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oy in God
"메리 크리스마스! 호호호."
이 외침은 오늘 아침에 성탄 낮미사를 마치고 강복 전에 최재완 신부님의 말씀입니다.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지고 학교까지 오시기 힘드실 거라며, 신부님께서 산타 할아버지 대신 선물을 줄 것을 암시하며, 하신 말씀입니다. 또 다른 모습으로 웃음을 주셨습니다.
학교 성당에서 이루어진 어젯밤 성탄 성야 미사는 참으로 은혜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좀 늦고, 향로 줄에 문제가 있어 미사가 늦어지고 향을 칠 수 없었지만, 학생들과 함께 하는 시간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리고 교목 최재완 신부님이 미사에 참석하는 친구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평택까지 직접 가서 준비해 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사연을 들으면서 감동이었습니다.
어두운 밤에 고요하고 거룩하게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을 맞이하는 전례, 아기 예수님과 구유 축복과 이어지는 미사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우리 안법학교에서 태어나시는 아기 예수님. 이를 위해 구유도 직접 제작하시며 마구간과 성탄 트리를 아름다운 꽃과 장식으로 꾸며놓으신 분들의 정성으로 아기 예수님 태어나시는 구유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이러한 전례에 처음으로 참석한 학생(유0경)은 저에게 이렇게 문자를 보내주었습니다.
“오늘 초대해주시고 새로운 것도 알려주시구, 사진도 찍어주시구.. 너무 감사합니다!
신부님 덕분에 오늘이 이번 해 중.. 가장 뜻 깊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시고, 남은 24년도 모두 행복하세요!!”
그렇게 성탄 밤 미사를 끝내고, 최 신부님의 성탄 선물도 받은 다음, 안성 성당에서 밤 늦은 시간에 따듯한 국수를 나눈다고 해서, 원하는 학생들과 함께 가서, 어떤 친구는 국수를 세 그릇이나.. 저도 한 그릇 맛있게 먹고 왔습니다.
집에 와서... 명동 대성당에서 이루어지는 성탄 성야 미사를 평화방송을 통하여 보며, 은혜로운 시간 가졌습니다. 그리고 늦은 시간에 최재완 신부님과 맥주도 한잔 했습니다. ^^
그리고 난 다음 피곤함에 지쳐 잠 들었습니다.
낮 시간에, 성탄 축하와 감사의 인사의 메시지를 모든 분들에게 개별적으로 카톡으로 전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녁 시간이 되니.. 오는 답장에 또다른 감사의 인사를 드리다 보니... 감사함과 고마움을 넘어 피곤함도 밀려왔습니다. 주고 받는 성탄 메시지.. 감사의 인사는 참으로 은혜롭고 고마운 시간들이었습니다. 그저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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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은 아침 성탄 낮미사를 마치고, 며칠 전부터 가보고자 했던 곳, 장베르 신부님(공베르 신부님 동생)께서 재임하셨던 곳을 방문하려고 길을 나섰습니다. 내년 1월 23일부터 2월 1일까지 공베르 신부님 고향과 프랑스 성지순례를 가는데, 공베르 신부님의 친 형제인 장베르 신부님을 자세히 알고자 길을 나선 것입니다.
참 잘 다녀온 것 중의 하나는, 안성성당 주임이며 안법학교의 설립자이신 분만 공베르 신부님인줄 알았는데, 동생 신부님도 공베르 신부님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형 공베르 신부님은 ‘앙투앙 공베르’(공안국)이고, 동생은 ‘쥘리앙 공베르’(공안세)로 부르며 구분하였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부르던 공베르 신부님을 공안국 신부님으로, 동생 신부님을 공안세 신부님으로 불러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사진도 찍어왔습니다.
