자리에서 맨 먼저 한 일이 우물을 파는 거였다면 브엘세바에서는 우물을 파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했습니다.
이미 배우셨듯이 구약에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거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하나님께 제사 즉 예배를 드렸다. 또는 기도의 단을 쌓았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찾고 경배하고 기도의 단을 쌓는 믿음을 통해 드디어 브엘세바에서의 ‘하나님의 복 주심’과 ‘이삭의 온전한 순종’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가요? 혹여 지금까지의 일들이 호사다마였다면 이젠 한 번쯤 돌이켜 봐야 합니다. 혹시 나에게도 내가 모르는 반쪽짜리 불순종이 있는 부분은 없는지를.
하나님껜 전화위복의 은혜가 있으니 우리에게 고진감래의 믿음만 있다면 결국엔 우리도 이삭의 그 이름의 뜻처럼 ‘웃게 될 날’이 있게 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기 위해 이제부턴 사탄이 자기 할 일을 할 때면 우리도 우리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즉 사탄이 시험 주기를 쉬지 않는다면 우리도 믿고 기도하기를 쉬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든 우린 사탄의 시험보다 최소한 한 번은 더 기도하려고 해야 합니다.
사탄이 몇 번이나 시험할지는 모르겠지만 내 믿음의 마지막은 항상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가 되게 해야 합니다. 시험 중에 나의 마지막이 근심이면, 일의 마지막은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시험 중에도 나의 마지막이 기도면, 일의 마지막은 항상 성령의 역사입니다.
기억해 두세요. 이삭의 시험이 브엘세바에서 끝난 이유를.
하나님은 복 주신다고 약속하신 곳에서 복을 주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이삭이 복 받을 가나안으로 오기까지 계속 인도하시며 기다리신 겁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한 번 따라 하세요.) “하나님은 오늘도 나를 기다린다!”
이제부턴 하나님에게 있는 전화위복의 능력을 믿으세요. 그리고 사는 중엔 고진감래의 믿음과 소망을 붙들고 현재의 고난과 역경 중에서도 기도의 단을 계속 쌓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삭을 웃게 하신 하나님이 결국엔 저와 여러분에게도 ’웃게 하시는 복’이 있게 하실 것을 믿어 어떤 경우에도 기다리는 믿음으로 소망을 잃지 않는 끈기를 발휘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