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미
윤 지 양
내가 아는 은미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모두 제주에서 다녔다. 은미는 제주도를 떠나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은미네 집엔 여행객들이 머물다 가곤 했다.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지만 제주도를 벗어나고 싶었던 적은 없다. 그들이 고향과 낯선 땅에 대해 이야기해도 산이 있고 바다가 있고 친구도 애인도 가족도 있는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가끔씩 친구와 애인과 가족과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은미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떠나도 금세 돌아올 생각이었다. 한라산 혈망봉이 구름에 가려진 오후였다. 은미는 내 옆자리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졸고 있다. 나는 차창 밖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은미는 가끔 검은 모래와 구멍이 뚫린 돌들을 밟았다. 가까이에서 본 바다는 투명하고 멀리서 보면 새파랬다. 발가락 사이로 모래가 들어왔다. 은미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고향이 다른 애인과 울면서 헤어졌을 때 은미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고등학생 때 도덕선생님이 뺨을 때렸을 때 중학생 절친과 절교했을 때 가끔씩 팔다리에 멍이 들어 오는 짝꿍이 간절히 떠나고 싶다고 말할 때 은미는 제주도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은미는 제주도에서 나고 자랐다. 잠에서 깬 은미가 버스의 버저를 눌렀다. 떠나도 꼭 돌아올 생각이었다.
- 시집〈기대 없는 토요일〉민음사
기대 없는 토요일 - 예스24
제4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나쁜 반복을 끊어내는 칼날의 시역사적 감각을 깨우는 언어의 굴착기제4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이 민음의 시 327번으로 출간되었다.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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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양 시집 〈기대 없는 토요일〉 민음사 / 2024