참고로, 공안세 신부님은 공안국 신부님의 바로 밑의 동생으로, 1877년 9월 7일 출생하시고, 1893년 형 공안국 신부님과 함께 로데즈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0년 6월 24일에 동시에 사제로 수품 받고, 그해 10월 9일에 부산을 통해 한국에 입국하였습니다. 형은 안성성당으로, 동생 공안세 신부님은 부여 흥산(금사리) 성당으로 발령 받아 사제(선교사)로서의 삶을 시작하셨습니다. 공안세 신부님은 금사리 성당을 부임하신지 6년만에 짓고, 12년만에 성당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공안국 신부님이 성당 축성을 1922년에 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일찍 성당을 마련하신 것입니다. 이를 두고, 공안국 신부님은 성당 축성식까지 마친 동생 공안세 신부님을 부러워하였습니다.
공안세 신부님은 1915-19년까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 1919년 11월에 금사리 성당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6월에 논산 성당(현, 논산 부창동 성당)에 2대 주임으로 부임하시어 새 성당 건축을 추진하여 1927년 적벽돌조 고전 양식의 성당과 서양식 사제관을 신축하였습니다. 또한 공안세 신부님은 일본들이 원하는 신사참배 거부 운동을 벌였으며, 1926년에는 유치원 과정 소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1931년 10월에는 샬트르 성바오로 논산 분원을 설치하였으며, 1933년에는 논산 소화학원을 설립하고 시약소를 운영하였습니다. 1942년 논산 성당을 떠나 서울 주교관에서 휴양도 하였고, 1942년부터 인천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지도 신부를 하였습니다.
1950년 6월 24일 형 공안국 신부님과 함께 사제수품 50주년 금경축을 하고 난 다음, 7월 15일 북한으로 압송되어 ‘죽음의 행진’ 후 11월 13일(형 공안국 신부님은 11월 12일) 중강진에서 병사로 죽음을 맞이하였는데, 교회는 이를 순교로 판명하여 하느님의 종 ‘순교자 공안세’로서 시복과정에 있습니다. 참고로 두분은 근현대 시복 후보자 가운데 공안국 신부님은 27번, 공안세 신부님은 나란히 28번입니다.
대전 교구 논산과 부여를 오가는 길은 좀 멀었지만,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아기 예수님께 조배 드린다는 마음으로, 공안세 신부님의 자취가 남겨진 곳을 가는 발걸음과 운전은 가벼웠습니다. 특별히 신부님들의 고향 방문을 앞두고, 공베르(공안국) 신부님 동생이 약 20년씩 부여와 논산에서 사목하던 성당을 방문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공안세 신부님이 두 번째로 사목하시던 논산 부창동 성당의 3대, 4대 신부님은 우리가 아는 신부님이었습니다. 3대 신부님은 안법학교 출신 박고안 신부님이셨고, 4대 신부님은 안법학교 교장이셨던 신원식 루카(류진선 신부님 바로 직전 교장) 신부님이셨습니다. 참으로 반가왔습니다.
금사리 성당에도 부창동 성당에도 하느님의 종 공안세(줄리앙 공베르) 신부님에 관한 설명이나 홍보가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아. 좀 더 많은 기도가 필요함을 느꼈습니다.
좀 늦게 학교에 돌아와 묵주기도와 성당에 계신 아기 예수님께 조배드리며.. 감사드리며.. 하루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 가운데 우리 안법교육가족(영적은인들)을 기억했습니다. 하여튼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첫댓글 학교 성탄 밤 미사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
공베르 신부님 상 옆에 누워 계신 아기 예수님
성탄 밤미사를 마친 다음 학생들과 기쁨의 시간
2024년 성탄 감사 인사(학교장)
금사리 성당 초대 공안세 신부님.
공안세 신부님이 지으신 금사리 성당
금사리 성당 성탄 구유
공안세 신부님(?)께서 미사 성제를 올리시는 모습
공안세 신부님 공적비(논산 부창동 성당)
부창동 성당
@최인각 부창동 성당 성탄 구유
공안세 신부님, 박고안 신부님, 신원식 신부님.. 안법학교와 연결 되어 있는 신부님들
공안세 신부님께서 하셨던 교육 분야 사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